무슨 책이든 읽고 리해하려면 우선 그 책의 작자의 인간성을 알아야 하고, 그 인간성을 알려면 어린시절부터 알아야 한다.
영춘이가 나보다 석달 먼저 《귀가 빠쪘다》고 언제나 《형》이라고 으시대기는 하지만 사실은 모두 1951년에 태여난 동갑이다. 영춘이와 나는 다섯살때부터 집안의 말소리마저 서로 다 들리는 이웃에서 함께 자라난 송아지 동무이고, 소학교 6년 세월을 한 반급에서 그림자처럼 붙어다닌 불알친구이고, 중학교도 한 학교 이웃 반급에서 함께 마친 클라스메이트나 다름없는 중학동창생이다.
어디 이뿐이랴. 영춘이는 집체호를, 나는 군대를 거쳐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서로 비슷한업(영춘이는 주로 언론과 출판, 나는 주로 문학)에 몸을 담고있다 보니 보름이 멀다하게 각종 문화인들의 행사에 참가하여 회의를 같이 하고 술자리를 같이하군 한다. 그리고 그 인연이 계속 이어져 지금은 사돈(나의 막내동생과 영춘의 막내 누이동생은 부부이다)까지 되였으니 영춘이와 나 사이의 인연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하니 내가 영춘이의 인간성을 안다고 해도 아마 머리를 저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춘이 부친 채택룡(1913∼1998)선생은 1927년부터 《카프》계렬의 잡지에 처녀작을 발표하기 시작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원로일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학의 중요한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문학이라도 주로 아동문학울 하는 엄부(嚴父)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서 영춘이의 예술적 천부는 일찍부터 우리들의 눈에 띄이기 시작했다.
늘 영춘이의 손을 잡고 습자련습을 시키거나 영춘이가 영화만 보겠다고만 하면 무조건 지갑을 꺼내여 돈을 주시군 하는 영춘이 아버님을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영춘이가 싫어하는데도 예술학교에 피아노레슨을 받도록 손목을 잡고 가는 영춘이 아버지의 뒤 모습을 바라보거나 혹은 북경이나 외지에 출장 갔다가 영춘이에게 사다주었다는 고급스러운 크레용이나 연필 같은것은 구경할 때에 그저 부럽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은 영춘이의 부친이 의도적으로 예술에 대한 자식의 흥미를 키워주고 나아가서는 예술쪽으로 자식을 이끌기 위한 고심(苦心)이였음이 분명하다.
벌써 일여덟살 때부터 영춘이는 부친의 옥필(玉筆)을 닮아서 글씨를 아주 이쁘게 썼고 그림도 아주 재치 있게 그렸다. 나와 함께 아이스호케이경기를 보고 와서는 공책이나 지어는 베니다로 만든 자기집 미닫이에도, 판자나무로 막은 동네의 울타리들에도 언제나 영춘이가 그려놓은 그림들로 울긋불긋했다. 아무튼 부친이 배양한 덕분인지 아니면 본인의 천부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영춘이의 예술적 재능은 일찍 피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춘이는 소학교 1학년 때부터 선생님으로부터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늘 들어왔으며, 나는 집에서 영춘이의 이런 예술적 재능 때문에 나의 어머님으로부터 늘 꾸지람을 들어왔다. 이뿐만 아니라 원족에 갔다와서 마저도 영춘이 때문에 며칠씩 두고 내 어머님한테 욕을 먹군했다. 영춘이는 노래를 시키니 벌떡 일어나서 그렇게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너는 뭣이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지 못해 하는냐, 주로는 이런 욕들이였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리론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유년시절의 조기경험과 기억들은 마치도 암벽(岩壁)에 글자를 아로새기듯이 영원히 마멸되지 않는 흔적을 남겨놓게 되는 법이다. 이런 것들은 한 인간이 어른이 된 이후의 인격이나 재능의 형성에 커다란 영형을 미친다. 한마디로 영춘이가 유년기에 부친으로부터 받은 예술계몽교육은 어른이 된 후에 언론, 방송, 출판분야의 지도자로서 훌륭하게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작용을 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영춘이가 벼슬길로 전향을 하지 않고 화가의 길을 계속 걸어 왔더라면 오늘날에는 큰 화가로 대성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도……
영춘이가 유년기와 소년기에 누린 행복은 너무나도 짧았다. 영춘이의 부친이 영춘(永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자식의 앞길이 영원히 봄빛으로 무르녹을 것을 바란 기대와는 달리 영춘이의 앞길에는 너무나 일찍이 무정한 서리와 폭설이 내렸다. 이 때 아닌 서리와 폭설은 영춘이에게 따사로운 봄빛 같은 사랑을 몰부어 주셨던 영춘이의 부친이 1959년에 이른바 《우파》라는 감투를 쓰게 되면서부터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영춘이의 부친과 함께 《우파》로 두들겨 맞았던 난우(難友) 김학철선생의 말을 빈다면 이른바 《반우파운동》은 《선량한 지성인들울― 정직한 지성인들을― 미친개 때려잡듯 마구때려잡은 치욕의 력사》이고 진시황을 찜쪄먹을 《제2의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같은 철부지마저 소학교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59년 늦은 봄부터 영춘이네 집에는 비운이 감돌기 시작함을 어슴프레하게 나마 느꼈다. 나는 영춘이네 가정의 비운을 통해 정치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인간비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철부지시절에 너무나도 일찌기 알게 되였다.
1964년, 날로 우심해지는 정치적인 박해로 하여 채택룡선생이 조선에 건너 간 뒤로 영춘이네 집은 더욱 비참해졌다. 내가 대학학창시절의 고한문시간에 《학정이 맹호보다 무섭다(虐政猛於虎)》는 맹자의 말을 배울 때 저도 모르게 련상한것은 영춘이네 집식구들이 정치운동의 풍파속에서 겪어온 수난사였다.
영춘이네 집식구들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정치적인 박해만이 아니였다. 남편과 생리별한 20년 가까운 세월속에서 영춘이의 모친은 자갈치고 모래치는 노가다판의 뜨내기로, 심심산중을 무른 메주 밟듯하는 약초군으로, 심지어는 매탄장(賣炭場)에서 연탄을 실어 나르는 리어커군으로 그야말로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으셨다. 아마도 영춘이 모친의 희생적인 모성애가 없었다면 영춘이네 집은 언녕 풍지박산이 났을것이다.
우리 속담에 《초년 고생은 금울 주고도 못 바꾼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집이 가난하고 불행만 해도 안된다. 가난과 억압만 있으면 자식들이 주눅이 든다. 가난과 억압이 있으면서도 부모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자식들이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자랄수 있고 따뜻한 마음을 키워갈수 있는것이다. 온실의 화초들은 온실밖으로 나와 한번만 서리바람을 만나게 되면 순간에 얼어 죽어버릴수 밖에 없지만 엄동의 시련을 겪은 들꽃이나 야초들은 어지간한 추위에는 얼어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영춘이가 어린시절에 겪은 역경은 의지의 칼날을 시퍼렇게 세워주는 숫돌같은 기능을 수행했고, 세태염량(世態炎凉)을 일찍이 느낄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선생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로신선생은 부친이 갑자기 벼슬자리에서 나떨어지고 옥살이를 함으로 하여 남들로부터 백안시를 당했던 어린시절의 아픈 기억에 비추어 《가세(家勢)가 갑자기 기울어지게 되면 세태염량을 몸으로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적 있는데, 이는 영춘이의 경우에도 맞는 말이다. 그리고 역경은 영춘이로 하여금 인간을 뜨겁게 사랑할 줄도 알고 불의(不義)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할줄도 아는 애증(愛憎)이 분명한 성격을 부각시켜 주었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국난을 당해야 충신이 나오고 집안이 어려워져야 효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가세가 기울어진 까닭에 영춘이가 효자로 되였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영춘이는 오늘의 현실속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말씀을 빈다면 보통정도의 효자가 아니라 《효자문(孝子門)을 세워야 마땅한 효자》이다.
그런데 부모에 대한 영춘이의 뜨거운 마음은 결코 《효》라는 한 글자에 죄다 포괄시킬수는 없다. 영춘이에게 있어서 비록 짧았지만 엄부(嚴父)의 교화(敎化)는 인생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한 귀중한 가르침이였고, 자모(慈母)의 피눈물 어린 사랑은 추운 엄동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닐수 있게 해준 은혜로은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아버님에 대해서는 천리인륜(天理人倫)적인 《효》외에도 복잡한 감정이 내재해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춘이는 부친를 통해서 자기의 정신적인 뿌리를 찾을수 있고,부친의 귀환 그리고 부친의 명예회복을 통해서야 만이 모친과 자기 그리고 모든 가족 나아가서는 자기 부친처럼 억울함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맺혔던 한을 풀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영춘이가 조선에 나가서 조선공민으로 국적을 바꾸고 19년이나 살아온 부친을 다시 중국으로 모셔와서 억울한 루명을 벗기고 모든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공직까지 회복시켜서 천수(天壽)를 다 하도록 극진히 봉양한 일은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글에서 반드시 언급되여야 할 것은 바로 영춘이가 부친를 모셔오기 위해 조선측과 벌려 온 장기적이고도 일구난설(一口難說)의 어려운 교섭과정이다. 영춘이도 이 일에 대해서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너무 자세한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영춘이가 조선측의 안전부, 외교부 심지어는 김일성수상에게 이르기까지 수 백 통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만은 나도 알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영춘이의 끈질긴 노력과 다함없는 효성은 끝내 조선측 해당부문의 지도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측에서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채택룡선생이 부인과 자식들이 살고 있는 중국에로 귀환하는 것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구체적인 내부사정을 알 수 없는 조선측 회령해관의 출입국을 관할하는 일군들이 《이런 전례가 없었다》는 말을 거듭 되뇌이면서 채택룡선생의 려권과 증명서류들을 검사하고 또 검사했다는 에피소드만은 영춘이가 나한테 대충 말해준적이 있다.
자기의 부모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어찌 남들을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연변탤레비죤방송국과 연변출판국에서 지도자로 있으면서 쏟아 부은 연변지역사회와 우리 민족에 대한 영춘이의 뜨거운 사랑을 그의 지극한 효심(孝心)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영춘이가 묶어 내놓은 이 에세이집에는 도합 15편의 연설문, 편의 수필, 8편의 론문이 수록되였는데, 그 대부분이 연변T방송국과 연변신문출판국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발표한 연설과 론문들 중의 일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연변TV프로그램 총체전략의 주요한 설계사, 지휘자 그리고 연변민족출판 생존발전전략의 기획인 그밖에 연변축구구락부회원 초대회장으로서의 영춘이의 뚜렷한 민족우환의식, 확실한 문화자세, 랭철한 사고와 판단력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현실화하는 조직력과 실천력을 엿볼 수 있다.
연변TV의 20년을 반추하면서 영춘이는 다음과 같이 연변TV가 가져여 할 바람직한 자세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세계화시대를 열어가는 연변사람들의 자세와 안목을 키워주는 향도의 방송, 세계에서 한점의 부끄럼도 없는 연변사람의 떳떳한 삶을 부각하는 창조의 방송, 〈연변을 세계에로의〉꿈을 영글어 가게 하면서 21세기 새 연변의 부흥을 이끌어가는 견인의 방송, 중국조선족의 문화창출과 민족문화의 진로개척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선도의 방송이여야 한다.》
민족언론의 당면한 자세와 당면한 자세에 대해 영춘이는 이렇게 지적한다.
《시장경제체제의 충격과 조선족공동체가 겪고 있는 혹심한 위기로 우리 말 언론은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우리 언론은 쓰러질 수 없다. 조선족동포사회가 전방위적인 곤혹을 치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언론이 조선족 동포사회를 잘 이끄는 견인차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비상시기라고 생각한다.》
연변의 축구는 단순히 스포츠의 범위를 초월하여 연변의 자존심과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나아가서는 13억 중국에 연변 나아가서는 200만 중국조선족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여 왔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점이다. 연변축구구락부 초대회장으로서의 영춘이는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연변TV방송국 국장으로서 연변축구구락부회원 초대회장을 맡아 나섰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축구사업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뛰여 다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태민족이나 서장의 장족같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민족과는 다른 민족이다. 유태민족이나 장족의 경우에 있어서 그네들의 민족문화를 담는 그릇이 종교인데 비하여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 민족문화를 담는 그릇은 비종교적인 교육, 문학예술 및 스포츠 그리고 언론, 출판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우리의 말과 글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교육, 문학예술, 언론, 출판 같은것이 살아야만 우리 민족은 자신의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인생태도의 측면에서만 영춘이와 나를 비교한다면 영춘이는 입세(入世)적이고 나는 출세(出世)적이여서 영춘이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웅심을 품은 유가(儒家)적 선비형이라고 한다면 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의 리상을 지닌 도가(道家)적인 은사(隱士)형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세상의 벼슬을 시답잖케 보는 내가 영춘이를 존중하는것은 결코 영춘이가 TV국장, 출판국장 같은 벼슬자리에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영춘이는 지금에 이르기 까지 TV국장이나 출판국장 같은 벼슬자리를 자기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벼슬자리 지키기에만 고심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는 참된 파수군이 되여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고 살려나가기 위해 자신의 혼신을 다했기 때문이며, 아울러 오래 동안 벼슬길을 걸어 왔지만 영춘이가 본연의 참된 인간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춘이를 단순한 친구로만이 아니라 언제나 부모에 대한 나의 효심(孝心)과 민족에 대한 나의 애심(愛心)을 비추어 보고 내 삶의 자세와 의지를 점검해 보는 귀감(龜鑑)으로 여기여 왔다. 특히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환경이 그렇지 않다고, 시운(時運)이 없다고 스스로 한탄하고 주저 앉으려 할 때마다 나는 영춘이를 머리속에 떠올리 군 했으며, 그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군 하였다. 내가 군대에서 나의 아버님의 해방전 력사문제로 하여 입당하는데 큰 난관에 봉착했을 때도, 그토록 되고 싶던 군관으로 승진되지 못하고 퇴대하여 지방에 돌아온 후 좌절과 패배의 고배를 마시며 방황할 때도 영춘이를 머리속에 떠올리고는 다시 삶의 용기와 의지를 되찾 군 했다. 왜냐하면 내가 삶의 길에서 봉착한 난관들은 영춘이가 봉착한 난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기 때문이다.
영춘이나 나나 아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져있을 나이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어깨의 짐은 무겁다. 나는 내 친구 영춘이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강인한 의지와 투혼으로 자신의 삶의 길을 걸어나가고 우리의 연변 지역 사회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 창달을 위해 더 많은 유익한 일들을 함과 아울러 계속 나의 익우량사(益友良師)로 되여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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