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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마음의 그림자》
자식, 잘도 뛴다. 네가 뛰면 이제 얼마나 뛰겠냐? 첫 코스에서 앞선 놈은 어디까지나 뒤따라오는 사람한테 자리를 내주기 마련인 줄 너는 모르지. 모르구 말구. 알면 첫시작부터 저렇게 뛸까?
앞선 사람은 뒤에서 따라 올까봐 숨 조절할새없이 뛰다나니 인차 맥이 진하지만 뒤에 선 사람은 앞선 사람과는 거리상으로 차이가 있지만 이제 따라잡을 기회를 여유 있게 노리며 뛰기에 숨 조절이 잘 되지. 잘 되구 말구.
자식, 그래 내가 여태껏 뛸 줄 몰라서 그냥 뒤따르는 줄 아느냐?
허, 그 자식, 그래도 생각던 바보다 잘도 뛴다. 그렇지, 저 녀석이 이번 경기에 나서자고 아침마다 줄뛰기를 했다지. 욕심 많은 자식, 해마다 보온병에 모범상장을 받쳐 타고도 성차지 않아 이번 경기에 내건 보온병까지 독차지하려구? 게걸스럽기 짝이 없군. 까짓 모범은 해마다 그럭저럭 한담 끝에 선거되는 거지만 경기에서의 승리자는 겨룸에서 이긴 자가 되는 거야. 아무렴, 승부를 냉혹하게 가르는것이 경기니까.
누가 말했더라, 신체도 혁명의 밑천이라구 했지. 암, 밑천이구 말구. 듣자니 저 녀석이 한달새에 체중이 열근이나 내렸다지. 한심해, 더 한심한건 우리 주임동지야. 뭐랬더라? 옳지. 뭐, 체중이 열근씩이나 내리는 도 아랑곳하지 않고 맡은바 연구사업을 잘해 나간다고 저 녀석을 추어올렸지. 제길, 체중이 내린것도 자랑거리야? 사람을 올리춰도 분수가 있지……
가만, 저 녀석은 우리 단위에 올때부터 저렇게 말라있었지. 혹시 저 녀석이 내리지도 않은 체중을 내렸다고 하지 않았을까? 가능해. 워낙 겨릅대처럼 마른 놈이니 살이 붙었으면 붙었지, 내릴 살은 없지. 쳇, 뭐이 고우면 사마귀까지 곱다더니 우리 주임 눈에는 저녀석이 깡깡 말랐다는 그 자체마저도 자랑거리로 보이는 모양이지? 흥, 코웃음이나 하나 받으라구. 그렇게 코 막고 답답한 사람이니 나만 보면 왜 멋없이 몸만 내는가고 이맛살부터 찡그리지. 내가 미우면 아예 밉다고 해. 속담에 며느리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같다고 나무람 한다는데……
오호, 저녀석이 인젠 숨찬 모양이구나. 두 어깨가 아까보다 더 세차게 오르내리는구나. 숨이 찰거다. 정 바쁘면 아예 물러서라구. 꼴보기 가긍하다구. 계속 뛰는걸 보니 물러서긴 싫은 모양이지? 그럴 거야, 원래 허영심이 많은 녀석이니까.
허영심이란 적당히 있으면 좋은 거겠지만 지나치면 그건 질곡이야. 그저껜 또 새 연구 과제를 달라고 청구서를 냈다지. 어쨌든 말 못할 녀석이야. 지금처럼 숨 조절도 없이 그저 냅다 뛰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는가? 영예도 가질 땐 좋아도 그걸 지탱해 가자면 쉽지 않아, 알겠어? 그래 내가 여태껏 영예를 가지고 싶지 않아 청구서 한장 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는 줄 아는가? 천만에, 영예를 가진 뒤 그 영예를 지탱해나갈 힘을 키우기 전엔 영예를 가질 생각조차 삼간다는 거야. 오늘 달리기 경기 역시 마찬가지야. 다음번 운동대회에서도 일등을 따낼 확신이 없으면 난 아예 이번 경기에 나서지도 않았을 거야. 한마디로 난 눈앞만 보는 사람이 아니야.
자식, 아직까진 숨을 헐떡거리며 잘은 뛰지만 이제 봐. 들숨만 마시고 날숨을 뽑지 못할 땐 누굴 원망하지 말어. 충고나 한마디 할까. 옛 명언 하나 빌지.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이긴 자라, 으흐흐……
이제 몇고패 남았나? 맙시사. 아직 여섯고패가 있구나. 나에게도 좀 벅찬데 괜한 생각이야. 저 녀석이 헐떡이는 꼴을 좀더 보게 됐으니 여북 좋아서. 웃는 모습보다 우는 꼴을 보기 더 재미있다고 했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역시 명언이야.
아니, 이게 누구 그림자야? 내 그림자? 아닌데, 오호, 저 녀석의 그림자구나. 요것 봐라, 지금 태양을 마주 향해 뛰니 저녀석의 그림자가 바로 내 발밑에서 늘어졌구나. 마른명태같이 바싹 마른 놈이니 그림자 역시 볼품없이 여위였구나. 참 묘하다. 뛸 때마다 저 녀석의 머리그림자가 꼭꼭 내 발에 밟히는구나. 이러고 보면 내가 저 녀석의 머리를 밟으며 뛰는 셈이지. 히히히, 거 재미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뭐 셀것도 없구나. 이렇게 뛰다나면 저 녀석의 머리를 몇십번, 몇백번 밟아놓을지 모르겠다. 자식, 자기 머리가 내 발에 짓밟히는 줄도 모르고 멋스레 뛰긴 잘 뛴다. 요놈 머린즉 연구론문이 통과될 때마다 자랑스레 쳐들고 다니던 머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더 밟아볼까. 요 가슴인즉 작년에 노력모범메달이 번쩍이던 가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한 번……
엉? 이건 또 누구의 그림자야? 아주 살진 그림잔데. 오호, 굽이를 돌아 태양을 등지고 뛰니 내 그림자가 앞에 나섰구나. 저런 괘씸한 놈 좀 봐라. 내 머리를 그 땀내 나는 더러운 운동신으로 마구 짓밟는구나. 엎음 갚음인가? 아니야, 절대 저 녀석한테 밟힐수 없어. 비록 그림자지만……
야야야……
이걸 어쩌나? 오른 다리에 쥐가 오르는구나. 방정맞게 아이구, 점점 더하구나. 저 녀석 다리엔 쥐가 오르지 않는지. 제발 뛰다가 넘어져, 넘어나져라. 코 깨고 이마 깨고 무릎까지 깨라. 저런, 저 자식이 점점 더 신나게 뛰는구나……
아이구, 인젠 뛰기는 다 글렀다. 통분하구나, 통분해. 내가 그래 이렇게 지고 만단 말이냐? 이까짓 달리기경기에서까지 저 녀석한테 진다면 내 꼴이 뭐가 되느냐? 절대 질 수 없어. 그런데 뛸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쩌나?
옳지, 저 녀석을 부르자. 그거 좋은 수다. 내가 이제 다리를 안고 넘어지면 저 녀석이 꼭 몸을 돌려 뛰어올 거야. 암, 뛰어 오구 말구. 경기에 나선 몸이라 해도 자기 단위 친구가 넘어진걸 보고도 모른척 그냥 뛸 수는 없지. 그러면 누가 지고 이길것도 없지. 가장 좋기는 저 녀석이 넘어져 무릎이나 깨면 제격이겠는데, 그러면 내가 기여서라도 저 녀석 먼저 종점에 갈수 있으련만……
저녀석 넘어지지 않고 그냥 뛰는구나. 어서 저녀석을 불러야지. 가만, 안돼. 그럴수 없어. 만약 저 녀석이 일등을 따낼 기회를 포기하고 나한테로 달려와 다리를 주물러 준다면 구경꾼들은 박수갈채를 보낼거야. 그 중에서도 우리 주임이 더 야단스레 박수를 칠거야. 그 꼴을 내가 눈이 시여 어떻게 보나? 안돼, 절대 저 녀석한테 고상한 풍격의 소유자란 칭찬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줘서는 안돼. 그냥 뛰게 하자. 고작해야 상으로 내건 보온병을 빼앗기게 되겠지. 까짓 보온병 하나쯤이야……
야, 아무튼 통분할 일이다. 이제 어떻게 경기장에서 나온단 말이냐? 그대로 주저앉으면 꼴불견이지. 까무러친듯 뒤로 넘어진다? 그것 역시 꼴불견이지. 시시한 경기에 별로 뛸 생각도 없어 스스로 그만둔것처럼 히쭉히쭉 웃으며 걸어 나갈까? 그것 비슷하다. 까짓 거 보온병 하나를 가지고 직업선수들처럼 냉혹하게 승부를 가릴 것 없지. 우리 집에야 보온병이 셋이나 있으니까 독신으로 있는 너나 가져라. 보온병 같은 걸 탐낼 내가 아니니까.
좌우간 오늘 운수 사납구나. 젠장, 이럴 줄 미리 알기나 했으면 아까 저녀석의 머리 그림자라도 몇번 더 기운차게 밟아줬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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