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
김훈 / 칼럼
들어가면서
두 녀인이 한 아기를 가지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다툼을 하다가 왕을 찾아간다. 왕 앞에서도 두 녀인이 또다시 다투기 시작한다. 두 녀인의 다툼을 조용히 듣고 있던 왕이 판결을 내린다. “둘이 서로 제 아기라고 우기니 할 수 없다. 아기를 둘로 잘라 반씩 나누도록 하라.”
이에 한 녀인이 흔쾌히 판결에 따르겠다고 한다. 자신의 아기가 아니기에 그 아기가 죽든 말든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엄마는 차마 아이를 죽일 수 없기에 차라리 가짜엄마에게 아기를 주라고 간청한다. 이 장면에서 왕이 진짜엄마를 가려낸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인 솔로몬 왕이 진짜엄마를 가려낸 이야기다.
‘진짜와 가짜’라는 명제로 글 한편 써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이 이야기다. 진짜와 가짜를 경우에 따라 진실과 거짓이라고도 한다. 가짜는 지금 류행어에까지 오른 짝퉁과 맥을 같이한다. 사전엔 짝퉁이란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올라있다. 상품세계에서 흔한 짝퉁이 인간세계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진짜엄마와 가짜엄마’를 가려낸 이야기다. 내가 직접 당한 ‘짝퉁김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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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나’
80년대 중반 내가 한창 문단에서 활약상을 보일 때 ‘가짜김훈’이 출몰했다. 나는 그 가짜를 ‘또 하나의 나’라고 별칭했다. ‘또 하나의 나’는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대상을 받은 나의 단편소설 명인데 그 소설명을 빌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나’가 첫 모습을 드러낸 곳은 연길현 동불사 공소합작사였다. 당시 공소합작사는 농촌신용사 역할도 했는데 ‘또 하나의 나’는 공소합작사 책임자를 찾아 급히 생활체험을 나오다 나니 현금을 적게 가지고 나왔다면서 돈을 선대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발표한 작품을 스크랩해서 모은 두툼한 서류철을 증거로 내놓았다.
공소사의 책임자는 내가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동불향 문화소 소장인 허흥식시인의 친구였다. 그도 내가 허흥식시인과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던 차라 ‘또 하나의 나’를 확인도 할 겸 문화소 소장을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그러자 ‘또 하나의 나’는 잠간 가볼 데가 있다고 핑게를 대고 줄행랑을 놓았다.
‘또 하나의 나’가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도문시였다. 대학 동창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첫마디에 도문에 왔으면 왜 련락도 하지 않는가고 볼 부은 소리다. 간 적이 없다고 하니 내가 도문시 빈 호텔에서 영화배우 모집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나’의 작간이다.
공안국 국장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잡아놓으라고 부탁을 했는데 한발 늦어 놓치고 말았다. 그자는 20분 전에 호텔을 떠나 종적을 감췄다. 호텔 측의 말로는 영화배우를 모집한다고 하니 숱한 예쁜 처녀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나’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흑룡강성에 있는 윤림호소설가의 집이다. 윤림호소설가와는 작품을 통해 서로 아는 사이였지만 대면은 한번도 못했다. 언젠가 윤림호소설가가 전화로 흑룡강성에 오면 자기가 사는 고장에 꼭 들려달라고 했다. 나는 가겠다는 약속만 해놓고는 일정을 잡지 못했다.
이번에도 흑룡강성 해림에 있는 대학 동창생이 왜서 윤림호소설가를 만나러 가면서 자기한테는 들리지 않았냐고 전화가 와서야 ‘또 하나의 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알게 되였다. 그자는 윤림호소설가의 집에서 백숙까지 대접받았다나. 윤림호소설가는 그자의 얼굴 모습은 책과 신문에서 본 나의 모습과 비슷했고 나이 역시 비슷하다고 했다.
그 후로 ‘또 하나의 나’는 종적을 감추었다. 혹 그자가 사기행각을 계속 벌이고 있는데도 내가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참, 담도 크고 신출귀몰하는 자다. 분석을 해본다면 이자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나의 작품을 죄다 수집하는 치밀성을 보였고 나의 꿈이 조선족과 관련된 영화를 찍는 것임도 알고 있었다. 윤림호소설가와 독대할 정도면 조선족 문단이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알고 있는 자이다.
지능범죄자임이 틀림없다. 암만 생각해도 누군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하여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 글을 통해 ‘또 하나의 나’에게 한마디 부연할 수 밖에 없어 고른 말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사기군은 죽어서 지옥 가면 혀가 뽑히는 형벌을 받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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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작가로 오해받은 굴욕
‘가짜김훈’이 ‘진짜작가’ 행세를 하고 사기행각을 벌인 데 대해 분을 참을 수 없는데 황당하게 ‘진짜김훈’이 ‘가짜작가’로 오해받는 굴욕을 맛보는 상상 밖의 일을 당한 적이 있다.
세계 명작 중 널리 알려진 장편소설 《양철북》이 있다. 이 소설은 귄터 그라스의 대표작이다. 나치의 통치하에 있던 독일의 력사와 사회상을 그린 장편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이 글에서 작품이나 작가를 론하려는 것이 아니고 작품명 때문에 하마트면 ‘가짜작가’로 오해를 받을 번한 일이 있어 《양철북》을 거든다. 어느 해 여름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행사가 있었다. 마침 내가 미국에 체류중이여서 문우의 소개로 행사에 참석하게 되였다.
시인인 문우가 행사에서 나를 거창하게 소개했는데 점심식사 때 한국에서 초청강사로 왔다는 녀성 수필가가 내 곁에 앉게 되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수필가가 갑자기 영화를 화제에 올리면서 《양철북》 얘기를 꺼냈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라고 했다. 양철북? 생소한 영화제명이다.
《양철북》이 중국어 제명으로 《铁皮鼓》인데 그 자리에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본 세계명작 반렬에 오른 영화는 제명이 거의 모두가 중국어로 되여있다. 영화명 번역이 나라마다 달라서 잠간 기억을 들추어내서 《양철북》과 근사한 영화제명을 고르는 사이 우리 둘의 대화는 끊어졌다.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행사가 끝나고 문우와 술 한잔 하는 자리에서 문우가 갑자기 “영화공부를 했다는 량반이 오스카상을 받은 《양철북》을 보지 못할 수는 없는데.” 한다. 그 영화 줄거리가 어떤 거냐고 물어서야 나는 《铁皮鼓》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근데 왜 《양철북》 얘기를 꺼내지? 문우의 말로는 내 곁에 앉았던 그 수필가가 문우에게 유명 작가라는 사람이 《양철북》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내가 ‘가짜작가’가 된 것이다.
영화제명 번역이 다른 탓에 내가 굴욕을 당한 것이다. 작가도 때론 엉뚱하게 수모나 굴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받아안았다. 영화제명이 다른 것으로 해서 하마트면 망신을 당할 번한 일이 또 한번 있었다.
1989년 처음 한국에 갔을 때 서울예대에서 교수로 있는 지인이 중국 영화에 관해 강의해달라고 했다. 그때 마침 북경영화학원 석사연구생반을 다닐 때라 모든 사유가 영화에 몰려있었기에 중국 영화 얘기는 편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중국 영화에 대해 소개를 마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한 수강생이 일본 영화와 중국 영화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물었다. 나름 대로 내 견해를 피력했는데 그 수강생이 일본 영화 한편을 거들었다. 여기서 또 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였다. 영화제명이 내 귀에 익숙한 제명이 아니다.
수강자가 거든 영화제명이 《라쇼몽》이다. 들어보지도 못한 영화제명이다. 몇십명 되는 수강생들 앞에서 질문한 학생에게 영화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어보지도 못한 영화라고 할 수도 없다. 중국의 최고 영화대학에서 석사공부를 하고 씨나리오도 썼다는 사람이 일본 명작을 모른다면 필경 또 작가행세나 하고 다니며 강의료나 챙기는 ‘가짜교수’로 락인 찍일 것이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일본 영화라고 했으니 필경은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다. “라쇼몽, 라쇼몽.” 입속으로 중얼대다가 저도 모르게 내 입에서 터져나온 말이 중국어다. “罗生门!” 중국어로 영화제명을 말하니 수강생이 고개를 갸웃한다. 해서 흑판에 영화제명을 중국어로 쓰니 바로 그 영화라고 한다. 순간 속으로 맙소사를 부르짖었다. 1950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고 세계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BBC 선정 력대 최고의 외국 영화에서 《라쇼몽》은 4위를 차지했다.
지금은 인터넷이 있어 작품명이나 작가명을 입력하면 곧바로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나와서 아주 편리해졌다. 이제 다시는 작품명이나 작가명 번역이 달라서 구설수에 오르거나 수모나 망신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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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를 가려 못 낸 일화
작가가 글을 쓰려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설정해야 하는데 그런 작중인물들은 작가의 생활체험에서 온다. 글을 쓰느라고 이런저런 생활체험을 많이 했는데 가장 인상 깊은 생활체험이 하나 있다. 작중인물로 쓸 원형을 미리 정하고 생활체험을 할 때도 있고 정한 원형이 없이 그냥 삶의 현장에서 작중인물을 고를 경우도 있다. 현장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 못한 경우가 한번 있었다.
80년대 중반에 중편소설 <정신병리학 연구>를 쓰기에 앞서 생활체험 차 정신병원을 찾았다. 지인인 병원 원장이 직접 안내를 맡았다. 정신병 환자들의 생활공간까지 들어가보았다. 그날 환자들이 군데군데 모여앉아 트럼프, 화투를 치고 있었다.
원장하고 환자들과 대화를 나눠도 괜찮은가고 물으니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정서가 이미 안정상태인 환자들이니 얘기를 나누어도 된다고 했다. 해서 나는 나에게 자주 눈길을 주는 환자에게 “놀음이 재미있나? 놀음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나?” 등등 아주 편한 질문을 했다. 나의 물음에 대답을 잘하니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더니 그 환자가 아주 짜증 난 기색을 보이면서 하는 말이 귀를 의심할 정도다. “전 환자가 아닙니다.”
환자가 아니면 왜 환자복을 입고 환자들 속에 끼여 트럼프를 치는 ‘쇼’를 벌이고 있냐고 묻기도 전에 원장이 웃음을 지으면서 해석을 한다.
“놀이판을 조직하고 환자들을 곁에서 관리하라고 한 놀음판에 의료일군 한명씩 끼워넣었네. 듣자니 작가들의 눈은 예리하다더군. 뭐 매 같은 눈이라던가. 난 자네가 가짜환자와 진짜환자를 가려내는 안목을 가진 줄로 알았는데. 허허허…”
원장의 말에 환자들이 벌린 놀음판에 의료일군을 몇을 끼워넣었는지 확인해보려고 매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눈길을 낱낱이 뜯어봤지만 누가 환자고 누가 의사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정상인이라고 보면 다 정상인 같아보이고 환자라고 보면 다 환자같이 보인다. 정상인이 ‘진짜’이고 정신병 환자가 ‘가짜’라고 설정한다면 진짜와 가짜를 작가의 안목으로도 가려낼 수 없다.
정신병원 방문을 마치고 원장과 단둘이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내가 물었다.
“정신병 환자와 정상인의 차이가 뭔가?”
“겉보기엔 정신이 멀쩡한 정상인이라도 다 이런저런 정신질환을 갖고 있네. 정신질환이란 사람의 사고, 행동, 감정 같은 것에 영향을 미치는 병적인 정신상태인데 쉽게 해석하면 받는 스트레스도 정신질환에 속하네. 점점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고 있는 세태에서 과욕, 말하자면 권세욕, 금전욕 등등 여러가지 욕구로 야기되는 욕구팽창, 욕구불만도 정신질환이네. 정신적인 질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정신병 환자와 정상인은 별 차이가 없네. 단 하나, 정상인이 환자와 다른 차이는 스스로의 통제력이 있는 것이네. 통제력을 잃으면 정신병 환자나 다름이 없네.”
원장의 말에 계시를 받아 쓴 것이 중편소설 <정신병리학 연구>이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과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과 사회에 가져다준 피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호소한 작품이다.
《장백산》2022년 제2호(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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