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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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미향이
2009년 04월 18일 05시 59분  조회:1527  추천:50  작성자: 김훈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

나와 그녀의 첫만남을 기억에 떠올려보면 그 어느 첩보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련상시켜 지금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5년전, 몽골로부터 갑자기 들이닥친 한류가 앙상한 가로수 나무가지에 처절하게 매달린 몇 안되는 말라버린 나뭇잎의 림종을 재촉하던 그런 계절의 어느날이였다.

그날 나는 서재에 죽치고 앉아 우리 민족녀성운명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 전날까지만해도 나는 한 잡지사의 청탁으로 쓰게 될 정기칼럼을 구상했다. 처음에 난 칼럼이 뭔지도 몰랐다. 그게 뭔가고 잡지사의 친구한테 물으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칼럼이란 신문, 잡지에서 시사문제, 사회와 풍속, 인생 등 문제를 다룬 글을 전문 기재하는 특별란인데 칼럼을 다루는 사람을 칼럼니스트라고 한다면서 나보고 한번 잘 해보라고 했다. 혼탁한 세상에서 자기 인생도 설계할줄 모르는 사람이 일약 세상은 어떻고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거창하게 운운하는 지성인으로 일약 변신한 셈이다.

세상과 인생을 운운하자면 우선 선인들의 명언록이나 잠언록 같은걸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계격언록을 뒤적이다가 눈에 쑥 들어오는 글 한줄을 발견했다.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

가석한 것은 이말을 대체 누가 했는지 책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는 이 말의 뜻을 되새기노라니 언젠가 보았던 한 소설이 떠올랐다. 조선조시대 씨받이운명을 그린 소설이였는데 그 소설의 주인공인 씨받이처녀는 씨를 받기위해 처음으로 사내를 받아들인 그날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나의 운명은 바로 그날밤에 결정지어졌다.》

말하자면 씨받이로서의 그 후 비참한 운명이 바로 첫 사내를 대하던 그날 밤에 결정지어졌다는 얘기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그 녀인의 수난사는 바로 그날밤부터 시작되였다는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쳤다.

가난으로 씨받이 신세가 되던 증조할머니 세대의 녀성들의 수난사,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 세대의 녀성들의 수난사, 《정치몽둥이》가 날아다니던 그 시절 우상정치, 《무산계급독재정치》의 순장품으로 된 어머니 세대 녀성들의 수난사, 격변하는 시대에 가치관념의 혼란으로 방황하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지금 세대 녀성들의 수난사 이런식으로 쭉 선을 그어내려 가노라면 녀인의 수난사로 민족의 비극을 재조명할수 있지않을가.

기발한 생각같아서 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바로 그거다. 녀자의 수난사가 시작된다는 밤을 재조명하자. 그 밤이 숙명적인 밤이던 치욕적인 밤이던 녀자로 다시 태여나는 성스런 밤이던간 그 밤을 그리면 녀성의 수난사가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내가 제풀에 흥분해가지고 해당 자료들을 열독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니 가녀리지만 약간은 귀맛좋게 들리는 젊은 녀성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안녕하세요? 송철선생님 계십니까?》

《네. 바로 접니다. 누구신지?》

《외람된 물음이지만 글 쓰는 송철선생님 맞죠?》

《글 쓴다기보다 글장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뉘신지?》

《저의 이름을 대도 선생님께선 모르실거얘요. 그저 선생님을 숭배하는 팬이라고 생각해주시고 저의 청을 들어주시면 고맙겠어요.》

《청이라니?》

《언제부터 선생님을 한번 찾아 뵙고 싶었어요. 귀한 시간이지만 한번 짬을 내서 저를 만나주시면 큰 영광으로 간주하겠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팬의 목소리다. 한번 만나만 줘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이런 말을 상급지도자에게 한다면 아첨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라 하겠지만 문학팬들에게 있어서는 아첨이라고 하기보다 경모의 마음이 다분히 깔린 소리라고 표현해야 한다.

한것은 팬들의 말은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니까. 10년전만해도 이런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그때 나의 팬들은 내 작품이 나가기만 하면 전화를 걸어왔고 편지를 보내왔으며 어떤 극성팬은 사랑을 고백해 오기도 하였다. 지어 한 극성팬은 울면서 내가 비록 처자식을 둔 사람이지만 영원히 문학의 우상, 사랑의 백마왕자로 마음에 모시고 일생을 나만 지켜보고 살겠다고 했다. 그 때는 찬사를 보내주고 열광하는 팬들이 귀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의 60년대 후반기처럼 인간령혼을 정화시키는 작가가 《피고름 짜는 의사》나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졸부보다 못한 그런 세월이 오면서 글쟁이들이 머리를 잡아뜯으며 쓴 글을 내주는 이가 없어 자기 호주머니의 돈을 털어 출간하고 또 그 책을 보아주는 이가 없어 창고에 묵여두는 그런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다. 누군가 이런 현상을 두고 작가의 타락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작가의 타락이 아니라 문명의 타락이라고 했다. 진짜 누가 타락하고 또 누가 누구를 타락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문분출하고 글을 쓰는 글쟁이들이 12억 인구 모두 돈을 벌라는 세상에서는 어딘가 정신상태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문학팬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듣기에도 성대에 이상이 생겨 병원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같아 보이는 사람이 목갈린 소리로 내지르는 단발마적인 괴성도 열광하는 가수팬들의 눈물, 코물, 오줌까지 짜내게 하는 세월에 내가 한 번 만나주면 큰 영광으로 간주하겠다는 팬이 나타났으니 반갑다기보다도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말씀 고맙습니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신기루같이 나타난 팬을 깍듯이 대했다.

《용건이라기 보다도 선생님께서 시간을 짜내 저의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얘요.》

《무슨 얘기신데?》

《저의 얘긴 선생님한텐 좋은 글감이 되실거예요. 정말이예요. 흑…》

나의 팬은 말을 맺지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송수화기로 울려나오는 녀자의 흐느낌소리를 들으니 내가 별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울지마시고 차근차근 얘기하십시오.》

한참만에 나의 팬은 오열을 그치고 울음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전화로는 도저히 얘기가 될것 같지 않아요.》

글감이 된다는 나의 팬의 이야기, 더군다나 오열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그 이야기가 무척 궁금스러웠다.

《지금 어디서 전화를 거십니까?》

내 말에 팬은 대뜸 반색한다.

《여긴 공중전화인데 선생님 지금 나와주실래요?》

《그러지요. 그런데 만날 장소를 어디로 정하면 좋겠습니까?》

《전 어제 북경에 오다나니 지리를 잘 몰라요. 제가 안다는 것은 천안문밖에 없어요.》

《천안문앞엔 관광객이 많아 만남의 장소로 정하기는…》

《그러시면 천안문광장 중심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앞에서 만나는게 어떨까요?》

《그런데 어떻게 서로 알아볼수 있겠는지…》

《제가요 아래우를 까만색으로 정장을 했는데 손에 〈연변녀성〉 잡지를 들고 있을께요. 시간을 몇시로 정할까요?》

《오전 11시로 하지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에 이르니 5분전 11시였다. 어떻게 생긴 녀성인지 또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금은 궁금한 마음으로 기념비 주변을 눈빗질했다. 까만색 정장을 하고 손에는 《연변녀성》잡지를 쥔 녀인을 찾아 기념비 주변을 돌았다. 그러나 그런 녀인은 없었다. 담배 한 대 붙여 입에 무는데 한 녀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까만색 정장을 하고 손에 잡지를 말아쥔 한 녀인이 기념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봐서 나이가 40대 초반에 가까운 녀인이였다. 전화로 들은 젊은 목소리에 비해 조금은 상상이 빗나갔음을 느끼면서 나는 그 녀인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전화로 약속한 내 팬이라면 적어도 주변을 두리번 거리겠건만 그 녀인은 고개를 약간 숙인채 내처 걸어왔다. 나는 그 녀인의 곁을 지나치면서 그 녀인이 손에 말아쥔 잡지에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그 녀인이 잡지를 너무 돌돌 말아쥐였기에 그것이 무슨 잡지인지 알수 없었다.

《저 미안하지만…》

내가 우리말로 그 녀인을 향해 말을 건넸지만 그 녀인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가버렸다. 그 어느 첩보영화에서 보았던 접선에 실패한 한 장면이 떠올라 절로 멋적은 웃음이 힉 나갔다.

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피웠을 때 인민대회당쪽에서 바삐 뛰여오는 까만색 정장을 한 녀성이 눈에 잡혔다. 갸날프리만치 쪽 빠진 몸매를 봐선 처녀로밖에 볼수없었다. 그러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또 실망했다. 그런데 나와 가까운 거리까지 달려온 그 녀성이 멈춰서더니 어깨에 멘 가방에서 잡지 한책을 꺼내는것이였다.

제발 그 잡지가 《연변녀성》이기를…

기대와 맞아떨어졌다. 그 녀성이 가슴앞에 펴든 잡지표지엔 전통 한복을 입은 조선족녀성의 사진이 찍혀져 있었다. 접선 성공이다. 내가 희미한 미소를 입에 단채 그녀한테 다가가자 그녀도 대충은 짐작이 가는지 마주 다가왔다.

내가 그녀가 쥐고있는 잡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어보이자 그녀는 인차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래 기다렸죠? 차가 밀려서…》

그녀는 흘러내려 눈을 가리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렸다. 조금은 넓은 하얀 이마와 쌍거풀이 질가말가한 반짝이는 두눈이 드러났다. 작은 눈이였지만 새물새물 웃는듯한 그런 눈이였다.

《나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아직은 식사전이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식사나 합시다.》

우리는 천안문광장 남쪽켠에 있는 맥드날도로 가서 빈자리가 많이 남은 구석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 화제에 들어가기전에 나로선 우선 그녀가 나의 전화를 어떻게 알았는가가 궁금했다.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그녀의 대답이 기막혔다. 북경역 지하철입구에 있는 쓰레기통곁에서 나의 명함을 주었다는것이였다. 필경 언젠가 나의 명함을 받은 어느 녀석이 북경을 떠나면서 버린 모양이였다. 그저 간단히《자유기고가》라고만 달랑 밝힌 나의 명함이 그 무슨 사장이요 리사장이요 주석이요 하는 사람들의 명함처럼 정히 명함첩에 모셔질 명함은 아니지만 믿기어려울 정도로 쓰레기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억장이 막히는 일이였다. 하긴 돈이나 권세를 가진 사람에 비해 별볼일이 없는 글쟁이의 명함이니 그런 《대접》을 받을만도 하다. 스스로 마음이 비참해지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내 명함을 발견하는 순간 얼마나 행운스러웠는지 몰랐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소 위안을 느낄수 있었다. 그녀가 주은 것이 명함장이 아니라 뭇사람들에게 짓밟힐번한 나의 자손심이였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돌리던 휴대폰전화번호와 팩스번호까지 밝힌 명함장을 그녀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우리는 인차 본 화제로 들어갔다.

《하실 얘기가 뭔데 지금 들어볼까요?》

《선생님 말씀 낮추세요. 선생님께서 말씀을 낮추시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지고 죄송스러워요.》

《미안하지만 성함은?》

《아이참. 여직 제가 선생님한테 제 이름마저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죄송해요. 저의 이름은 최미향, 올해 나이는 26살, 취미는 독서, 특기사항은 리혼녀입니다.》

초면에 나이뿐만아니라 리혼녀라는것까지도 당당하게 밝히는 그녀의 솔직함이 아주 인상적이였다.

그녀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도 없고 별로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없는 북경에 오고보니 마치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프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허두를 떼고는 본론에 들어갔다.

《선생님을 찾은건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의 글을 통해 저의 기구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데 있었어요. 여느 소녀들처럼 꿈많고 웃음이 많던 저는 하루밤사이에 꿈을 잃고 웃음을 잃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밤이 바로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 된셈이지요.》

그러고보면 녀인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는 격언이 아주 적중한가보다. 미향은 아래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달래면 달랠수록 더 울어버리는 것이 녀자와 어린애들이다. 녀자나 어린애들이 울때면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상책이다. 나의 안해도 이러저런 일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설음을 받을 때는 곧잘 울어버린다. 그럴 때 달래면 안된다. 달래면 더 울어버리다가 나중엔 나를 상대로 스트레스를 푼다.

한 번은 친구의 아들 돌생일에 우리 내외는 단돈 백원만 가지고 갔다. 아이의 돌상에 사업을 하거나 과장이나 처장같은 장자나 가진 다른 친구들이 몇백원씩 척척 꺼내놓는 것을 보고 안해는 가지고 간 백원을 꺼내놓지 못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안해는 울었다. 곁에서 내가 달래니 안해는 그 설음을 나한테 쏟아부었다.

《맨날 그런식으로 살고 있으니 마누라 체면 하나 세워주지 못하지요. 글 만들어내는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뭔들 못하겠어요.》

그러면 나는 말없이 서재로 들어간다. 더 곁에 있었다간 좋은 일이 없다. 살아오면서 설음받던 일들이 다 쏟아져나오고 나중엔 아예 나를 바보로 만든다. 글과 씨름하면서 애들과 대화할줄도 모르는 아버지, 안해에게 미용원에 가서 얼굴 한 번 만지라고 몇십원도 쥐워주지 못하는 남편, 남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마저 없는 사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술로 화풀이 하는 어리석은 사람, 하여간 나는 지구라는 이 땅덩어리우에 발붙일 자리가 없는 사람으로 되어버린다.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두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서재에 앉아있으면 조금후 안해는 언제 투정을 부렸는가 싶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커피 한잔을 놔준다. 그러면 나는 씩 웃으며 안해의 엉덩이를 툭 친다. 안해도 웃어버리면서 내 코를 한 번 비틀어놓고는 나가버린다.

안해생각을 하고 나니 오열하는 미향의 어깨라도 한 번 다독여주고 싶다. 40대 남자가 울고 있는 20대 녀자와 마주앉아 있는것이 볼거리나 된 듯 주변의 시선들이 따갑게 맞쳐온다. 나젊은 정부의 고운 투정을 받아주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미향은 울음을 그치고는 잠간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그 사이 나는 울지않고서는 꺼낼수 없는 미향의 기구한 인생이야기가 시작되였다는 그 밤이 대체 어떤밤이였을가에 대해 추측해 봤다. 폭력에 의한 굴욕의 밤? 아니면 그 어떤 비루한 거래로 이루어진 계약적인 밤? 혹시 그 어떤 피치못할 사정으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친 밤?

언제 울었나 싶게 새로 화장을 하고 다시 내앞에 앉은 미향이는 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미향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라는 그 밤은 시인들의 말을 빈다면 천지간의 화합과 령혼과 령혼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황홀한 밤이였다. 한마디로 미향이가 녀자로 새롭게 태여나는 밤이였다.

미향의 기구한 생을 미향이가 말한대로 대충 적으면 이러하다. 평소에 백마왕자로 흠모하던 학교의 체육선생과 그 학교 고중졸업생인 미향은 소낙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에 학교 체조련습실에서 육체와 령혼의 향연을 가진다. 그것을 계기로 둘은 나중에 부부가 된다. 미향은 고향마을에서 유치원선생으로 일하고 남편은 체육학원으로 연수를 간다. 그 사이 사랑엔 금이 실리고 미향은 그 금을 메우려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는 포기해 버리고 만다. 배속에 커가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던 미향의 일루의 희망마저도 남편의 잔혹한 발길질에 꺼져버린다. 희망의 잿더미속에서 단 하나의 불찌라도 찾으려고 미향은 무작정 고향을 떠나 북경으로 온다.

어디서 많이 들었고 또 녀성잡지에서 많이 보아온 이야기다. 별로 감흥이 가지않았다. 그렇다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수없어 미향앞에서 진지하게 듣는 모습을 꾸미느라고 애썼다. 가끔 하품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고 곤경을 치뤘다. 미향이가 이야기를 마치자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해서 녀성잡지에 보내보라고 했다.

《녀성잡지에 나오는 글은 너무 짧고 깊이가 없어요. 선생님께서 저의 이야기로 장편소설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그 반응이 대단할거얘요.》

단편소설감으로도 안되는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만들라니 어이없었다. 그러나 글감이 안된다고 말할수 없었다.

《오늘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서는 감이 잘 서지않는데 이러면 어떻소? 미향이가 오늘 할 말을 채 못한 것 같은데…》

미향이가 내말을 잘랐다.

《맞아요. 저의 이야기는 며칠을 새면서 말해도 다 하지 못할거얘요.》

《그러니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오. 록음기가 있소?》

《없어요.》

나는 호주머니에서 취재용으로 쓰던 자그마한 록음기를 꺼내놓다.

《미향이가 겪은 일과 하고싶은 말을 이 록음기에 록음해주오. 며칠이든 한달이든 천천히 생각나는대로 록음해주오. 할 이야기를 다 했다고 생각되면 그 때 나한테 다시 련락을 주오.》

《녀자는 돈에 웃고 돈에 운다》

그날 그렇게 헤여진후 미향이는 가끔씩 전화가 왔다. 그저 인사차로 걸어오는 전화였다. 할 이야기를 다 록음했는가고 물으면 미향은 번마다 기구한 자기 생에 대해 이야기 하자니 자꾸 설음이 북받치고 눈물이 앞서 도저히 록음을 할수 없다고 했다. 마음이 안정될 때 록음을 하라고 하면 마음이 도저히 안정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럼 우선 일자리나 찾아 일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면 다소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을수 있을거라고 하니 자기도 지금 그럴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평소에 그리 친하지도 않은 친구집에서 눈치밥을 먹자니 살점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후로 한 반달동안 미향한테서 전화가 오지않았다. 아마 일자리를 얻어 바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북경도서관에 가서 창작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신지?》

아주 딱딱하고 거친 한어말이 고막을 찔렀다.

《당신이 송철인가?》

《그런데…》

《지금 빨리 동향촌파출소로 오시오.》

아주 명령조였다. 죄지은 일 없어도 파출소로 출두하라면 가슴이 뜨끔해진다. 우선 불길한 생각부터 앞세우게 된다. 고중에 다니는 아들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아니면 어느 친척이 범법했나…

북경의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동향촌파출소를 길을 물어가며 찾아가다나니 택시로 한시간 남짓이 걸렸다. 파출소에 들어가니 몸매가 거쿨진 젊은 경찰이 나를 차갑게 맞았다. 그 녀석은 나한테 자리를 권하지도 않은채 심문조로 물어왔다.

《이름?》

《송철.》

《나이?》

《48살.》

《직업?》

《자유기고가.》

《자유기고가가 뭡니까?》

《글쓰는 사람. 잠간만 당신 지금 날 심문하는거요?》

《난 지금 공무를 집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손님한테 먼저 자리라도 권해야 할게 아니오?》

《거기 걸상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의자에 앉아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그러자 그 젊은 녀석이 고개도 들지않고 말했다.

《여기선 금연입니다.》

《책상우에 재떨이가 있는데…》

《담배 태우라고 놔둔게 아닙니다.》

나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그냥 재떨이에 던져버렸다.

《신분증.》

나는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젊은 녀석앞에 던져주었다. 신분증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젊은 녀석이 신분증을 내앞으로 던져주며 물었다.

《가라오케에 자주 다닙니까?》

한때는 가라오케에 자주 나들기도 했다. 지방에서 친구가 오거나 북경에 있는 친구들끼리 파티가 있으면 2차로 이어지는게 가라오케였다. 다른 친구들은 카라오케아가씨들과 잘 어울려 기분을 냈지만 나는 내가 부를 노래 몇곡만 부르고는 술만 마시다가 꼬꾸라진다. 한두번도 아니고 번마다 그 꼴이니 언젠가 한 친구가 아들둔건 봐선 고자가 아닌데 혹시 벌써 고개숙인 남자가 돼버렸나 하고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가라오케에 가봤댔자 별 재미가 없고 술에 몸만 상하는데다가 오가는 택시료금도 문제가 되어 발길을 끊은지도 오래됐다.

《방금 묻지 않았습니까? 가라오케에 자주 다니는가고.》

나는 대답대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녀석은 서랍에서 명함 장 한 장을 꺼내 내 눈앞에 내댔다.

분명 휴대폰전화번호와 팩스번호까지 찍힌 나의 명함장이였다.....

《그 명함은 어디서 난거요?》

《바로 그게 문제가 된겁니다. 이 명함장이 몸 파는 아가씨한테서 나왔단 말입니다.》

《뭐?!》

《미선이라는 조선족아가씨를 잘 알고 계실텐데.》

《뭐 미선?!》

《상습적으로 몸 파는 아가씬데 오늘 새벽에 잡혔습니다.》

생각밖으로 화제가 엉뚱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첨 듣는 이름인데.》

《같은 조선족이니까 알만도 하지 않습니까.》

이말에 참다못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버럭 소리질렀다.

《이봐 조선족 팔지마. 이 북경판에 조선족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그 말해? 무려 7만이야 7만!》

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그 녀석도 저으기 놀라는 눈치다.

《조용조용.》

《내가 어떻게 조용조용 말할수 있나 말이야. 자네 지금 날 오입한 줄로 알고 있는데 사람 함부로 점 찍지마. 당장 잡아가둔 그 녀자 여기로 데려와!》

이젠 내쪽에서 호령조로 나왔다. 녀석은 한참 말없이 흥분한 나를 차분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훌쩍 일어나 나가버렸다. 분통이 터진김에 나는 담배 한 대 붙여 물었다. 담배를 거의 한 대 다 태울쯤해서 녀석이 들어왔다. 그 뒤로 한 아가씨가 고개를 푹 떨구고 들어왔다. 녀석이 아가씨한테 호령했다.

《고개들어!》

그말에 아가씨가 고개를 들었다. 화장기 하나도 없고 온 얼굴이 눈물투성이였다. 꽤나 곱상하게 생긴 아가씨였다. 녀석이 나를 가리키며 아가씨에게 물었다.

《이 사람을 아냐?》

아가씨는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쩐지 안도의 숨이 나간다.

《그런데 이 명함을 어디서 났어?》

《친구 핸드백을 빌렸는데 그 안에 명함장이 있는줄 몰랐어요…》

《친구 이름이 뭐야?》

《미향…》

(뭐 미향?!)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디에 있어?》

《저의 세집에 있어요.》

《너 같은 애냐?》

《금방 온 애니 그런 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녀석이 나한테 고개를 돌리면서 아까보다는 굳어진 얼굴을 풀며 물었다.

《미향이란 애한테 명함을 준적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글 써달라고 해서 한 번 만나고 그 뒤로 전화로 통화만 몇번 했지요.》

《그럼 이젠 가봐도 됩니다. 훗일 명함장 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웃기는 놈, 형상관리를 잘하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명함장관리를 잘하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저 아가씨하고 몇마디 말을 해도 됩니까?》

내가 녀석에게 청을 들었다.

《무슨 말을?》

《같은 조선족이니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그러나 제가 알아듣게 한어로 하십시오. 자 한 대 태우시죠.》

녀석이 이젠 제쪽에서 먼저 담배를 권한다. 담배를 붙이고나서 나는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아가씨한테 물었다.

《너 몇살이니?》

《스물다섯…》

《시집갔냐?》

《아직은…》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냐?》

내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마음 같아서는 즉신나게 패주고 싶었다. 나는 저으기 흥분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고개를 푹 떨구고 대답을 않자 녀석이 꽥 소리질렀다.

《어서 대답해 봐!》

아가씨의 고개가 더 떨어졌다. 비록 내가 던진 물음이지만 녀석까지 심문하는식으로 합세하니 조선족으로서 별로 망신스런 생각이 들어 아가씨의 대답을 더는 듣고 싶지않았다. 대답이 나와봤댔자 돈 때문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던가 《돈에 속고 돈에 울고》

이런식의 탄식조는 30년대 기생출신인 가수들이 부른 류행가에서 많이 나왔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 당시 일제가 실행한 우리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중 그 하나가 매독정책과 유곽발전정책이다. 일제는 우리민족의 청장년들을 타락으로 유인하여 민족의 정기를 빼앗고 나아가서는 우리민족을 쇠망케 하기 위하여 각 도시마다 유곽이라는 인육시장을 대규모로 설치해 놓고 먼저 일본 기생들을 끌어들이고 후에 와서는 조선녀성을 창녀로 인육시장에 내몰았다. 하여 한 때는 서울장안만해도 2천여명의 조선인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돈에 속고 돈에 울고》는 그 시절 이런저런 사정으로 첩살이하거나 기생으로 된 녀자들의 신세타령이였다. 기생출신인 리화자가 부른 《화류춘몽》2절 가사를 적으면 이러하다.

《술취한 사람에게 주정도 받았으며 돈많은 사람에게 괄세도 받았다오 밤늦은 자동차에 지친몸 담아싣고 뜨거운 두뺨위에 흘린 눈물 진한 것이 기생이냐 》

이 노래를 부른 리화자도 나중에는 술에 젖고 아편에 중독되여 비극의 생을 마감했다. 그 시절 기생들이 돈에 속고 돈에 운 사람이라면 바로 내앞에 머리를 떨구고 서있는 90년대 아가씨는 대체 무슨 사람이냐. 역시 돈에 속고 돈에 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돈에 웃고 돈에 우는 사람인가…

어쩐지 내 마음이 서글퍼졌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내가 걸상에서 일어나자 불시에 아가씨가 내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애걸했다.

《선생님 제발 절 도와주세요. 제가 그 짓을 하고 싶어한게 아니예요.》

이때 녀석이 또 꽥 소리질렀다.

《한어로 해!》

나도 녀석을 향해 우리말로 꽥 소리질렀다.

《야 임마, 조선말 하는것도 이땅에서는 자유야!》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때 무슨 기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녀석은 두눈이 호동그래졌다.

《방금 무슨 말을 했습니까?》

《너 입다물라고 했다.》

나는 역시 우리말로 말하고는 아가씨한테 말했다.

《그 어떤 피치못할 사정이래도 몸건사만은 잘해. 우리민족을 팔지말고. 잘 기억해둬. 자기구제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하는거야.》

그러곤 나는 힝하니 나와버렸다.

《녀자는 새롭게 태여나기를 원한다.》

며칠후 미향한테서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명함장을 잘 건사하지 못해서…》

《알고 있었소?》

《네. 경찰이 왔다갔어요. 죄송해요.》

《죄송할것없고, 그런데 미향인 그 아가씨와 친구요?》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자랐는데…》

《그런 친구들과는 거리를 멀리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명심하겠어요. 마땅한 거처가 없어 잠시 그 애 신세를 진건데 그애가 그런 앤줄 몰랐어요. 고향에 함께 있을 때엔 참 착한 애였는데. 인차 자리를 옮기겠어요. 선생님 지금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용건은?》

《용서도 빌겸 부탁할 일도 있고 해서…》

《용서빌것은 없고 부탁할 일이 있으면 지금 말해보오.》

《새로 나온 〈중화인민공화국 심계법〉 있잖아요. 그걸 우리 글로 번역해 줄수없나요? 번역료는 충분히 드리겠어요.》

《누구의 청탁인데?》

《누구의 청탁이 아니고 제가 한국회사에 들어갈려고 그러는데 〈심계법>에 대해 공부 좀 할려고 그래요. 그런데 전 한어에 약하니까요.》

나의 팬이 공부하겠다는데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말이지 난 지금도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 지어는 아무책이든 읽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한창 책을 읽을 청춘시절을 헛되게 보냈기 때문이다.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은 우리 세대를 보고 타락한 세대라고 했다. 타락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런저런 근거중 그 하나가 우리 세대가 책을 읽지 않았고 또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아버지세대 사람들은 공부를 못한 사람이라도 뿌슈낀이나 조기천의 시는 한 두수쯤은 외울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 세대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창 책을 읽을 나이에 《홍위병》완장을 두루고 《반란에 도리가 있다》고 설치고 다니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답시고 농촌에 가서 호미로 땅을 긁으면서도 제딴에는 지구를 다스린다고 호기를 뽑았고 그러다가 이런저런 기회를 타서 겨우 시내로 들어와 가정을 이루고 보니 청춘시절이 말마따나 속절없이 가버렸으니까.

북경에는 사업하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 사업에 성공한 친구들은 많지만 책을 읽는 친구는 드물다. 한 번은 식당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친구집에 가보니 5성급 호텔방보다 더 화려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죄다 외제였다. 그런데 유독 책장 하나만은 없었다. 책이라곤 쏘파우에 나뒹구는 저질 잡지뿐이였다. 또 한 번은 무역업을 하는 친구집에 가보니 한벽을 전부 차지한 책장에는 사회, 과학, 문학서적은 물론 지어 취미생활에 관한 도서까지도 꽂혀있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몇만원을 주고 한꺼번에 사온 장식용에 불과했다는 것이 내 마음을 쓰리게 했다.  

아버지 세대의 눈에 우리 세대가 타락한 세대로 비쳤다면 우리 아래 세대는 어떤 모습일가.

언젠가 북경시교에 있는 식당에 들린적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웃통을 벗어제치고 술을 마시는 20대 초반의 연변에서 온조선족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돈 벌러 무작정 북경으로 온 청년들이였다. 북경에서 그것도 시교에서 동족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이다. 자연스레 우리는 합석했다. 통성명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년들의 나서자란 곳이 룡정이라 하니 나는 더욱 반가웠다. 한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생활을 시작한 곳이 바로 룡정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반가워 내가 술잔을 들며 건배를 제의했다.

《윤동주 넋이 깃든 룡정을 위하여 건배!》

술잔을 통쾌하게 비운것까지만은 좋았는데 그 뒤에 저들끼리 하는 말이 기막히다.

《야, 윤동주가 누구야?》

《글쎄…》

《어디서 듣던 이름인데…》

《죽은 사람이 아니야?》

너무 기가막혀 내가 물었다.

《너들 학교 다녔냐?》

대답인즉 고중을 나왔다고 한다.

《고중을 나왔다는 녀석들이 윤동주도 몰라?》

나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나왔다.

《어서 옷을 입어!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조선족은 공공장

소에서 웃통을 벗는 일이 없어.》

녀석들은 어정쩡해서 나의 눈치를 보면서 옷을 주어입었다.

《그렇게 머리가 비여가지고 북경에 와서 돈을 벌어보겠다구 천만에. 우선 어디가서 그 빈 머리를 먹물로 채워라.》

녀석들이 잠자코 있다가 내가 식당문을 나설 때 나를 바래는 인사가 《보다보다 별 웃기는 사람 다 보네》였다. 그래 내가 웃기는 사람이라면 너들은 남을 웃길 자격도 없는 녀석들이야. 이렇게 나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했다.

미향은 우편으로《중화인민공화국 심계법》을 보내왔다. 나는 번역할 시간이 없어 출판사에 다니는 안해가 번역을 도맡았다. 번역료가 충분히 지불될것이라고 하니 안해는 신이나서 밤을 패며 번역했다. 번역이 끝난후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미향을 만났다.

그날 미향은 내 록음기를 가지고 왔다.

《죄송하지만 전 록음을 하지못했어요. 여러번 시도를 해보았는데 눈물만 나왔지 말이 안나와요. 다시 생각해보니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둘추어봤댔자 채 아물지않은 상처를 아프게 허빌뿐 앞으로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될것같지 않아 전 포기하기로 했어요.》

하긴 그렇다. 집요하게 자신의 과거에 묻혀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과거라는 그늘속에서 시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포기해도 과거 전체는 포기할 수 없는것이다. 그것이 슬픈 과거였던 기분나는 과거였던간

에 과거는 엄연하게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누군가 슬픈 과거가 시궁창이 될 수도 있고 또한 벅찬 현실과 희망찬 래일의 밑거름으로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과거의 그늘에서 나와 새롭게 자기 인생을 설계해 보겠다는 미향에게 조언으로 한마디 했다.

《미향이 이런 말이 있어. 녀자는 언제나 새롭게 태여나기를 원한다. 새롭다는 그 말 다 좋게 리해하면 안돼. 새롭게 태여난다는것은 새로운 변신, 말하자면 탈바꿈이라는 말로도 통하는데 그 새로운 변신이 새로운 타락의 탈바꿈이 되겠는지 아니면 새로운 비약으로 되는 탈바꿈이겠는지는 자신에게 달렸지.》

《선생님 말씀 명심하겠어요. 선생님한테 미리 량해를 구할게 있어요. 번역료를 미처 마련하지 않아 오늘 드릴수 없군요. 죄송해요.》

《거기엔 너무 신경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나 하라구.》

내가 번역료는 별로 개이치않는다는식으로 나왔지만 사실 그날 안해는 내가 번역료를 가지고 들어오는가 해서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손을 내밀었다.

《뭘 내라는거요?》

나는 짐짓 딴전을 부렸다.

《번역료.》

《번역료는 훗일 주겠다더군.》

《지금 세월에 어디 외상이 있어요. 당신 당해보지 않아 빈손으로 왔어요?》

《믿을 만한 사람이야.》

《또 그 말, 지금 믿을만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범의 코 등의 밥알이라도 뜯어먹는 세상이예요.》

안해가 이런 말을 할만도 하다. 한해전 북경에서 평소 면목이 있는 한 사람이 《중국의 투자환경》이라는 두툼한 책 한권을 가지고 와서 번역해 달라고 했다.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그 사람의 말을 곧이듣고 나와 나의 안해는 근 반달동안 거의 밤을 새워가면서 그 책을 번역했다. 번역원고를 넘기고 반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후에 물어보니 그 출판사가 부도가 나서 없어졌다고 했다. 우리한테 책을 맡긴 그 사람에게 수고비로 얼마간 보상이라도 해야 한다고 안해가 말하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도 그 책의 출간을 위해 접대비를 포함해 만원가량 날려보냈다고 했다. 더 어데가서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원고라도 돌려달라고 하니 부도난 출판사의 사장이 한창 도피중이여서 찾을 길 없다고 했다. 그 때 안해는 화병으로 몇일 누워앓았다.

《이번 번역은 누가 시킨거예요.》

《한국회사에서 근무하는 내 후배야.》

이런식으로 둘러댈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미향은 투자의향서, 제품소개, 회사소개같은 짧은 서류들을 번역해 달라고 팩스를 보내왔다. 그런 격식의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는가를 배우겠다는것이였다. 배우겠다는 사람의 요구를 거절할수 없었다. 다른 때같으면 안해에게 그냥 넘겨 번역하라고 했겠지만 또 번역료 말을 꺼낼가바 그냥 내가 번역해서 팩스로 보내주었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미향이가 북경에 진출한 한 한국무역회사에 입사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당연히 축하할만한 일이였다. 내가 축하할겸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니 미향은 첫 로임을 탄후에 자기가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미향은 한국회사에 입사한 후에도 자기가 아직도 번역에 서툴다고 하면서 가끔 회사관련 서류의 번역을 의뢰해왔다. 번역을 의뢰해온 서류를 보니 미향이가 몸담은 회사는 무역중개업을 하는 작은 회사같았다.

하루는 내가 서재에서 컴퓨터로 미향이가 보낸 서류를 번역하고 있는데 안해가 들어왔다. 컴퓨터 형광막에 나타난 글을 보고 안해는 자못 놀란 기색이였다.

《소설 쓰는가 했더니 딴 판이네.》

《짧은 글이니 당신 손 빌것도 없고 해서…》

《당신 이런 번역은 다시는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번역료는 있어요?》

《친구청탁인데 술 한잔 사겠지.》

《그저 술, 술, 술, 이젠 술소리만 들어도 지겨워나요. 참 그런데 지난번에 번역한건 어떻게 됐어요?》

《뭘 말이오?》

《〈심계법〉말이예요.》

《주겠지.》

《그냥 주겠지 하고 기다리지 말고 재촉하세요. 당신 시간이 없으면 내가 찾아갈테니 주소만 알려주세요.》

《기다린바하곤 좀 더 기다리라구.》

《그러다가 또 전번 꼴이 되면 어쩔라구요. 대체 누구 청탁인가요?》

《내 후배라고 했잖소.》

《대학후배예요?》

《말해도 당신 모르오.》

《후배라고 너무 믿지 말고 재촉할건 미리 재촉하세요.》

《알았다니까.》

《그런데 당신 나하고 역정낼건 뭐예요?》

《당신 오늘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어디 말 안하게 됐나요? 지난번처럼 그저 두눈 펀히 뜨고 당할가봐 그래요.》

미향이가 첫 로임을 타는 날 우리는 미향이가 정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미향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선생님, 번역료는 어떻게 계산하는가요?》

보매 미향이가 번역료를 챙겨가지고 왔는 모양이다.

《번역원고에 따라 다른데 준확한 표준에 대해선 딱히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일반 번역원고는 번역된 자수로 천자에 적어도 30원은 하지.》

이말에 미향은 두눈이 호동그래졌다. 그는 한참이나 아무말없이 앉아있었다.

《뭘 생각하나?》

《아니요.》

《그 얼굴에 씌여져 있는데.》

《사실 전 번역료가 그렇게 될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미향은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 꺼내 내앞으로 밀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전 3백원이면 충분할줄로 알고…》

돈 수자에 기막힌 웃음이 나갔지만 미향의 천진스러움과 그 솔직함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미향이가 북경에 와서 인생의 새출발을 했으니 그 돈은 내 축하선물이더럼 치고 도로 넣소.》

이말을 하면서 나는 어쩔수없이 안해를 떠올렸다. 두 번 다시 당하는 꼴 다시 볼수없다던 안해에게 뭐라고 말할가. 에라, 또 당했다고 하지. 후배녀석이 회사공금을 가지고 실종됐다고 할 판이지. 지금 세월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그러나 밤을 패며 원고를 번역한 안해에게 또 실망을 안겨줄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난들 어쩌나…

《선생님…》

미향이가 말을 잇지못하고 어깨를 들먹였다. 녀자들의 울음끝에는 꼭 할 말이 있다. 이윽고 미향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사실 전 선생님을 속였어요. 바른대로 말씀드린다면 전 배우겠다고 〈심계법〉 번역을 선생님한테 의뢰한 것이 아니얘요. 제가 한국회사에 입사하려고 찾아가니 회사 사장님이 저보고 〈심계법〉을 번역해 보라는게 아니겠어요. 저의 문자수준을 보려는것이였어요. 사실 전 한어

나 조선어나 다 약해요. 그러나 전 그 기회를 놓칠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전 선생님에게 번역을 의뢰했던거얘요. 회사 사장님은 선생님이 번역한 〈심계법〉을 보더니 대뜸 오케를 부르는게 아니겠어요. 그 후에 선생님께서 번역해준 회사서류도 전부 제가 번역한걸로 되었어요. 죄송해요…》

《미향의 그 솔직함이 내 마음에 들어. 됐어, 그만 울라구. 미향이, 거짓말도 때론 아름다운 거짓말이 될 수도 있고 기특한 거짓말이 되는 경우도 있지. 이런 이야기가 있어. 한 군인이 군사훈련중 전우를 구하다가 희생되였는데 그 비보를 홀로 있는 어머니한테 전할수 없었지. 왜냐하면 희생된 군인은 외독자였고 그 어머니는 시한부생명을 사는 로인이였으니까. 그래서 희생된 군인한테서 구원을 받은 전우가 매달 아들의 이름으로 편지를 띄우고 그 어머니에게 약과 돈을 부쳐주었지. 시한부생명을 살던 로인은 결국은 아들의 장래가 창창하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지. 이런 경우의 거짓말은 아름다운 거짓말이고 미향의 경우는 기특하게 받아들일수 있는 거짓말에 속하지. 그러나 그런 기특한 거짓말도 자주 하면 못써.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솔직한게 좋아.》

말을 해놓고보니 내가 집에 돌아가 안해한테 해야 할 거짓말은 안해에게는 기특한 거짓말이 되기는 고사하고 배신감을 주는 거짓말이 될 것이다. 방금 미향에게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솔직한게 좋다고 말했지만 나는 안해에게 솔직할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사내는 속임과 허위의 가증스런 탈바가지라고 했나보다. 그러나 안해도 고생스레 번역한 원고가 한 인간이 새생활에로의 출발에 도움이 되었다는것을 알면 내 거짓말을 용서할 것이다......

《녀자는 변신을 거듭한다》

그 후로 오래동안 미향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둬달 취재차로 외지에 갔다 돌아오니 안해가 기쁜 얼굴로 내 앞에 송금표를 내보이면서 오늘 온것이라고 했다. 3천원 송금표에는 그저 간단히 번역료라고 적혀있었다. 송금인은 최미향이였다.

《실종됐다는 사람이 그래도 신용 하나만은 지켰군요.》

나는 안해에게 번역을 의뢰한 후배가 실종됐다고 거짓말했었다.

《최미향이란 이 녀자가 당신의 후밴가요?》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내가 미향이가 적어준 전화번호에 전화를 거니 그 전화는 취소된 전화라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아마 회사를 옮긴 모양이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미 수집한 일제시대 종군위안부에 대한 자료정리에 들어갔다. 자료를 정리하다가 나는 당시 일제 법제국의 한 참사관이 쓴 글 한편 발견했다. 그자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가장 어려운 과제의 하나가 우리민족의 녀성층을 감화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양 등 선진제국은 식민정책, 또는 선교를 위해서 먼저 부인층을 감화시키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 녀자가 감화를 하면 남자는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제도 우리민족 녀성의 순결성과 고귀성은 민족성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큰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아냈고 아울러 다른 식민지통지자들보다 한술 더 떠서 감화정책보다도 그 순결성과 고귀성을 무참히 짓밟는 것을 우리민족의 민족성을 쇠퇴시키는 중요한 일환으로 보았기에 우리민족의 녀성들을 성의 노예인 위안부로 전쟁판에 내몰았다.

《광사원(廣辭苑)》이란 사전에는 종군위안부란 《일제 때 장병들을 수행해서 위안해 준 녀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실체는 종군위안부란 세계 군대와 전쟁사상 전례가 없었던 군인들의 성욕처리를 위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섹스 처리용 녀자들이다.

일제시기에 종군위안부가 있었다면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된후에는 현지처라는 것이 생겨났다. 사전엔 현지처란 외지에 나가 있는 남자가 현지에서 있을 동안 데리고 사는 녀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말을 바꾸어 말하면 현지에서 구한 섹스처리용 녀자다. 섹스처리용 녀자라는 점에선 위안부나 다름이 없다.

일제시기엔 일제가 총칼로 우리 민족 녀성들을 종군위안부로 전쟁터에 내몰았다면 경제대국이 된후에는 그 족속들이 돈다발을 들고 가서는 우리 민족 녀성들을 현지처로 들여 앉혔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 아니다. 우리를 더욱 경악케 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그 못된 본을 받아 중국에 사업차로 드나드는 일부 한국인들도 조선족 녀성들을 현지처로 들여 앉혔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현지처, 그들은 과연 어떤 녀성들일가?

듣는 소문엔 아세아촌 부근에 한국인 현지처들이 많다고 했다. 어느 하루 나는 그 실태를 알아보려고 아세아촌으로 갔다. 나는 먼저 비싼 외제 화장품만 파는 상점에 들어가 상점주인과 얘기를 나눴다. 외제 화장품중 한국산이 특히 많았다. 상점주인은 30대 중국녀성이였다.

《이 비싼 화장품을 사가는 분이 있습니까?》

《공급은 수요에 따른다는 법칙을 모르시는가 보군요.》

《하긴 그렇습니다. 사는 사람이 없으면 여기다 가게를 차릴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이 비싼 화장품을 애용하는 분들은 대체로 어떤 부류의 녀성들입니까?》

《시장조사를 나왔나요?》

《그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대체로 외국회사에 근무하는 아가씨들이 아니면 장기주재하거나 자주 중국을 나드는 외국인들의 〈작은댁〉들이지요.》

한어로 《작은댁》이라면 첩살림하는 사람, 시체말로 《현지처》다.

《그런 〈작은댁〉들이 많습니까?》

《많다고 할수는 없는데 그러나 적지는 않아요.》

《어떻게 〈작은댁〉인줄 보아냅니까?》

《어떤 기준이 있는것도 아니고 또 그런 녀자들이 그 어떤 표식을 달고 다니는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보면 알려요. 녀자의 눈은 못 속이니까요.》

《그런 녀자들은 별장에 있나요?》

《별장을 갖고 있는 녀자들도 더러 있겠지만 이 근처의 녀자들은 대체로 사무실겸 주택으로 쓰는 그런 집에 있어요.》

말하자면 오피스텔이다.

《드믄드믄 주문배달을 가보면 대부분 무슨 회사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달려있는데 들어가보면 대체로 아가씨 혼자 있지 않으면 같이 사는 남자하고 둘 뿐이예요. 그런데 그런 녀자들이 후에도 주문배달 해달라고 내미는 명함을 보면 대개 무슨무슨 회사의 부장이 아니면 경리라고 찍혀있어요. 말하자면 밖에 나가선 회사 직원이고 방에 들어와선 〈작은댁〉노릇을 하는셈이지요. 말하자면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격〉이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창밖으로 미니스커트 차림의 한 젊은 녀성이 50대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상점쪽으로 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저런 녀자가 바로 한국인의 〈작은댁〉이얘요.》

상점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녀자를 보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랬다. 미향이였다. 나는 내눈을 의심했다. 머리모양이나 옷차림이 판판 달라졌지만 분명 미향이다. 미향이를 한팔로 감싸안고 걸어오는 사내는 꽤나 왜소한 몸집에 키가 훌렁 크고 얼굴은 희여멀건 사람이였다.

《저 녀잔 이곳에 온지 서너달 되었는데 우리 집의 단골이예요.》

둘은 상점안으로 들어왔다. 상점주인이 깍듯이 인사하며 그들을 맞아들였다. 미향은 나를 보는 순간 놀라는 기색이더니 인차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여기서 만날줄을…》

《나 역시 미향일 여기서 만난줄은 생각지 못했소.》

미향의 곁에 선 사내가 나와 미향일 번갈아 보다가 미향에게 묻는듯한 시선을 보냈다.

《참, 소개 드릴게요. 이분은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시고 이분은 저의 회사 박사장님이세요.》

우리는 서로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눴다. 박사장이라는 사내가 실례한다면서 인차 자리를 떴다. 사내는 나가면서 미향에게 말했다.

《미스 최, 10시에 약속이 있으니 시간 장악하라구.》

《네. 시간맞춰 올라갈게요.》

미향의 말은 억양마저도 서울말씨를 닮았다.

《선생님 커피 한잔 할까요? 이 부근에 커피 잘하는 집이 있어요.》

《그러지.》

별로 기분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부근에 있는 자그마한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미향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제가 많이 달라졌지요?》

《글쎄, 겉모양이나 억양은 그 사이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젊은 녀성인 경우에 아무리 시골티가 푹배인 녀자라도 대도시에서 한달만 지내면 시골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모한다. 미향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반년 사이에 미향은 옷차림에서부터 몸가짐새, 지어는 억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직업녀성을 뺨칠 정도로 닮았다. 한국말을 빈다면 아주 세련되였다고 할가.

《회사를 옮긴 모양이던데.》

《처음에 몸담았던 그 회사는 서울의 본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옮겨 앉은 것이 지금의 회사인데 역시 무역업이예요.》

《회사직원이 얼마나 되오?》

《지금 한창 불경기여서 사장님외에 저밖에 없어요.》

둘밖에 없는 회사, 상점주인의 말대로라면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그런 회사다.

《미향인 회사에서 무슨 일을 보고 있소?》

《참, 저의 명함 드리지 않았군요.》

미향이가 꺼내주는 명함을 받아보니 거기엔 《경영경리》라고 찍혀있었다.

《어허, 경리로 승진했군그래.》

《아직은 명색뿐이죠.》

그래 맞다. 명색뿐이지. 경영경리이라 해놓곤 사장의 생활이나 보살피는 그런 《생활비서》 노릇이나 하겠지. 거친말로 표현한다면 사장의 잠자리 시중까지 들어주는 《작은댁》 노릇! 마음이 별로 씁스름해났다. 유치할 정도로 천진스럽고 솔직하던 미향이가 어쩌면 반년사이에 이렇게 완판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을가가 믿어지지 않는다. 녀자는 변신을 거듭한다지만 그 변신이 너무도 돌연적이고 빨랐다. 변신이라고 하기보다 다시 태여났다고 해야 적절할 것 같다. 녀자는 변신을 거듭한다는 말을 녀자는 태여나기를 거듭한다고 고쳐 말해야 할것같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눈을 내리깔고 커피를 홀짝이던 미향이가 고개를 들면서 침묵을 깼다.

《혹시 선생님께서 저를 〈현지처〉로 보는게 아니예요?》

내가 할 말을 미향이가 먼저 꺼내니 내 쪽이 오히려 당황해났다.

《뭘…》

《아까 우리 사장님을 보는 눈길이 다르던데요.》

녀자들의 눈치 하나만은 알아줘야 하겠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 부근엔 〈현지처〉 노릇을 하는 애들이 많아요. 그애들마저도 저를 자기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요.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얘요. 우린 결혼할 사이예요.》

미향은 잠시 말을 끊고 호 하고 한숨을 내쉰다. 나는 나대로 잠자코 담배를 피우면서 그 아래 말을 기다렸다. 미향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사장님은 제가 처음 입사한 회사 사장님이 소개해주었어요. 안해와 사별한지 5년이나 되는 고독한 분이신데 자식 둘은 미국에서 영주권을 가지고 따로 살고 있대요. 비록 나한테는 삼촌벌이 될 분이지만 전 그 분의 몸에서 묻어나는 고독하고도 우울한 분위기에 마음이 끌렸어요. 그 분도 내 몸에서 풍기는 슬픔에 가까운 그 우울함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요. 말하자면 동병상련이라 할가…》

그래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정심이고 사랑은 아니잖아. 이런 말이 있어. 동정 때문에 결혼한다는 것은 신화에 불구하다. 대부분은 안정감을 바라는 마음에서 또는 공허감을 채우자는 마음에서 그것이 아니면 그 어떤 실리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랑을 거드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결혼까지 가야할 사랑이 아니야. 지친 새는 아무데나 앉는다는 말이 있어. 삶에 지친 몸이라고 주저없이 아무데나 기댔다가는 다시 춰설수 없게 영영 지쳐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나의 입으로 나온 말은 엉뚱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는거니까. 그 선택이 좋은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오.》

《고마워요…》

이때 커피숍의 복무원아가씨가 미향한테로 다가왔다.

《손님 한분이 찾아요.》

《누군데?》

《지난번에 왔던 그 사람.》

이말에 미향의 얼굴엔 삽시에 짜증기가 내비쳤다. 그는 지갑에서 백원짜리 한 장을 꺼내 복무원에게 주며 말했다.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하세요. 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세요.》

복무원아가씨가 돈을 받아쥐고는 밖으로 나갔다. 바깥쪽을 보니 창밖에 키가 훤칠한 한 사내가 때국에 절은 양복을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누군데?》

《거지신세가 된 그런 사람이 있어요.》

우린 한참 더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못했구만. 보내준 번역료를 잘 받았소. 집사람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라더구만.》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훗일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련락주세요.》

전에는 말끝마다 도와달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도움받을 일이 있으면 련락하라고 한다. 나는 주객이 전도된다는 그 말을 실감했다.

그날 내가 미향이와 헤여져 공공뻐스 정류소로 가는데 등뒤에서 우리말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잠간만.》

뒤를 돌아보니 아까 커피숍밖에 서있던 사내였다. 아마 사내는 내 뒤를 따랐는 모양이다.

《절 불렀습니까?》

《네. 미안하지만 저하고 잠간 이야기를 나눌수 없겠습니까?》

《뉘신지?》

《미향의 남편되는 사람입니다.》

《네?!》

《어디 가서 잠간 앉으시지요.》

나는 그 사내를 따라 부근에 있는 간의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음식점엔 손님이 없었다. 사내가 절인 락화생에 북경 이과주 한병을 불렀다. 나는 잠자코 사내만 지켜봤다. 사내는  술이 오기 바쁘게 내 앞의 잔에 술을 부었다. 술 붓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자기 앞잔에다 술을 붓더니 마시자는 말도 없이 먼저 한잔 술을 단숨에 비웠다. 영락없는 알콜중독자였다.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쓱 훔치고는 사내는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보다싶이 알콜중독자입니다. 술 한잔 먹어야 마음이 진정되고 말도 제대로 나갑니다. 량해해 주십시오.》

방금 마신 술이 인차 사내얼굴에 오르고 있었다. 먼저 코등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내는 지절지절 말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난 미향이한테 할짓 못할짓 다 한 놈입니다. 내 얘기 미향이한테서 들으셨습니까?》

나는 그저 고개만 가로저어보였다.

《난 말입니다. 한때는 미향이의 백마왕자였습니다. 지금 이런 모습이지만 그땐 처녀들의 시선을 모을수 있는 츨츨한 모습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꼴이 됐습니다. 모두가 다 내 탓입니다.》

사내는 술 한잔을 벌컥 마셔버렸다.

《다 이 술과 계집 때문입니다. 거 있잖습니까 남자는 주색에 망한다는 말. 내가 바로 그렇게 망한 놈입니다…》

사내는 눈물까지 찔끔찔끔 짰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봐줄 꼴불견이 둘 있는데 하나는 녀자가 하품을 짝짝 해대는 꼴이고 다른 하나는 사내가 눈물을 찔찔 짜는 꼬락서니다.

《난 미향이 없인 못삽니다. 절 도와주십시오. 아까보니 미향이와 가까운 사이같은데 곁에서 말 좀 해주십시오. 내가 무릎꿇고 지난 잘못을 빌고 앞으로 미향이를 황후같이 모실테니까 다시 가정을 회복하라고 설복해 주십시오.》

《그건 당사자끼리 나눌 얘긴데…》

《내 말은 미향의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자식아 그 꼴 해가지고 천하에 좋다는 말 다 긁어모아 해도 들어줄 사람 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난 결심했습니다. 미향이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미향이와 함께 죽고 말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지지 않지요. 자 보십시오.》

사내는 털내의를 훌쩍 들어보였다. 바지 앞섶밑으로 쑥 찔러넣은 남포약 두 개가 보였다. 나는 벌어진 입을 한참이나 다물지 못했다. 사내가 털내의를 내리고는 또 술 한잔을 단숨에 굽냈다.

《이건 위협이나 공갈이 아닙니다. 이제 날 구제해 줄 사람은 미향뿐입니다. 지금도 난 미향의 신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술 살 돈도 미향이가 준겁니다.》

사내는 또 술 한잔을 털어넣었다. 그 꼴 보기싫고 또 말같지도 않은 말 듣기도 싫어 내가 한마디 했다.

《자네 자폭할 용기가 있나?》

《네?》

사내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자살할 용기가 있나 말이야!》

내가 술상을 내리쳤다. 술잔이 튀여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있나 말이야?》

《전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좋아.》

내가 라이타불을 켜들었다.

《털내의를 올리게.》

《네?》

《내가 그 남포약에 불을 달아 줄테니까.》

이말에 사내는 몸을 뒤로 젖히다가 걸상과 함께 벌렁 뒤로 나가 넘어졌다. 나는 라이타불을 켠채로 얼음판에 넘어진 황소처럼 눈만 꺼벅이고 있는 사내한테로 다가가 라이타불을 사내의 코앞에 대며 말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아예 이 자리에서 자폭하고 말아. 너 같은 인간은 언녕 죽은 목숨이야. 두 번 다시 죽겠다면 내가 불을 달아주지.》

사내는 후-하고 입김을 내불어 라이타불을 꺼버렸다.

《보아하니 죽을 용기는 없구만그래. 일어나!》

사내는 고스란히 일어나 앉았다.

《죽을 용기가 없으면 살 의욕이라도 가져. 조선족 사내라면 단 하루라도 사내답게 살아.》

말을 마치고 나는 음식점을 나왔다. 등뒤로 사내가 광기를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자식아 넌 대체 누구냐? 년놈들 다 죽이고 말겠다. 죽이고 말겠어…》

음식점에서 나오니 기동순찰차 한 대가 비상경보음을 울리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동순찰자는 간의음식점앞에 와서 급정거했다. 아마 간의음식점주인이 그 사내가 내보인 남포약을 보고 《110》에 신고했는 모양이다.

사내가 폭발물을 지녔으니 영락없이 잡혀갈 신세다.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130조에는 총기, 탄약, 또는 관제 도검 또는 폭발성, 가연성, 유독성, 부식성 물품을 비법적으로 휴대하고 공중장소 또는 공공교통수단에 들어가 공공안전에 위험을 미쳤고 그 정상이 엄중한 자는 3년 이하의 유기징역, 구역, 또는 관제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형법조항에 따르면 사내는 적어도 구역형은 면치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내의 몸에서 나온 것은 남포약이 아니라 남포약 겉종이로 씌운 나무토막이였다. 경찰도 너무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경찰이 나한테 물었다.

《이 사람과 어떻게 되는 사입니까?》

《그저 우연하게 만난 사람입니다.》

《함께 술을 마셨다더군요.》

《술은 저사람이 혼자 마셨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여길 들어오게 된겁니다.》

《이 사람 정신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알콜중독자는 분명한데…》

《심한 알콜중독자는 정신병환자에 속하지요.》

하긴 그랬다. 알콜중독도 정신질환에 속하니까.

《이런 사람한테는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데…》

경찰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 사내에게 일가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북경에 있는가고 물었다. 사내가 틀림없이 미향의 이름을 대려니 했는데 예상밖에도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래도 미향의 이름만은 팔고 싶지않았던 모양이다. 누굴 위협하고 공갈치려고 가짜 남포약을 가지고 다녔는가고 물으니 사내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녔다고 했다.

이 말에 경찰은 또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웃음거리가 된 사내를 같은 민족으로서 지켜본다는 것이 망신스러웠고 고역스러웠다. 같은 민족이라도 이런 구제불능 사내의 보호자로 나설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사내는 가짜 폭발물로 공중질서를 파괴한 죄로 구역당한 것이 아니라 보호자가 없는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실려갔다.

그래도 어쩐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내가 공중전화로 미향한테 자초지종을 알렸더니 미향은 칼로 자르듯이 말했다.

《그 사람은 절로 제 무덤을 파는 송장이 다 된 사람이얘요.》

혹독한 말이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서로 살을 섞으며 지냈던 사람인데…

문뜩 한 스님의 법음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녀자가 남자에게 원하는 것은…》

미향은 한국으로 시집갔다. 그가 시집가기전 나는 한국령사관앞에서 그를 만났다.

그날 나는 서울에서 열리게 되는 《문인대회》에 참가하려고 비자받으러 한국령사관을 찾아갔다. 령사관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으로 시집가려고 수속밟으러 온 녀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한 5백여명은 될 것 같았다. 나젊은 애숭이 처녀도 있었고 30대, 40대로 보이는 녀성들도 있었다. 시골티가 폭 배인 녀자도 있었고 아주 시체멋을 낸 녀자도 있었다. 대부분 결혼상대인 한국남자를 동반했다. 한국 남자들 거개 모두가 얼굴이 볕에 타서 검실검실하고 주름투성인 40대 시골 사람들이였다. 한국 남자들 대부분이 무표정한채로 서있는 반면에 녀자들의 표정은 밝았다. 껌을 짝짝 씹으며 뭔가 쉴새없이 지껄여대고 있는 30대 녀성들이 모여선 곳으로 나는 다가갔다. 대체 그들이 뭘 그렇게 신이나서 지껄여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야, 니건 어느게야?》

《저기 있잖니. 노란 잠바를 입은 사람. 저 머저리같은게 글쎄 어제 밤 내 방에 들어오겠다는걸 겨우 물리쳤다. 글쎄 아무리 위장 결혼이라도 한 번은 같이 자야 한다는게 아니겠니.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 서울 가서 보자고 윽윽 벼르드라.》

《서울 가면 넌 영낙없이 먹혔다.》

《먹히긴, 도착하자마자 내빼면 되지. 그런데 니꺼는 어느게야?》

《저기 서 있는 꺽다리다.》

《생긴것부터 싱겁구나.》

《그래도 아주 다정다감하더라. 애 아버지 아니면 한 번 살아도 괜찮을 남자더라.》

《네 남편 왔니?》

《꺽다리곁에 서있지 않니.》

《제 녀편네 내놓으면서 뭐가 저리 신나서 저러니?》

《둘이 형님 동생하는 처지다.》

《야, 넌 진짜 결혼하는거지.》

《그래.》

《어느게야?》

《저기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이다.》

《야 너무 늙었다. 완전히 할아버지구나.》

《그래도 제 나이는 45살이라더라.》

《볼바엔 제 구실도 못하겠구나.》

《말도 말라. 묵을 대로 묵은 총각이여서 그런지 매일 밤을 샐 지경이다.》

《너 복 만났구나.》

낄낄대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속이 울컥 뒤짚혀질 지경이였다. 기관총이라도 있으면 한배찜 내갈기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여기선 조선족 남자의 체면은 구겨진 감투신세인 것이 아니라 시궁창에 처박힌 신세였다.

처녀가 없어 장가를 못간다는 시골총각들의 딱한 사정을 나는 많이 들어왔다. 어떤 마을에서는 시집, 장가가는 처녀 총각이 없어 몇해째 잔치떡 구경도 못했다고 한다. 또 어떤 마을엔 처녀라곤 정신병에 걸린 처녀 한명밖에 없다고 했다. 도시와 한국에로 녀자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힘이 없는 무력하고도 무능한 조선족 남자들이 불쌍했다.

한국령사관앞에 펼쳐진 이 진풍경을 조선족 총각들이 보면 어떤 느낌을 받을가가 궁금스러워진다. 자책? 한탄? 아니면 격분? 살의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을 죽이고 싶다는 살의를 가지기에 앞서 자기가 죽고 싶을 정도로 자책부터 느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왔는지 미향이가 내앞에 나타났다. 미향이도 수속하러 왔다고 했다.

《한국 사람 그렇게 좋아?》

갑자기 내던지는 반감이 깔린 내 물음에 미향은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물음을 던지고나니 나도 하필이면 왜 그런 물음을 던졌는가고 후회했다. 미향이로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였다. 그런데 미향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좋아요.》

《뭐가?》

《다른건 몰라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 남자들보다 하루를 살아도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고 그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이 좋아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녀자가 남자에게 원하는 것은 돈이나 재물보다도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 강한 삶의 의욕이얘요. 나의 전 남편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어요. 내가 접촉면이 좁아서

그런진 모르지만 후에도 난 조선족 남자들속에서 내가 원하는걸 줄수 있는 그런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나는 조선족 남자로서의 비애를 느꼈다. 하는 일없이 놀음이나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 하늘에서 돈비가 내리려

니해서 헛된 공상에 젖어 사는 사람, 벼락맞은 소고기를 노리듯 공것만 탐내는 사람, 사내대장부라고 큰소리나 떵떵 치면서 남자구실이라곤 밤의 그 노릇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다른 민족한테는 비굴하다가도 동족은 악착스레 긁어대는 사람, 평생을 비굴하게 아첨이나 하면서 눈치밥이나 얻어먹는 사람, 지어 녀편네까지 위장결혼의 제물로 내놓는 사람, 이런 류형의 사내들이 녀자들의 눈에 비쳤다면 녀자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을가.

《한국에 시집가려고 하는 녀자들을 무턱대고 탓할게 아니얘요. 비록 각자가 목적이 다르고 혹은 수단이 비루하다 하더라도 한가지만은 명확해요. 그녀들은 지금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있으며 그 만족감을 얻으려고 탈출하는거얘요. 말하자면 만족감을 주지못하는 생활의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거얘요. 일종 욕구불만의 해소라고 생각해도 돼요.》

미향의 말에 최서해의 《탈출기》가 생각났다. 도시와 한국에로의 녀성들의 탈출, 그것은 말그대로 현대의 탈출기다. 미향은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나를 찾았다. 그는 돈 3만원을 나한테 맡기면서 정신료양원에 수용되여 있는 전 남편의 뒷바라지를 부탁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한 때는 사랑하며 함께 살아온 사람이니 그냥 모른척하고 갈수 없군요. 그 사람 월병을 좋아해요…》

미향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헤여지면서 미향은 또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미향이가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없이 미향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미향을 태운 택시가 떠나갔다. 차창을 내리고 나를 향해 손을 젓던 미향이가 소리높혀 말했다.

《선생님 사랑해요…》

그래 고맙다 미향아, 그래도 넌 나를 사랑스런 사람으로 봐주었으니…

《녀자는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빚어졌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하는 여유가 있어야 사랑을 베풀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누군가 했던 이 말로 미향에게 주는 축복을 대신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본 작품은 장백산 계열소설상 수상작(200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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