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되여 인민의 고통을 덜어주리라!” 이것은 훈춘현 하다문공사 중심대대 맨발의사 리춘홍이 1965년 5월에 현위생학교 대문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가슴에 뿌리 내린 굳은 신념이였다.
이 드팀없는 신념을 안고 3년동안 학습한 리춘홍은 마침내 태평대대 맨발의사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농촌의료사업의 보람찬 길에서 인민을 위해 전심전의로 복무하여 왔다.
학교에서 의학공부를 3년밖에 못한 리춘홍은 의료사업가운데서 수시로 곤난에 봉착하였다. 특히 의료수준이 낮은것이 제일 큰 난관이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부단히 실천속에서 인민의 건강을 위해 기어히 의료수준을 높이리라 마음 먹었다. 이렇게 마음 먹은 그는 의학서적을 꾸준히 읽으면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리춘홍이는 밤늦게까지 책을 보다가도 책상에 엎드린채 소르르 잠든적이 한두번만 아니였다. 그러다가도 그는 안해가 방문 여는 소리에 벌떡 깨여나서는 찬물에 세수를 하고는 또 의료서적을 뒤적이군 했다. 그는 밭머리에서 회의전 시간에도 식사시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의 이런 피타는 노력은 그의 의료수준으로 하여금 재빨리 제고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군중들도 날이 감에 따라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열밤중에 찾아가도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는 그를 “우리의 의사”라고 친절히 불러주었다.
1972년 11월 어느날 밤 열시경에 그는 신흥에 있는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십리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니는 위출혈이 와서 의식을 잃었던것이다. 그는 긴장히 서둘러치며 약 반시간가량 아버지에게 구급조치를 대고있는데 한대대에 있는 사원이 탐투성이 되여 집안에 들어섰다. 그 사원은 가쁜숨을 몰아쉬며 아이가 풍을 일구었는데 생명이 위급하다는것이였다. (아직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있는데 이 자리를 떠나면 아버지는 구급해 낼수 없지 않는가?)
리춘홍은 정신을 잃고 신음만 하는 아버지를 내려다 보면서 잠시 안타까운 심정에 사로잡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간후 그의 머리속에는 자기가정의 고통만 어찌 고통이라 하랴? 애가 풍을 일구었으면 부모들은 얼마나 놀라있겠는가? 인민의 의사로서 남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것이 마땅히 취해야할 태도라는 생각이 번개쳤다. 그는 뒤미처 그 무엇을 더 생각할 사이 없이 약가방을 둘러메고 그 사원과 함께 달려가 마침내 어린아이를 사경에서 구해내였다. 이때 손에 땀을 쥐고 어린애와 리춘홍의사의 일거일동을 지켜보던 그집 식솔들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리춘홍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치 못했다.
어린 아이를 구급하느라고 피로해진 리춘홍은 새벽 세시경에야 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그런데 또 한사람이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의 안해는 간밤에 세사람이나 데리러 왔댔다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또 지체없이 문을 차고 나서더니 아침 다섯시가 넘어서야 왕진을 마치고 간신히 발걸음을 떼며 집으로 돌아 왔다. 리춘홍의사의 지성어린 손길에 다른 환자들은 모두 별고없었으나 그의 아버지만은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리춘홍의사는 몇년간 태평대대 의사로 있다가 1973년 3월에 공사소재지인 중심대대에 옮겨 왔다.
1975년 3월이였다. 68세나는 윤금복로인이 뇌출혈이 와 2일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리춘홍은 윤로인 병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는 서적들도 뒤져보고 다른 의사들과 물어도 보면서 윤로인의 치료에 온갖 지성을 다 들이였다. 그런데 윤로인의 심장맥박이 점점 미약해지더니 그만 호흡이 중단되군 했다. 이렇게 되자 다른 의사들은 인젠 희망이 없다고 했고 윤로인네 가정에서도 관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리춘홍은 백분의 일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숨이 넘어가는 한순간까지라도 치료를 들이대는것이 의사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숨져가는 윤로인에게 혈압을 올리는 주사를 놓으려 했다. 그런데 피골이 상접한 윤로인의 팔에서는 혈액순환까지 정지되다보니 혈관을 찾을래야 찾을수 없었다. 리춘홍은 윤로인을 구해내고야 말리라는 불타는 마음과 굳은 신념을 지니고 마침내 혈관을 찾았다. 순간 리춘홍의 뜨거운 정성이 슴배인 주사약물이 윤로인의 혈관을 통하여 심장에 흘러 들었다. 그러자 약 2분동안 숨이 끊어졌던 윤로인은 긴숨을 한번 몰아쉬더니 심장이 약간씩 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리춘홍은 윤로인을 구급할수 있다는 신심을 다지고 옹군 엿새동안이나 윤로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치료를 다그쳤다. 그는 윤로인에게 주사를 놓아준다 초약을 대려준다 지어 대소변까지도 직접 받아내면서 온갖 정성을 다 넣었다. 그런 보람은 헛되지 않아 윤로인은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게 되였다. 윤로인이 소생하게 되자 그의 친척일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리의사 덕분에 로인을 구했다면서 그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렸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그후 3개월동안 리춘홍의사의 치료를 받아 걷게까지 된 윤로인은 구사일생이라고 하면서 리의사를 찾아 아들이면 이보다 더 끔찍하겠는가고 감격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윤로인은 “다 죽게된것을 살려주었는데 인제는 일터에서 죽어도 원이 없다.”라고 하며 이듬해 모철에는 벼모까지 뽑았다.
작년 가을 경로원의 박금복할머니가 공사병원에 입원하였었다. 박할머니는 딸집에 있으면서 리춘홍의사의 치료를 받을것을 소원하였다. 리춘홍의사가 박할머니를 맡아본 첫날 박할머니의 열이 불시에 41.4도까지 올라 헛소리도 하고 점차 의식을 잃었다. 환자에 대한 언제나 불같이 뜨거운 마음을 지닌 리춘홍의사는 14일동안이나 하루에도 몇축씩 찾아다니며 박할머니에게 알콜로 온몸을 닦아준다, 입안에 약도 떠넣어준다 하면서 무진애를 다 썼다. 그런 보람으로 나중에 박할머니의 열이 38도로 내려왔다.
리춘홍은 대대합작의료참에 경제가 충족하지 못한 정황하에서 한쌍되는 밭을 가꾸어 여러가지 약재를 심고 제약공장도 꾸려 많은 약들을 자체로 해결하였다. 하여 합작의료자금이 8백여원으로부터 지금은 7천 600원으로 늘어났다.
원래 중심대대는 전현에서 질병률이 제일 높은 대대의 하나였다. 리춘홍의사는 몇년래 예방을 위주로 하는 방침을 실행하면서 환경위생을 잘 틀어 쥐였다. 그는 친히 삽을 메고 변소도 치고 사원들과 함께 재료도 메여다 변소도 짓고 쓰레기를 끌어다 고온발효거름을 만들었으며 생산대 위생원을 데리고 산에 가서 할미꽃뿌리, 고삼 등 약초를 캐여다 달이여 집집에 나누어도 주고 전간에도 가져다 줌으로써 리질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이렇게 예방위주의 방침과 환경위생을 잘 틀어쥔데서 리질, 간염 등 여러가지 전염성 발병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리질이 제일 심하였던 1974년에는 질병발병률이 1천 2백여인차였는데 작년에는 72인차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이 리춘홍의사가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여온 범상치 않는 로정에는 깊은 밤에 바지를 돌려 입고 환자를 구하러간 우스운 이야기며 환자를 간호하느라 사흘동안이나 굶어 길가에 쓰러진 놀라운 일이며 환자집의 나무도 패주고 불도 때준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루다 헤아릴수 없다.
이처럼 인민에 대하여 한없는 사랑을 지니고 충성스럽게 사업해온 리춘홍의사는 1977년부터 전 주 맨발의사 선진개인으로 표창받았으며 올해는 길림성 춘기애국위생선진생산자로 표양받았으며 몇년래 련속 훈춘현 우수당원, 로동모범으로 당선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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