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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어지간해선 멸망할 수 없었다
2024년 10월 13일 09시 38분  조회:161  추천:0  작성자: 고구려
외적의 위협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과거 중국의 역사는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시기인 5세기 이전에는 주로 중원의 서북쪽에 있는 이민족들이 중국을 위협했다. 흉노족·선비족 등의 위협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제2시기인 5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위협의 방향이 분산되어, 서북 및 동북 양쪽에서 중원에 대한 위협이 가해졌다. 서북쪽의 유연·돌궐·몽골, 동북쪽의 고구려·발해·거란·여진의 위협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제3시기인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동북쪽이 중원을 위협하는 핵심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동북쪽에 있던 만주족은 중원을 장악하여 청나라를 지배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마지막인 제4시기에는 주로 해상으로부터 위협이 가해졌다. 아편전쟁(1840년) 이후의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개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5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중원의 동북쪽에 있는 민족들이 점차 성장하던 시기였다. 제2시기와 제3시기에 중원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장악한 동북쪽 민족으로는 요나라(거란족), 금나라(여진족), 청나라(만주족)가 있었다. 몽골족도 아시아 동북쪽의 민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에 관해서는 좀 더 고찰이 필요하리라 본다. 

위와 같이, 5세기 이후로 아시아 동북쪽은 점차 상승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마치 오늘날 세계문화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듯이, 5세기 이후의 아시아에서는 힘의 중심이 서서히 동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추세를 고려해 볼 때, 중원 동북쪽의 민족들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동북쪽의 전반적인 상승세에 더해 고구려는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612년부터 4차에 걸친 국제대전에서 세계제국 수나라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2차에 걸친 침공을 모두 격퇴한 것으로부터 그 국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런 고구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에게 멸망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최근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도 ‘고구려의 지친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전쟁으로 지치지 않은 민족은 없었다. 누가 더 많이 지쳤는가를 기준으로 하면, 당나라도 고구려 못지않게 지쳐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오랜 전쟁으로 지쳤기 때문에”라고 설명하는 논리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그 오랜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한 쪽은 고구려이었다. 그리고 매번 패배한 쪽은 중국이었다. 그런데 오랜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한 쪽은 지쳐서 멸망하고, 매번 패배한 쪽이 지치지 않고 승리했다고 하는 설명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서 멸망했다고 한다면, 고구려가 아니라 중국이 멸망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장기적인 전쟁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럼, 고구려 멸망의 첫째 원인으로 무엇을 꼽아야 할까?

우리는 그 단서를 당 태종의 유조(遺詔, 군주의 유언)와 그 이후의 상황 변화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고 한쪽 눈까지 실명한 것으로 알려진 당 태종은 죽을 때에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자치통감> 같은 중국 역사서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이 유조는 이후 천년이 넘도록 중국 황제들에게 두고두고 기억되었다. 그 후 중국 내부에서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야심’이 부각될 때마다 자체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억누르기 위해 제시되곤 하던 것이 바로 당 태종의 유조였다. 

그런데 역대 황제들에 의해서 아주 잘 지켜진 이 유조은 정작 당 태종의 아들 고종에 의해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당 고종은 한족 황제 중에서 이 유조를 지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유조를 어기고 대(對)고구려 전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전근대 시대의 중국에서 선(先)황제의 유조는 곧 법률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황제일지라도 객관적인 명분 없이 그러한 유조를 어기기는 힘들었다. 

그럼, 당 고종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외전쟁 같은 중대 사안에서는 황제의 사심이 관료들의 공론에 의해 묻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나라 정부에서 당 태종의 유조를 어긴 데에는 무언가 객관적인 명분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 그 객관적 명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라의 협공 약속이었다. 고구려 대 중국의 대결에서는 당 태종의 말처럼 승리를 기대하기 힘들지만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의 협공을 이끌어내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당 고종은 아버지의 철석 같은 유조를 어기고 고구려 침공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종전에는 고구려 대 중국의 전쟁에서 신라·백제는 대체로 관망의 자세를 취했었다. 중국을 지지한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 경우에도 정작 군사적 협공만큼은 꺼려한 두 나라였다. 다시 말해, 김춘추·김유신처럼 노골적으로 중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 사람들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종래에 고구려와의 단독 대결에서 한번도 고구려를 꺾은 적이 없는 중국은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의 협공에 힘입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본인은 당나라였지만, 그것은 신라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추세나 고구려의 국력으로 볼 때에 고구려는 ‘웬만해선 멸망할 수 없는 나라’였지만, 신라의 협공이라는 의외의 변수가 국면을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의 협공이라는 중대한 상황 변화가 있었기에 당 고종은 태종의 유조를 어기고 고구려 침공에 나서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5세기 이후 아시아 동북쪽의 상승세를 타고 급성장하던 고구려는 신라에게 꼬리가 잡혀 결국 중원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그 지역에 있던 거란족·여진족이 결국 중원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은 당시의 동북쪽이 기본적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자체 기운이 상승함과 동시에 반미감정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고, 또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미국과 정면승부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상당히 모호하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한미동맹으로 북한을 붕괴시키자’는 수구세력의 논리가 일정한 힘을 갖고 있다. 과연, 미국은 당나라가 되어야 하고, 한국은 신라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일부 사람들은 고구려와 신라가 상호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두 나라가 같은 민족이었음을 부정하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오늘날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남과 북도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일부 사람들은 ‘민족’이라는 단어가 근대에 와서 출현한 점을 들어 고구려와 신라가 동류의식을 가졌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우리’라는 의식은 존재했고 그 ‘우리’라는 표현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라는 의식이 없었다면, 지난 수천 년간 한민족의 민중들이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친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우리가 수구세력의 주장처럼 미국과 합세하여 북한 붕괴에 일조를 가한다면, 북한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라 미국의 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훗날의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21세기판 ‘짝퉁 신라’라며 두고두고 손가락질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미국에 정면 승부를 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동족인 북한과 외세인 미국의 대결’에서 동족을 해하고 외세를 편드는 ‘반인륜’ 만큼은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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