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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삼국시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쳤더라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것입니다.》
삼국시기 고구려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통치배들은 고구려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칠 대신 내부싸움을 자주 벌려놓음으로써 우리 나라의 전반적발전을 저애하였다.
7세기 중엽 당나라와 신라통치배들의 결탁
신라통치배들은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을 가로막고 저들의 지배권을 넓히려는 야망밑에 당나라와 결탁(야합)하는 반역의 길로 나갔다. 신라통치배들의 이러한 기도는 7세기 40년대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640년대 전반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643년(선덕녀왕 12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것을 요청하였으며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침공때에는 그를 도와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640년대 후반기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결탁하는 매국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648년(진덕녀왕 2년) 신라 김춘추[金春秋(603-661년) -후의 태종무렬왕]가 당나라를 방문하여 범죄적결탁을 밀약한것은 그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고구려침략에서 련속 패배를 당한 당나라는 이 무렵 종래와는 달리 신라와 본격적인 야합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당나라를 방문한 김춘추는 당나라와 매국적인 흥정판을 벌려놓고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이북의 광활한 고구려령토는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의 야심에는 또 다른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라와 결탁하여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마저 정복하자는것이였다.
당나라는 신라통치배들과 밀약을 하였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이킬수 없는 참패를 당한 까닭에 대규모적인 침략전쟁에 선뜻 뛰여들수 없었다. 그리하여 밀약후에도 10여년동안이나 기회를 엿보며 침략전쟁준비를 하였다.
한편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군을 하루빨리 끌어들일 기도밑에 관료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는가 하면 당나라의 년호를 쓰는 등 사대주의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며 659년에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원정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신라통치배들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당나라와 결탁하고 당나라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씻을수 없는 엄중한 죄악적후과를 남기였다.
라당련합군의 침공을 반대한 백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당나라침략자들은 7세기 60년대에 이르러 신라의 청병을 구실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에 들어섰다.
당시 당나라침략자들은 먼저 라당련합으로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그길로 신라를 정복하고 제일 강대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먹어보자는것이였다. 만일 신라를 당장 정복할수 없는 경우 련합을 유지하여 고구려를 먼저 정복하고 다음에 신라를 먹을것을 계획하고있었다.
당나라와 신라는 660년에 먼저 백제를 대규모적인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660년 6월 소정방이 거느린 13만명의 당나라침략군은 1 900여척의 배로 덕물고를 거쳐 금강하구로 기여들었고 김유신이 거느린 5만명의 신라군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백제의 형편은 국력이 심히 약화되고 혼란이 조성되여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것은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속에서 부화방탕한 생활이 계속되고 간신이 성행하여 충신들이 모해를 당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안일해이되여있던 백제의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은 대응책을 시급히 세울 대신 당나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신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하면서 시간을 보내였으며 이 사이에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국내깊이까지 기여들수 있었다.
660년 7월 신라군은 별로 저항을 받음이 없이 천년의 요새 탄현을 넘어 황산벌(충청남도 론산군 련산동쪽 5리지점)로 밀려들었으며 당나라침략군은 금강을 거슬러올랐다. 이리하여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백제의 인민들과 군인들은 때늦게나마 결사적으로 싸웠다. 계백
한편 백제군은 금강을 거슬러오는 당나라침략군 13만명이 소정방의 지휘밑에 기여들자 2차례의 완강한 방어전을 벌리여 큰 타격을 주었다.
적들이 사비성을 포위공격하게 되자 백제의 의자왕과 대신들은 제 한목숨만을 건지려고 수도를 버리고 웅천(공주)으로 도망쳤다. 사비성은 7월 13일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의자왕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7월 18일 적에게 항복하고말았다. 이리하여 백제봉건왕조는 멸망하였다.
백제강점후 라당련합군은 고구려침공에 집중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660년 말~662년에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연개소문장군의 지휘밑에 적들의 침략을 짓부셔버리였다. 특히 고구려군은 662년 1월 당나라의 소정방, 방효태가 거느린 침략군과의 사수(합장강)격전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1개 군단을 모조리 소멸하였다. 적장 소정방은 어찌나 혼쌀이 났던지 산속에 숨었다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고구려내부의 정세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급변하였다.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자 당나라는 그 기회에 고구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고 기도하였으며 적들의 간교한 책동에 의하여 연개소문의 세 아들사이에는 권력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대막리지자리를 차지하고 군사지휘권을 잡고있던 연남생은 권력싸움에서 밀리우게 되자 넓은 지역과 많은 군대를 끌고 당나라에 투항하는 반역행위를 감행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자기관하 12개성의 많은 주민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구려통치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정치적혼란, 투항변절은 강력한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뒤흔들어놓았으며 나라의 방위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라당련합군은 668년 고구려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50만의 당나라침략군과 20만의 신라군은 륙지와 바다, 북쪽과 남쪽에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당나라침략군의 주력은 반역자 연남생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공격하였고 남쪽에서는 류인궤가 거느린 당나라침략군과 신라군이 평양성으로 북상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성은 668년 8월 수십만대군의 완전포위에 들게 되였다.
이 엄혹한 형편에서도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치렬한 공방전은 한달이상이나 계속되였다. 그러나 668년 9월 고구려군의 지휘를 맡았던 신성이 변절투항하였고 보장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투항하였다. 결국 근 1 000년간 동방대강국으로 위용을 떨치던 고구려는 무너지게 되였다.
고구려말기의 력사는 나라의 통수체제, 방위체제가 마비되고 국내의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아무리 강대한 국력을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는것을 교훈으로 남기였다. 고구려가 무너진것은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집권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연개소문의 아들의 변절투항으로 강대한 자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었기때문이며 라당련합군의 공격때문이였다.
결국 신라통치자들의 반역적인 외세의존행위로 하여 강대했던 고구려는 무너지고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삼국통일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고구려가 무너지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우두머리(안동도호)로 들여앉히였다. 그리고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두어 동방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인민들은 강점자들을 자기 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669~676년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삼국인민들의 단합된 투쟁
고구려가 무너진 후 당나라침략자들은 신라마저 집어삼킬 흉계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정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리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이 외세에게 먹히울수 있는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였다.
이 엄혹한 시기에 세나라인민들은 힘을 합쳐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일떠섰다. 이 투쟁은 본질에 있어서 외적에게 빼앗긴 자기의 령토와 겨레를 되찾기 위한 정의의 싸움이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고구려, 백제땅을 독차지하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조건에서 당나라침략군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에도 신라통치배들은 대동강이남지역까지만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세나라인민들의 투쟁은 669년경부터 시작되여 온 나라 각지에서 벌어졌다.
북방에서는 고구려항전군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당나라강점군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670년 3월 태대형 고연무가 지휘한 1만의 고구려항전군은 설오유가 지휘하는 1만의 신라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건너 옥골로 진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안기였으며 672년 8월에는 백수성에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수천명의 목을 잘라버리였다.
고구려인민들의 투쟁은 압록강이남지역에서도 치렬하게 벌어졌다.
668년 말부터 각지에서 당나라강점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을 힘있게 벌리고있던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에 설치되여있던 《안동도호부》를 669년경에 료동지방의 신성(중국 료녕성 무순부근)으로 쫓아버렸다.
한편 고구려의 수림성사람인 대형 검모잠은 항전부대를 조직하여 국모성을 중심으로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으며 남으로 진격하면서 당나라의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조선서해 사야도(소야도)에 피신해있던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한성(장수산일대)에 데려다놓고 《고구려국》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남방에서는 백제인민들이 670년 7월 신라군과 함께 백제땅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63개의 성을 탈환하였으며 672년 초에는 백제의 거의 전지역을 회복하였다.
669년 2월에 당나라침략군의 우두머리의 하나였던 리적이 자기 왕에게 보낸 보고에는 압록강이북지역에서 저들이 장악한 성은 14개뿐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것은 고구려군민들이 처음부터 완강한 투쟁을 벌려 강점자들에게 치명적타격을 주었으며 압록강이북의 많은 성들에 적들이 미치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당나라통치배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내몰아 675년경부터 새로운 공세를 기도하였다. 이때 세나라인민들은 과감한 투쟁을 벌려 적의 공세를 걸음마다 분쇄, 격파하였다.
신라군은 675년 9월 천성(례성강어구)에 침입한 당나라침략군 1 400명을 소탕하고 적선 40여척, 군마 1 000필을 로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9월 말에는 매초성(경기도 양주)에 둥지를 틀고있던 20만의 당나라침략군을 공격하여 수만명을 살상포로하고 군마 3만여필과 수많은 군수물자들을 로획하는 전과를 이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지금의 강원도 덕원, 문천일대로 진출하였다.
675년 10월 이후에도 크고작은 18차례의 전투를 진행하여 6 000여명의 적을 소탕하고 수백마리의 군마를 로획하였다.
676년 11월 신라군은 기벌포(금강하구)에서 적장 설인귀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과 22차에 걸치는 격전끝에 4 000여명을 소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적들은 압록강이남으로 더는 기여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처럼 세나라인민들은 669~676년간에 100여차의 전투를 벌려 당나라강점자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데서 세나라인민들이 이룩한 큰 성과였다.
신라통치배들의 매국배족행위로 말미암아 세나라 전 강토가 당나라침략자들에게 강점당할 위기를 겪게 되였지만 애국적군민들은 희생적인 투쟁으로 적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몰아내고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라통치배들은 인민들의 투쟁에 편승하여 백제의 전지역과 고구려의 대동강이남지역을 차지한 다음 투쟁대오에서 떨어져나감으로써 또 하나의 큰 죄악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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