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년간 교육사업을 해오면서 많은 변화를 지켜보고 있지만 만족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만물이 자연의 변화속에서 날로 진보를 하면서 새로운 탈바꿈을 기약하고 있지만 우리 애들은 이상하게 점점 퇴보하고 있다는 가슴아픈 현실을 감출수 없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어떤 핑게를 만들면서 다소 안위의 주추돌을 만들어보느라 모지름같은것을 엮어보지만 점점 조이는 현실의 어떤 구석앞에서 부득불 안타까움의 항아리를 깨뜨릴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몇년전만하여도 그처럼 활달하고 배움에 게으름을 모르고 열심히 매일을 열어가는 애들의 장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흥분에 젖기도 하였지만 요즘의 현실은 참으로 캄캄하기만하다. 스러져가는 한그루의 나무앞에서 현실의 탈을 벗길일이 아득하다. 여직 담임교원 사업을 해오면서 늘 반성의 울타리를 열심히 가꾸느라 하지만 어수선하게 자라나는 잡초의 존재를 다시금 절감하면서 잡초가 잡초가 아님을 절실히 느껴본다. 잡초가 없는 자연을 우리는 쉬이 자연이라고 부르기에는 자격이 없는줄로 알면서도 모든 잡초를 모조리 뽑으려는 그런 아둔한 행위가 오늘에 또 다른 어떤 존재를 만들어왔는지 모른다. 잡초의 존재가 무성해야만 자연의 풍요로움도 느끼듯이 이젠 잡초에 그만 미련을 두고 하나하나 쪼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 애들 왜서 요지경인지 가슴을 흔든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사색의 물결을 따라 노를 젓느라니 맞서는 물길이 두렵기만 하다.
우선 요즘 우리 애들은 죽은듯이 살아가고 있다. 구경 무엇이 우리 애들을 요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을가? 그런 존재앞에서 흡족해하는 어떤 얼굴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간에 발언을 하라면 몇을 제외한 기타 애들은 죽어가는 소리로 말마저 제대로 못하고 서성거리는 모습을 너무 쉽게 볼수있는것도 참으로 그저 스쳐지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무섭게 풍랑을 만든다. 수업시간에는 그처럼 죽은듯이 가만히 있다가도 휴식시간이 되면 정신없이 움직이는 모습에도 뭐가 문제로 다가서고 있는것이 아닐가? 왜서 애들은 자신을 그처럼 무섭게 단속해야 했을가? 오직 말도 없이 얌전하게 앉아서 선생님의 말을 듣기만 하면 최고로 생각하는 애들의 그런 심리는 또 무엇이 만들어 놓은것일가? 가끔 질문을 하면 감히 손도 못들고 두려움에 망설이는 그런 존재는 또한 어떻게 생긴걸가? 발언을 한다해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런 심리는 또 어디서 밀려온것일가? 파아란 마음이 이렇게 늙어가는 리유는 또한 어떻게 된 판결일가? 정말 안타깝다! 그리고 걱정스럽고 또 두렵구 나중에는 무섭고…
이 모든 현상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구경 무엇이 이렇게 무섭게 애들을 좌우지 하고 있는것일가? 아무리 사색의 돌다리를 부셔봐도 대답은 그냥 하나로 어설프게 다가선다. 그들의 심리에 어떤 문제가 생긴것이다. 배움에 두렵고 생활에 두렵고 교류에 두렵고 움직임에 두렵고 믿음에 두렵고 웃음에 랭정한것이다. 그럼 애들이 이렇게 자신을 만들고 싶어서 초래된 후과일가? 절대로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무서운 후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것일가?
모든 교육자가 스스로 사색의 힘이 필요한 급선무이다.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보다 량심적인 사색이 가장 바람직한 답안을 물고 일어설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들여다본다면 어느 정도 우리는 답안을 뽑아낼수 있을것이다. 가슴을 치면서 이런 질문을 한번쯤 해보는것이 너무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가?
“나는 진정 애들이 마음을 열수 있는 그런 교원으로 다가섰는가? 애들이 얼마나 나를 믿고 있는지? 애들에게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그런 형상을 만들었는가? 나는 구경 어디로 가고 있는것인가에 대하여 질문을 해본적이 있는가? 애들을 질책하기전에 먼저 스스로의 질문을 해보았는가? 구경 애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애들이 도대체 나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나를 두려워하는가?...”
이런 질문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들수 있었는가? 애들의 가슴을 찌르는 어떤 못된 말들을 한적은 없는가? 나는 구경 애들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서고 있는가?
스스로 떨리는 가슴을 눌러야 한다. 교육은 어떤 영예에 매달리는 순간부터 가치를 잃게 된다. 더우기 교육은 어떤 가리움을 동원하여 허영에 눌리워서는 절대 안되며 그런 허줄한 동원으로 얻는 그런 영예에는 비린내가 풍김을 스스로 절감하여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자랑이 아니며 더우기 드러냄이 아니다. 평범한 움직임속에 큰 뜻을 키워가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 아닐가 싶다. 무서운 교원의 얼굴은 교육의 함정이다. 왕왕 애들이 무서워하는 교원을 높이 평가하는 헐망한 울타리도 없는것은 아니다. 애들이 무서워하는 교원은 절대로 좋은 교원이 아님을 명기해야 한다. 진정 좋은 교원은 자신의 어떤 형상을 수립시키지 않는다.
다음 우리 애들은 기를 잃고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제앞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교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 된다는 어설픈 지팽이를 잡아쥐고 아주 힘들게 매일을 열어가고 있다. 애들과 서로 교류를 할라치면 정말 힘이 든다. 우리 애들은 자신을 너무 감추려고 애를 쓴다. 가히 자신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잘 할수 있으련만 그 어떤 두려움의 영향으로 기를 못펴고 그냥 굽은 등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럼 이런 현상은 또 어떻게 생겨난것일가? 자신의 주장을 모조리 파묻어 버리고 그저 조심스레 행동하는 어떤 움직임을 만들기에 엄청 바빠한다. 시간에도 허리를 펴지 못하고 할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선생님의 눈치만 살피면서 자신을 두려웁게 만들고 있다. 감히 자신의 주관도 드러내지 못하고 선생님의 말이면 무조건 따르는 그런 모습도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용기를 완전히 잃어 버렸고 될수록이면 자신의 존재를 최소한 약화시키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을 너무도 쉽게 볼수 있어서 안타까움은 짙어만 간다. 그저 몇몇 애들을 제외한 기타 애들은 자신에 대하여 너무 신심이 없으며 지어 어떤 애들은 선생님이 질문을 시작하면 두려워서 벌벌 떨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임에 확실하건만 늘 부정하려고 애를 쓰고 그런 부정에 만족하려는 모지름을 만들고 있는것이 요즘 우리 애들이다. 당당하고 활발한 기운은 어디론가 다 도망가고 이상한 자신들을 만들기에 요란스레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견해나 장점같은것을 스스로 자랑할만도 하건만 그 어떤 두려움에 눌리워 기를 못펴고 늘 자신을 밟고 있는것이 요즘 우리 애들이다. 그럼 애들이 이렇게 해야하는 리유는 구경 무엇이며 왜서 이렇게 애들이 변하고 있는것일가? 보기마저 안타깝고 걱정스럽기만하다. 몸은 날로 커가지만 마음은 늘 야위여가는 현실이다. 선생님의 간단한 어떤 질책에도 무슨 큰 설음이라도 당한듯이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을 지켜보느라면 마음만 모질게 아플 뿐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서러운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어떤 장애로 쌓이고 쌓여서 이처럼 큰 설음을 만든것이다. 마음의 구석에 드리운 어떤 설음을 토해낼 그런 그릇이 보이지 않고 간혹 그런 그릇이 보일지라도 마음에 어떤 장애가 생기면서 길이 막히게 된것이다. 그 길은 구경 누가 열어줘야 할것인가? 우리들의 사색이 너무도 필요하다. 교원은 생각하는 사람이여야 한다. 언제든 늘 생각하는 그런 존재로 다가서야만 진정 애들에게 어떤 길을 새롭게 열어주게 될것이다.
이제 우리 교원들이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은 정말 아득하기만 하다. 어느 길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가에 대하여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영원한 주제이다. 고정된 뿌리가 없이 움직일줄 알고 생각할줄아는 어떤 나무로 다가서야 하지 않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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