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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사랑, 내리사랑
리봉우
1986년 9월 4일 내가 연변대학교에 등록하는 날 갑지기 어머니를 물리치고 아버지가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당시는 지금 신입생처럼 큰 짐이 없이 등교하는 것이 아니였다. 적어도 이부자리, 그리고 궤짝정도는 가지고 가야하니 가능하면 부모나 형님누나들이 동행하였다. 아버지의 동행을 크게 반기지 않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아버지를 크게 좋아아지 않았다. 온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아버지로하여 나는 동네에서뿐만 아니라 대대마을에서도(현재의 촌)<<리곰보아들>>로 통했고 또 그런 아버지를 새로운 동학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었다. 더우기 우리집은 가난하기로 소문나 있어 어려서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아버지의 형상보다 다소 원망의 대상로 은근히 자리잡고 있은것 같다. 그런 반발심이라할까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때면 나는 무작정 달려들었고 얻어맞더라도 손에 쥐이는데로 뿌리고 휘들렀다. 그때면 아버지는 꼭 나의 궁둥이나 뒤통수를 치면서 <<야, 임마, 우리집은 동네분들의 신세가 얼마나 많은데 이러냐?>하며 훈계하였다. 사실 <<신세>>를 말하면 아버지(당연히 우리집)는 동네 신세나 정부의 신세를 많이 졌다. 1962년 갓 결혼한 아버지는 저수지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언제에서 추락하였는데 한쪽 신장을 떼내는 대수술을 하였다. 물론 집체일을 하다가 생긴 사고여서 대부분 수술비를 생산대에서 대거나 병원측에서 면제를 해주었는데 아버지는 <<새 생명을 준>>생산대와 정부에 감격해하였다. 그래서 생산대의 궂은 일에는 늘 앞장에섰다. 한번은 석회암 동굴이 무너질 위험성이 있어서 누구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일을 하다가 끝내 동굴이 무너져 4시간만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지만 심한 심장병과 허리병을 얻었다. 생산대 일뿐만아니라 동네집의 좋은일 궂은일도 아버지는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술한잔 얻어 잡수시면 만사 땡이고 또 취하시면 소리없이 울군 했다. 그런 아버지는 정작 제집일만은 뒤전이었다. 늘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면서 어머니나 나와 어린 동생들에게 이일 저일 시키면서 들볶았다. 시골에서 앞장서야할 가장이 장기환자로 앞장서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잘살리 만무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자신의 몸이 아팠으면 그랬고 세상에 자기 가정이나 처자식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가 어디있겟냐마는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특히 고아나 다름없는 아버지는 결혼해서 7년만에 첫 자식인 나를 낳으니 얼마나 귀중했으며 나의 궁둥이나 뒤통수를 때릴때는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을까? 그리고 만취해서 우실때는 술주정이 아니라 처자식들에게 미안한 눈물었다는 것을 알수가 없었다. 1983년 현성 고중에 입학한뒤부터 아버지는 나를 대하기가 좀 어려워하거나 미안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호도거리 책임제를 금방 실시한때라 나는 집안의 중요한 일군이어서 거의 매주 마다 집에와서 일손을 도왔고 겨울방학이면 일년 땔나무를 거의 나의 도움으로 장만하니 자신의 아들이라도 늘 미안해하는 눈길이었다. 특히 잘 못먹어서 그런지 키도 크지 않고 또 어려서부터 캄캄한 밤이면 한치 앞도 보지못하는 야맹증이 있는 나를 바라는 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달랐다. 그때로부터 집안에서 내 목소리가 높아졌고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때 아버지는 꼭 나와 의논하였다.
고중때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천지>>잡지사(지금의 연변문학)에서 꾸린 1기문학반에 참가하였으나 글 한편도 발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2기 학습반은 좀 싹수가 있는 문학도를 선발하여 꾸렸는데 가장 유혹적인 조건은 학원생들은 적어도 <<개간지>>라는 잡지에 발표해준다는 것이었다. 다만 학비가 처음보다 비싸 200원인가 300원인가 하였다. 참가하고 싶었지만 학비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집안의 밑천이었던 암송아지를 400원에 팔고 내손에 학비를 지워주셨다. <<아버지 정신이 있습니까? 그 송아지가 어떤 송아진데 아무 말씀이 없이 파신단말입니까?>>고 언성을 높였으나 나는 내심 처음으로 아버지한데 감격해했다. 하여 고중 3학년때 제2기 학습반에 참가했고 <<개간지>>에 <<촘명한 소년>>이라는 3000여자의 민간이야기가 발표되였고 원고료 10원인가 15원을 받은 것은 1986년 겨울이었다. 부모님들은 내가 대학도 붙었고 글도 발표해서 원고료도 받았다고 동네방제 자랑하셨지만 지금 랭정히 생각해보면 어린 자식의 무모한 욕심때문에 집안의 밑천이었던 암송아지와 공개문학지도 아닌 <<개간지>>에 나의 이름석자를 바꾼것이었다.
어쨋든 저녁까지 어머니와 함께 가기로 했던것이 아침에 아버지가 나서서 아버지와 함께 연변대학교에 등록을 하고 나와 아버지는 공원근처 <<흠흠식당>>(鑫鑫饭店)이란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정심을 먹었다. 정말로 부자가 처음으로 <<서울나들이>>를 한셈이니 술한잔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술을 즐기신 아버지한데 연길에 왔으니 기어코 생맥주를 마셔야한다면서 생맥주를 권했다. 아버지가 한번도 생맥주 맛을 보지 못했으니 마셔보시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흰술을 마시면 취할까봐 근심이었고 또 취하면 내손을 잡고 울기라도 하면 망신스럽다는 나의 계산이었다. 아버지는 <<응, 그래, 촌놈이 한번 맛보자>> 하면서 순순히 응하셨다. 식사중 나개 소피보러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급히 마시고 컵을 치우는 것이였다. 물론 아버지 맥주컵에는 맥주가 잇었다. 아버지는 나쁜일을 하다 선생님께 들킨 소학생처럼 게면쩍게 웃으면서<맥주가 말 오줌냄새가 나서… 촌놈은 그래도 배갈이 좋아>고 말씀하였다. 아버지는 마시고 싶은 흰술을 아들이 맥주를 권하니깐 어쩔수 없이 마신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소피보러 간 틈을 타서 흰술 석냥을 달라고 해서 단모금에 굽을 냈다. 식사가 끝난후 아버지는 나보고 공원에가서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날씨가 흐려 단방 비가 내릴것 같았고 또 지체되면 아버지가 당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가봐 언제 어머니와 함께 와서 찍자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게 좋겠다고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표정이였다. 사실 식당에서 공원대문까지 200메터도 되지 않았고 또 말이 쉽지 시골에서 부모님들이 한번 연길행차을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난 내상각대로 아무때나 기회가 있게지 하면서 날씨를 핑계로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이듬해 6월6일 오전 벼모내기를 끝내고 잠간 웃방에서 쉬겠다던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영영 눈을 감으셨는데 당시 49세였다. 처자들에게 늘 미안해하시던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서만이라도 처자들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시려고 그랬는지 어디 아프단 말한미디,유언 한미디 없이 지어 부엌에서 점심밥 짓고있는 어머니한데마저 <여보, 나 먼저가우>라는 말한마디 없이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내가 고중 2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키우면서 점점 느끼는것은 참새가 대붕이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읽을수가 없다는 점이다. 어버이 살아계실때 섬기길란 다하여라/지나간 뒤면 애닲다 어찌할까?/ 평생에 다시못할 일이 이뿐인가 노라라는 정철의 시조가 늘 나의 귀를 따갑게 한다.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대학교 1학년 후학기니 내가 번돈으로 술한병도 사드릴수 없었지만 대학등록하러 왔을 때 맥주를 권하지 않고 흰술을 드시게 했더라면, 사진한장 찍자고 했을 때 사진이라도 찍었더라면 지금 처럼 가슴아프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들처럼 당당하게 <야, 난 흰술을 먹겠다. 아버지가 사진 한장 찍자는데 뭘 그리 말이 맣아?>하고 목소리라도 높였으면 적어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한장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처럼 잘 먹이고 입히지 못하고 커가는 아들에게 늘 미안해 하는 아버지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들의 말을 따랐다.
김충현(1857)은 자식의 부끄러움을 텅빈 산에 어버이를 장사지내고/ 일년에 단한번 성묘를 오네/부끄러워라 효자의 마음/무덤앞의 나무만보다도 못하나니라고 하였다. 당나라때 시인 맹교(孟郊)는 유자음(游子吟)에서 <한치 풀잎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어찌 봄날 해볕같은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할수 있다 말하랴.>라고 읊기도 했다.
부모님이 떠나신후 애통해 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알뜰이 공경하고 잘 모실 일이다. 특히 부모님의 무심코 던진 말씀이라도 귀등으로 흘리거나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만큼 애석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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