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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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올리사랑, 내리사랑 댓글:  조회:1795  추천:22  2011-01-31
올리사랑, 내리사랑   리봉우       1986년 9월 4일 내가 연변대학교에 등록하는 날 갑지기 어머니를 물리치고 아버지가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당시는 지금 신입생처럼 큰 짐이 없이 등교하는 것이 아니였다. 적어도 이부자리, 그리고 궤짝정도는 가지고 가야하니 가능하면 부모나 형님누나들이 동행하였다. 아버지의 동행을 크게 반기지 않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아버지를 크게 좋아아지 않았다. 온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아버지로하여 나는 동네에서뿐만 아니라 대대마을에서도(현재의 촌)<<리곰보아들>>로 통했고 또 그런 아버지를 새로운 동학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었다. 더우기 우리집은 가난하기로 소문나 있어 어려서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아버지의 형상보다 다소 원망의 대상로 은근히 자리잡고 있은것 같다. 그런 반발심이라할까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때면 나는 무작정 달려들었고 얻어맞더라도 손에 쥐이는데로 뿌리고 휘들렀다. 그때면 아버지는 꼭 나의 궁둥이나 뒤통수를 치면서 <<야, 임마, 우리집은 동네분들의 신세가 얼마나 많은데 이러냐?>하며 훈계하였다. 사실 <<신세>>를 말하면 아버지(당연히 우리집)는 동네 신세나 정부의 신세를 많이 졌다. 1962년 갓 결혼한 아버지는 저수지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언제에서 추락하였는데 한쪽 신장을 떼내는 대수술을 하였다. 물론 집체일을 하다가 생긴 사고여서 대부분 수술비를 생산대에서 대거나 병원측에서 면제를 해주었는데 아버지는 <<새 생명을 준>>생산대와 정부에 감격해하였다. 그래서 생산대의 궂은 일에는 늘 앞장에섰다. 한번은 석회암 동굴이 무너질 위험성이 있어서 누구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일을 하다가 끝내 동굴이 무너져 4시간만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지만 심한 심장병과 허리병을 얻었다. 생산대 일뿐만아니라 동네집의 좋은일 궂은일도 아버지는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술한잔 얻어 잡수시면 만사 땡이고 또 취하시면 소리없이 울군 했다. 그런 아버지는 정작 제집일만은 뒤전이었다. 늘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면서 어머니나 나와 어린 동생들에게 이일 저일 시키면서 들볶았다. 시골에서 앞장서야할 가장이 장기환자로 앞장서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잘살리 만무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자신의 몸이 아팠으면 그랬고 세상에 자기 가정이나 처자식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가 어디있겟냐마는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특히 고아나 다름없는 아버지는 결혼해서 7년만에 첫 자식인 나를 낳으니 얼마나 귀중했으며 나의 궁둥이나 뒤통수를 때릴때는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을까? 그리고 만취해서 우실때는 술주정이 아니라 처자식들에게 미안한 눈물었다는 것을 알수가 없었다. 1983년 현성 고중에 입학한뒤부터 아버지는 나를 대하기가 좀 어려워하거나 미안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호도거리 책임제를 금방 실시한때라 나는 집안의 중요한 일군이어서 거의 매주 마다 집에와서 일손을 도왔고 겨울방학이면 일년 땔나무를 거의 나의 도움으로 장만하니 자신의 아들이라도 늘 미안해하는 눈길이었다. 특히 잘 못먹어서 그런지 키도 크지 않고 또 어려서부터 캄캄한 밤이면 한치 앞도 보지못하는 야맹증이 있는 나를 바라는 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달랐다. 그때로부터 집안에서 내 목소리가 높아졌고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때 아버지는 꼭 나와 의논하였다. 고중때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천지>>잡지사(지금의 연변문학)에서 꾸린 1기문학반에 참가하였으나 글 한편도 발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2기 학습반은 좀 싹수가 있는 문학도를 선발하여 꾸렸는데 가장 유혹적인 조건은 학원생들은 적어도 <<개간지>>라는 잡지에 발표해준다는 것이었다. 다만 학비가 처음보다 비싸 200원인가 300원인가 하였다. 참가하고 싶었지만 학비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집안의 밑천이었던 암송아지를 400원에 팔고 내손에 학비를 지워주셨다. <<아버지 정신이 있습니까? 그 송아지가 어떤 송아진데 아무 말씀이 없이 파신단말입니까?>>고 언성을 높였으나 나는 내심 처음으로 아버지한데 감격해했다. 하여 고중 3학년때 제2기 학습반에 참가했고 <<개간지>>에 <<촘명한 소년>>이라는 3000여자의 민간이야기가 발표되였고 원고료 10원인가 15원을 받은 것은 1986년 겨울이었다. 부모님들은 내가 대학도 붙었고 글도 발표해서 원고료도 받았다고 동네방제 자랑하셨지만 지금 랭정히 생각해보면  어린 자식의 무모한 욕심때문에 집안의 밑천이었던 암송아지와 공개문학지도 아닌 <<개간지>>에 나의 이름석자를 바꾼것이었다. 어쨋든 저녁까지 어머니와 함께 가기로 했던것이 아침에 아버지가 나서서 아버지와 함께 연변대학교에 등록을 하고 나와 아버지는 공원근처 <<흠흠식당>>(鑫鑫饭店)이란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정심을 먹었다. 정말로 부자가 처음으로 <<서울나들이>>를 한셈이니 술한잔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술을 즐기신 아버지한데 연길에 왔으니 기어코 생맥주를 마셔야한다면서 생맥주를 권했다. 아버지가 한번도 생맥주 맛을 보지 못했으니 마셔보시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흰술을 마시면 취할까봐 근심이었고 또 취하면 내손을 잡고 울기라도 하면 망신스럽다는 나의 계산이었다. 아버지는 <<응, 그래, 촌놈이 한번 맛보자>> 하면서 순순히 응하셨다. 식사중 나개 소피보러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급히 마시고 컵을 치우는 것이였다. 물론 아버지 맥주컵에는 맥주가 잇었다. 아버지는 나쁜일을 하다 선생님께 들킨 소학생처럼 게면쩍게 웃으면서<맥주가 말 오줌냄새가 나서… 촌놈은 그래도 배갈이 좋아>고 말씀하였다. 아버지는 마시고 싶은 흰술을 아들이 맥주를 권하니깐 어쩔수 없이 마신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소피보러 간 틈을 타서 흰술 석냥을 달라고 해서 단모금에 굽을 냈다. 식사가 끝난후 아버지는 나보고 공원에가서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날씨가 흐려 단방 비가 내릴것 같았고 또 지체되면 아버지가 당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가봐 언제 어머니와 함께 와서 찍자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게 좋겠다고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표정이였다. 사실 식당에서 공원대문까지 200메터도 되지 않았고 또 말이 쉽지 시골에서 부모님들이 한번 연길행차을 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난 내상각대로 아무때나 기회가 있게지 하면서 날씨를 핑계로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이듬해 6월6일 오전 벼모내기를 끝내고 잠간 웃방에서 쉬겠다던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영영 눈을 감으셨는데 당시 49세였다. 처자들에게 늘 미안해하시던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서만이라도 처자들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시려고 그랬는지 어디 아프단 말한미디,유언 한미디 없이 지어 부엌에서 점심밥 짓고있는 어머니한데마저 <여보, 나 먼저가우>라는 말한마디 없이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내가 고중 2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키우면서 점점 느끼는것은 참새가 대붕이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읽을수가 없다는 점이다. 어버이 살아계실때 섬기길란 다하여라/지나간 뒤면 애닲다 어찌할까?/ 평생에 다시못할 일이 이뿐인가 노라라는 정철의 시조가 늘 나의 귀를 따갑게 한다.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대학교 1학년 후학기니 내가 번돈으로 술한병도 사드릴수 없었지만 대학등록하러 왔을 때 맥주를 권하지 않고 흰술을 드시게 했더라면, 사진한장 찍자고 했을 때 사진이라도 찍었더라면 지금 처럼 가슴아프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들처럼 당당하게 <야, 난 흰술을 먹겠다. 아버지가 사진 한장 찍자는데 뭘 그리 말이 맣아?>하고 목소리라도 높였으면 적어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한장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처럼 잘 먹이고 입히지 못하고 커가는 아들에게 늘 미안해 하는 아버지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들의 말을 따랐다. 김충현(1857)은 자식의 부끄러움을 텅빈 산에 어버이를 장사지내고/ 일년에 단한번 성묘를 오네/부끄러워라 효자의 마음/무덤앞의 나무만보다도 못하나니라고 하였다. 당나라때 시인 맹교(孟郊)는 유자음(游子吟)에서 <한치 풀잎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어찌 봄날 해볕같은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할수 있다 말하랴.>라고 읊기도 했다. 부모님이 떠나신후 애통해 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알뜰이 공경하고 잘 모실 일이다. 특히 부모님의 무심코 던진 말씀이라도 귀등으로 흘리거나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만큼 애석한 일이 없다.
13    "나는 아니야!" 댓글:  조회:2280  추천:63  2009-08-20
"나는 아니야!"리봉우언젠가 <입장 차이>라는 유모아를 본 기억이 난다. 대충 정리하면 이러하다. 남의 흰머리는 조기 로화의 탓, 내 흰 머리는 지적 년륜의 탓이고, 남의 남편이 설거지하면 공처가, 내남편이 설거지하면 애처가요,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여 살아야하고 딸은 남편을 휘여잡고 살아야 하며, 사위가 처가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내 아들이 처가에 자주 가는 것은 주대없는 일이다. 또 남의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버릇없이 키운 탓이고 자기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 주장이 뚜렷하기 때문이요, 남이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리기적인 사고방식이고, 내가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좀더 추가한다면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몰면 안전운전요,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다라는 이야기도 되겠다. 이런 입장차이는 사실 자기 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를바가 아니지만 자각하지 못한채 <나는 아니야!>라고 부인하거나 혹은 억지를 부리는 사고 방식이다. 자신이 조롱하는 부정적인 형태를 일삼으면서도 이를 자인하고 고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려고 하는데 이를테면 옆사람이 보기에 도박 중독, 게임중독, 인터넷 중독, 쇼핑중독, 알콜 중독이 있음에도 그것들을 즐기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들이다. 상기 행위들을 다소 학식있는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의학상에서는 <행동중독>이라고 하고 전파학에서는 <제3자효과>라는 용어와 비슷하다. <행동중독>이란 말은 쉽게 리해가 되지만 <제3자효과>는 다소 생소한 말이라 그 요점은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은 안된다.>라는 인식적 착오를 말한다, 이를테면 내가 포르노 보는 것은 괜찮치만 다른 사람은 보면 나쁜 영향이 있기기 때문에 보면 안될것이요, 나는 술을 마셔도 괜찮으나 다른 사람은 자주 마시면 중독이 되기 때문에 자제해야 한다는 인식적 오류를 말하는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행동중독이나 인식적 오류들은 일반사람에게도 자주 나타나지만  일부 지도자들이나 공직자들이나 혹은 지성인들에게도 종종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다른 사람들의 오만이나 독선을 큰 소리로 비판하면서도 그에 못지않는 자신의 오만과 독선은 그 사실부터 인정하지 않거나 정당화하는 자도자들, 나만큼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인재고 다른 사람은 용재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 법과 원칙을 어기거나 혹은 도덕적 불감증에 걸렸으면서도 관례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은 타락한 공직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좀 더 따금한 말을 한다면 조선족 학교 학생수들이 줄어드는 현상이 우리 교육의 문제라고 웨치면서 자기 자제들아나 손자 손녀들만은 기어코 한족학교로 보내는 지성인들이라 할수가 있겠다. 일반인이든, 지도자이든, 공직자이든, 지성인이든 모두가 상대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고 <난 아니야!>라는 병이 있으면 빨리 고치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다.
12    하이힐 등산과 음주 운전 댓글:  조회:2063  추천:67  2009-07-23
모아산 산림공원은 연길의 명소이다. 이것은 내가 금년 초에 귀국하여 처음으로 모아산 등산을 하면서 느낀 생각이다. 돌과 세멘트로 잘 정비된 소나무 숲속길, 그리고 나무계단으로 된 주봉 등산로는 가파롭지가 않아 남녀로소가 즐기면서 등산할수가 있어 정말로 인문정신이 깃든 등산로라할수가 있다. 등산이란 여러가지 류형이 있겟지만 주로 높은 산이나 험악한 산을 정복하는 산악대들과 같은 전문등산과 건강을 위하고 여가를 즐기면서 주변의 야산을 오르는 일반 등산으로 나늘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모아산 등산은 분명히 일반 등산이다. 그래서인지 모아산을 찾는 사람들은 등산과 놀이를 함께 즐기고 있는것 같았다. 등산을 하면서 약수터에서 물 한통을 떠오는 사람, 온 가족이 함께 등산하는 사람, 애완견을 데리고 등산하는 사람… 그래도 나한데 가장 인상깊은 등산객은 하이힐을 신고 지어는 스커트 까지 입은 등산객들이다. 세멘트 등산길은 괜찮으나 나무계단으로 된 등산길을 걸을 때는 뾰족 신굽이 나무판 사이에 자주 끼워 애를 먹는데, 그래서 조심조심 걸거나 아니면 아예 신발을 벗어 들고 스타킹바람으로 걷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나의 등산 취미는 한국에가서 1년반동안 강의를 하면서 생긴것이다. 내가 강의하던 배재대학교는 대전 도솔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어 짬만 있으면 도솔산으로 등산을 하는데 등산로는 그리 가파롭지도 않고 또 밤등산을 위해 태양능가로등도 설치하여 주변 주민들도 근교에 있는 우명한 계룡산보다 도솔산 등산 코스를 많이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그들은 동네산이라도 등산을 할때 꼭 등산바지, 등산화, 모자, 지팡이, 선글라스 그리고 일부 상비약과 물이 들어 있는 배낭같은 것들을 갖추고 등산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등산을 할때는 등산을 하는 기본을 갖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하이힐 등산객을 보았을때 감히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기본이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격식을 따져야 할때 꼭 격식을 따져야하겠지만 <오이를 꺼꾸로 먹어도 제 멋>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나들이 옷차림으로 등산을 하던 하이힐을 신고 스커트를 입고 등산하던 관계가 없이 마음이 편한 선에서 끝나는 일들은 자신이 즐거우면 그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은 적어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혐오감을 주지않고 스스로 즐기는 등산이기 때문이다. 오이를 바로 먹던 꺼꾸로 먹던 먹어서 배를 불리거나 영양가를 섭취하는데는 아무런 차이가 없듯이 자신이 행동이 일부 상식을 벗어난다고 해서 남한데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인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비난의 대상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하지만 일상 생활속에서 나의 행동이 남한데 피해를 준다거나 혐오감을 준다면 조금 생각해봐야한다. 이를테면 좀 케케묵은 이야기지만 아직도 공공장소나 뻐스안에서 큰소리고 통화를 한다거나 툭트인 대중음식점에서 큰소리 웃고 떠든다거나, 변기를 사용하고 물을 내리지 않는 다거나 대중목욕탕에서 몸을 싰지 않고 큰 탕속으로 쏙 들어간다거나…. 등 행위야 말로 <기본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요즘 생활수준의 제고로 <마이카(My-car)시대>로 진입하면서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이 많아졋지만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주차한다거나 또 과속운전이나 음주운전현상이 아주 비일비재라 이것이야 말로 신종 <기본이 없는 행위>이라고 할수가 있다. 특히 과속운전이나 음주운전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그리고 타인, 지어 사회까지 엄청난 피해를 줄수 있기때문에 이는 기본과 상식문제를 뛰어넘어서 인격문제이다. 연길의 모아산 하이힐 등산이나 넘어지면 코 닿을데도 차를 끌고 출근하는 것은 풍경이지만 운전은 인격이고 과속운전과 음주운전은 구겨진 인격이다.
11    <<아내의 유혹>>은 유혹이 되지 말아야 한다. 댓글:  조회:2050  추천:74  2009-04-24
  요즘 SBS방송국의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때문에 한국의 직장인들은 칼퇴근을 한다고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 가족 시청시간대에 정신환자 같은 악녀들의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물고 뜯는 진흙탕 란투전에 불구하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 아니다. 적어도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남녀로소 할것없이 욕을 하면서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데 혹시 시간이 맞지 않아 못 보면 인터넷으로 보고야 직성이 플리는듯하다 지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마저 은재, 애리, 민소희 정도의 이름쯤은 제 이모나 고모이름처럼 익숙히 알고 있다.모여 앉으면 대화가 이 드라마내용인데 시청을 못한 사람은 시체 말로 <왕따>당하는 기분이들기 때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시청을 하게 될까라는 원인 분석은 제쳐 놓고 왜 이런 나쁜?내용을 방영할까가 더욱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포함한 텔레비죤프로그램들은 사실 문화적인 상품이다. 문화적인 상품도 상픔이기때문에 경제론리가 작동하는데 그게 바로 작은 투자로 더욱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돈을 벌려면 상품이 많이 팔려야 하고 그것이 텔레비죤프로그램에서는 시청률이라는 용어로 요약이 되며 시청률이 높아야 그 프로그램에 붙는 광고가 늘어나고 광고로가 높아져 많은 돈을 벌수가 있다. 때문에 <<불륜 묘사와 함께 과도한 고성과 욕설, 폭력 등 내용이 가족 시청 시간대에 방송됐다.>>는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방영이 되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재벌과 서민으로 나누어 엇갈린 불륜, 배신 그리고 고부 및 사돈간의 갈등, 복수와 음도 등을 다룬 내용들을 자주 접하는데 (물론 질 좋은 드라마들도 많다.)바로 이런 드라마들은 무엇보다 시청률이 보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드라마와 같은 텔레비죤프로그램들은 물질적으로 소비되는 상품이면서도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대중의 심리와 욕망을 담은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소비대상이다. 이런 문화적 소비(텔레비죤 시청같은 것)는 상당부분 무의식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며 그런 까닭에 텔레비죤시청은 시청자의 취향 행동양식에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친다. 텔레비존은 인간들과 유아기부터 무덤까지 동반하고 있으며 󰡒신화의 이야기꾼󰡓이며, 산업적 대중문화의 기반이며 모든 것을 포함한 사회화도구이다. <가족의 화로>와 같은 텔레비전은 이제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한국텔레비죤 프로그램 접근이 보편화 되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유혹>에만 훌쩍 넘어만 가는 <바보 시청자>가 되지 말고 옥석을 가릴 줄 아는 혜안과 한창 감수성을 키워가는 청소년들 시청에 가이드도 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비판자가 되어야한다. 사족이지만 비상은 약이 될수도 있고 독이 될수도 있듯이 언제나 유익한 것만 있을 수가 없다.
10    전파환경변화와 우리문화 댓글:  조회:1511  추천:57  2009-04-24
  문화를 배우고 공유하는 것은 전파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와 문화교류란 전달자와 수용자가 의미를 공유하고 소통함으로써 상호이해가 발생하여 의미관계가 맺어지는 하나의 전파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현재 세부적으로 보면 문화교류는 기술전파매체와 교통매체에 얹혀서 매개되고 이동되며 혹은 교류되는 문화확산, 즉 신문, 잡지, 라지오방송, 텔레비죤방송 영화 등 전통적인 매스컴과 함께 문자, 소리, 영상정보가 복제된 동영상정보를 매개하고 이동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시대가 열렸다. 따라서 전통적이고 직접적인 문화접촉과 교류를 현대적이고 간접적인 문화흐름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특히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인터넷통신 등 뉴미디어 전파의 보편화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이 매체 접근이 가능하여 문화의 확산정도의 폭과 속도가 넓고 빠르다고 할 수가 있다. 즉 전천후 정보매체가 디지털기술에 의해 탄생되면서 문화는 지식, 이데올로기, 뉴스보도와 함께 음악, 춤, 문학, 연극, 예술, 영화를 담은 문화콘텐츠라는 이름으로 동일 콘텐츠가 여러 개의 다른 미디어를 통해 구현되고 소비된다. 그리고 하나의 내용물이 신문, 공중파방송, 극장, 컴퓨터, 위성, 케이블방송, 비디오방, DVD극장 등에서 소비되고 유통될 수가 있기 때문에 미디어의 힘은 더욱 커진다   아시다시피 우리민족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대체로 우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둘째는 조선족의 집거지형성과 교육, 셋째는 조선족의 언론출판과 같은 민족문화의 발전, 마지막으로 조선족 집거지와 한반도의 지리적 근접성과 그에 따르는 비교적 용이한 문화적 교류로 들 수가 있다. 특히 한국사회와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조선족사회 문화를 론할때 중국사회 문화라는 전반적인 문화배경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문화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조선족은 문화유전을 통해 형성된 동족의식, 동일문화의식으로 인해 한반도 문화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 문화를 타 민족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세계적인 문화지도에는 문화적 다국(多局)과 다극(多極)의 형국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도 하나의 문화적인 극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류라는 문화흐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수천년 동안 대륙문화가 한반도에도 전파되었고 그것이 다시금 일본으로 흘러갔다. 또 서구물질문명과 기술문화는 영국 미국 일본 등의 해양문화라는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물밀듯 한반도에로 밀려들어 왔다 그런데 반만년 역사 이래 새천년 시대를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한국문화가 한류란 이름을 달고 일본, 미국 등 해양 쪽으로 그리고 중국 몽골, 베트남 등 대륙방향 쪽으로 흐르고 있다. 유사 이래 한국이 처음으로 문화저수지위상을 갖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긍정하던 부정하던 한류라는 문화조류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을 휩쓰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1996년 한국의 텔레비전드라마가 중국에 수출되고 2년 뒤 가요 쪽으로 확대되면서 중국에서 한국대중문화열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2000년 이후에는 드라마, 영화, 가요 등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김치, 고추장, 라면, 불고기 등 음식재품, 가전제품, 의류품, 화장품, 지어는 한국어 교육과 학습의 열풍이 나타났는데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런 모든 현상을 한류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당연히 드라마를 포함한 텔레비전프로그램이 그 중심에 있다.  여기서 한류문화형성의 주류들이 중점을 두고 절대적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와 필름, DVD, 음반 등 영상물 등 물질적 문화는 한국적인 사고, 생각, 느낌, 사상 등 비가시적인 가치차원의 문화를 전파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특히 현재에 와서는 모국과의 문화적 교류는 조선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문화를 발전시킴에 있어서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한국의 대중문화의 이상이다. 현재 조선족의 인구류동은 도시화 중심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서 여러 가지 진통을 격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전파환경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모국과의 직간접 문화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어 모국적인 것, 중국적인 것 그리고 자생적인 것이 잘 조화되는 독특한 조선족문화를 만들어내는 기회이기도 하다.
9    절약과 저축 그리고 인생 댓글:  조회:1698  추천:66  2009-04-22
요즘 누구도 예상 못했던 경제위기로 어렵다고들 아우성은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랑비하고 절약을 외면하는 풍조는 여전히 팽배하다. 어려운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개 절약을 모른다(우리 주변에 실제로 어려워서 절약이나 저축을 할수가 없는 사람도 많지만)는 점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쓰고보자는 식이고 이 정도의 돈을 절약하고 저축한들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수가 있게느냐라는식의 심리가 작용하기때문에 늘 어렵게 살게 된다. 그리고 부자가 절약을 하고 아끼는 것을 보고 린색하다고 말하고 돈없는 사람이 돈을 쓰면 욕심이 없고 통이 큰 사람이라고 오히려 칭찬을 하는 사고 방식이 시정이 되지 않는 한 어려움이 항상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것이다. 또 어렵게 살다보면 남에게 돈을 빌리게 되는데(물론 어쩔수 없이 돈을 빌리는 경우도 있다.)남에게 돈을 자주 빌리는 사람도 대개 절약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돈을 빌리기 위해 궁색한 변명을 해야 하고 고개를 숙여야 하고 돈을 빌리다보면 빚이 늘어나기 마련이고 나중에 행동마저 제한을 받게 되어 향후 인격형성에도 큰 걸림돌로 된다. 정말로 무기없이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의 꼴이요, <<고개숙인 당신>>이 되는것이다.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이나 억만장자가 된 대부호들의 분명한 공통점은 절약과 저축에 철저했다는 사실이다. 절약한다는것과 린색하다는것을 혼돈하는 경우가 많은데 절약은 아무리 위인이고 부자라도 자신에게 쓰는 비용을 랑비함이 없이 아껴서 호화와 사치를 하지 않는 것이고 린색하다는 것은 재산을 지나치게 탐욕해서 재산 그 자체에만 집착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랑비하고 호화와 사치를 일삼으면서도 당연히 베풀어야 할곳에 베풀지 않고 써야 할곳에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절약은 미덕이요 린색은 악덕이라 할수 있다. 절약은 생활의 기본이다. 절약을 모든 생활에 영향을 주게 된다. 절약을 할줄 아는 사람은 생활 자체에 절제와 질서가 있으며 언제 닥칠지 모를 우환에 대비할수가있다. 반면에 절약을 모르는 사람은 생활에 절제가 없고 질서가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재산이 바닥나고 어려움을 맞게된다. 절약과 저축정신은 작은 것부터 성실하게 해나가야 한다. 밑굽 빠진 물통에 두레박으로 물을 아무리 부지런히 퍼담아도 물통을 채울수가 없다. 그러나 밑굽이 새는 아니, 밑굽이 빠진 드레박이라도 물을 부지런히 퍼담으면 밑굽이 있는 물통에 물을 채울수가 있다. 비록 밑굽이 없는 드레박이지만 거기에 묻어 있는 물방울이 한 방울 두방울씩 떨어져서 물통속에 고이기때문이다. 이와 같이 저축의 원리는 적은 것이라도 성실하고 꾸준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적은 돈이지만 꾸준히 성실하게 저축하면 돈은 모이게 되어 있다. 눈덩이를 굴리면 점점 큰 눈덩이가 되지만 그러나 그 눈덩이의 핵이 되는 처음 덩어리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한다. 저축은 비단 돈에 한정된것은 아니다. 지식, 체력, 지어 인격 역시 저축을 통해 이루진다. 청소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후날 지식을 위한 저축이요 체력도 젊었을 때 그 관리를 잘 해두어야 이후에 건강이 보장된다. 덕도 마찬가지이다.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거듭 저축해 나갈때 후날 그 덕이 인격을 형성해준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절약과 저축정신이야말로 <<인생의 유비무환>>이라고 한다.
8    돈과 인격 댓글:  조회:2024  추천:63  2009-04-22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고가 많이는 금전문제 때문에 생기고 있는것이 사회적 현실이다. 각종 매스컴을 통해 심심치 않게 돈 때문에 생기는 사고와 사건들을 접하게 되는데 인간의 욕심이 끊어지지 않는 한 아마도 돈으로 인한 사고나 사건은 계속 될것이다. 인간은 동물가운데서 소유욕이 가장 강한 동물인데 그 중에서도 돈에 대한 욕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만이 갖고 있는 옥구이다. 개도 않먹는 돈이지만 그 돈때문에 개보다도 못하는 끔찍한 일들을 비일비재로 서슴없이 저질는 것이 인간이다.  어떤 위인은 돈이 갖는 속성을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위험한 폭발물>>과도 같다고 했다. 돈을 다루는데서 특별히 주의를 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폭발을 할지 모르는 것이 돈인데 돈은 용도에 따라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유익한 윤활제가 될 수가 있는가 하면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보내는 파괴물로도 될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돈이란 위대한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대받을 만큼 못난 것도 아니다. 인생은 돈 때문에 기뻐도 하고 돈 때문에 슬퍼도한다. 돈에는 살아있는 돈이 있는가 하면 생명이 없는 죽은 돈도 있다. 그것은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돈의 주인은 성실하게 돈을 모으고 써야 하는 곳에 값있게 쓸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고 인간성이 풍요로운 사람이다. 돈을 모으는 방법, 돈을 쓰는 방법, 그리고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솔직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돈의 사용을 인격의 거울로 비유하기도 한다. 돈은 두가지 극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고 또 하나는 인간을 추잡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를 테면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위해 쓰는 돈, 이웃과 지역 사회를 위해서 공헌하는 돈, 나라와 인류를 위해 공헌하는 돈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반면에 쓸 곳에 쓰지 않는 린색한 돈, 호화와 사치에만 방탕하게 쓰는 돈은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모름지기 인격을 갖춘 사람이 값있게 쓸 수 있는 돈까지 가지고 있다면 더욱 돋보일 것이다. 돈이 돌고 돌아 돈이라고 하지만 돈은 남이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벌어야한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노하우(편법이나 부당한 방법을 제외한)가 필요되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근면과 절약과 인내심이다. 이 세가지만 실천한다면 누구나 돈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돈은 모으되 땀흘려 성실히 모아야하고 돈을 많이 갖고 있되 린색하지 말아야 하며 돈앞에서는 한사코 추잡한 인간이 되지 말아야한다.                                           
7    신용과 게임법칙지키기 (리봉우7) 댓글:  조회:1813  추천:133  2007-04-16
신용과 게임법칙지키기  리봉우 1. 택시에 관한 이야기  연길시가 택시가 많다는 것은 중앙테레비죤방송에서까지 보도 될 지경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인민페 5원이면 대부분 시내구역에서 택시를 탈수있다. 택시가 금방 나왔을 때는 택시 한번 타는 것은 일종의 묘한 향수를 하는 것 같았다. 달리는 택시를 향해 손을 한번 휙저으며 <택시>하고 외치고 택시가 서기 바쁘게 문을 열고 다음 힘껏 쾅닫으면서 목에 힘을 주어 목적지를 대면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택시는 정말로 명실공히 대중교통수단으로 되었다. 아침 등교시간이나 혹은 퇴교시간에 소학생들도 4-5명 모여서 택시를 탄다.(이것 역시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풍경이란다.) 지어 장보러 온 할머니들도 택시를 타는데 그것도 급하지 않는 경우에는 택시를 좀더 좋은 걸로 골라 탄다고 한다. 하긴 같은 값을 치르고 지저분한 차를 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여튼 우리 연길시민들의 일상에서 택시를 빼놓으면 정말로 꽃잎 없는 꽃과 같다.  그런데 1년전인가 2년전인가 8월의 어느 날 연길시민들에게 정말로 택시가 없었다. 아니 있어도 탈수가 없었다. 연길택시가 승차거부를 좀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파업을 한 것이다. 그날 필자는 연변예술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려고 집을 나섯는데 좀처럼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웬일일가? 택시파업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그냥 의문부호를 달면서 겨우 택시를 잡고 무작정 강의가 있으니 예술학원으로 가자고 하였다. 택시에 앉아서 오늘 택시기사들이 파업을 하는데 당신이 강의를 하러 가니 태워다 주지만 10원은 내야 한다고 하였다. 조금 언짢은 마음은 있었지만 강의시간도 다가오고 또 파업원인도 궁금하여 그대로 갔다. 기사아저씨는 여러모로 파업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데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존권을 찾는다는 것이다. 동정은 가지만 당신들의 파업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것은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시민들이 불편을 겪어야 효과가 있다는 명답이 나온다. 이튿날 아침 나는 강의로 하여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하고 어찌 되었는가고 문의 하니 어제 비행기시간이나 기차시간을 놓친사람들이 많다고 하면서 은근히 자기들의 힘을 과시했다. 그러면서 만약 택시세금이 없다면 연길시재정수입도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도 하여주었다. 해결은 유관부분에서 제때에 잘 처리하여 어떤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놀라운 것은 시민들을 볼모로 자기의 리익을 챙기는데 대한 무감각과 그리고 또 시민들의 일상관심사를 유관부문에서 슬쩍 내부로 처리한다라는 것이다. 위기관리에서 신용과 공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만약 택시기사들의 파업한다는 정보가 공개되면 많은 시민들은 불편을 경감시킬수가 있다. 마치 내일 비가옵니다라는 일기예보를 안다면 우산을 준비하듯이 정보를 안다는 것은 자기의 행동을 통제할 수가 잇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속한 해결과 정책적 조정 등을 시민들에게 공개를 한다면 오히려 질타보다 박수를 받을 수가 있고 더욱 신뢰를 받을 수가 있다. 덮어 감추려는 것은 오히려 의혹만 불러 일으킬 수가 있으며 위기해결의 효과는 더욱 적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현재 연길시의 택시들은 잘 글러가고 있다. 료금미터기를 쓰지도 않고 고객과 기사들 지간에 어떤 관습에 의해 돈을 주고 받으면서 말이다.   2. 다방에 관한 이야기  연길에는 다방도 참 많다. 택시가 많아서 중앙텔리비죤방송에 보도는 되지 않았지만 다방이 많아서 좋으면 좋았지 나쁜 점은 없는 것 같다. 이전에 택시를 타는 것처럼 다방에 다는 것도 역시 고급 문화소비로 여겨왔다. 그윽한 향기의 커피한잔 시켜 놓거나 차 한잔을 시켜놓고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 명상에 잠기기거나 혹은 친구와 다방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운치는 역시 별미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철학가나 문학가 예술인들은 다방에서 영감을 찾았고 지어 민주주의 모태는 커피하우스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언제나 갈수 있는 만남의 장소는 변함이 없지만 다방에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경우보다 음주문화의 명소로 꼽히고 있다. 하여 다방에서는 양주, 맥주, 배갈과 함께 마른 명태, 땅콩 같은 가벼운 안주뿐만 아니라 지어 꿩탕, 토끼탕, 볶음요리. 찌개등 중형안주마저 메뉴에 오른다. 조금 곁가지를 치면 중, 소학교, 대학교 주변에는 식품상점이라는 간판을 걸고 버젓이 음식을 해서 파는 일들도 비일비재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연길의 다방에는 차보다 술이 더 많다. 양 대가리 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인데 조금 문명하게 말을 한다면 게임법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연길에 다방뿐만 아니라 안마방. 로인활동실…게임규칙을 지키는 곳이 얼마나 있을가?  3. 간판에 관한 이야기 연길내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민족적 특색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은 음식문화, 주택문화, 복식문화, 언어문화를 들수가 있다. 굳이 하나를 더 든다면 간판문화를 들 수가 있다. 그것은 모든 간판이 조선문을 사용하여야하며 기타 문자와 병용할 때는 조선문이 우선, 적어도 조선문과 기타문자의 크기는 같거나 혹은 기타문자가 조선문보다 커서는 아니된다는 골자의 자치주의 조례라는 보호벽이 있기 때문이다. 외국관광객들, 특히 한국이나 조선의 손님들은 우선 연길의 간판을 보고 중국의 민족자치의 정책에 대해 감복을 한다. 그런데 요즘 보면 연길의 간판은 어딘가 모르게 엉망이 되는 감이 든다. 우리말 규범에 잘 맞지 않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간판, 조선문은 작게 한문은 크게 쓴 간판, 지어는 대담하게 아예 조선문은 없는 간판이 난무하다. 자치조례를 잘 시달하느냐하는 문제는 제쳐놓고 한 도시의 민족적특색이 색바려 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수가 없다. 간판문화는 연길의 도시이미지를 창출하는데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이런 무형자산이 슬슬 없어간다는 것은 그 만큼 도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곁가지 이야기지만 연변의 정확한 간판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그런데 요즘 많은 지도일군들은 공개석상에서 <연변주(延边州)>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 같다. 그리고 정부기관 회의에서 사용되는 프랑카드나 현수막에서 조선문이 없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언론에 공개되고(지도 일군들의 행사나 회의가 중요하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됨)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반복이 되면 언젠가는 습관이되여 우리의 무형브랜드가 없어져 연변경제에 손실이 될 가봐 근심이 된다. 상기의 세 이야기의 공동점이 있다면 신용과 게임법칙을 잘 지키기다. 시민을 볼모로하는 승차거부는 신용을 저버리는 것이고 그 관리부분에서는 합리한 게임법칙을 제정해야 하며 또 영업에서 아무리 돈을 벌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양머리 걸고 개고기를 팔지 말아야 하며 정부가 제정한 게임법칙을 잘 시달하지 않는 것도 역시 신용이 부족한것이라 할수 있겠다. 어쨌든 축구에 배구게임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 된다.
6    경제적인 성장과 정신적인 혁명 (리봉우6) 댓글:  조회:1798  추천:126  2007-04-16
경제적인 성장과 정신적인 혁명  리봉우한국에 있는 기간 연변에 다녀온 한국의 지인들에게서 늘 <중국이 무섭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많은 분들은 연변이나 혹은 중국의 어떤 곳을 다녀오고 중국에 다녀왔다고 말하기를 즐긴다.), <연변이 한 해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고 놀라움에 금치 못한 말들을 들었다. 당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귀 맛 좋은 말이요, <봐라, 가난한 동포유학생이라고 하여 너무 무시 하지마, 우리도 잘 살고 있어>라는   하나의 정신적인 안위로 될 수 있는 강심제였다. 그러나 귀국하여 이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떤 한국인들의 말이 어딘가 모르게 감탄과 경이로움보다도 다른 의미로 느껴지는 듯하였다.       변화는 발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변화는 긍정적인 면으로 많이 생각하게 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말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변화는 꼭 긍정적인 것만 아니다.. 례를 들어 <그 학생이 변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면 우선 긍정적으로 그 의미가 다가오지만 <원래 괜찮은 학생이 점점 나쁘게 번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가 있다. 반면에 발전은 긍정적인 변화이다. 시쳇말로 따른다면 <업그레이드>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현재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발전은 바로 경제적인 발전이다. 연변의 얼굴-연길시만 보아도 느낄 수가 있다. 이를테면 날로 높아지고 멋져지고 많아 져가는 상업빌딩이나 아파트, 시원하게 넓어져 가는 도로, 날로 더욱 밝아지는 도시 중심가의 가로등불, 먹을 것, 입을 것이 큰 근심이 없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중산층들의 증가(물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먹고 입을 것을 근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등등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사회발전의 기초이지만 전반 사회발전을 대체할 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상한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쉽게 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면 대학의 건늠 길엔 신호등이 있는데 왜 소학교의 건늠 길엔 신호등이 없는지? 신호등은 있지만 노약자나 장애자와 같은 사회약자들이 충분히 건널 수가 있는 시간은 왜 주어지지 않는지? 길은 넓어 지고 건늠길의 표식은 잘 되었는데 왜 도로는 좁아 보이고 길을 건너기는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지? 중심가의 가로등은 더욱 밝지만 주택가의 골목길은 밝아 지지 않는지? 소학교 정문에서 100메터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요염한 아가씨가 윙크하는 간판아 걸린 안마방이 둥지를 틀고 있을 수가 있는지, 지어 주택구에마저 (혹시 국민신체건강을 위한)안마방이나 변상적인 도박장소인 노년활동실이 자리를 잡을 수가 있는지…등등 현상들이 너무 쉽게 접하게되여 지어 하나의 일상적인 것으로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특수한 상황이라고만 밀어버리기는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행동을 바꾸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은 실천에서 비롯되고 실천은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뭔가 변화(긍정적)를 시도하려면 앞선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앞선 생각이리고 해서 절대로 원칙과 기본이 없는 빈곤한 생각은 아니다.      공정한 경쟁원리와 민주적인 합리성이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회피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는 급속한 사회변동을 경험하였다. 우리 사회가 겪은 발전은 가히 압축성장이리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신속하고 다방면적인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경제 발전은 국가의 중심 이념일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개인의 차원에서도 핵심적인 가치기준으로 수용되고 추구되어 왔다. 즉 절대적인 빈곤의 후진적인 상황을 벗어나 번영과 선진을 따라 잡기 위한 역사적인 도약의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간적인 압축기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례컨데 우리 사회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발생하고 그 효률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가장 중요한 부의 축적 기술은 시간차에 따르는 부동산 가격의 등락을 적절히 활용하는 일종의 시테크가 그 보기로 된다.   그 동안의 압축적 성장과정은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에 급속한 경제적인 발전과 산업화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정한 경쟁의 원리와 민주적인 합리성이 오히려 이러한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의도적이며 적극적으로 회피, 파괴되어 오면서 부정적 상황의 전개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지난 시기에 달성한 압축적인 성장은 어떤 면에서 합리적인 질서와 규칙이 없이 사회성원 각자가 개별적인 이익의 극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 상황에 돌입하였다는 의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시기에 우리 사회에서 <발전>이라 함은 사회성원들이 다 함께 나아가는 협동적 진보의 과정을 의미하였다기보다는 남들보다 앞서야만 하는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경쟁의 과정을 부추기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러한 방면의 실례는 수없이 접할 수가 있다.. 가까운 실례를 든다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간의 생명마저 도외시하는 가짜 분유사건이 생동한 보기이다. 기본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드는가?     요즈음 연변TV방송의 공익광고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교통신호가 없는 건늠길을 건너는 소학생을 위해 차를 정지시키는 기사아저씨의 자애롭고 여유가 있는 웃음과 그 고마움에 화답하는 소학생의 밠고 맑은 웃음의 화면과 함께 <내가 먼저 지키는 교통규칙이 밝은 웃음을 만듭니다.>라는 광고어가 흐른다, 이런 공익광고의 권유, 평등식 구호는 <사람마다 교통질서를 준수하는 것은 기본책임이다>라는 명령식 구호보다 더욱 효과적이다. 이는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가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연변TV방송의 <사랑으로 가는 길>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프로그램은 내 한 가족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들에게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 밝은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의사소통의 공감대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인정이 메말라가 간다는 요즘 상황에서도 그렇게 많은 정성이 모일 수가 있다. <기본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는 민의의 합리적인 결집과 유통을 매개로 할 수가 있는 원활한 소통질서가 형성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대다수 사람들이 수긍하는 기본과 원칙이 이루질 수가 있다. 
5    광고, 그 아름다운 유혹 물리치기 (리봉우5) 댓글:  조회:2032  추천:123  2007-04-16
광고, 그 아름다운 유혹을 물리치기  리봉우 우리는 광고의 홍수시대에 살고있다.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예전에는 정보의 결핍으로 일상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러나 현재 정보가 너무 많아 쉽게 접근할 수가 있어 일상 생활에 매우 큰 도움을 준다. 간단한 례를 들면 집 문을 열고 나서도 문이나 벽이나 계단에 붙인 열쇠수리, 하수도수리, 가스나 생수배달, 가전수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쉽게 얻을 수가 있어(물론 미관에는 영향을 주지만) 대단히 편리한 느낌을 가진다. 또 텔레비죤, 신문과 잡지 같은 대중매체를 통한 광고들뿐만 아니라 거리의 전광판,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전단 등 여러 형태의 광고물을 접하게 된다. 어찌하던 우리는 생활 속에서 광고라는 말을 헤아릴 수 없이 듣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많은 광고물을 접하면서 살고 있다. 광고는 이미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의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광고의 홍수 속에서 하나의 부담이 생기는데 바로 어떤 정보가 유용하고 진실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능력이 필요 된다는 것이다.      광고는 사회의 정보원인 동시에 판촉선봉장.   광고는 상품판촉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구매의사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주로 광고에서 얻는다. 다시 말해서 광고주는 자신의 제품 또는 서비스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소비자는 올바른 구매의사를 결정하기 위해 광고를 리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광고 때문에 울고 웃을 때가 많다. 이를테면 거짓광고, 허위광고. 부풀린 광고, 지어는 아름다운 광고에 의해 가짜 제품이나 불량제품을 산다거나 혹은 과대소비를 하게 되어 가슴을 친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까 광고는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의 요인이지만 결국 광고의 실체를 알아야만 일상 생활에서 광고를 정확히 리용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주로 네 가지 측면에서 광고의 본질을 살펴볼 수가 있다. 광고는 소비자가 어떤 특정된 반응을 일으키도록 하는 의도된 것이고, 주로 신문이나 텔레비죤 등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고(이 점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은 광고를 진실로 믿는다), 광고를 싣는 매체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며, 시장상황을 유리하게 변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상품판매를 촉진확대하여 리윤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광고란 광고주가 비용을 지불하고 판촉전략으로서 설득을 목적으로 한 정보전달 활동이다.   여기서 주목을 하여야 할 것은 광고의 정의는 대체로 광고주의 관점에서 이루어 졌다는 점과 지나칠 만큼 광고효과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용을 지불한 광고주의 립장에서 보면 무엇보다도 광고효과가 가장 큰 관심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물론 진실된 정보도 포함)하여 자기의 상품이 더욱 진실하고 유용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한다. 모든 사회현상이 대부분 그렇듯이 광고도 <제작하는 립장>이 있으면 <수용하는 립장>이 있다. 때문에 소비자는 무엇보다도 광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광고는 결코 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광고는 상품판매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례컨데 화장품광고나 패션광고에서 화장품이나 의상은 아름다움이나 성적인 매력을, 자동차광고나 부동산광고에서는 사회적인 신분을, 이동통신 광고에서는 휴대폰이 신세대의 사랑을 등등 광고는 무수한 의미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광고도 일종 예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현대사회에서 광고는 상품을 중심으로 의미를 생산, 재생산함으로써 상품의 미를 끊임없이 례찬한다.  바로 이러한 상품례찬인 광고에 의해 허위욕구가 만들어 지고 소비 생활에 익숙하게 된다. 광고는 대중들이 자신의 생활과 외모 등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불만을 갖게 하여 결국 상품구매와 소비를 통해 이러한 불만족을 해소시키도록 유도한다. 광고는 신비로운 환상을 리용하고 미래의 약속을 판매하면서 소비를 촉구하고 있으며 로동자의 절약보다 소비자의 소비를 미덕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대중매체에서 젊음과 랑만이 충만한 스키장이나 해수욕장을 표현한 광고가 그 자체가 바로 자유나 평등인 것처럼 그리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스키장이나 해수욕장 같은 데를 갈수 있는 세계, 그 세계는 현실인 것이 아니라 광고가 만들어 낸 꿈의 세계이다. 이렇듯 광고의 세계는 언제나 아름다움, 젊은, 건강, 행복, 부, 세련, 사회적인 신분 등 신비롭고 자유로운 <가상 현실>의 문명의 세계이다. 뿐만 아니라 광고는 상품의 차이를 통해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끊임없는 소비로 어떤 차이나 불만족을 해소하도록 한다.   광고는 현대 시장경제체제에서 가장 효률적인 정보원의 하나로 경제성장 및 자유경쟁을 도모하고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촉진시켜 줄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재원 마련에 큰 기여를 하는 수단으로 보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반면에 광고가 허위욕구를 창출을 유인하고 따라서 소비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킬 뿐 아니라 물질주의가 팽배한 소비문화를 조장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광고와 소비를 비난만 할 수가 없다. 그 론리적인 근거는 광고 이미지 속에 등장하는 상품의 상징적인 속성과 소비의 문화적인 차원이다. 현대사회에서 상품은 고유의 물리적인 속성보다 상징적 특성이 중요시 된다. 오늘날 상품은 생산될 때 기능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상품의 차이는 단지 상징적 차별화를 통해서 부여된다. 일상적인 삶이 풍요로워 짐에 따라 소비자는 상품을 물리적인 편리성보다 심리적인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진대 광고에 대한 미적 감수성을 키워 광고를 즐기면서도 유용하게 소비하는 사람은 대단히 총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4    행동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리봉우4) 댓글:  조회:2071  추천:144  2007-04-16
행동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리봉우 연변대학 신문학부 학부장 가끔 매스컴에서 발렌타이데이(련인의 날)에 9만9천999송이 장미를 련인에게 선사했다거나 고급호텔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데 18만 8,888원을 선뜻 뿌렸다거나 70세의 유명인사가 30살도 안된 안해와 뮤직컬을 관람하는 랑만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있는자의 횡포>>였다. 그러나 안해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기름칠을 하고 언제 한번 화장품이나 속옷은 고사하고 쵸콜렛이나 지어 장미 한송이도 선물하지 않은 사람에 비하면 더욱 매너있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삐딱한 생각이 든다. 사실 고생하는 당신, 정말사랑하오, 수고하오, 내 이후에 정말 잘 해드리리다라는 빈말보다 안해 몰래 아침밥을 해놓는 등 실제 행동으로 가사를 분담하거나 안해를 돕는 사람이 더욱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요 아름다운 사람이다. 며칠전 한국에 간 사촌 매형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그 골자는 20살 꽃나이에 10식솔 대가정에 시집온 누님이 고마워 32년동안 4월 30일 결혼기념날 아침에 앞산에서 진달래를 한아름 꺽어서 줬는데 금년에는 처남이 자기를 대신해서 수고를 해달라는 것이다. 큰 목적은 없지만 작은 것이라도 언제나 그 것을 위해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매형의 소행에 난 너무나 작아지는 느낌이다. 대학교수요, 박사요 하는 자부심에 언제나 사회적으로 의의 있는 것만을 고민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행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생각하고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술을 적게 마셔야지, 담배를 끊어야지, 책을 많이 봐야지. 이번엔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지, 작은 돈이라도 아껴야지, 아이를 적어도 둘을 나야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야지….. 등등 왜 이렇게 해야 하는 도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관건은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것이다. 특히 현재 소위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허례허식이나 명철보신, 혹은 탁상공론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더더욱 안타깝다. 이를 테면 조선족학생수의 급감을 의논하면서 자기의 손군들은 임마, 그래도 지금 사회에서는 한어를 잘 해야 주류사회에 편입되여 밥을 먹을 수가 있어하면서 슬그머니 한족학교에 보내는 일, 술자리나, 세미나나 학회에서는 민족의 운명이니, 미래니, 방책이니 하면서 많은 것들이 쏟아 나오지만 그때 뿐,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역시 다른 사람들의 몫이였다. 빈말로만 떠들고 실천, 실행이 없는 것, 저는 아무것도 아니 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 남을 비판하기만 일삼는 것, 제 잘못은 가리우고 남에게는 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성인의 진정한 앎이 아니라 변론가, 아니 공론가의 특징이다. 진정한 앎은 실행을 낳는 것이다.특히 우리의 시대는 깊은 철학적인 고민보다도 지행합일(执行合一)이 더욱 필요된다. 인제 너, 나 할 것 없이 봄이 활짝 피는 길에서 멋진 발걸음을 내디뎌 보자.   
3    현대사회의 속도와 느린 교육의 의미 (리봉우3) 댓글:  조회:1843  추천:120  2007-04-16
현대사회의 속도와 느린 교육의 의미    리봉우                       일전에 아들애의 방학학부모 회의에 갔더니 학교 정문 앞에 방학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라고 홍보하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지어 어떤 학원요원들은 자기네 학원교육이 학교보다 났다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하였다. 순간 나의 머리에는 학교에 오면서 총알같이 달리던, 사람이 채 내리기 전에 씽 하니 달려가던 소형 뻐스가 떠올랐다. <시간이 금전>이라더니 인젠 속도가 금전이다.     교육도 속도전?     일반적으로 교육이란 가르치고 배우는 것, 또는 인간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를 하고 또 자아실현이나 지적 안목의 형성과 같은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교육은 속도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육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형식이나 과정을 보면 달라진다. 여러 사회부문과 마찬가지로 교육 역시 속도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남보다 먼저 하나라도 더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남 보다 많은 지식을 배우기 위해 고액의 과외나 학원교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웬만한 학원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학교의 진도를 앞질러 나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모두가 남보다 더 먼저, 더 빨리 더 많이 교육을 하자는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학교교육은 이미 정설로 굳어진 지식을 새로운 세대에 전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교육의 내용과 첨단지식 사이에 일정한 시차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며 교육의 변화 속도는 사회 또는 과학기술의 변화 속도와 일치할 수가 없다. 지식의 발전 속도가 환만할 때는 이러한 차이가 잘 알리지 않지만 요즈음처럼 단 몇 년 만에 지식의 량이 급증하는 때에는 학교교육의 효용성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하여 시대의 변화가 비행기라면 학교의 교육내용은 달구지에 불과하다고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이러한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사회에서 쓸모가 있기를 기대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것이 교육의 성격이나 역할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다 일부 에서는 학교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온라인 교육의 보급) 다소 온건한 입장에서는 학교가 가르치는 지식의 성격이 달라져야 함을 역설한다. 즉 종래의 교과지식보다는 과정지식과 또는 련관성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개인적인 차원의 더 먼저, 더 많이, 더 빨리 교육은 질보다 량을, 공생보다 경쟁을 중시하는 개발 년대의 부작용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단절된 교육보다  련관성의 교육을 지향      미국에서 여러 번 <올해의 교사>상을 수상한 바가 있는 존 테일러 개토는 오늘날 학교교육의 문제를 비판하는 글에서 미국 소학교학생들의 시간 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수면 56시간, 텔레비시청 55시간, 학교관련시간 45시간(수업 30시간, 숙제 7시간, 통학 및 준비뮬 8시간), 개인생활 12시간(식사 3시간, 순수 개인 생활시간 9시간) 한 주간 168시간 가운데 아이들이 순수하게 지기 자신만의 여유를 즐길 수가 있는 시간은 9시간에 불과하다. 그나마 다른 것을 배우거나 활동을 하고자 하는 아이에게는 이 시간마저 가질 수가 없다.   그는 이러한 일과가 의존적인 인간, 스스로 의미 있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인간을 길러내는데 아주 효과적임을 지적하면서 아이들의 시간을 빼앗아 버린 교육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날 아이들은 실제의 세계, 어른의 세계와 무관한 추상적인 공간에서 자란다. 그들은 스스로 호기심을 가질 자유도 없이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에 따라 단속적인 관심만을 가질 것을 강요당한다. 따라서 그들은 앞날을 예측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도 현재도, 또 양자의 연관성도 이해하디 못한다. 동료와의 진정한 관계를 맺을 줄도 모른다. 요약하면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단절되어 있고 또한 그들의 인식과 사물 역시 단절이 되어있다.     현재 일부 발전된 나라에서는 개토가 말한 단절의 교육의 대안으로 연관성의 교육을 지향한다. 연관성의 교육이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지식과 삶, 리론과 실천의 본원적인 관계에 대한 자각이다. 물론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이론이나 설명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을 통해서이다. 미국의 한 음학대학의 교수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하여 부끄러워하는 소학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잘 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런 마음이 크게 되면 기교만 늘게 된다. 나는 스무 살에 음악을 시작하였어, 늦게 시작한 것이지만 우리 선생님은 오히려 나를 천천히 가르쳐 주었다. 건반 하나하나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즐겨보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도>를 하나 치더라도 그 음의 아름다움과 느낌을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도>를 칠 수가 있고 그냥 잘 연주를 하려는 사람은 아무리 실수가 없이 연주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단다.>>   요즈음 흔히 시대의 변화에 비하여 뒤떨어진 우리교육의 락후성을 가리켜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교사들이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표현한다. 이 말의 의미는 21세기형 교실과 교사가 필요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작정 속도문명을 찬미하고 지체를 극복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도화된 교육이 사회의 변화 방향과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지만 사회의 변화의 방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감시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역시 필요한 것이다.     
2    거대 담론과 실천 (리봉우2) 댓글:  조회:1879  추천:84  2007-04-16
거대 담론과 실천 리봉우  어느날 한 젊은이가 문을 두드리고 찾아와 3층집을 산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인츰 집 장식을 하게 되여  소란스럽게 굴게 되니 량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면서 가루비누 두 봉지를 주면서 먼지가 일게 되니 빨래 할 때 쓰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가급적으로 빨리 끝내겠다는 말도 살짝 거들었다. 당시 우리 아빠트 단원에는 3층집만 제외하고 전부 입주한 상태였다. 조선족은 나 혼자고 5층에 살고 있어 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들한데는 늘 조용하게 계단을 오르내리라고 주의를 주고 될 수록이면 청국장같은 한족들이 기피하는 냄사가 나는 음식 끓여 먹지 않고 먹고 싶으면 음식점에서 먹군하였다. 가급적이면 한족 이웃들 한데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아마 새로 입주하는 젊은이도 마찬가지 생각에서 집집이 다니면서 량해를 구하는 것이였다. 그런데 젊은이의 이런 사소한 일이 대단한 효과가 있을 줄이야. 우리 단원의 년장자인 왕선생은 젊은이의 소행을 극찬하면서 남의 일에 잘 관여를 하지 않는 성미지만 퇴근을 할 때나 후일이면 장식 상황를 살펴보고 아이디어를 내주고 지어 자기의 인맥관계를 동원하여 장식 재료도 싼값으로 싸게 해주었다.  시체말로 한다면 사소한 일이지만 진정이 담긴 상대방배려의 언행으로 젊은이의 이미지관리가 성공을 한셈이다. 젊은이의 소행에 도산 안창호선생의 일화가 떠오른다. 1902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에 류학을 할 때 그 곳에는 30여명의 교포들이 있었으나 류학을 목적으로 온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개 인삼장사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들은 상투를 하고 중국인삼을 고려인삼이라고 속여 파는가하면 집에 돌아오면 술을 마시고 싸우는 것이 일과처럼 되여있었다. 그 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도산은 길에서 인삼장사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다. 주위에는 백인들이 둘러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도산이 싸움을 말리고 까닭을 물어보니 서로 상대방의 구역을 침범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산은 교포들의 생활 상태를 둘러보고 한국인의 체면을 유지하기 어려운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것은 국가의수치이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인을 야만인으로 보고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민족으로 볼 것이다. 이들을 지도하여 모범이 되게해야만 한국이 독립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릴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먼저 비를 들고 동포들이 거처하는 집 안팍을 쓸고 유리창을 닦고  창틀과 문앞에 화분을 놓고 꽃씨를 심었다. 도산의 이런 행동에 얼마 안가 동포들의 생활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졋다. 겉모습이 달라지자 마음까지 새로워졌다. 어느새 그들은 의복도 청결해지고 면도도 자주하고 이웃을 의식하여 말소리도 낮추고 냄새나는 음식도 자제하게 되었다 << 왜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느냐?>>고 빗대던 사람도 <<이웃을 위하는 것은 문명인의 도리교 여기서 한국인이 미국인을 불쾌하게 하면 미국은 한국인 전체를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라는 도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런 생활이 시작이 되여 약 1년이지나니 동포들의 생활은 놀랄만큼 달라졌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어떤 미국인 기업인은 도산을 신뢰하게 되였고 한국인들이 집세를 깍아주는 가하면 회관도 무료료 제공하였다.. 그렇게 하여 1903년 9월 23일 10여명의 동포들로 미주지역 한인 친목회가 탄생되고 이는 나중에 공립협회로 발전하고 다시 미주 한인사회의 중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였다. 현재 조선족은 전통적인 집거구를 벗어나 해외에서 이를테면 서울의 가리봉동, 대림동, 신림동, 국내의 할빈, 장춘 심양은 물론 북경, 대련, 청도, 연대 상해 등지에서 새로운 코리안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을 할것은 전통적인 집거구나 새롭게 형성되는 코리아타운에서 우리는 한국인이나 중국의 타민족들에게서 긍정받고 신뢰받고 존중받는 민족으로 만들어가야한다. 뭉뚱거려 말을 한다면  자기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찾아가고 지키면서도 세계의 흐름에 뒤떻어 지지 않는 <<문명한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가야한다는 거대담론이다.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는 시대에서 지성인들이 벌리는 새로운 민족적인 계몽이 아닐수가 없다. 급변하는 시대에 있어서 깨치고 아는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더욱 요청이된다. 이런 시각에서 우에서 실례를 든 젊은이나 도산의 <작은 일부터, 나부터 > 실천을 통해 모범을 보이는 것은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수가 없다. 모범이란 것은 본보기며 본보기는 실천을 통해 만들어가고(본보기는 만들어 져셔는 안된다.)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게 되고 본받게 한다. 리론이나 담론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실천되여 하나의 본보기를 이루기 전에는 널리 보급이 되지 못한다. 새로운 리론이나 담론은 대단히 필요하고 유용한것이지만 그것을 응용하여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다. 학교교육에 대한 천마디 말보다 훌륭한 학교 하나를 이뤄 놓은 것이 더욱 나은것이 바로 그 리치다. 훌륭한 리론이나 담론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화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리론은 리론대로 되어버리거나 담론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1    [미디어] 매체의 책임은 태산보다 무겁다 (리봉우2) 댓글:  조회:1635  추천:95  2007-03-11
매체의 책임은 태산보다 무겁다 리봉우 연변대학교 부교수우리 독자나 청취자, 혹은 시청자들은 대중전파매체로부터 어떤 사안의 내용에 대해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대중전파매체가 그것을 얼마나 강조해서 다루고 있느냐를 통해 그 사안의 중요성을 느끼거나 알게 된다. 따라서 대중전파매체는 어떤 론점을 선정하고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용자들에게 그 론점이 중요한 것으로 느끼게하는 능력 내지 그 기능을 가진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대중전파매체는 어떤 주제나 론점을 강조, 보도함으로써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 주제나 론점을 중요한 것으로 지각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전파매체는 수용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의제설정의 기본골자다.매체는 정보전달자만 아니다사실상 대중전파매체는 정보나 의견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자들에게 어떤 특정적인 사건들을 주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사건을 제시하면서 대중들에게 무엇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할 것이며 무엇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암시해준다. 바로 대중전파매체는 <수용자들에게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보다 <무엇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더욱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수용자들의 <머리 속의 상(像)>은 개인적 심리적경향이나 지식구조나 성별에 의해 다르겠지만 주로 그들의 접하고 있는 대중전파매체들이 세상의 지도를 달리 그려 놓기때문이다.현실생활 중에서 어떠한 사람들이나 막론하고 많은 정보들은 대중전파매체에서 획득한다. 특히 시공간의 제한으로 하여 주어진 문제령역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직접적인 경험이 적을수록 그 문제에 관한 정보들은 대중전파매체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떠한 전파매체도 모두가 뉴스를 선정하여 보도를 한다. 이러한 보도들은 우리들의 사회적 현실을 형성해주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만약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진 매체가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고 사회현실을 왜곡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줄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매체가 일방적으로 <대중의 의제>를 결정하려고만 하지 말고 매체는 반드시 수용자들에 의해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주제도 잘 반영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체가 주요한 의제설정자이지만 유일한 설정자가 아님을 알려준다. 매체는 지역사회의 게시판이다때로는 매체에서 알심을 들여 중점보도를 조직하였지만 수용자들은 큰 반응이 없으나 무심코 내보낸 기사나 사론설들이 상상외로 사회적인 반응이 클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의제를 정하는가 하는 문제이다.이를테면 현실생활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 대중들의 보편적인 리익의 공동집합으로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문제들, 시대적인 특징이 있고 어떤 계시와 교훈적인 의의가 있는 열점화제들 등을 의제로 정해야 한다.대중전파매체의 품위와 위신은 뉴스의 신속성과 풍부성에도 있지만 의제를 어떻게 잘 설정하는가에도 많이 관계된다. 의제설정은 대중전파매체가 사회적 여론에 영향력을 과시하는 구체적인 표현형태이다. 물론 매체가 보도한 문제마다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중매체에서 중점적으로 보도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이것은 바로 사실 뿐만 아니라 사실에 관한 진실도 알게 하여 공중에게 책임지고 설명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언론은 그 지역의 게시판이며 또 량심이다. 끝으로 수많은 언론인들로 그토록 숭배를 받아온 토마스 제퍼슨의 말, <꼭 필요하다면 정부보다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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