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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속도와 느린 교육의 의미
리봉우
일전에 아들애의 방학학부모 회의에 갔더니 학교 정문 앞에 방학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라고 홍보하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지어 어떤 학원요원들은 자기네 학원교육이 학교보다 났다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하였다. 순간 나의 머리에는 학교에 오면서 총알같이 달리던, 사람이 채 내리기 전에 씽 하니 달려가던 소형 뻐스가 떠올랐다. <시간이 금전>이라더니 인젠 속도가 금전이다.
교육도 속도전?
일반적으로 교육이란 가르치고 배우는 것, 또는 인간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를 하고 또 자아실현이나 지적 안목의 형성과 같은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교육은 속도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육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형식이나 과정을 보면 달라진다. 여러 사회부문과 마찬가지로 교육 역시 속도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남보다 먼저 하나라도 더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남 보다 많은 지식을 배우기 위해 고액의 과외나 학원교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웬만한 학원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학교의 진도를 앞질러 나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모두가 남보다 더 먼저, 더 빨리 더 많이 교육을 하자는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학교교육은 이미 정설로 굳어진 지식을 새로운 세대에 전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교육의 내용과 첨단지식 사이에 일정한 시차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며 교육의 변화 속도는 사회 또는 과학기술의 변화 속도와 일치할 수가 없다. 지식의 발전 속도가 환만할 때는 이러한 차이가 잘 알리지 않지만 요즈음처럼 단 몇 년 만에 지식의 량이 급증하는 때에는 학교교육의 효용성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하여 시대의 변화가 비행기라면 학교의 교육내용은 달구지에 불과하다고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이러한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사회에서 쓸모가 있기를 기대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것이 교육의 성격이나 역할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다 일부 에서는 학교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온라인 교육의 보급) 다소 온건한 입장에서는 학교가 가르치는 지식의 성격이 달라져야 함을 역설한다. 즉 종래의 교과지식보다는 과정지식과 또는 련관성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개인적인 차원의 더 먼저, 더 많이, 더 빨리 교육은 질보다 량을, 공생보다 경쟁을 중시하는 개발 년대의 부작용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단절된 교육보다 련관성의 교육을 지향
미국에서 여러 번 <올해의 교사>상을 수상한 바가 있는 존 테일러 개토는 오늘날 학교교육의 문제를 비판하는 글에서 미국 소학교학생들의 시간 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수면 56시간, 텔레비시청 55시간, 학교관련시간 45시간(수업 30시간, 숙제 7시간, 통학 및 준비뮬 8시간), 개인생활 12시간(식사 3시간, 순수 개인 생활시간 9시간)
한 주간 168시간 가운데 아이들이 순수하게 지기 자신만의 여유를 즐길 수가 있는 시간은 9시간에 불과하다. 그나마 다른 것을 배우거나 활동을 하고자 하는 아이에게는 이 시간마저 가질 수가 없다.
그는 이러한 일과가 의존적인 인간, 스스로 의미 있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인간을 길러내는데 아주 효과적임을 지적하면서 아이들의 시간을 빼앗아 버린 교육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날 아이들은 실제의 세계, 어른의 세계와 무관한 추상적인 공간에서 자란다. 그들은 스스로 호기심을 가질 자유도 없이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에 따라 단속적인 관심만을 가질 것을 강요당한다. 따라서 그들은 앞날을 예측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도 현재도, 또 양자의 연관성도 이해하디 못한다. 동료와의 진정한 관계를 맺을 줄도 모른다. 요약하면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단절되어 있고 또한 그들의 인식과 사물 역시 단절이 되어있다.
현재 일부 발전된 나라에서는 개토가 말한 단절의 교육의 대안으로 연관성의 교육을 지향한다. 연관성의 교육이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지식과 삶, 리론과 실천의 본원적인 관계에 대한 자각이다. 물론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이론이나 설명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을 통해서이다. 미국의 한 음학대학의 교수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하여 부끄러워하는 소학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잘 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런 마음이 크게 되면 기교만 늘게 된다. 나는 스무 살에 음악을 시작하였어, 늦게 시작한 것이지만 우리 선생님은 오히려 나를 천천히 가르쳐 주었다. 건반 하나하나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즐겨보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도>를 하나 치더라도 그 음의 아름다움과 느낌을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도>를 칠 수가 있고 그냥 잘 연주를 하려는 사람은 아무리 실수가 없이 연주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단다.>>
요즈음 흔히 시대의 변화에 비하여 뒤떨어진 우리교육의 락후성을 가리켜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교사들이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표현한다. 이 말의 의미는 21세기형 교실과 교사가 필요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작정 속도문명을 찬미하고 지체를 극복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도화된 교육이 사회의 변화 방향과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지만 사회의 변화의 방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감시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역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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