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http://www.zoglo.net/blog/liguangren 블로그홈 | 로그인
<< 1월 2025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무정장군》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1
2016년 09월 06일 20시 27분  조회:1846  추천:1  작성자: 리함

무정장군. 

1920년 3월 1일 중국 상해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사진.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 인민군중의 지지밑에서 북벌군은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 손전방의 수십만명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 땅을 점령하였다. 1927년 1월 광주의 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옮겨갔다. 혁명세력은 주강령역으로부터 장강, 황하 류역에로 발전하였다. 화북이 눈앞에 보였고 조선도 멀지 않았다. 희열에 벅찬 무정은 지체 없이 북벌전쟁에 뛰여들며 조선민족 대표로 무한에서 열린 “반일대동맹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7월 15일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가 무한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자 국공합작은 파렬되고 기세 드높던 대혁명-북벌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투쟁의 시련을 겪으며 위대한 북벌전쟁에 나섰던 거의 모든 조선인혁명가들은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 켠에 섰다. 무정도 국민당의 공산당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한구에서 체포되여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사형에 언도되였다고 한다. 그러자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이 대시위를 가지고 조선인혁명가 무정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여 나섰다.

무한당국, 아니 왕정위 괴뢰정부는 학생들 대시위에 눌리워 무정을 가짜로 석방하고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정은 혼자가 아니였다. 괴뢰정부의 무창법원 법관중에 무정의 동지가 있었기에 무정은 다행히도 상해로 무사히 빠질수 있었다.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 대시위, 무창법원의 동지-이러한 사실들은 공산당원 무정의 됨됨이를 알리고도 남음이 있다. 무한에서의 무정은 조선인혁명가의 대표로 성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 시절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조선인(한인)지부가 활동하고있었다. 적절히 말하면 중국공산당 강소성위 소속 홍남구(洪南区)조선인지부다. 이 조선인지부의 래력을 알자면 조선공산당을 곁들어야 할것 같다.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였다는것은 세인이 잘 아는 일이다. 이에 따라 상해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부가 조직되였는데 사회주의자 려운형이 지부 책임자였다. 국제공산당 일국일당(一国一党)의 원칙에 따라 상해 조선공산당지부는 1927년 9월에 지부성원 전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강소성위 홍남구소속으로 되였다. 려운형이 의연히 서기였다. 려운형은 그때 복단대학 영어교수였다고 하는데 중공지부는 그의 사택인 상해 프랑스조계지 포석루 128번지(上海法租界蒲石楼128号)를 거점으로 달마다 2~3차의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였다. 로홍군이고 중화쏘베트 제1차 대표대회의 유일한 조선인대표였던 최정무(崔政武)는 상해 복신로 182번지 2층 집이였다고 자기의 구술문-로홍군 최정무에서 밝힌다.

중공 상해조선인지부는 상해와 그 주변 조선인사회를 이끄는 중심기관이였다. 상해조선인지부에서 무정은 자기를 혁명의 길로 이끌고 중국으로 이끌었던 려운형을 다시 만나고 조선인지부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1929년에 상해조선인지부는 활동의 편리를 위하여 지부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그 내막을 보면 무정 등의 역할로서 무정은 장세걸,오명(吴明), 최정무, 윤호(尹浩), 김원식(金元植), 허렬(许烈) 등과 더불어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여기서 장세걸, 오명, 최정무, 윤호 등 무정의 동지들이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무정이 1924년 하북성의 보정군관학교를 다닐 때 장세걸(원명 김홍묵), 오명 등은 그 직후 황포군관학교를 다니거나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하나의 공동한 혁명목표를 위하여 상해로 모여들었다.

오명에 대해서 알려지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조선인교관 이름에 훈련부 기술조교로 적히여있다. 장세걸(1901-1933)은 원명이 김홍묵(金洪默)이고 서울 사람이며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다.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광주에서 무한에 이른 장세걸은 장개석과 왕정위의 혁명배반으로 기세 드높던 북벌전쟁-대혁명이 실패하자 국민당반동파의 무자비한 백색공포에서 무사히 벗어나 상해에 가서 상해조선인지부를 찾았었다. 그때로부터 무정과 장세걸은 뜻을 같이하는 혁명전우로 되였다. 그들은 또 힘을 합쳐 상해지부의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하며 상해 조선사람들의 수령인물로 떠올랐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7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7 2. 중국으로 온 후 2020-09-13 0 1163
6 1.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 2018-04-11 0 1181
5 《무정장군》프롤로그 2018-04-11 0 1317
4 《무정장군》차례 2018-04-11 0 1183
3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3 2016-09-18 1 1883
2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2 2016-09-18 0 1324
1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1 2016-09-06 1 184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