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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으로 온 후
2020년 09월 13일 13시 46분  조회:928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중국으로 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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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북경으로 온후 중국어가 생소한데서 무정은 선참 문화대학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웠다. 1924년에는 북방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과를 전공하였다. 일본학자 모리가와 노부아끼(森川展昭) 교수의 견해( 주. “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다. 중국과 한국의 무정 관련자료들을 검토하면 무정장군이 선참 문화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웠다는 견해를 같이하고있다. 북방군관학교 입학에 대해서는 견해가 전혀 다르다.
김순기선생은 북방군관학교가 아닌 보정군관학교(강무당)이며 이 학교 포병과를 졸업했다고 주장( 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페지)한다. 무정장군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 전사라 신빙성이 더 있어보인다. 중국과 한국의 허다한 자료들이 모두 김순기선생의 주장을 따른다.  무정장군 글을 비중있게 써낸 중앙인민방송국 기자 김성룡과 연변텔레비 기자 서봉학(徐凤学)도 보정군관학교설을 견지한다. 필자도 보정군관학교설에 의문을 가지질 않는다. 여러 면의 자료를 보면 모두가 보정군관학교에로 모아지고있다.
보정시는 하북성 중부에 위치하면서 북으로 수도 북경과 140킬로메터, 남으로 성소재지 석가장과 125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보정륙군군관학교(保定陆军军官学校)는 보정 옛성에서 동북으로 5화리(5华里) 되는 동풍동로(东风东路) 585번지에 자리잡았다. 태항산항일근거지 첫 답사차 2009년 8월 14일에 보정에 이르러 보정륙군군관학교를 찾으니 전체면적 1500여무에 달하는 군관학교가 맞아주었다.
보정륙군군관학교 정문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륙군군관학교 간판이 걸리고 오른쪽 기둥에 보정군교기념관 간판이 내리 걸리여 여기가 그제날 보정군관학교임을 알리고있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단층집으로 된 학교건물이 안겨지면서 입구건물 정면의 군혼(军魂)이라는 커다란 금빛 두 글자가 유난히 눈부시였다. 이어  보정군관학교문물사료전시관을 찾아보니 문물사료전시관에는 1500여명의 졸업생 명단이 밝혀져있었다. 1902년부터 1923년까지 보정군관학교가 존재한 21년간 전후 9기에 걸쳐 근 1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할때 대부분 졸업생 명단은 밝히지 못한 현실이였다. 무정의 이름은 이곳 1500여명 명단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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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소개자료를 보니 보정군관학교의 전신은 1902년과1903년에 꾸린 “북양륙군행정장변학당” (北洋陆军行营将弁学堂), “북양륙군속성무비학당”(北洋陆军速成武备学堂)이고 청정부가 중국에 처음으로 꾸린 최대규모의 전국적인 군관학교였다. 갑오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청정부는 군사를 진흥하고 신식군대 골간을 양성하기 위하여 매년 10만원의 경비를 학교에 지출함과 아울러 구라파, 미국, 일본 등 나라에서 교관을 초빙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마다 외국에 류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장개석을 비록한 중국 국민당의 허다한 고급장교들이 이 학교의 졸업생이였다. 장개석의 회상에 의하면 그가 이 학교에 입학할 때 절강성에만도 1000여명이 지망을 했으나 입학할수 있는 사람은 겨우 14명밖에 안됐다고 한다. 그만큼 학교의 심사가 엄하고 입학점수선이 매우 높았다. 북경 문화대학서 초보적이나마 1년정도 중국어를 익힌 무정은 시험을 거쳐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좋은 군사자질을 갖추었던 무정은 꾸준한 노력으로 포병전문가로 성장하였다.
보정군관학교 시절에 무정은 조선인으로서 군벌혼전을 이룬 국민당과 동북군 사이 남구전역(南口战役)에 참가하였다. 남구전역은 북경 13릉 서부에서 벌어졌다. 무정은 또 천진공격전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한후에는 국민당 염석산(阎锡山)부대의 포병대위(大尉)로, 22살 때에는 포병 중좌군관(中校军官)으로 활약하였다.
22살 때면 1925년을 가리킨다. 군벌간의 혼전에 언녕 실망을 느낀 무정은 미련없이 국민당군대에서 탈출하여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1925년 이해 장가구(张家口)에서 공산당원 문창빈(文昌彬), 명덕건(明德件)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무한에 이르러 당의 지하사업에 뛰여들었다.
1926년 5월 20일,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령도밑에 있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이 북벌군의 선견대로 선참 호남에 진격하여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은뒤 7월 1일에 국민정부는“북벌선언”을 발표하였다. 7월 9일에 8개 군의 약 10만명이나 되는 국민혁명군은 서로, 중로, 동로 세갈래로 나뉘여 정식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 인민군중의 지지밑에서 북벌군은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吴佩孚), 손전방(孙传芳)의 수십만명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땅을 점령하였다. 1927년 1월 광주의 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옮겨갔다. 혁명세력은 주강령역으로부터 장강, 황하류역에로 발전하였다. 화북이 눈앞에 보였고 조선도 멀지 않았다. 희열에 벅찬 무정은 지체없이 북벌전쟁에 뛰여들며 조선민족 대표로 무한에서 열린 “반일대동맹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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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7월 15일,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가 무한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자 국공합작은 파렬되고 기세드높던 대혁명—북벌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나 투쟁의 시련을 겪으며 위대한 북벌전쟁에 나섰던 거의 모든 조선인혁명가들이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 켠에 섰다. 무정도 국민당의 공산당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한구(汉口)에서 체포되여 감옥에 갇히였다. 사형에 언도되였다고한다. 그러자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이 대시위를 가지고 조선인혁명가 무정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여 나섰다. (주. “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
무한당국, 아니 왕정위 괴뢰정부다. 이자들은 학생들 대시위에 눌리워 무정을 가짜로 석방하고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정은 혼자가 아니였다. 괴뢰정부의 무창(武昌)법원 법관중에 무정의 동지(주.“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가 있은데서 무정은 다행히도 상해로 무사히 빠질수가 있었다. 무한의 대학과 중소학교 1만여명 학생들 대시위, 무창법원의 동지—이러한 사실들은 공산당원 무정의 위인됨을 알리고도 남음이 있다. 무한에서의 무정은 조선인혁명가의 대표로 성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 시절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조선인(한인)지부가 활동하고있었다. 적절히 말하면 중국공산당강소성위 소속 홍남구(洪南区)조선인지부이다. 이 조선인지부의 래력을 알자면 조선공산당을  곁들어야 할것 같다.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였다는것은 세인이 잘 아는 일이다. 이에 따라 상해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부가 조직되였는데 사회주의자 려운형이 지부책임자였다. 국제공산당 일국일당(一国一党)의 원칙에 따라 상해 조선공산당지부는 1927년 9월에 지부성원 전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강소성위 홍남구소속(주.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283페지)으로 되였다. 려운형이 의연히 서기였다. 려운형은 그때 복단대학 영어교수였다고 하는데 중공지부는 그의 사택인 상해 프랑스조계지 포석루 128번지(上海法租界蒲石楼128号)을 거점으로 달마다 2--3차의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였다. 로홍군이고 중화쏘베트 제1차대표대회의 유일한 조선인대표였던 최정무(崔政武)는 상해 복신로(上海福新路 )182번지 2층집이였다고  자기의 구술문—로홍군 최정무(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68페지) 에서 밝힌다.
중공상해조선인지부는 상해와 그 주변 조선인사회를 이끄는 중심기관이였다. 상해조선인지부에서 무정은 자기를 혁명의 길로 이끌고 중국으로 이끌었던 려운형을 다시 만나고 조선인지부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1929년에 상해조선인지부는 활동의 편리를 위하여 지부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주.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283페지)하였다. 그 내막을 보면 무정 등의 역할로서 무정은 장세걸(张世杰),오명(吴明), 최정무(崔政武), 윤호(尹浩), 김원식(金元植), 허렬(许烈) 등과  더불어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상해지부”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움은 장세걸, 오명, 최정무, 윤호 등 무정의 동지들이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무정이 1924년 하북성의 보정군관학교를 다닐 때 장세걸(원명 김홍묵), 오명 등은 그 직후  황포군관학교를 다니거나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하나의 공동한 혁명목표를 위하여  상해로 모여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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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에 대해서 알려지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조선인교관 이름에 훈련부 기술조교로 적히여있다. 장세걸(1901—1933)은 원명이 김홍묵(金洪默)이고 서울 사람이며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다.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광주에서 무한에 이른 장세걸은 장개석과 왕정위의 혁명배반으로 기세드높던 북벌전쟁—대혁명이 실패하자 국민당반동파의 무자비한 백색공포에서 무사히 벗어나 상해에 가서 상해조선인지부를 찾았었다. 그때로부터 무정과 장세걸은 뜻을 같이하는 혁명전우로 되였다. 그들은 또 힘을 합쳐 상해지부의 외곽조직인 조선(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한인)청년동맹 등을 조직하며 상해 조선사람들의 수령인물로 떠올랐다.
1930년 5월이후 장세걸은 상해조선인지부의 추천과 중공강소성위의 파견으로 강소에 가서 홍14군 제1사 사장 겸 제2퇀 퇀장으로 활약하다가 상해로 돌아왔고 1931년 초이후 중앙군위의 파견으로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가 홍1방면군 제1군단 제22군 참모장, 제1군단 제2사 제6퇀 퇀장 등 중책을 떠이였다. 장세걸은 중공강소성위 위원을 겸한 양림(杨林,원명 김훈-金勋-), 무정(원명 김무정) 등과 더불어 중앙홍군의 3김,  즉 세 김씨장군으로 활약하던 위인이요, 무정의 전우였다.
최정무와 윤호는 그 시절 쏘련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海参崴双城子) 태생이다. 최정무는 1910년 생이고 윤호는 확연히 알수는 없지만 같은 또래로 알려진다. 쏘련 공청단원들인 최정무와 윤호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원동지구의 조선인혁명가인 박우(朴禹)의 소개와 영향으로 혁명의 장도에 오른 젊은이들이다.
어느날 박우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혁명에는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갈라볼수 없는거요.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중국 상해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박우는 손수건 하나를 건네주면서 상해가서 복신로 182번지 2층집을 찾으라, 려운형이란 분을 만나라, 그분은 조선당의 상해지부서기라고 동을 달았다. (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69페지) 1926년 최정무, 윤호 등 5명의 쏘련 공청단원들이 울라지보스또크 쌍성자를 떠나 중국 상해행에 오를 때 최정무의 나이는 16살이였다.
불원천리하고 상해에 이른 최정무 일행 5명은 복신로 182번지를 찾아 상해조선인지부서기 려운형선생을 만나 비밀소개신인 손수건을 건네였고, 려운형선생의 파견으로 광주 황포군관학교로 가서 제6기 예비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1927년 초 넉달동안의 예비과목 단계를 거친후에는 제4기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는 최정무의 경우이지만 동행한 윤호 등 4명도 비슷한 학습과 훈련과정을 거치였다고 보아진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 시절, 최정무는 조선인 양림혁명가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1927년 12월의 광주봉기에 뛰여들었다.(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73페지)윤호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 실패후에는 각기 천신만고로 상해에 이르러 조선이지부를 찾았고 보정군관하교 출신인 무정과 더불어 한 지부에서 당생활을 하며 상해 한인청년회를 개편한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상해지부” 성원으로도 뛰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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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오명, 최정무, 윤호 등은 황포군관학교—무정은 사기가 부쩍 올랐다. 다같은 중국 군관학교 혁명군인출신들이니 중국혁명에서 몸을 내번지며 해볼만 했다. 최정무가 말하는 원동지구 조선인혁명가 박우선생처럼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은 갈라볼수 없고,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생때같던 윤호가 상해조선인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에서 별반 활동하지 못하고 1928년 5월 28일에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불행히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남경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무정과 그의 동지들은 분하여 펄쩍 뛰였다. 알고보면 이 적들이란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 순포(巡捕房巡捕)들이였다. 황포출신 윤호는 어찌하여 이자들에게 체포되였을까? 이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항일로간부 최채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류연산 저)에서 자상히 알려진다.
1928년부터 1932년 몇년 사이만 해도 상해의 조선인들은 무정 등이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당지부와 그 외곽조직인 “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청년동맹”의 지도하에 상해에서 광범위한 반일선전활동을 자주 벌리였다. 낮이면 반제집회, 시위행진 등이, 밤이면 프랑스조계지 공공조계지에 삐라와 포스터가 나타나니 조계지당국의 비위를 거슬릴 수밖에 없다. 이때를 두고 최채는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있다.
 
 
프랑스조계지 순포방과 공공조계지공부국에서는 조선인혁명가를 체포하여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일본령사관에 넘겨 서울 서대문감옥 등에 압송하고 조선인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국민당정부에 넘겨 남경감옥 등에 투옥케 하였습니다. 상해 조선인당지부의 주요 골간이였던 정향명(丁向明,일명 성시백)과 윤호, 김석철 등 동지들은 선후하여 체포된뒤 남경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으며 우수한 공산당원인 강선필은 국민당한테 학살되여 남경 우화대(雨花台: 남경시 혁명렬사릉원)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최채의 이 증언은 황포출신 윤호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에 의해 체포되고 남경감옥에 투옥되였음을 잘 알리고있다. 일제측의 관련자료로 보면 무정 등 동지들의 지도하에서 상해 조선인들의 반일 혁명활동은 정말 활발히 전개되였었다.
1932년, 조선의 전민족적인 반일운동—3.1운동 13돐을 맞으면서 상해한인녀자청년동맹에서는 “3.1절을 당하여 동지에게 격(檄)함”을 발포하고 상해한인청년당에서도 “3.1기념 선언”을 발포하였다. 중국혁명호제회(互济会) 상해한인분회에서도 “3·1 운동 제13주년 기념 선언’을 발포하고 조선인 민간단체 화랑사(花郎社)에서도 “3.1절 기념에 대하여”를 발포하여 그 성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런 발포문과 기념활동은 비록 무정이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홍3군단으로 떠난 후이라 하지만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그의 외곽조직인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의 구체적인 지도의 결과라는것은 에누리없는 사실이다. 무정의 상해시절도 그러했었다.
상해시절의 무정과 그가  포괄되고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는 여러 반일활동들과 더불어 남경 감옥에 재감(在監) 중인 윤호(尹浩)·김석철(金奭哲)·성시백(成時佰) 등 3동지를 구출하기 위한   군중적 선동 및 위로금 모집 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무정은 이 구출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윤호는 조직과 동지들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도 보지 못하고 남경감옥에서 옥사하여 상해 조선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구체적인 옥사시간이 어느해, 어느달인지는 밝혀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1932년 3월직후라고 추측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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