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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5)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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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남역에 내리니 유성운박사가 친구와 같이 승용차로 맞아주었다. 승용차는 남경시가지를 거치며 곧추 남경 자금산 북쪽 기슭으로 달리였다. 두어식경 지나니 자금산 북쪽 기슭의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 도착이다. 우리 일행 셋은 유성운박사의 안내하에 먼저 공묘 오른쪽에 위치한 남경항일항공기념관 입구를 찾았다. 정문입구내에 들어서니 금자탑모양의 대형 유리건물이 선참 우릴 맞아주었다. 남경항일항공기념관 주체건물이였다. 실외는 쌍날개 비행기, 실내에는 단날개 비행기가 전시되여 항일항공기념관의 의미를 짙게 하여주었다.
항일항공기념관내에 들어서니 기념관은 지상지하 2층으로 되고 기념관 전시물들은 지하1층에 전시되여 있었다. 기념관 소개를 보니 중국의 항일전쟁기간 중국공군 비행기는 도합 21597차 출격하여 일제놈들 비행기 599대를 격추하고 110대를 격상하였으며 적함 8013대를 격몰격상시키는 휘황한 승리를 취득하였다. 그 가운데서 손실도 커서 중국공군비행사 880명이 희생되고 7897명 공군관병들이 부상 또는 잔페로 되였다. 중국의 항일항공에 지원차로 나선 그 시절 쏘련 항공인원 236명과 미국 항공인원 2186명, 한국 항공인원 2명도 중국의 항전을 위하여 영용히 희생되였다.
숭엄한 기분이란 어떤 감정인가를 알것 같았다. 숭엄한 기분 그대로 기념관내 미국항공렬사들과 쏘련항공렬사들, 중국항공렬사들 사진과 소개를 주의하여 살피였다. “중국공군속 한국렬사”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중국공군속 한국렬사는 김원영과 전상국, 미남형 두 겨레인물 사진이 맑은 인상으로 우릴 보고있었다. 사진곁에는 간단한 문자소개가 곁들여지면서 숭엄한 기분속으로 이끌었다. 내가 530여키로메터를 달리며 남경을 찾은것은 무엇때문이였던가? 바로 우리 겨레 김원영과 전상국 두 항일항공비행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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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조선인(한국인) 가운데서 선참 찾아보는이는 전상국. 전상국(田相国,1907.12.22-1938.8.21)은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사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직 전상국 신상관련 구체적인 자료는 수집하지 못하였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료들은 전상국은 일찍 일본 다치가와(立川) 비행학교를 졸업한후 일본에서 항공학교 교관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고 밝히고있다. 그후 전상국은 중국 중앙항공학교 교관으로 근무하게 되며 1931년에는 2등비행사 자격으로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항공항일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의렬단의 5당 대표 14명이 모여 조선인(한국인) 들의 항일통일전선체조직-민족혁명당(民族革命党)을 결성하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과는 한하늘을 떠이고 살수 없다고 보는 전상국이기에 1936년에 결연히 민족혁명당에 가입하게 된다. 조선인 비행사 전상국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항일독립투사의 참다운 삶이라 하겠다.
그후 전상국의 삶은 어떻게 이어져갈가? 관련자료들에 따르면 전상국은 1938년 8월 중일전쟁 당시에 국민당 남경정부 륙군소좌로서 비행대 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양자강(杨子江)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국정부가 전상국의 항일공훈을 기리고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할 때의 독립유공자 공훈록도 이같이 쓰고있다.
남경항일항공릉묘내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2013년 9월 19일 현지촬영
그러나 남경항공친목회(南京航空联谊会) 부회장 왕견(王坚)의 연구결과는 이와 판판 다르다.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 현지답사를 하면 우리는 이곳 항일항공렬사공묘의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는 1993년 5월에 정초식을 가지고 1995년 5월 항일전쟁승리 50돐을 기념하면서 중국, 로씨야, 미국, 한국 등 나라 정부관원들과 항공계 지명인사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제막식을 가지였음을 인츰 알수가 있다. 이날의 제막식에는 한국의 원 공군참모장인 김신(金信)도 귀빈으로 참석하게 되면서 남경항공친목회 왕견 부회장은 김신과 깊은 인연을 가진다.
그때 왕견은 김신장군과 한국 항일항공렬사인 전상국 그리고 김원영의 출신, 가족관계 등을 부탁하게 되였다. 왕견이 알고있는 전상국 자료는 너무도 간략하여 상위대장이고, 1907년생이고, 1938년 8월 21일 희생되였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후 왕견은 계속되는 연구와 조사를 거치면서 1960년 국민당측 공군총사령부에서 편찬한 《공군충렬록》 (空军忠烈录) 제1집 제209페지에서 끝내 전상국의 신상자료를 찾아내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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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국렬사, 본적 한국, 중국적에 가입한후 강소성 강녕현 사람, 중화민국 기원전 5년 출생. 일본항공학교와 우리 나라 중앙항공학교 제2기 고급반 졸업. 처음 일본항공학교 교관으로 임직하다가 망국의 아픔 안고 우리 나라 공군에 가입… 27년 (1938년) 8월 21일, 공무로 한구(汉口)에서 C.B기 74호로 사천 성도로 가다가 발동기 고장으로, 호북(湖北) 의창(宜昌) 서쪽 60키로메터 남타강(南沱江)에 추락, 순국. 유가족으로 안해와 딸 하나가 있음.
(田烈士相国,祖籍韩国,入我国籍后为江苏省江宁县人,生于中华民国纪元前五年。在日本航空学校及我国中央航空学校第二期高级班毕业,初任日本航校教官,因怀亡国之痛,遂归我国投效空军……二十七年(1938年)8月21日,因公由汉口驾C.B机74号飞往四川成都,因发动机故障,坠落于湖北宜昌西60公里南沱江中殉职。遗妻及女一。)
남경항일항공기념관내 김원영-전상국 사진전시앞에서 유성운박사(우)와 함께 /2013년 9월 19일 현지촬영
전상국렬사 연구에서의 결정적인 일환이라 할가. 왕견의 소개에 따르면 《공군충렬록》 제1집에서 전상국은 애국열성으로 넘치는 전형적인 군인출신이라고 소개하고있다. 그 시절 전상국의 조국-삼천리강산은 일제의 철제아래 신음하는데서 전상국은 직접적으로 간악한 일제놈들과 싸울수 없었다. 울분에 넘친 전상국은 결연히 중국행을 선택하고 국적을 강소 강녕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중국에서라도 일제와 싸우며 조국에 보답하려는 열혈청년의 헌신적인 패기였다.
과연 전상국은 여간내기가 아니였다. 7.7사변후 항전초기에 전상국은 벌써 중국항공대의 일원으로 출격해 17차에 달하는 공중운송과업과 일본군에 대한 15차의 폭격투하과업을 출중히 완수하면서 항일전 중국공군의 당당한 상위로 떠올랐다. 불행하게도 전상국은 32살의 한창나이에 비행기 기계고장으로 공무중 순국하였으니 중국공군이나 그가 태여나고 자란 고국으로 말하면 크나큰 손실이 아닐수 없었다.
최근년간 왕견이 부회장으로 근무하는 남경항공친목회에서는 한국 김신장군의 도움으로 일본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전상국렬사의 안해와 딸 련락주소를 알게 되였다. 그들은 너무도 기뻐 인차 렬사의 안해와 딸과 련락을 가지였다. 이는 일본에서 생활하는 전상국렬사의 친인들을 흥분시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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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27일 오전 10시, 전상국렬사의 딸 전혜경(田惠卿)녀사는 81세 고령인 외삼촌 한유동(韩有东)과 더불어 드디여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를 처음 배알하게 되였다. 아버지 전상국이 중국의 항일전장에서 순국하여 67년만에 찾아보는 걸음이였다.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에 들어선 전혜경녀사는 계단 넘어 저 산등성이에 거연히 일어선 항일항공렬사기념비와 기념비 주위 비림(碑林)을 둘러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곳 남경의 항일항공렬사공묘가 이다지도 웅위롭고 보호가 잘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전혜경녀사는 항일항공렬사기념비 오른쪽 비림속에서 아버지 전상국 상위대장의 거룩한 존함을 찾아내고는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녀사는 지닌 가방에서 소중히 간직한 사진 3장을 꺼내고는 아버지와 맘속말을 터놓았다.
“아버지 보세요. 이 사진은 어머니 사진이예요.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어요. 이 사진은 아버지 큰외손자 사진이구요. 이 외손자가 태여난후 외할머니는 이눔이 사위(전상국을 가리킴)를 신통히도 닮았다구 하셨어요. 이 사진은 아버지 딸 일가족의 사진이예요. 봐요, 아버지 세 외손자지요. 모두 잘 지우고있어요…”
2005년 10월 27일, 전상국렬사의 딸 전혜경녀사가 아버지 명함이 새겨진 기념비앞에서. /자료사진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에서의 전혜경녀사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 전상국과 어머니 한씨는 조선에서 이미 결혼하고 중국에 왔으며 1936년에 남창에서 딸애 전혜경을 낳았다. 아버지가 순국할 때 녀사는 겨우 두살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어머니는 어린 딸애를 데리고 친정어머니 댁을 찾아서 외삼촌네와 같이 생활할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항전이 승리한후 1946년 전혜경녀사는 어머니와 외삼촌을 따라 상해에서 륜선으로 귀국하였으며 후에는 삶을 찾아 일본땅에 옮겨 앉게 되였다.
알고보면 전혜경의 아버지 전상국이 순국한후 안해 한씨는 남편이 묻힌 곳을 알지 못하여 찾아갈수도 없었다. 1995년 5월,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한국 원 공군참모장 김신장군이 귀국한후 거듭되는 끈질긴 노력과 수소문을 거쳐 전상국렬사의 안해 한씨와 딸애 전혜경이 일본에서 생활하고있음을 알고 련락이 닿게 되였다. 전혜경이 외삼촌 한유동과 함께 중국 남경행에 오른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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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연구로 보는 전상국 인생발자취와 딸 전혜경이 남경을 찾은 진실한 이야기를 나름으로 헤아려 보았다. 남경항일항공기념관 현지답사를 마친후 우리는 기념관 뒤부분에 펼쳐진 항일항공렬사기념비를 찾았다. 산중턱 수림속에 일어선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는 비행기 몸체를 형상하는 두가닥 기념비로 주체기념비를 이루고 주변은 담장모양을 이룬 많고많은 비림군체들이 총총히 서있었다. 비림들은 미국, 쏘련, 중국 등 항일항공렬사군체로 나뉘여졌고 그중의 한 비림에 김원영과 전상국 두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히여 여기가 한국(조선) 항일항공렬사비림임을 알리였다.
우리는 남경항일항공기념관에 이어 항일항공렬사기념비에서도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유성운박사는 남경에서 살면서도 이곳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다가 리선생 덕분에 이곳 항일항공기념관과 기념비를 처음 찾아본다면서 깊은 감회를 터놓았다. 그 감회에 받들리여 우리는 기념비 구간을 내리면서 강소성문물보호단위로 된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를 하나하나 눈주어보았다. 그 아래구간은 남경항일항공기념관과 항일항공렬사기념비, 항일항공렬사공묘로 이루어진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의 왼쪽켠 입구와 출구를 이루고있었다.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구간 비림에 새겨진 김원영, 전상국 렬사 이름. /자료사진
남경에서의 두번째 현지답사지는 김원영이 남경의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하기전 예비교육을 받았다는 남경성내 동관두 23호. 유성운박사의 덕분으로 성운박사의 친구 승용차를 리용한데서 신속하고도 순조로이 동관두 23호에 이르러 고풍과 현대멋으로 흐르는 동관두를 두루 돌아볼수가 있었다. 동관두는 말그대로 옛수도(古都)로 이름난 남경의 유람명승지 부자묘(夫子庙) 와 진회하(秦淮河) 구간에 자리잡았는데 남경에 이를 때면 의례 선참 찾아보는 곳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이곳 부자묘였다.
남경 도심의 동관두 23호는 또 항일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인 송몽규가 1935년 봄과 여름 남경행에서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조선인특별반 제2기생 학원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의미있는 고장이기도 하였다. 내가 동행한 두 후배친구에게 송몽규를 떠올린데서 우리의 감회는 한결 깊어만 갔다. 현지답사 겸 유람으로 보낸 남경에서의 즐거운 하루였다.
2015년 7월 10일, 강남 두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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