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의 항일렬사전을 펼치면 항일련군 제2군 6사의 녀전사였던 리계순렬사를 대할수가 있는데 그는 줄곧 중공화룡현위 제5임서기였던 김일환의 안해로만 나타난다. 이는 력사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리계순은 특정된 력사환경속에서 선후로 세 남자의 안해로 되여야 했다. 아래 《좌》적사조의 산물인 리계순렬사전기와 흐름을 달리하면서 력사속의 진실한 리계순녀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김일환은 사실 리계순의 두번째 남편이였다.
첫 남편—김익춘
그제날의 화룡현 덕신사 금곡촌은 항일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른 유서깊은 고장이다. 1914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1일)에 리계순은 이 마을의 한 가난한 리씨댁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털면 먼지뿐인 살림이라 아버지 리원백은 종일 아글타글 해도 처녀애로 자라난 리계순을 학교에 보낼 힘마저 없었다.
그 세월에 금곡촌에는 사립원동학교가 있었다. 1928년에 조선 경성감옥에서 출옥한 외지의 한 혁명자가 장창환이라고 변성명하고 안해와 같이 원동학교에 와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도움으로 리계순은 늦게나마 이해 여름에 원동학교에 들어가 공부할수 있었다.
장창환은 교원신분을 음페로 안해 리씨와 같이 금곡일대에 혁명의 불씨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마을에는 야학실이 꾸려지고 장선생 안해 리씨가 부녀강습을 맡았다. 그때 금곡에는 길림, 국자가, 룡정 등지에 가서 공부하는 채수항, 리지춘 등 학생들이 30여명이나 되였다. 그들이 때때로 마을에 돌아와 장씨와 손을 잡으니 반일기운은 날따라 짙어갔다.
리계순은 길림사범학교 출신인 오빠 리지춘과 장창환, 채수항 등의 영향밑에서 혁명에로 강단을 내리였다. 1930년 6월 이후 마을의 리지춘, 장창환, 김정숙 등 한패의 투쟁골간들이 선참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더니 채수항을 서기로 하는 금곡지하당지부가 조직되였다. 당이 지도하는 공청단, 부녀회, 소선대, 농민협회, 적위대 등 혁명단체들이 재조직되기 시작하자 리계순은 부녀회에 참가하여 맹활약을 보이였다. 그후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과 1932년 봄의 춘황투쟁에서 리계순은 쇠소리가 쟁쟁하는 투쟁골간으로 나섰다.
1932년 4월에 김경욱이라고도 불리운 중공당원 김익춘이 달라자구위 농민협회 책임자로 부임되였다. 그는 워낙 화룡현 평강구 약수동사람인데 금곡촌에 친척들이 있었다. 후날 화룡현유격대녀전사 김정옥도 금곡촌출신으로서 김익춘의 사촌 녀동생이였다. 이런고로 1907년 생인 익춘이는 나이가 많아서 금곡촌에 가서 원동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자기보다 예닐곱아래인 리계순을 알게 되고 후에 사랑을 속삭이게 되였다. 1932년에는 이미 부부관계로 널리 알리여졌다. 리계순의 첫 남편이였다.
1932년 여름에 조직의 부름으로 리계순은 남편과 함께 화룡현 약수동으로 지대를 옮기였다. 남편 김익춘은 후날의 화룡현유격대 대장이고 렬사인 김세와 손잡고 평강구유격대를 재건하는 투쟁에 나서고 리계순은 약수동적위대에 편입되여 활동하였다. 이해 8월 리계순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가을 평강구유격대가 약수동에서 재건되였다. 대장 김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안도산속의 중국륙군대속에 들어가 구국군쟁취사업에 나서고 김익춘이 림시대장을 맡아보았다. 그러던 이 가을의 어느날 평강구유격대는 세린하의 한 악질주구 백호장을 죽여버렸다가 세린하대지주 손가놈자위단의 추격을 당했다. 수명의 유격대원들은 약수동 뒤산언덕에서 놈들의 포위속에 빠지였다. 위급한 찰나 김익춘은 놈들을 자기한테로 끌며 대원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놈들은 공산당을 잡았다면서 익춘의 목을 베여 세린하대지주 손가놈의 대문앞에 달아매기까지 하였다.
리계순은 이렇게 화룡현약수동에서 첫 남편 김익춘을 잃었다. 이에 앞서 달라자에서 활동하던 오빠 리지춘도 놈들에게 체포되여 불행히 희생되였다.
두번째 남편—김일환
1932년 가을이후 산구에 자리잡은 어랑촌에 화룡현의 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 약수동에서 활동하던 화룡현위와 평강구위가 어랑촌으로 전이하자 리계순도 어랑촌으로 전이하였다.
1933년 음력 1월 18일(양력 2월 12일) 어랑촌 13용사전투에서 화룡현위 제4임서기 최상동이 희생된후 현위 조직부장 김일환이 제5임 현위서기로 부임하였다. 리계순은 새로운 현위의 비서로 되여 김일환의 신변에서 싸우게 되였다.
새 현위서기 김일환은 화룡현 덕신사 금곡촌출신으로서 리계순과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혼하고 어랑촌 서남쪽의 야지골어구 외딴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리계순은 투쟁속에서 만난 두번째 남편을 더없이 사랑하면서 시어머니 오옥경(렬사), 시5촌조카 김선(항일녀전사) 이와 더불어 남편의 발이되고 팔이되여 주었다.
1933년 봄에 화룡현 유격대는 《1.18》의 엄청난 손실에서 벗어나 시초의 한개 중대로부터 3개중대를 가진 대대로 발전하였다. 일제놈들은 1933년 봄과 여름의 수차의 토벌에 이어 가을에 또 일만(日滿)련합토벌대를 무어 수백에 달하는 병력으로 어랑촌근거지를 대거진공했으나 패주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헌데 1933년 이해 봄부터 악성적으로 벌어지던 대내 반《민생단》투쟁은 가을이후 보다 고조를 이루었다. 리계순의 남편 김일환은 하루아침에 현위서기 직무에서 해임되여 온가족을 데리고 처창즈에 가서 구국군쟁취사업에 나서야 했다. 때는 1933년 11월이였다.
계순이 일가는 처창즈로 간후 세대주 성씨를 리씨로 변성명하고 처창즈동쪽골에 있는 중국인지주집에 일군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농사를 은페로 구국군공작에 나설 때 계순이는 부녀공작에 뛰여들었다. 시어머니 오옥경은 통신공작, 조카 김선이는 아동공작에 나서니 온 집안모두가 기계치륜처럼 물려 돌아갔다.
처창즈의 사업이 성과적으로 진척되여갔다. 1934년 가을이후 어랑촌근거지의 군민들은 선참으로 새로 개척한 처창즈근거지로 전이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남편은 정식으로 《민생단》의 혐의를 받다가 1934년 음력 11월(양력 12월)에 끝내 당조직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당했다. 계순이와 시어머니, 조카―세 녀인은 서로 붙안고 비분의 눈물을 쏟았다.
그런데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로당원인 시어머니는 당적을 제명당하고 계순이는《민생단》혐의추적을 받았다. 이듬해 봄에 조카 김선이는 옥수수를 심을 때 너무도 배고파 못쓰게 된 옥수수알 몇알을 먹었다고 《민생단》혐의로 체포되여 3일간이나 묶이여 지내야 했다. 15살밖에 안된다는데서 일주일만에 놓여나오니 계순이는 너무도 억이 막혀 시어머니와 같이 밭머리에 나가 한바탕 통곡하였다.
했으나 계순이는 혁명을 염오하거나 근거지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강심을 먹고 일어나 투쟁을 견지하는것으로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1935년 음력설이 지나 연길현 여러 근거지의 혁명군중들이 또 처창즈에 밀려들었다. 자그마한 처창즈에 군중만 해도 500명을 훨씬 넘어서니 처창즈의 식량사정은 극도에 달했다. 군중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목숨을 부지할수밖에 없었다.
그때 조카 김선이는 근거지적위대에 참가하여 집단생활을 하고 계순이는 시어머니와 함께 처창즈북산에 초막을 지어놓았다. 만삭이 된 그는 몸을 힘겹게 움직이면서도 매일 부녀와 군중들한테 가서 곤난을 이겨내고 투쟁을 견지하자고 고무하여주었다. 그의 완강한 투쟁정신은 사람들을 심히 감동시키였다.
1935년 이해 봄에 계순이는 딸 정자(김일환과 계순사이의 자식)를 낳았다. 몸이 너무 허약하여 젖이 나올리가 만무하였다. 헌 두루마기에 싸인 갓난애는 배가 고파서 울기만 하였다. 계순이는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어느날 적위대에 갔던 김선이가 아기 보러 왔다. 세식구는 오래간만에 모여앉아 소나무껍질로 저녁을 굼때였다. 문뜩 계순이가 시어머니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였다.
《어머니, 앞으로 우리 정자랑은 이런것을 먹지 않겠지요?!》 《아무렴, 우리가 지금 이런것을 먹는것은 애들이 더는 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지!》 시어머니는 애기를 들여다보면서 락관적으로 말하였다. 계순이는 어린것을 위해서 넘어가지 않는 소나무껍질을 또 억지로 넘기였다.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은 이토록 컸다.
세번째 남편—남창수
1935년 여름이후 처창즈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토벌은 더욱 우심해졌다. 이해 봄에 다시 군중해산문제가 제기되였으나 누구하나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음력 10월에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세갈래로 나뉘여 처창즈근거지에 일시에 덮쳐들었다. 항일부대는 여러 날이나 싸웠지만 나중에는 일부 소부대만 남기고 음력 10월 9일(양력 11월 4일)에 내두산일대로 전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근거지해산문제가 다시 일정에 올라 청년들은 앞다투어 부대에 편입되고 로약자와 부녀들은 조직의 지시에 의하여 무조건 하산하여야 했다.
그러나 계순이는 시어머니와 함께 죽어도 산아래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뻐기였다. 하여 김일네 집안(부처간)과 남창수네 집안(삼형제), 강일수네 집안, 리계순네 집안(네식구) 도합 16명 《민생단》련루자가족들은 먼저 서남차골안에 초막을 지어놓고 남아서 계속 싸울것을 결의하였다. 후에는 동남차골짜기 막바지에 귀틀집하나를 지어놓고 단합살림을 꾸리였다. 리계순네 가정은 말그대로 계순이와 시어머니 오옥경, 조카 김선, 딸애 정자 네식구이다. 에누리없는 청일색의 랑자군이였다. 집안에 있을 사람은 다 있어야 한다고 살다 보면 남자의 일손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16명의 대가정성원들은 서로 믿고 받들었지만 삼형제중 맏이인 남창수는 더욱 그러하였다. 처음에는 서로 의지하며 의례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것은 애틋한 사랑으로 번져갔다. 계순이의 시어머니도 남달리 왼심을 쓰는 창수를 두고 눈치를 모르는바가 아니였다.
1936년 새해에 들어선 어느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조용히 찾아 남창수가 좋으니 마주서보라고 귀뜸하였다. 처음에는 아닌 보살을 했지만 그 마음을 어디에 감출수 있으랴. 마음은 있어도 시어머니앞에서 선뜻 말을 내지 못했던 그는 시어머니의 처사가 돋보이기만 했다.
후에 리계순은 조직의 비준으로 남창수와 결혼하고 부부간이 되였다. 꼭 김일환이 희생되여 2년만에 있은 세번째 재혼이다 . 동남차막바지에 단합살림을 꾸린후 이들 네 집안은 산속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련계를 가지고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계순이와 김선이는 이 자위대의 녀대원으로 되였다.
1936년 음력설을 앞두고 그들은 한개 분대를 거느리고 8퇀부대를 찾고있는 김명주를 만났다. 그한테서 3사 8퇀(후에 6사 8퇀)이 안도현 경내에서 활동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도움으로 8퇀과 련계를 가지였다.
8퇀 퇀장 전영림은 리계순네 모두를 퇀의 특수반으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하였다. 이는 겨울이 발버둥질치는 1936년 이른봄의 일이다. 총을 잡고 원쑤놈들과 싸우려는 리계순의 소망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전영림의 8퇀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소속이였다. 6사 8퇀의 이 특수반에는 젖먹이 정자도 있는가 하면 나많은 오옥경시어머니도 있어 부대에 시끄러움을 끼치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적의 《토벌》대와 맞띄워 그 자리에 음페했는데 첫돌이 갓 지난 정자가 배고프다고 울어댔다. 전체의 목표가 로출될 시각에 계순이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고리솜을 꺼내 아기의 입에 틀어막았다. 아기는 낯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내아들의 후대는 이것뿐이라며 입에 솜을 빼고 아이를 안은채 산속으로 천방지축 깊이 들어간데서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사경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더는 부대에 시끄러움을 끼칠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어린 정자를 데리고 하산을 결심했다. 리별이 각일각 다가오는 이 시각에 계순이는 철 모르는 유복녀를 누가 앗아가기라도 하듯 꼭 업고 시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이 사람 며느리! 내가 살아있는 한 정자도 살아있을것이니 근심말고 잘 싸우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막아서며 정자를 받아업었다.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정자는 어머니한테 가겠다고 기를 쓰면서 울어댔다. 시어머니도 울고 계순이도 흐느꼈다. 시어머니는 강잉히 정자를 둘쳐업고 급급히 그 자리를 떴다.
정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내내 발버둥질이다. 그러는 살붙이가 너무 불쌍해서 계순이는 막 달려가며 시어머니를 불렀다. 그러건말건 시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아래로, 산아래로 내려가기만 하였다.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눈물겨운 인생리별사의 한페지였다. 그후 그들은 서로 다시 한번의 면회도 가져보지 못하였다.
* * *
그후 6사 8퇀은 1936년 봄과 여름, 가을 내내 안도현과 무송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이해 11월에 6사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장백현 희샤즈거우밀영으로 움직이였다.
그해 따라 강산같은 눈이 일찌기도 내려 부대의 행군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해산후 몸을 춰세우지 못한 계순이는 이를 악물고 대오를 따라섰다. 그러다가도 로숙할 때면 작식대원들의 선두에서 돌아치면서 전사들의 식사를 마련하였다.
행군 도중에 리계순은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 더는 대오를 따를수가 없었다. 퇀부에서는 그와 몇몇 부상자, 로약자들을 무송현의 후방밀영에 남아 치료하도록 조치를 대고는 계속 길을 다그쳤다. 조카 김선이는 계속 부대를 따라갔다.
한동안의 치료를 거쳐 리계순의 동상은 차도가 보이였다. 1937년에 잡아든후 계순이와 그의 동지들은 무송현의 후방밀영을 떠나 끝내 장백의 희샤즈거우밀영에 이르러 오매에도 그리던 부대의 넓은 품속에 안기였다. 그후 리계순은 동상을 입은데다가 임신한데서 백두산 최후방밀영으로 불리우는 횡산밀영을 거쳐 홍두산밀영으로 가는 태고연한 밀림속의 천연바위굴로 옮겨갔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이름난 백두의 홍두산림시병원―바위굴 병원이다. 그러던 이 바위굴 병원이 1937년 겨울에 200여명쯤 되는 적들의 돌연적 습격을 받았다. 포위돌파중 리계순은 불행히 체포되여 장백현성에 설치된 류치장으로 끌려갔다가 류치장에서 남자애를 낳고 1938년 1월의 어느날 장백현 리수구의 대호에서 적들에 의해 비밀리에 잔인하게 살해되였다.
리수구 대호에는 세호의 조선족세대가 살고있었다. 적들이 물러간 후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렬사의 유체를 고이 묻어주었다.
1972년 5월 1일에 장백현에서는 렬사의 무덤을 현성의 탑산남쪽가에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1988년 5월 6일에는 중조 두나라의 해당 부문과 일군들이 참가한 의식을 가지고 리계순렬사의 유골을 장백으로부터 조선으로 옮겨갔으며 조선 평양의《대성산렬사릉》에 고이 모시였다.
해당 자료에 의하면 리계순의 시어머니는 산에서 내려간후 혁명이란 이 두글자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굳세게 살아가면서 손녀애를 살리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계순의 친정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수가 없어 외손녀의 생사여부로 골몰하다가 조선전쟁이 끝난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외손녀를 만났고 딸 계순이 남긴 달비를 외손녀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리계순이 1937년 12월 23일에 감옥에서 낳은 갓난애는 그와 남창수의 소생이였다. 이 갓난애는 남충일이라고 불렀는데 남의 집에서 자라다가 후에는 무송현 우전국 국장으로 사업했으며 최근년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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