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20여년전의 일이다. 대학재학시절에 필자는 항일투쟁사 현지답사와 취재를 시작했었는데 첫 답사지가 화룡현 약수동이였다. 약수동과 서성, 룡정 등지에서 력사의 견증자들인 박동활, 김승룡, 리종빈, 손성찬, 황옥순, 차정희 등 로인분들을 취재하고 항일로간부인 량환준선생을 찾아 뵙고 해당자료를 깊이있게 탐구하는가운데서 약수동의 항일투쟁력사를 체계적으로 그려낼수 있었다. 김순희렬사가 그 가운데의 한부분을 이루었다.
약수동항일투쟁사연구는 해당연구부문과 성, 주 부녀련합회 부녀운동사분야의 깊은 중시를 받았다. 그때 성, 주 부녀련홥회에서는 한창 부녀운동사연구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한데서 자치주부녀련합회 부녀운동사조의 리결사주임(현임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상임 부주장), 김영홍(자치주 래신래방국 주임)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게 되였고 성부녀련합회의 녀성간부 여럿이 수시로 필자를 찾았다. 성 부녀련합회 부녀운동사의 장정이 그 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우린 연길에서도 만났고 장춘에서도 만났다.
1983년 2월 13일 음력설날에 필자는 장정의 전화요구에 따라 “성부녀련합회 장정에게 보낸 편지”, 즉 “김순희렬사에 관하여”를 써서 띄웠다. 이에 앞서 필자는 대학 3학년때 “김순희렬사의 보도에 대하여”를 써서 해당부문에 띄웠으며 신문과 방송에서도 보도를 해주었다. 이는 모두 20여년전의 일이다. 필자의 노력으로 김순희 1931년 희생설과 최후는 력사의 본래면모대로 돌아섰다. 헌데 지금까지도 어떤 이들은 이전의 제한된 력사전기에 따라 김순희희생을 1932년 봄으로 취급하거나 과장, 허구된 최후를 그대로 답습하는 페단이 존재하고있어 혼란을 가져오고있다.
아래 조선족항일렬사의 대표인물로 떠오른 김순희렬사전기에서 제기된 몇가지 문제를 다시 언급해보기로 하자.
1. 김순희래력문제:
최현숙의 정리는 문학식으로 되였는데 렬사를 안도현 소사하사람으로 보았다. 무슨 근거로 이러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부동한 견해들도 있어 홀시할수가 없다.
당년 공청단평강구위 아동국장이였던 황옥순은 화룡현 이도구 수성촌에서 1932년 봄에 약수동으로 가서 한동안 활동하였는데 그때 손태익의 본처는 병사하고 오누이를 거느린 홀애비였다고 한다. 그때 공청단평강구위서기 안정로는 “손태익이 처가 없는데 하나 소개할가?”하는 말을 수차 했고 얼마후 김순희가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섰다고 한다. 지난세기 80년대초반에 필자는 황옥순녀사를 자주 찾았는데 그떄마다 황녀사는 이 말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김순희는 룡정에서 조직선을 따라 온 중공당원이였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공청단구위 서기 안정로의 말이였다고 한다. 안정로는 룡정중학교출신으로서 룡정의 지하당조직과 밀접한 련계를 가진 혁명자였다. 보매 김순희는 지식인티가 다분했고 옷차림도 농촌차림이 아니였다.
공청단평강구위 부녀위원 차정희녀사도 1932년 봄에 약수동에 갔을 때 김순희가 없었고 얼마후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선 녀자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순희를 안정로가 약수동에 데려왔으며 룡정방면이 옳다고 지적하였다.
상기 두 녀사분의 회상에 따르면 김순희는 확실히 안정로가 룡정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안정로와 김순희는 룡정중학시절에 이미 잘아는 사이였다. 이런 실례는 가끔 찾아볼수가 있다. 당년 연길현 봉림동에서 활동한 항일투사 리용국(공청단동만특위서기와 왕청현위서기를 력임)은 투쟁의 수요에 따라 대성중학교출신인 김정길을 룡정에서 봉림동에 데려갔다. 모두 조직선을 통해 한 일들이였다. 김순희도 이런 관계로 약수동에 들어섰다.
허나 김순희가 고향이 어디며 신분이 어떠하며 래력이 어떠한가를 누구도 알지 못하고있다. 황옥순, 차정희 녀사가 모르며 약수동사람들이 모르며 손태익의 두 자식들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보아 연변출신의 렬사들은 래력이 밝혀지며 가족관계가 나타나기가 십상인데 전국적으로 선전되는 김순희렬사는 지난50년대부터 널리 알려진 투사인데 래력이나 가족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한 비밀로 남을것 같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필자는 김순희가 로씨야 연해주에서 온 사람이 아닐가 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를 약수동에 데려온 안정로가 바로 연해주출신이였다.
2. 김순희가 약수동에 나타난 시간:
김순희는 1932년 봄에 약수동에 나타났고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섰다. 처녀로서 오누이를 가진 남자와 결혼했던것이다.
3. 희생된 시간:
1932년 봄 희생설은 력사사실과 어긋난다. 준확한 시간은 1932년 음력 11월 4일 (양력 12월 1일)이다.
4. 최후의 상황:
김순희렬사의 최후에 대하여 이미 1981년 4월에 쓴 한편의 글에서 언급한바 있기에 구태여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분명한것은 적들이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위협할 때 김순희가 척 나선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순희렬사에 대해 필자는 20여년이나 지켜보았다. 일반 렬사면 틀린부분이 있어도 그러려니 지나치겠지만 김순희렬사는 다르다. 김순희렬사는 지난 50년대부터 선전되고 전국적인 렬사전기종합에도 오른, 조선족항일렬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여서 그저 지나칠수가 없는 실정이다. 지금도 때론 력사를 모르는 문인들이 렬사에 대한 해당자료와 연구동태를 모르면서 최현숙의 해당 글을 그대로 옮겨놓으니 가끔 혼란이 일어날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글 쓰는 이들에 따라 재현될수도 있기에 김순희렬사전기에 대해 시정할것은 시정하면서 밝히는작업은 매우 필요한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무튼 김순희렬사에 대해 실사구시의 원칙대로 행했으니 시름이 놓인다. 지금이나 후세의 연구가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뿌듯하기만 하다.
부록1: 김순희렬사의 보도에 대하여
80년대에 잡아든후 우리 글, 우리 말 신문잡지와 방송들에서는 우리 조선족항일렬사들의 전기를 륙속 취급하고 있다. 우리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김순희녀사도 그 가운데의 한사람으로서 조선족항일녀성영웅으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장렬한 최후에 대한 보도는 력사사실보다 꾸밈이 있어서 진실하지 못하게 되였다.
력사사실을 진실하게 쓰는것은 영웅인물을 존중하는것이며 더우기는 당의 실사구시의 작풍을 견지하는것이다.
최근에 보도된 김순희렬사의 영웅사적들은 다음과 같이 되여있다. 1979년 《길림청년》10~11호에 실린 《죽어도 굴하지 않은 김순희》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씌여졌다.
1932년 3월 4일, 돌연히 약수동에 덮쳐든 일제 《토벌대》는 약수동적위대들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헛물을 켠 적들은 온 마을의 부녀들을 붙들어놓고 적위대의 행방을 알려한다. 부녀들에 대한 위협공갈이 로골화되고 무시무시한 참살이 눈앞에 박두하자 김순희는 더는 참을수 없어 부녀들속에서 결연히 나선다.
1980년 10월 26일부 《연변일보》에 실린 수필 《불멸의 자욱》에서의 김순희는 한층 더 발휘되고 있다.
《1932년 봄의 어느날, 일제침략자들은 유격구를 소탕하고 수백으로 헤아려지는 무고한 백성들을 붙잡아다가 총칼앞에 세워놓았다. 그들이 금시 무참하게 참살될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자기의 한몸으로 붙잡힌 군중들을 구원하자고 두주먹을 부르쥔 김순희는 분연히 적들앞에 나타났다… 당의 비밀을 루설하라고 조겨대자 김순희는 추호의 주저도 없이 혀를 물어 끊었고 유격대가 간곳을 쓰라고 을러메자 그는 또 오른손의 다섯손가락을 몽땅 물어 끊었다. 나중에 그는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는 사형장으로 떳떳이 걸어 나갔던것이다.》
1981년 3월 8일부 《길림일보》의 《항일녀영웅—김순희》에서도 그러하다. 어떤곳에서는 필자의 뜻에 따라 이러저러한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우에 언급한 글들과 기본상에서 같다. 올해에 들어와서 한 연변인민방송국의 방송도 상기와 같이 보도되였다.
그렇다면 김순희렬사의 최후는 과연 어떠하였는가? 김순희가 희생된 시간은 1932년 음력 11월 4일이지 1932년 3월 4일이거나 1932년봄이 아니다.
항일의 유서깊은 그제날 화룡현약수동은 이름난 항일근거지의 하나로서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쏘베트정부가 세워졌던 고장이다. 당년에 중공평강구위와 그 직속기관들이 약수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공화룡현위도 한때 약수동에 거처했고 동만특위의 주요간부들도 때떄로 약수동을 찾았다.
약수동에 《큰둥지》가 들어 박혔다며 일찍부터 냄새를 맡고있던 일제투도구령사분관에서는 1932년 음력 10월 22일의 제1차토벌에 뒤이어 2차토벌을 개시했다. 음력 11월 4일, 날이 푸름푸름해오자 적들은 이미 마을가까이에 있는 조개산에 노랗게 올랐다. 조개산보초선에서 발견했을때는 벌써 늦었다. 전날밤의 어둠을 타서 세린하쪽으로 감쪽같이 기여들었던지라 마을에서 몇리 떨어진 도끼지팡(지금의 진화)의 첫보초선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것이다. 급보를 받은 마을의 적위대들은 선후로 몸을 감췄지만 앓고 있거나 마을주위에서 보초를 서던 적위대원 몇몇은 피하지 못하고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변절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지하조직명단이 토벌대의 손안에 들어갔다.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집들마다엔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았다.
점심이 되자 혈안이 되여 미쳐 날뛰던 토벌대와 그 주구들은 해산달이라 피할래야 피할수없어 집에 남아있던 김순희를 데려다 마을의 몇몇 로인들과 같이 점심을 끓이게 했다. 김순희는 별수없이 반찬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때 주구들이 몇번이고 들어가서 이것저것 캐여묻는품이 아무래도 좋은일이 아니라고 느낀 그 자리에 있던 정명화는 말린 가지를 주면서 얼마 떨어진 허룡남(적위대원) 집으로 피신하라고 권했다. 그가 금방 허룡남의 집에 들어서자 뒤따라 더러운 마수가 뻗쳐갔다.
정태준(명의상 호제회회장이였지만 일찍부터 아들딸들을 혁명에 내보내고 지하사업에 발벗고 나섰던 공산당원) 등 6명은 이미 잡혀있었고 마을의 로인들도 마구다지로 끌어왔다. 인피를 쓴 승냥이들은 김순희를 널판자우에 묶어놓고 다시 널을 만삭이된 배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앞뒤에서 널을 마구 누르며 뜀질하며 대라고 조겨댔다. 원쑤에 대한 끝없는 증오로 타오르던 김순희의 이글거리던 두눈은 빛을 잃기 시작했다. 사람이 잘못되면 무엇을 알아내지 못할가봐 겁을 먹은 승냥이들은 나중엔 고추물을 들이댔다. 그래도 그에게선 아무런 단서도 얻어내지 못하였다. 맥이 진한 그자들이 고추물 가지러 나간 잠간 사이, 무엇보다도 조직의 비밀을 목숨보다도 더 중히 여긴 김순희는 자기의 혀를 물어끊었다. 고추물을 다시 부어 넣으려는 순간, 그는 붉은 선지피와 함께 끊어진 혀를 확 내뱉았다.
절망에 빠진 적들은 야수적인 본성을 드러내고말았다. 졸개들을 시켜 마당에 있던 조이짚을 집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한편 마당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문마다 열어제끼고는 정태준 등 6명을 정주칸에 끌어다 세워놓았다. 기관총련발사격소리와 함께 우리의 동지들은 하나하나 쓰러졌다. 널판자우에 묶이운 김순희에게는 여섯놈이 달려들어 총창으로 찔러 웃방에 떠밀어놓고 처마끝마다 돌아가며 불을 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조사,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김순희의 최후는 바로 이러했다. 이는 한두사람에게서 취재한것이 아니다. 이로부터 보면 김순희렬사에 대한 상기보도는 잘되지 못한것 같다. 문학작품이라면 다른 문제겠지만 력사인물의 전기에서는 허구가 용인되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력사인물에 대한 형상을 높인다고 하기보다 도리여 그 형상에 손색이 가게 되며 지어는 영웅인물과 대중을 탈리시키는 엄중한 문제를 초래시킨다. 영웅인물의 사적은 그의 투쟁력사사실이지 종래로 작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웅인물에 대한 소개는 과장이 조금있어도 되는듯이 생각하는데 이는 더없이 오유적인것이다. 력사연구가로서, 전기정리가로서 구체적이고 참다운 조사연구를 하지 않고 여기저기 발표된 자료에만 의거하여 제나름대로 꾸미는것은 삼가해야 할 바라고 느껴진다.
김순희, 당의 조직의 비밀을 고수하기 위하여 일제의 피비린 총칼아래에서도 굳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스물두살의 나젊은 생애를 바친 영웅의 빛나는 그 이름은 인민들속에서 대대로 길이 전해질것이다!
연변대학조선어문학부 78급(3학년) 학생
1981. 4. 5
부록 2
성부녀련합회 장정에게 보낸 편지
장정(张晶)동지, 음력설에 안녕하십니까, 전화는 이미 받았으나 제때에 회신하지 못하여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에야 편지를 띄우니 량해를 구하는바입니다. 김순희렬사에 대하여 알려드리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김순희렬사에 관하여
첫째, 시간문제에서: 김순희렬사의 장렬한 최후는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 화룡현 민정국 렬사보관서류 김득봉렬사략력에 의하면 김득봉렬사는 1932년 11월 4일에 희생되였습니다. 그는 김순희렬사와 같이 희생된 렬사입니다.
◎약수동출신인 정창근로인 (현재 연길시)의 증실에 의하면 김순희렬사희생시간은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바로 그날은 정창근의 부친 정태준(중공당원)로인의 환갑날이였습니다. 정태준로인도 김순희와 같이 희생된분입니다.
◎ 현재 화룡현 약수동에 거주하는 박동활, 김승룡 등 로인들의 증실도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그전날 11월 3일이 바로 김승룡 부친의 생일이여서 돼지를 잡았다고 합니다.
◎ 당년에 화룡현 약수동에서 활동하였던 공청단평강구위 아동국장 황순옥(일명 황옥순, 별호 평강나비)의 증인입니다. 그는 1932년 봄에 약수동에 갔는데 그때 공청단구위서기 안정로한테서 “손태익이 처가 없는데 하나 소개할가?!” 하는 말을 수차 들었다고 합니다. 황순옥은 롱담으로만 알았는데 그후 얼마가지 않아 과연 낯모를 녀성이 약수동에 나타났구요. 그는 약수동적위대 부대장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선 김순희였습니다. 그때 황순옥은 안정로에게서 김순희는 룡정에서 온 중공당원이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 차정희(현재 룡정에 거주)의 증실. 차정희는 1981년에 69살로서 별명은 맑스로 통했습니다. 그는 1932년 봄에 공청당평강구위 부녀위원의 신분으로 약수동에 갔습니다. 김순희가 약수동에 나타나기전의 일이였습니다. 김순희보다 한발 앞섰지요. 그때 차정희는 김순희를 친히 찾아보았다고 합니다. 그해말에 차정희는 정태준로인의 딸인 정경옥에게서 약수동참안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개산툰에 지대를 옮긴 후의 일이였지요.
◎ 또 흥미로운 일이 있습니다. 약수동에 다니며 박동활, 김승룡, 리종빈 등 로인을 방문하였을 때 얻어낸 수자입니다.
박동활은 1981년 61살, 참안시 12살, 김승룡은 1981년에 참안시 14살, 리종빈은 1981년에 66살, 참안시 17살, 리종빈의 안해는 남편보다 한살 이상이여서 참안시 18살, 이런 년령수자들은 하나같이 1932년을 가리키고있습니다.
상기 조사와 증실자료로부터 보면 김순희렬사 희생시간은 틀림없는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1931년 설이거나 1932년 봄 설은 발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둘째, 김순희렬사의 최후에 관하여:
1.녀류작가 최현숙이 쓴 김순희는 허구가 적지 않습니다. 례컨대, 적들이 군중들을 모아놓고 위협할 때 김순희가 결연히 적들앞에 나섰다는 문제입니다. 이는 력사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력사의 최후에 대해 제가 쓴 글을 참고(1982년 3월 7일 “연변일보”조선문에 실은 글과 저와 권립선생의 서명으로 “지부생활”(조선문)에 실은 글, 1982년 어느 호던지 잊었습니다.)하십시오.
2.안도현 소사하출신이라는 문제는 아직 얻어들인 자료가 없습니다. 만약 성부련회에서 계속 최현숙의 글대로 한다면 력사진실을 떠난 오유를 범하게 될것입니다.
최현숙작가는 일찍 약수동에서 정명화할머니를 방문했는데 그때 취재가 수분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현재 약수동에 거주하는 김승룡이 정명화의 아들입니다. 최현숙취재시 김승룡과 리종빈도 자리를 같이 했고 그때 력사사실대로 반영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최현숙작가의 글에 이의를 갖고있습니다.
하긴 긍정적으로 말해 김순희의 어떤 사실에서 최현숙작가가 저보다 아는것이 더 많다고 봅니다. 그는 필경 50년대에 벌써 약수동에서 취재한분이기때문입니다. 아는것만큼 적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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