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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치떨리는 경신년 대살륙을 두고
2006년 07월 20일 00시 00분  조회:4791  추천:133  작성자: 리함
바로 잡아야 할 우리력사(12)

치떨리는 경신년 대살륙을 두고

리 함


1920년 10월, 일본제국주의는 근 2만명에 달하는 정규부대를 연변 등지의 조선인집거구에 파견하여 전대미문의 피비린 대살륙을 감행하였다. 사람들은 이 피비린 대살륙을 말할 때 일제놈들은 이르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고 말한다. 그 전형적 개괄이 바로 《3광정책》, 즉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기이다. 허나 력사를 보면 이는 어긋나도 크게 어긋난다. 더우기 닥치는대로 모조리 죽인다는 말은 통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3광정책》은 력사학가들이 후에 당년 일제놈들의 간악한 행위를 세가지로 개괄한것이지 일제놈들이 그때 3광정책을 만들어내고 그대로 행한것이 아니다. 이는 경신년 대토벌을 보면 리해할수가 있다. 본문에서는 경신년대토벌 견증자들에 대한 현지취재를 통하여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1

《일본놈들 때문에 숨도 바로 쉬지 못했습니다.…》
1989년 6월 17일 오후, 연길시 새마을(新村)에서 순난렬사의 후대 조애숙(그해 77살)을 찾았을 때 그는 이렇게 허두를 떼였다. 그리고는 가슴이 막히는듯 인차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지나 천천히 이야기를 터놓았다.

조애숙은 충청북도 충주군의 한 천주교가정에서 태여났다. 그가 7살나던 해 겨울에 아버지의 이불짐우에 앉아서 두만강을 건너 자리집은 곳이 연길현 팔도구 수북천(룡정시 팔도향 팔도촌부근)이였다. 그때 애숙의 아버지 조병일은 신의질을 하면서 천주교를 믿었지만 실상은 조선에서부터 활약한 열렬한 독립운동가로서 팔도구일대 독립무장단체의 책임자였다.

1920년 10월 하순에 일제토벌대가 팔도구일대에 덮쳐들었다. 이에 앞서 친분이 두터운 팔도구경찰서의 백순사(백인칠의 아버지)가 수북천에 와서 조병일을 보고 어서 피하라고 하였다. 그때 조병일은 누구나 다 피신하면 독립운동은 누가 하겠느냐며 피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무리 일본군이 그의 집에 주숙을 정하게 되였다. 그러자 그의 안해는 안절부절 못했다. 집안천정에는 독립군부대에 주려고 모은 양말, 신, 의복, 약품 등 물건이 있었던것이다. 다행히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병일의 신분이 드러났다. 어느날 저녁 놈들은 조병일을 붙잡아 학교로 끌고갔다. 이튿날 오후 그의 안해와 딸 애숙이가 호출을 받고 가보니 조병일은 놈들의 혹독한 고문으로 머리가 터졌는데 강당엔 피가 질벅했다.

그의 안해는 구해낼 방법이 없음을 직감하고 남편의 부탁대로 교회당의 최신부를 모셔왔다. 천주교의 종부성사가 끝난후 국수집에 가서 국수 한그릇 받아왔지만 조병일은 물도 넘기지 못했다. 그들 모녀가 집에 와서 얼마안되여 총소리가 세번 울리였다. 애숙이는 이렇게 8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이튿날 조병일의 안해는 가을한 조이밭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딸 애숙이와 함께 대충 묻어놓았다. 그리고는 경찰서 백순사를 찾아 성당묘지에 모시도록 도와달라고 청들었다. 일본놈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세번 부른 사람이여서 다치지 못한다고 했다. 백순사가 이듬해 밭갈이에 시끄럽다며 재삼 제기해서야 겨우 허가를 받았다.

조애숙은 69년전의 일을 회상하며 손등을 자주 눈굽에 가져갔다. 6월 21일, 우리는 조애숙, 심태순(조애숙의 외손녀)과 함께 팔도구를 찾아갔다.

그날 우리는 조병일의 순난터와 수북천마을자리, 천주교회당, 성당자리 등을 답사하고 팔도촌의 권오승로인집에서 이 촌의 몇몇 로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그들은 팔도구일대서 성망높은 독립투사—조병일을 잊을수가 없다며 혀를 찼다. 그 자리엔 또 당년 일본토벌대에 피살된 리경찬투사의 딸 리기순(1989년에 74살)도 있었다.

리기순은 팔도구 수커리(쌍봉촌)출신인데 경신년대토벌 때 6살이였다. 그해 그의 아버지 리경찬은 30대의 사나이로서 조병일의 련락원이였다. 그는 팔도촌 건너 마을 수커리에서 일본토벌대놈들에게 체포되여 수북천으로 끌려갔다. 그는 수북천에서 조병일의 집마루기둥에 묶이워있다가 교회당 웃쪽 3층대바위에 가서 학살당하였다. 시체는 한달만에 찾아서 수커리뒤산에 겨우 매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또 독립투사 김병렬에 대한 이야기도 감명깊게 들었다. 김병렬의 며느리 박복실(그해 69살) 등 로인들의 소개에 따르면 김병렬은 성당촌 사람으로서 조병일의 수하에서 활동했었다. 그는 일제토벌대의 심사를 받을 때 정신병자로 가장했다. 낮에는 분별없이 《애국가》 등 노래를 부르며 다니고 밤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소리치며 다니니 놈들은 깜짝 속히웠다. 김병렬은 늘 술에 취한척하면서 영어로 일본놈들을 욕했다.

이 무렵에 경찬의 안해도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야수들은 갓 해산한 그를 수북천 버들방천에 끌고가서 옷을 홀딱 벗기고 군도로 찌르는 형용을 하며 악랄하게 위협하였다. 넋이 날아날지경이였지만 녀인은 뻗쳐냈다.

그만큼 팔도구는 당년 독립운동의 주요한 활동지구였다. 1988년 10월 21일과 22일 왕청현 춘양진에서 전명준(그해 88살)로인을 취재할 때 그는 당년 팔도구에서 홍범도장군을 여러번 보았다고 했다.

전명준로인은 당년 지방독립운동단체의 련락원이였다. 그는 조선 강원도 평강군태생인데 18살 때 부모를 모시고 두만강을 건너왔다. 그의 일가가 팔도구 수커리에서 살다가 목단천을 거쳐 의란구학교촌에 이사한 때는 1920년 가을이였다. 그때 마을의 호주인(戶主人)은 리씨라고 하는 60살좌우의 로인이였다. 모두들 그를 리주사라 불렀는데 원근에 성망이 높았다. 그때 그는 늘 팔도구로 다니였다. 후에야 알고보니 그는 조선독립운동가로서 그가 팔도구로 다닐 때는 꼭 회의하러 갈 때였다.

1920년 10월 어느날, 리주사 등 12명이 팔도구에 가서 긴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오다가 의란구쪽에서 나오는 일제놈들에게 몽땅 붙잡혔다. 놈들은 그들을 결박해가지고 가다가 어느 산에서 살해하였다.

리주사와 끌끌한 장정이 잃어지자 온 마을이 동원되여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이듬해 봄 햇풀이 머리를 들때에야 겨우 시체를 찾았는데 이 생매장된 시체들마다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하늘도 저주할 만행이였다. 그럼 팔도구와 의란구부근의 산에서 귀축같은 만행을 저지른 자들이 대체 일본군 어느 부대일가? 로인들은 머리만 가로 저었다. 기억난다면 일본군이 노랗게 밀려들더라는것뿐이였다.

2

1919년 《3.1》운동이후 동만을 중심으로 한 동북각지의 조선인반일독립 지사들은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조선독립의 길에 나섰다. 통계에 따르면 동만지구만 해도 규모가 비교적 크고 무기가 겸비한 조선인독립무장단체가 7개 있었는데 대원은 2900여명에 달하고 두만강남부에서 일제침략군과 싸운 차수는 1920년 한해만 해도 1651차에 달했다고 한다.

적들은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언녕 1919년 하반년부터 준비를 다그쳤던 조선강점군사령부는 1920년 8월에 전면적토벌계획을 제정하고 조선 라남주둔 제19사단을 토벌조직자로 내세웠다. 그때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4사단을 토벌에 끌어들일 타산도 계획에 들었다. 그리고는 10월 2일에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해내고 이를 구실로 10월 6일부터 전면동원령을 내리였다. 토벌에 투입된 총병력은 1만 8000~2만명에 달했는데 그 주력부대는 라남주둔 제19사단이였다. 19사단은 또 이소바시지대, 아즈마지대 3개지대와 사단직속부대, 국경수비대 등으로 나뉘여 물밀듯이 동만각지에 덮쳐들었다.

19사단소속 기무라지대는 10월 20일 밤에 조선의 온성부근에서 두만강을 넘어섰다. 22일에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일대를 소탕하고 배초구와 왕청, 훈춘 등지 그리고 연길현 의란구, 팔도구 등지에서 150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살해했다. 우에서 언급한 팔도구와 의란구의 수난자들은 바로 기무라지대의 놈들에게 무참히 살해된것이다.

동만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압록강이북의 조선인집거구는 삽시에 살벌한 기운이 꽉 찼다. 심여추가 쓴 《연변조사실록》에서는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인촌락에 대하여 위협공갈하여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채 불을 질러 태워죽이였다. 무릇 불속에서 뛰쳐나오는자 있게 되면 즉시 총칼로 찍어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하였다.》고 밝히였다.

1920년 11월 9일부 《길장일보》는 《최근 3주일내에…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명에 달한다.》고 썼다.

훈춘시는 경신년대토벌에서 심한 재난을 당했다. 1988년 11월 22일 훈춘에 갔을 때 우리는 먼저 마천자향 포태촌의 김하익로인(그해 75살)을 찾았다.
《나는 경신향 회룡봉태생인데 경신년토벌때 백부 김홍석이 회룡봉에서 붙들려 금당에서 죽는것을 직접 보았수다.》

그는 이렇게 허두를 때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백부 김홍식은 회룡봉 현립8소 교원으로서 지방에서 독립선전활동을 벌리며 의연금을 모았는데 놈들에게 살해될 때 29살쯤밖에 안되였다. 그날 놈들은 회룡봉과 그 일대에서 김홍석, 박현규 등 7명을 붙잡아 금당촌(경신진 금당촌) 숭실학교에 끌고가서 불태워 죽이였다. 김하익로인은 먼발치에서 이 비장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한다. 1992년 2월에 필자는 녀류작가 리혜선씨와 함께 두만강이주답사차로 방천에 갔다가 그때의 경신향 금당촌에도 가보았는데 당년의 순난터—숭실학교자리에는 그때의 기초돌하나가 그대로 박혀있었다. 당지 사람들은 혁명자들의 넋이 스며있다 하여 이 기초돌을 《귀신돌》이라고 불렀다.

훈춘시가지에는 당년 국내외에 이름떨쳤던 반일독립투사 황병길의 딸 황정일(1913년~1989년)이 살고있었다. 필자는 일찍 황정일로인을 찾아 황병길과 그의 일가를 둘러싸고 옹근 3일이나 이야기를 들었었다.

1920년 음력 4월 중순 황병길이 불행히 사망된후 그의 안해 김숙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권총과 태극기보따리를 목숨처럼 아끼며 잘 간수하였다. 그해 음력 9월 초나흗날 훈춘애국부인회 회장인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다른 곳에 옮기자고 내놓았다가 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 위급한 찰나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제꺽 집안의 돼지물통에 넣었다. (유지로 쌌기에 탈이 없었음) 뒤미처 집안에 들어선 놈들은 아무것도 뒤지지 못하자 황병길이 죽지 않았다면서 무덤까지 파헤쳤다.

이날 아무것도 얻지 못한 놈들은 동네의 남자들만 열댓을 연통라자의 빈학교에 가두고 불을 지르려고 서두를 때 김숙경이 척 나섰다.

《이 사람들은 죄없는 사람들이얘요. 〈죄〉는 나에게 있으니 이 사람들을 어서 내놔요.》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났다. 다만 한 30살 되는 최현숙이라는 남자가 이에 앞서 뛰다가 총에 맞아죽었을뿐이였다. 이날 그녀는 놈들에게 끌려갔다가 36명 우리동지들과 함께 마적달아래에서 적들 총구앞에 나섰다. 기관총소사가 곧 시작될무렵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한 일본군장교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가 뭐라고 지껄이자 놈들은 36명 동지들을 순순히 내놓았다. 일본놈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마음대로 죽이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김숙경이 한족형제들의 마차에 실려 연통라자의 자기집에 도착한것은 집떠난지 10여일후였다.

그해 음력 9월 초엿새날 일본군은 대황구에도 달려들었다. 마침 대황구 북일학교 천정에서 당년에 안중근, 황병길 등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고 결의한 《단지동맹 (斷指同盟)》의 도끼, 목데기, 손가락마디가 발각되였다. 이는 그들이 손가락마디를 도끼로 자를 때 쓰던 물건들이라 한다. 결과 학교의 명예교장 김남극과 교원 량병칠, 김하정이 체포되였다. 마을에서도 20여명이 붙잡혀 학교마당에 나왔다. 이때 김남극이 나서서 《이 물건들은 내가 감추어둔것이니 쏠테면 나를 쏘라.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다.》고 비호해 나섰다.

놈들은 김남극, 량병칠, 김하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내놓았다. 이날 놈들은 김남극과 량병칠 두 사람을 북산기슭의 말뚝에 묶어놓고 기관총으로 쏘아죽이고 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놈들이 물러간후 사람들이 모여들어 불을 껐기에 학교는 한쪽켠이 좀 탔을뿐이였다. 그후 사람들은 다시 학교를 수건했는데 그때부터 이학교를 《3.1》학교라고 불렀다.

황정일은 후에 김남극의 며느리로 되면서 대황구에서 항일활동에도 종사하였기에 대황구의 정황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일본침략군은 연통라자, 대황구, 회룡봉외에도 훈춘각지에서 대토벌을 일삼았다. 조선강점군 제19사단 이소바시지대는 훈춘에서 다시 3개 토벌대로 편성된뒤 10월 14일 밤중부터 훈춘일대에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제1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8일까지 훈춘 동부와 동북부의 28개 부락을 토벌하였다…

제2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훈춘 일대의 허다한 부락을 토벌하였다…

제3토벌대는 15일 훈춘 동북부와 동남부의 많은 부락을 토벌하였다…

로씨야 원동지구에서 투입된 제11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의 토문자지대(12월 15일 로씨야경내로 퇴각)와 제13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은 제19사단의 이소바시지대와 배합하여 토문자, 로흑산과 라자구일대를 토벌하였다.

했으나 일제토벌대놈들은 가는곳마다에서 조선인반일독립투사들의 견결한 반대를 받았다.

3

당년의 연길현 장암동(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은 일명 노루바위마을이라 하는데 경신년대토벌 그해 심한 토벌란을 겪었다. 당시 룡정촌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이였던 마띵은 노루바위골을 현지답사하고 《견문기》를 썼는데 그가운데 한토막은 이러하였다.

《나는 10월 31일(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진 장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하였다. 10월 29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데서였다. 그날 날이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을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

그후 이 견문기는 서방 여러나라 신문에 널리 실려 강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인지 노루바위골은 우리의 마음을 몹시 끄당기였다. 1991년 12월 10일 필자 일행은 마침내 노루바위골 답사길에 올랐다.

연길에서 뻐스를 타고 그때의 동성용향소재지로 간 우리는 7~8킬로메터를 좋이 걸어서야 이 향의 동명촌(동명 2대)에 이를수 있었다. 이 촌은 노루바위골 원골의 중간쯤에 위치한 마을로서 일명 삼구촌이라고도 불렀다. 해당조사자료에 의하면 지형은 여기서 다시 남북방 세개골로 갈라지는데 원골을 남골이라 하고 북쪽골을 북골, 중간골을 새골(사이골이란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삼구촌이라 부르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

이날 우리는 동명촌에서 1.5~2킬로메터 떨어진 북골의 북동(동명3대)에 가서 김흥섭(1991년 72살) 로인을 취재하는가운데서 세개골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 그것은 남골, 북골을 각기 남노루바위, 북노루바위로 부른다는것과 새골은 다시 새골과 웃새골 2개 마을로 갈라지는데 경신참변을 당한 마을이 바로 웃개골이라는것이였다. 여러 자료들에서 말하는 장암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큰 의미로 볼때 장암동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엄격히 따지면 《웃새골》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왜냐하면 참변을 당한것이 이 마을이고 당년 이 일대의 중심지가 웃새골이였기때문이다.

김흥섭로인의 아버지 김경흥(광복직전에 70살로 사망)이 조선서 이고장으로 이주할 때는 19살이였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119살(1991년)이 된다. 100년전에 벌써 북노루바위에 자리잡았다는 말이다. 그때 이 일대에 조선인이 몇세대 되였으니 이곳 개척은 19세기 90년대 이전으로 되고있다. 조선인으로서 지금의 룡정에 첫발을 들여놓은것이 1884년이라고 할 때 이와 비슷한 시간이 된다. 김로인은 이런 일화도 들려주었다.

19세기 90년대초의 일이다. 수수를 좀 심어야겠는데 씨종자가 없었다. 마침 서남으로 35리쯤 가면 조선인마을이 있다고 하기에 그리로 가니 과연 우물가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다름아닌 우리가 일컫는 룡드레촌(룡정)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북노루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였다. 하여 그때로부터 노루바위골에도 수수를 심게 되였다. 이주초기의 한 모퉁이를 보여주는 귀맛당기는 일화였다.

김로인은 경신년태생이다. 그가 태여나던 해에 웃새골에 20세대가량의 조선이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7~8살 될 때에는 30여세대로 늘어났다. 후에 김로인은 자기마을력사에 짙은 흥미를 가지고 허창호 등 로인들한테서 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상깊은것은 경신참변이였다.

당시에 노루골에는 경신참변을 앞두고 한 엿장사가 나타났다. 그는 엿을 파는척하면서 조무래기들과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아는가고 물었다. 그곳을 지나던 마을의 한 청년이 이 말을 듣고 의심이 들어 인차 국민회조직에 알리였다. 하여 마을청년들은 엿장사를 불러다 따지고 들었다. 그자는 모르쇠를 대였다. 그러자 청년들은 그자를 뻐드러지게 때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두워지니 더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시체》가 오간데 없었다. 이때 룡정에서 조사가 온다는 소문까지 파다히 퍼졌다. 독립운동투신자들은 분분히 피신하였다.

그러던 음력 9월 20일(양력 10월 30일)이다. 밤중에 웃새골에 이른 일제토벌대놈들은 동살이 잡히자 일제히 마을에 덮쳐들었다. 마을의 남정들은 모두 결박당한채 학교마당으로 끌려갔다.

토벌대놈들은 32명 남자들을 학교마당에 꿇어앉히고 독립운동을 안하는 사람들은 일어서라고 호통쳤다. 뒤이어 학교마을에 떠밀어넣고 기관총소사를 들이대고는 학교에 불을 질렀다. 뛰쳐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다시 떠밀어넣었다.

일제놈들은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남자라고 보이는것은 무턱대고 총질했다. 그 서슬에 남쪽 령너머 덩때마을(동명 5대)에서 웃새골로 다니며 토기막을 하던 김씨(약 40살)가 총에 맞아 죽었다. 지금의 동명촌(당시 삼구촌으로서 물건너에 있었음) 남쪽밭에서 일하던 늪지골(북노루바위의 뒤너머 마을)의 리관준(30여살) 농민은 물건너 3호동네로 내달아 3부자가 사는 농막에 뛰여들었다가 뒤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뒤미처 농막에 이른 놈들은 악이 나서 그 농막과 곡식가리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 웃새골이 당한 경신참변의 대체적상황이다. 마띵의 《견문기》등에는 10월 29일이라고 하나 마을사람들은 10월 30일로 가슴속에 아로새겼으니 구태여 캐고싶지 않은 마음이다. 일제놈들에 대한 피의 원한이 가슴 한가득 괴여오른다.
김로인과 이야기를 나눈후 우리는 집마당에 나가 동쪽산을 바라보았다. 산기슭엔 과연 노루를 방불케하는 바위무리가 있었다. 노루바위라고 한것은 저 바위에서 인기되였다고 김로인은 덧붙였다.

이어 우리는 김로인의 안내하에 마을앞 개우물을 건너 새골에 접어들었다. 어구가 새골옛터라고 하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동으로 뻗은 새골을 따라 1킬로메터 남짓이 걸으니 웃새골옛터였다. 웃새골은 새골치기였는데 역시 밭으로 되여있었다. 밭가운데로 나가니 사기와 질그릇쪼각들이 가끔 눈에 띄웠다. 김로인은 당년의 그릇쪼각들이라고 하였다.

밭 웃쪽의 낮다란 산밑에 자리잡은 교회당 자리도 보이였다. 지금은 옛 모양이 력연했으나 터자리와 주위는 온통 나무판이였다. 아름드리나무도 가끔 섞이였다. 흘러간 력사속에 묻히며 해당조사자료를 펼치니 마을의 주민 모두가 예수교를 믿었다. 당시 국민회계통에서는 예수교를 외의로 지반을 닦았는데 웃새골은 노루바위일대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로 되였다. 마을의 지방국민회책임자는 한국룡(당시 약 60살)과 그의 아들 한두현(당시 약 30살)이였다. 그시절 웃새골과 그 일대에서 《조선독립만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 구호소리가 터져올랐다. 이 마을조직은 왕청현 봉오동과 련계를 가지였다. 이들이 모은 군자금과 무기 등은 지체없이 봉오동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발길을 학교자리로 돌리였다. 금방 마을자리를 지나니 골짜기 왼켠에 있는 마른 옛 박우물터가 발목을 잡았다. 70여년 세월이 흘렀으나 박우물터는 돌하나 파손없이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골짜기를 건너니 학교자리가 나타났다. 옛터가 그대로 드러났다. 항일로간부 량환준 등 로인들이 이 학교를 1914년에 예수교계통에서 세웠고 학교이름을 《사립영신학교》라고 했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경신참변후 학교는 령너머 원골(동명 4대)로 옮겨갔다지만 옛모습은 여전했다. 산기슭에 닦은 터, 그 터를 받들어주는 돌담들이 정답게 안겨들었다.

필자 일행은 학교자리에서 이윽토록 떠나지 못하고 남쪽켠의 학교밭(당지 사람들이 이렇게 부름)자리와 골짝너머 웃새골옛터, 교회당자리, 32인무덤산 그리고 웃새골의 정경을 한껏 되새겼다. 일제침략자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운 우리 겨레가 장하게, 장하게만 안겨왔다.

청산리전투후 연변의 독립군부대들은 활동무대를 잠시 지금의 로씨야경내로 옮기였다. 전국인민들의 견결한 항전과 연변인민들의 무장항격에 의해 일본침략군은 1920년 말에 주력부대를 연변에서 철거(전부 철거는 1921년 5월) 시키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치떨리는 경신년대토벌, 대살륙의 전후관계이다. 일본침략군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죽이고 불사르고 지랄했지만 닥치는대로 모조리 잡아죽인것이 아니다. 어느 한 마을에 진주할 때엔 사전의 정보에 따라 반일에 나선 청장년 남자들을 어느 빈집이나 학교, 교회당에 처넣고 불지르고 기관총소사를 하였지 애매한 부녀자들이나 반일단체밖의 남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청산리 백운평에서 보이는 남자들에 대해 아이건, 어린애건 모조리 집안에 떠밀어넣고 살륙한것은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군대가 잘못되였다고 판단하고 피비린 보복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같이 남자로 생긴건 모조리 잡아 죽인 경우는 많지가 않다.

이것이 력사이며 이것이 력사의 진실이다. 력사는 어디까지나 진실로 말해야지 간악한 일본침략자들이고 한 하늘을 떠이고 살수없는 족속들이라 하여 모조리 잡아죽이지 않은것을 모조리 잡아죽였다 해서는 안될것이다. 중국을 망라한 조선, 한국 등 일제의 철제아래 허덕인 아세아나라들이 일본정부가 력사교과서를 마음대로 외곡하는 현실을 두고 규탄할 때 규탄하는 우리들이 우리들로부터 사실을 과대하며 력사를 외곡해서야 되겠는가?! 흘러간 력사를 제대로 정시하며 진실로 말하는것만이 맑스주의유물론자의 립장과 태도가 아닐가, 사학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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