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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5만원탈취거사 지점문제 (2)
2006년 07월 21일 00시 00분  조회:4409  추천:139  작성자: 리함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14)

15만원탈취거사 지점문제 (2)

리 함


1919년 룡정 3.13반일대집회는 일본군경과 중국륙군대의 잔혹한 무장탄압으로 끝나고 박문호 등 17명 (혹은 19명) 독립투사들이 피못에 쓰려졌다. 집회참가자들은 손에 무기를 잡지 못한것을 통탄했다. 그가운데서도 철혈광복단단원으로 이날의 충혈대, 즉 결사대에 참가한 최봉설, 림국정,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이 더욱 그러했다.

《태극기 하나만 들고 만세를 불러서 독립을 한다는것은 통분한 죽음이다! 총을 들고 나서라! 총을 들고 나서서 원쑤도 갚고 독립도 하자!》

이들 6명 철혈광복단 단원들의 심장에서 터져나온 부르짖음은 인차 행동으로 번져갔다. 1920년초에 연변을 들썽하고 그후에는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15만원탈취사건》이 바로 이렇게 일어났다.

15만원탈취거사를 말하자면 아마 당년의 연길현 와룡동으로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와룡동에는 최봉설투사의 옛집(일전에 연변일보에서는 이 옛집이 거의 무너지고있다고 보도했다.)이 있는데 바로 이집에서 최봉설이 건너편 창동학원에 다니였고 바로 이집에서 최봉설이 피로써 조선독립을 찾기 위한 철혈광복단(1914년)에 참가했다. 15만원탈취거사의 주동자 림국정도 이집에 류숙하면서 창동학원에 다니였다.

림국정은 워낙 조선 함흥사람이고 그의 어머니는 예수교전도사이다. 국정의 어머니는 반일의 뜻을 품은분인데 간도 룡정에 조선인 반일지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 국정을 반일정신으로 키우고저 반일독립열이 가장 크다는 와룡동 창동학원에 아들을 류학시켰던것이다.

1915년 5월단오에 국자가에서 열리였던 《전간도조선학생운동회》 (부르하통하와 연집하가 모이는 합수목의 모래밭)에서 장래의 조선독립운동가들을 똑똑히 본 일본놈들은 창동학원과 소영자 광성중학교 등 학교의 진보적교원과 학생들을 박해,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이 이렇게 번지자 창동, 명동, 광성, 정동 등 4개 중학교의 철혈광복단단원들은 분분히 왕청현 라자구에 설치된 사관학교로 달려갔다. 창동학원의 최봉설, 림국정, 한상호, 라일 등도 례외가 아니였다.

이듬해 (1916년) 여름에 최봉설, 한상호, 라일은 제고장으로 돌아오고 림국정은 돈을 벌어 공부를 계속하겠다며 로씨야로 일하러 갔다. 최봉설은 집에 돌아온후 와룡동에서 몇리 되는 부르하통하 건너편 적안평촌 학교에서 체육교원을 하며 아이들에게 체육과를 가르치는 한편 군사조련까지 시키려고 은근히 왼심을 썼다. 그때 독립정신을 키우기 위한 간도조선인교육의 골자는 체육운동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최봉설이 림국정이를 자기 집에서 다시 만난것은 1919년 3월초였다. 국정한테서 레닌과 로씨야 10월혁명, 로농국가 등 소문을 진실로 들은 최봉설은 조선의 독립이 당금 실현되는것만 같았다. 국정이와 같이 60~70리 길을 걸어 명동학교로 가니 수십명 철혈광복단 단원들이 모이였다. 그번 비밀회의에서 최봉설이는 림국정 그리고 룡정의 윤준희, 명동중학의 박웅세 등과 더불어 룡정의 3.13독립만세를 위한 충혈대에 가담했다.

3월 17일 3.13수난자 장례식이 룡정 합성리 동산묘지에서 있은후 최봉설은 국정, 상호, 라일 등 여럿과 함께 룡정의 윤준희네 집에 모여 무기없는 자기네를 통탄하였다. 이날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총을 잡고 독립의 길에 나서야 되는 현실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러면서 총문제를 놓고 골몰하다가 룡정의 일본은행을 털자는 의견에 합치되였다. 하여 일부는 일본은행시탐에 나서고 일부는 돈을 모아 권총 등을 마련하기에 동분서주했다. 이 시기 그들은 여러번 모여앉는 가운데서 은행을 터는것은 현실적이 아님을 보아냈다. 왜냐하면 터는날 은행에 돈이 딱 있다고 장담할수 없었기때문이다.

이럴 때 조선은행 회령지행룡정출장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지하공작원 전홍섭한테서 일본놈들이 길회선부설경비로 회령서 룡정에 일본돈 15만원을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람을 띄워 룡정에 가서 시탐해보니 사실이 옳았다. 윤준희, 림국정, 최봉설,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 6명의 습격조가 무어진후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15만원탈취거사를 주밀히 짜고들었다. 달라자 명동촌의 김하규집은 그들의 비밀련락장소로 되였다. 김하규는 최봉설의 장인으로서 명동례배당을 거점으로 반일비밀련락사업에 나서고있었다.

와룡동을 돌아본 이튿날 필자 일행은 15만원탈취거사 지점답사길에 올랐다.

우리를 실은 찦차는 룡정시가지에서 떠나 륙도하를 따라 남으로 달리더니 잠간새에 부처골어구의 신화 6대에 이르렀다. 도로표식은 5킬로메터를 가리키고있었다. 여기서 서남방향으로 산굽이를 조금 돌다가 륙도하를 건너면 재박골(신화 7대)이고 재박골에서 다시 남으로 한참 걸으면 하승리(룡정시 지신진 승지1대)마을이다. 하승리는 부처골어구의 신화6대(원 신명촌)에서 2리가량 떨어진 산밑마을인데 당년의 15만원탈취거사는 바로 재박골과 하승리사이에서 생겼다. 거사지점이 재박골 맞은편 동쪽 강변산굽이라는 설도 있어 우리는 하승리마을안에서 박병선(90년도에 73살), 박병렬(90년도에 63살) 두 로인을 찾았다.

두 로인은 6촌간으로서 모두 하승리 태생이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때 조선회령서 이주해와서 여기를 개척한지도 90여년에 된다고 하는데 1920년초 당시에 10여세대 조선인들이 살고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길은 지금 위치가 아니라 지금의 부처골어구에서 산굽이를 돈후 륙도하를 건너 남북으로 앉은 강서쪽 산밑으로 올리 뻗었단다. 강동쪽 강변산굽이로 뻗은 지금의 신작로는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후인 지난 30년대에 닦았다고 하니 《동쪽강변산굽이》라는 설은 자연 취할바가 못되였다.

하승리의 두 로인과 이야기를 나눈후 우리는 부근의 거사지점을 답사하였다. 거사지점에서 보니 룡정에서 남으로 펼쳐진 륙도하벌은 여기서 좁아지면서 갈지《之》자로 향하다가 동으로 굽어들었는데 달라자 명동촌과 승지촌사이 관문으로 되는 선바위가 환히 안겨왔다. 그래도 거리는 하승리에서 약 5킬로메터는 된다고 한다. 승지촌은 물건너 동쪽 2킬로메터 지점에 있었다. 이때에야 우리는 당년 투사들이 선택한 지리적위치가 독특하다는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거사후 와룡동, 의란구를 걸쳐 로씨야땅으로 가야 했으니 동쪽의 달라자나 서남쪽으로 뻗은 동량, 하승리 건너편쪽은 취할바가 못되였고 룡정쪽은 더구나 말도 말아야 했다. 이 4개 방향은 일본놈들이나 중국측군경 경계가 삼엄하고 불리한 생소땅이여서 제일 좋기는 하승리 아래마을 재박골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재박골로 빠지다가 동성참, 해란강을 거쳐 와룡동, 의란구로 가는것이였다. 이점을 그네들은 똑똑히 보아내고 사전에 길들을 모두 익혀두기까지 했었다.

15만원탈취계획이 무르익은후 최봉설과 한상호는 와룡동에 있으면서 룡정에서 대기하는 윤준희와 림국정의 통지를 기다렸다. 1920년 1월 4일에 회령에서 룡정으로 떠난다는 전홍섭의 비밀통지가 전해지자 이들은 기타 4명과 함께 1월 4일 점심때쯤에 중국학생복에 중국신을 신고 하승리부근의 강변신작로에 나타났다.

이 장소를 택한것은 우에서와 같이 사전에 밀모한것이다. 습격지로는 오랑캐령이 좋지만 놈들이 오랑캐령에 이를 때는 낮이여서 행동하기 불편하고 멀리 전이하기도 불리했다. 가장 좋기는 해질무렵이나 어두운 때이다. 이때면 놈들이 승지촌을 지나 여기에 이를것이고 또 주위에 10여세대 되는 조선인산재호들이 있고 길가에 주막집도 있어 술을 마시는척하며 행동하기도 좋을것이였다.

하승리 부근에서 이들 6명은 두패로 나뉘여 길에서 무질서하게 오가는척하면서 습격자세를 취해보았다. 자신이 있을 때 그들은 하승리어구에서 5킬로메터 밖에 있는 합성리공동묘지로 향했다.

해질무렵 박웅세와 김준 두 청년이 하승리부근 주막집의 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 둘은 자기 패들을 기다리는척 하면서 자주 바깥에 나가 회령쪽 길을 살피였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긴장한 속에서 마음이 한결 죄여드니 곁방에서 술군들이 떠들며 놀아대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들린다면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뜨거운 숨결소리뿐이였다.

얼마후 김준이 밖에 나갔다가 급히 들어서며 나지막히 웅세와 말했다.
《온다!》
《온다구?!》

일면 긴장하기도 하고 일변 반갑기도 한 시각이였다.

때는 오후 6시경, 어둠의 장막이 대지를 포근히 감싼 뒤였다. 전날 새벽 5시, 룡정주재 간도일본총령사관 순사 나까도모와 조선인 순사 박연흠은 길회철도부설전용경비 15만원수송임무를 맡고 룡정을 떠났다가 그날 오후 6시에 회령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오전 8시반에 귀로에 오를 떄 은행 직원 하루구찌와 김용억, 회령의 조선인 상인 진길풍이 동행하였다. 15만원 현금꾸레미와 기타 물건은 말에 실었다.
오후 2시에 신흥평에 이르러 다리쉼을 하고 다시 길을 조이던중 룡정에로 우편물을 수송하는 한 일본인이 행렬에 끼이였다. 현금을 실은 말이 앞서고 우편물을 실은 말이 뒤따랐다. 은행직원 김용억과 진길풍, 나까도모가 말을 따랐고 우편물수송원 가지하라와 은행직원 하루구찌, 조선인순사 박연흠이 각기 그뒤를 따랐다.

박웅세와 김준이 술집에서 나와 비청걸음을 해댈 때 마지막 말이 그들을 지나쳤다. 두사람이 말뒤를 따르며 한어로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는데 저만치에 최봉설, 림국정, 윤준희, 한상호 네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역시 한어로 이대로 가다간 언제 룡정에 들어서겠느냐며 말행렬의 왼쪽 옆에 다가섰다. 이때 네사람이 서로 길을 피하며 코말에 접근했다. 멀쩡한 놈들은 룡정쪽에서 오던 패와 룡정쪽으로 가던패들이 술을 거나하게 마이고 다투겠거니만 생각했다.

찰나 코말에 다가선 넷이 제꺽 손을 쓰며 말탄 놈들을 사격했다. 나까도모가 가슴과 왼손관절에 관통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자 그들은 총탁으로 놈의 이마를 부셔놓았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조선인상인 진길풍은 길손의 도움을 받아 그날 저녁으로 룡정에 호송(구급치료중 이튿날 오전 11시에 죽음)되였다. 김용억은 강을 건너 승지촌쪽으로 숨어버리고 가지하라는 내꼴봐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하루구찌와 박연흠순사가 동량어구촌에 달려가 중국순경들에게 알려 현지에 다달았을 때는 나까도모가 이미 절명하고 현금과 우편물을 실은 말들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뒤미처 총령사관의 10여명 순사가 다달아 현지를 샅샅이 수색하니 자루가 부러진 구식렵총 한자루와 우편물 네개가 눈에 띄일뿐이였다.

사건이 벌어진후 웅세와 준이는 즉각 명동촌으로 떠나갔다. 새날이 밝으면 웅세는 장가를 들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여있었던것이다. 이들둘의 과업은 거사가 실현된후 모집중에 있는 종군간호부처녀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가는것이였다.

준희와 봉설이는 말을 지체없이 재박골로 몰아갔다. 재박골치기 동성참 산속에서 다급히 짐짝을 헤치니 일화 15만원이 옳았다. 순간 그들은 심장이 툭 멎는것만 같았다. 이 시각을 위해 그들은 그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긴장히 보냈던가.

밤은 각일각 깊어갔다. 헌데 와야 할 국정이와 상호가 나타나질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두 사람의 마음을 휩쌌다. 방정맞게도 말들이 이따금 소리를 지르는데 웬일인지 그 소리가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말들을 쏴죽이자느니 죽이지 말자느니 하며 옥신각신하는데 삭정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국정이와 상호가 그들앞에 나타났다. 그들 둘은 말을 놓이고 줄창 걸어왔던것이다.

이들 넷은 말들을 나무에 매여둔채 각기 돈짐을 나누어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여기서 와룡동까지 돌아서 약 80리 길인데 기어이 날밝기전에 와룡동에 가 닿아야 했다.

그들은 거의 닫다싶이 하였다. 목에서는 겨불내가 콱콱나고 땀이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들은 내처 길을 조이기만 했다.

이러구러 해란강을 넘고 삼봉동을 지났다. 조양천 부근에 이르니 뉘집에선가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부터 5킬로메터되는 길을 기다싶이 하면서 걸어 끝내 부르하통하를 건너 동틀무렵에 와룡동마을 서산너머에 가 닿았다. 상호의 아버지와 봉설의 아버지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약속한 지점에서 좀 쉬고난 뒤 그들은 다시 길을 다그쳐 저물녘에 의란구의 산속 한 귀틀집에 들어섰다. 거사를 목적으로 이미전부터 이 산속에 와 집을 짓고 대기하고있던 한 철혈광복단 단원이 그들을 뜨거이 맞아주었다. 이 단원은 그 사이 이미 로씨야연해주 뽀씨예트의 조선마을 지신허까지 다녀오며 길을 익혀두었었다. 검거선풍을 피하여 두어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돈을 가지고 연해주 해삼위로 가는것이였다.

15만원탈취거사후 간도 전 지역에 걸쳐 대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결과 국자가관할내의 와룡동이 거점이라는것이 드러났다. 국자가령사분관의 주임이 연길도윤과 교접한 끝에 일제총령사관과 국자가분관의 경부 2명이 지휘하는 순사 37명과 중국측군경 57명을 거느리고 와룡동에 달려들었으나 헛물만 켰다. 악이 난 적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15만원탈취거사의 전후 과정이다. 와룡동과 룡정을 경유하여 하승리와 부처골부근의 현지답사까지 마친 우리는 내내 흥분속에서 솟아나지 못하였다.

의란구 산속에서 두어주일 머무르다가 그 귀틀집주인의 안내하에 눈우 모닥불곁에서 사흘밤을 새고 나흘만에 연해주 뽀씨예트의 지신허에 이르자던 그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톡)의 조선인마을 신한촌에 가자던 그들, 신한촌에서 15만원 돈을 가지고 홍범도장군이 계시는 추풍 당어재골로 가서 그의 휘하에서 무기를 사고 즉각 군대를 편성하겠다던 그들, 신한촌서 열린 조선인 독립단체회의에서 연해주 수청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연변의 라자구에서 군대를 편성하자는 결정을 지었을 때 그것이 벌써 다 성공된것처럼 그토록 기쁨에 차있던 그들을 우리는 방불히 보는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그네들이 신한촌에서 무장독립과 승전을 약속하면서 불렀던 노래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 했다.


이천만의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
잃었던 네 자유와 너의 권리를
원쑤의 손에서 도루 찾도록
나가라 싸워라 대승의 월계관
네게로 오도록 나가라 싸워라
… … … …

헌데 뉘 알았으랴, 연해주 조선인독립단체의 배합밑에 총구입이란 이 큰일이 바야흐로 성사될 무렵 그만 비밀이 탄로되여 음페지점이 드러났다. 낌새를 챈 일본놈들은 신한촌의 주숙지를 돌연습격했다. 이 습격에서 적의 시선을 자기한테로 끌며 동지들을 구하겠다며 선참 문을 박차고 나간 최봉설이 구사일생으로 포위를 돌파하고 나머지 셋—윤준희, 림국정, 한상호는 불행히 체포되여 조선 청진감옥에 압송되였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독립투사들이 청진감옥에 투옥된후 연변과 연해주의 조선인독립단체들에서 자기 동지들을 구출하고저 각기 권총과 수류탄을 휴대한 박웅세, 김준, 렴길룡 등 셋을 조선 청진으로 파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연해주 해삼위일대의 조선인독립단체와 독립투사들도 적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당했다. 팔의 상처를 치료한후 최봉설이는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로씨야 백파군과 싸웠다. 그후 그는 치따당학교에서 레닌의 교시를 직접 들었고 한때(1920년대) 돈화현 액목일대와 왕청일대서 반일투쟁에 종사하기도 했다.

1956년에 최봉설은 고향인 와룡동을 찾아 창동학원 옛터를 돌아보면서 옛전우들을 그리였다. (후에 구쏘련서 사망.) 1990년 5월에 최봉설투사의 맏아들이며 원 연변총공회 주석 최동현(그때 73살)과 그의 부인, 최동현의 친동생이며 구쏘련 우즈베크공화국 따슈껜트시 꼴호즈총공정사인 구쏘련공민 최단일(그때 53살)과 농예사인 그의 부인 한짜라 (그때 50살), 최단일의 아들 최리쨔(그때 15살) 등이 연변에 친척방문을 왔던차에 력사부문과 항일로선배들의 동행하에 15만원 탈취거사지점을 돌아보았다.

이번 답사길에서 우리는 재박골과 동성참, 해란강, 삼봉동, 조양천, 부르하통하, 와룡동 비밀지점, 의란구 산속, 로씨야에로의 산길 등은 비록 일일이 답사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하나의 길로 이어져 달려와 15만원탈취거사 투사들을 우리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하게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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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깡최
날자:2009-07-25 07:12:05
지난여름 서대문형무소 갔다가 이들을 떠올렸댔슴다~!! ㅎㅎ
1   작성자 : 깡최
날자:2009-07-25 07:14:38
아 와룡동 헌집 사진도 찍은거 있는데 한참 찾아봐야 하는구나~!!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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