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자의 말: 올해 10월은 중국로농홍군 장정승리 70돐이 되는 달이다. 당년 세계를 진감한 2만 5천리 장정에 중앙홍군인 양림, 무정 등 십여명 조선족혁명가들이 참가했었는데 양림, 무정은 살아서 섬북땅을 밟은 두 조선인이였다. 위대한 장정승리 70돐을 기념하면서 특고 《장정길에서의 양림과 무정》을 본 코너에 올리는바이다. 겨레들이여, 그젯날의 2만5천리장정에도 우리 겨레가 참가하였다는것을 잊지 마시라!
장정길에서의 양림과 무정
리 함
1934년 10월, 중국로농홍군은 중앙쏘베트구역 서금 등 원래의 근거지를 떠나 세계를 진감한 2만 5천리장정을 시작하였다. 중앙홍군의 양림, 무정 등 10여명 조선족혁명가들도 부대를 따라 장정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혁명의 성지와 근거지의 인민들을 작별하였다.
장정이 시작되자 양림은 중앙군위간부퇀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간부퇀은 2개 보병영과 1개 특과영(特科營), 1개 상간대(上干队)로 구성되였는데 상간대이외의 간부퇀 학원들은 모두가 부대에서 뽑혀온 련과 패의 간부들이였다. 간부퇀의 주요과업은 중앙기관과 중앙수장들의 경위를 담당하는것이였다. 양림의 어깨에 놓인 짐은 아주 무거웠다.
1935년 4월하순, 대오는 세갈래로 나뉘여 운남으로 진군하였다. 홍군주력부대가 곤명에 박근하자 혼비백산한 국민당반동파는 군대를 곤명에 집중시키는 한편 10여만의 군대를 풀어 홍군부대를 추격하였다.
4월하순의 어느날 저녁 간부퇀은 중앙기관과 함께 운남경내의 한 마을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이튿날도 부대는 계속 마을에 머물러있었다. (곤명을 치게 될가? 금사강을 돌파하게 될가?) 전사들은 저마다 궁금해했다. 놈들의 대부대가 박근하고있다는 소문은 들리는데 부대는 사흗날 오전까지도 출발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전사들은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다. 양림은 전사들의 심정이 리해되였지만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을 줄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택동동지가 홍군을 령도하시는한 놈들의 추격과 포위에서 꼭 벗어날수 있으리란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중앙수장들이 바삐 보내는걸 보아 중요한 결책이 무르익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과연 옳았다. 중앙군위에서는 금사강을 강행도하하기로 결정하고 교평도(絞平渡) 나루터를 탈취하여 후속부대의 도하를 엄호할 과업을 간부퇀에 맡기였다.
금사강은 사천과 운남변계의 천험지대를 흐른다. 게다가 홍군이 가야 할 구간은 가파로운 산비탈이여서 까딱 잘못하면 산골짜기로 굴러떨어진다.
양림은 임무의 간고성과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교평도나루터를 통제하여 부대전체가 금사강을 순조롭게 건너야만 적들의 포위,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날수 있고 그래야만 전략적이동의 결정적인 승리를 취득할수 있는것이다. 그는 진경퇀장, 송임궁정위와 토의하여 간부퇀의 2영을 선견지대로 하고 5련을 전위련(前卫连)으로 하였다.
전위련을 선두로 한 간부퇀이 금사강을 향해 움직이였다. 주야분전끝에 간부퇀은 200여리 길을 다그쳐 금사강가에 이르렀다.
때는 5월 3일 저녁녘이였다. 양림은 정찰병을 파견하여 적정과 나루터의 형편을 탐지하게 하였다. 강대안에 세금을 징수하는 리금국(厘金局)과 30~40명의 보안대가 있고 그날아침 정규군 한개 련이 증파되였다는것이 밝혀졌다. 적들은 교평도의 나루배를 몽땅 강대안에 집중시키고 사복한 놈들을 수시로 건너보내여 형편을 탐지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어찌된 영문인지 강을 건너온 놈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아 두척의 배가 그냥 이쪽 뭍에 대여있었다. 양림은 동지들과 함께 연구한 끝에 소수 병력을 두척의 나루배에 태워 대안의 나루터를 신속히 습격, 탈취하기로 하였다.
강행도하가 시작되였다. 전위련의 1패, 2패가 나루배 두척에 갈라앉아 강심으로 나아갔다. 강이 넓고 물살이 세여 작은 배는 무시로 기우뚱거렸지만 우리의 용사들은 하나같이 힘을 내여 저었다. 배가 대안나루터에 닿자 전사들은 날렵하게 돌층계에 뛰여올랐다.
홍군전사들의 모젤권총앞에서 적의 두 보초병은 찍소리도 못했다. 우리 전사들은 총 한방 쏘지 않고 1개 련의 적군과 보안대놈들을 전부 생포하였다. 그들은 나루터를 재빨리 통제하고 나루배 5척을 수색해냈다.
교평도의 나루배는 7척으로 늘어났다. 밤낮 엿새동안의 도하를 거쳐 수만에 달하는 홍군대오가 금사강을 건넜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동지들도 양림 등 간부퇀의 용사들이 열어놓은 진군로를 따라 나루배에 앉아 금사강을 건넜다. 그사이 양림은 강대안의 나루터를 공고히 하고 대부대의 순조로운 도하를 담보하기 위하여 퇀의 지도자들과 함께 부대를 지휘하여 종심에로 진격하였다.
무정은 팽덕회동지가 지휘하는 제3군단을 따라 장정길에 올랐다. 그는 1930년 7월, 홍군이 동정호반의 악주를 점령할 때 벌써 홍군패장으로 소문을 놓았고 장정길에서도 팽덕회동지의 유력한 조수였다. 무정은 부대를 따라 오강천험을 돌파하고 사품치는 금사강, 대도하를 건넜으며 백설이 아아한 설산, 일망무제한 초지를 지나 파서(巴西)지구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홍군총정위이고 홍4방면군의 지도자인 장국도는 각 군단간에 그리고 각 군단과 군사위원회 모택동동지와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제3군단을 자기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각 군단간에 정보를 이어주는 비밀전보부호책을 거두어들이였다. 심지어 제1, 제3 군단과 모택동동지의 통보용비밀전보부호책까지 거두었다. 제3군단에서는 돌발적인 사태에 대처하고저 무전기를 따로 갖추고 무전암호책을 달리 만들었다.
1935년 9월 3일에 이어 장국도는 또 홍군전적총지휘부 정위 진창호, 총지휘 서향전한테 전보를 띄워 남하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날 아침 전적총지휘부에 갔다가 사태의 험악성을 낌새 챈 팽덕회는 장국도에게 야심이 있다는것을 보아냈다. 전적총지휘부 참모장 엽검영은 이 일을 모택동동지에게 보고하였다.
그때 홍군부대의 행동배치를 보면 제1군단이 제일 앞에 서고 제3군단이 우익종대의 제일 뒤에 섰다. 홍4방면군 34군, 30군, 9군과 전적총지휘부는 대오의 중심, 즉 중간에서 행동하였다. 이 행동배치에 따라 모택동과 장문천은 전적총지휘부와 같이 움직이고 주은래와 왕가상이 병으로 제3군단 군단부에 머물렀다. 한데서 장국도가 변한다면 모택동 등 동지들의 안전을 담보할수 없었다. 제3군단은 대오의 뒤켠에 서다보니 홍군대오보다 하루이틀 늦게 아서, 파서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전적총지휘부와의 거리는 15~20리쯤 되였다. 그사이 안절부절 못하던 팽덕회는 숙영지에 이르기 바쁘게 전적총지휘부로 달려갔다. 파서에 4~5일 머무르는 사이에도 매일 찾아갔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제11퇀을 비밀리에 모택동의 주숙지와 가까운 곳에 배치하였다.
어느날 팽덕회는 전적총지휘부로 갔다가 참모장 엽검영한테서 아계지구로 진출한 제1군단이 향도를 찾지 못하여 무척 애를 먹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국도의 음모를 파탄시키고 위기를 제거하자면 아계로 진출한 제1군단에 무전암호책을 보내주어야 했다.
헌데 누구를 파견할것인가? 팽덕회는 선참 자기부하인 조선인 무정을 생각했다. 몇년동안 한부대에서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서 그는 무정의 사람 됨됨이와 혁명에 대한 헌신성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무정에게 무전기와 무전암호책을 맡기면서 아계로 진출한 제1군단을 찾아 꼭 전할것을 부탁하였다.
어디를 보나 망망한 초원이였다. 무정으로서는 아계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길잡이도 없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있다면 수중의 지남침뿐이였다. 무작정 북으로, 북으로 가야만했다. 그것도 물을 찾아서말이다. 부대가 지난 방향이라면 물구뎅이곁에 밥지은 자리가 있기 마련이였다.
얼마를 걸었는지 어느날 홀연 가마걸었던 자리를 발견했다. 아직도 약간 온기가 있는걸 보아 홍군대오가 멀리 간것 같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솟구쳤다. 려로의 피로도 가신듯 사라졌다.
무정은 끝내 제1군단을 찾아 무전암호책을 넘겨주었다. 천만다행이였다. 이날 마침 제1군단에서는 제3군단에서 띄운 모택동동지의 긴급전보를 받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팽덕회가 어느날 오전에 전적총지휘부로 가서 서로 북상을 주고받았는데 점심을 먹고 다시가니 진창호의 어조가 판이하게 달랐다. 북상항일은 일언반구도 없고 어느쪽이 어찌어찌 좋다는말 뿐이였다. 장국도한테서 전보가 왔다는 조짐이였다. 팽덕회는 이 일을 즉각 모택동에게 알리였다.
그로부터 두시간도 되지 않아 전적총지휘부 참모장 엽검영이 장국도한테서 남하하라는 전보가 왔다고 비밀리에 보고하였다. 모택동이 행동방침토론을 핑계로 진창호 등을 찾으니 진창호가 과연 장총정위의 전보내용을 털어놓았다. 모택동이 중앙서기처회의를 열어 남하문제를 토론하여야겠는데 주은래, 왕가상이 병으로 제3군단에 머물러있기에 장문천, 박고와 같이 3군단사령부로 가서 그들과 같이 회의를 해야겠다고 말하였다. 평소 모택동 등의 일거일동을 엄밀히 감시하는 진창호건만 이것이 몸을 빼는 탈신지계(脫身之計)라는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모택동동지는 제3군단사령부에 이르렀으며 제1군단에 긴급전보를 띄웠던것이다.
《림표, 섭영진: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다. 1군단은 제자리에서 대기할것.(林、聂: 行动方针有变, 一军团在原地等着。)》
모택동이 발송한 전보문이였다. 무정은 자기가 전한 무전암호책에 의해 전보문이 번역되는것을 보고서야 기쁨을 안고 귀로에 올랐다. 한차례 무시무시한 홍군분렬위기는 이렇게 무정이 전한 하나의 무전암호책에 의해 가시여졌다.
팽덕회는 이렇듯 홍군대오의 운명과 관계되는 더없이 중요한 과업을 조선인 무정한테 맡기였다. 무정은 이 과업을 출중히 완수하였다. 모택동 등 동지들은 제3군단과 함께 계속 북상하였고 드디여 아계에서 제1군단과 회합하였다. 무정은 실로 전반 장정기간에 홍 제3군단전적위원회 서기 팽덕회의 조수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1935년 10월, 홍군제1방면군의 주력부대는 승리적으로 섬북에 이르렀다. 이는 력사적인 승리였다. 양림, 무정동지는 제1방면군을 따라 섬북땅을 밟았다. 그외의 10여명 조선인동지들은 모두 장정길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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