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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연변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2)
2007년 01월 02일 00시 00분  조회:5337  추천:104  작성자: 리함
3. 양정학당과 4대 중학교


보는 바와 같이 연변서 조선족사립학교운동과 항일민족교육의 서막을 열어놓은 이들은 기독교출신의 반일지사들이다. 훈춘현 동광학교와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세번째로 연변에 세워진 조선족사립학교는 양정학당이다. 양정학당은 1907년 3월, 월간신동(越垦绅董) 이동춘(李同春)이 광제욕(지금의 용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에 설립한 것인데 이듬해 1908년 3월에 조선족사립신식학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관립학당으로 넘었다. 1901년에 명동일대의 달라자에 화룡현이 설치되자 양정학당은 관립 제2학당으로 되고 잇따라 현립2교로 이름을 바꾸었다.(17) 현성의 소학교가 현립1교로 되고 양정학당이 현립2교로 되었다.

이동춘은 김약연의 동지이고 기독교출신으로서 20세기 초 조선족의 걸출한 교육가이며 항일민족교육의 선구자였다. 그는 함경북도 종성군 태생으로서 1872년에 태어났다. 호를 우화(雨华)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열중해 온 그는 20대에 들어서자 한어에 제법 숙달하였다. 그는 일찍 중국에 이주하였고 한어에 정통한데서 조선주재 청나라 “총리교섭통상대신” 원세개는 1894년에 이동춘을 자기의 통역관으로 등용하고 “파총(把总)”이란 관직을 내리었다. 후에 다시 북간도에 돌아온 이동춘은 화룡욕분방경력(和龙峪分防经历) 장조린의 지지와 녕원보 13사 총향악 (十三社总乡约) 현덕승의 도움 밑에 민중의 힘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광제욕 광소사 상천평에 신식학교 양정학당을 세웠던 것이다. 양정(养正)이란 학생들의 민족적 기개를 키운다는 뜻이었다.

양정학당은 중국식 초가 14간으로 이루어졌는데 교실이 3간이고 숙사가 6간, 나머지 5간은 주방과 식당으로 사용했다. 이 학교에서는 초창기에 벌써 녕원보의 13개사에서 8~9살부터 20살 이하의 조선 간민자녀 60명을 받아들이고 첫 해에 중문, 중어, 일본어, 산학, 체조 5개 과목을 설치하였다. 교원은 2명이었는데 이동춘이 학교관리를 하면서 중어, 일본어, 체조과를 맡고 조선족 피원경이 중문, 산학을 맡았다. 이동춘은 학교운영에서 공개적으로 “반일친중”의 기치를 들고 학생들에게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을 키워주기에 열중하였다. 1908년 2월 27일 화룡욕분발경력 허덕유는 이 학당을 시찰하고 변무독판과 방판에게 올리는 서한에 “이와 같이 편벽한 산간마을에서 이렇듯 드높은 교육열의와 향학의 진취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흔치 않다.”(18)고 썼다.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 장재촌에 온 박정서(박무림)와 김학연은 장재촌에 “규암재”를 꾸린 김약연선생 등과 손잡고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을 세웠다. 규암 김약연선생은 함경북도 종성출신으로서 한학자였다. 일찍부터 반일사상을 가진 김약연은 종성과 회령의 우국동지들에게 두만강 건너 북간도로 집단이주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종성에서 두민을 지낸 성암 문병규학자,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회령의 소암 김하규학자 등 실학파동지들이 대찬성을 하고 1899년 2월 18일에 네가문의 대소가문 스물두집의 식솔 141명이 오늘의 명동, 장재에 이주(19)하여 삶의 터전을 잡았다.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김약연 네 학자는 모두 고향에서 서재를 열었던 훈장들로서 이주 후 이미 환갑이 넘은 문병규, 남도천 두 학자는 뒤로 물러섰지만 김하규(당시 38살), 김약연(당시 32살)과 남도천의 아들 남위언(20)은 1901년에 각기 소룡동, 장재촌, 영암촌에 소암재, 규암재, 오룡재를 꾸리고 교육, 문화 운동에 착수하였다.

이들 세 서재는 힘을 합쳐 명동서숙이란 신문화교육기관을 세우고 초대숙장에 박정서, 숙감에 김약연, 재무에 문치정(문병규의 아들), 교원에 김약연, 김학연, 남위언, 김하규를 내세웠다. 설립 초기 학생은 42명이었다. 명동서숙은 사실상 서전서숙의 후신이라 1909년 4월에 현대 멋이 진한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획기적인 것은 이 시기 서울 상동청년학원(중등교육기관) 출신이며 신민회 회원인 정재면의 명동학교교육 참여이다. 정재면의 정식 부임과 함께 김약연이 교장이 되고 정재면이 교감을, 문치정이 재정을 맡았다. 정재면의 부임조건이 성경과 설치와 매일 예배였다. 하여 명동학교는 첫 시작부터 예배수업을 하고 마을에도 명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기독교학교에 기독교마을의 탄생이다.

이어 정재면은 서울에서 황의돈(국사대가), 장지영(한족학자), 박태화, 김철(와세다대학 법학과 출신) 등 쟁쟁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역사, 국어, 법학 등 과목을 강의하게 하였다. 1910년에는 3년제 중학부가 증설되고 1911년 3월에는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데서 여학부가 설치되었다. 명동학교는 정신태, 이의순(이동위의 차녀), 우봉순 등 여교원을 초빙하여 북간도에서 처음으로 근대여자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한데서 명동학교의 규모는 날로 확대되어 1911년에 벌써 학생수는 중학부에 160명(남학생 114명, 여학생 46명), 소학부 보통과에 121명, 고등과에159명, 여학부 보통과에 53명, 고등과에 12명이었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되면서 중국 동북의 남만과 북만, 조선과 러시야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왔다. 《연변문사자료》제5집 제89폐지에 의하면 명동학교는 1925년에 중학부가 폐교될 때까지 18년 간에 무려 1,000여 명의 졸업생을 키워냈다.

1908년 10월 28일, 기독교출신들이며 반일지사들인 강백규, 강희헌, 유한풍 등은 녕원보 개운사 자동툰 후저동(지금의 용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제6촌민소조)에서 농가 한채를 사고 정동서숙을 세웠다. 교직원으로는 초대숙장 강백규, 숙감 강희헌, 학감 유한풍, 교원 최봉철 등 4명이고 학생은 20여 명이었다.(21) 1913년 3월에 정동서숙은 사립정동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때 교원은 5명, 학생은 8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14년 8월에 여학부를 설치하고 1917년 3월에 중학부증설을 결정하고 학생모집에 착수하였다. 학교의 성망이 높아지자 외지의 많은 학생들이 이 학교에 몰켜들었다. 정동학교는 명실공히 북간도 두만강북안의 또 하나의 반일민족교육진지로 떠올랐다.

1911년 3월에 연길현 소영자에 길동기독학당이 일떠섰다. 이 학당은 이동휘의 창의와 그의 동지인 이종호의 투자로 세워졌는데 그후 광성학교로 확대, 개편되었다. 교장은 이동춘이고 학감은 김립; 교원은 장기영, 오영선, 계봉우, 김하석, 문경; 간사는 구춘선, 이봉우, 황원호, 이남원; 재무에 정현서; 식당주임에 박춘서 등이었다.(22) 학교 내에 중학교와 법률정치과를 두고 그 부속으로 여자 학부와 소학과를 두었다. 중학교는 중학교로 발전되어 명동촌의 명동중학교, 와룡동의 창동중학교, 자동의 정동중학교와 더불어 연변의 최초4대 중학교로 이름이 났다. 학교의 취지가 항일인재양성인데서 “독립군학교”라고도 불리웠다. 그만큼 광성학교의 교직원들은 모두가 기독교계의 이동휘의 동지들로서 1914년 이후 이동휘가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꾸리니 대부분 교원과 학생들이 나자구로 옮겨갔다.(23) 한때 이동휘의 장녀 이인순도 이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24)하였다고 한다.

1907년에 국자가 서북쪽 와룡동(지금의 연길시 원 소영향 민흥촌)에 창동서숙이 세워졌다. 반일지사들인 남성우, 이병휘, 오상근 등의 제의와 최병균, 최종한, 최병규, 오상인, 김성옥, 정지형, 지병학, 나시영, 전윤민, 정종현, 오관준, 한영운 등 12명 학교후원회의 합심이었다. 창동이란 조선의 창성을 도모한다는 뜻인데
0년에(25) 중학부를 부설하고 학교이름을 창동학원으로 개명하였다. 윤병석선생의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에 따르면 개교 초기 이상근, 이병휘, 남성우가 정, 부 원장을 맡고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이진호, 김리택, 송창희, 서성권, 문경 등 8명이 교원을 맡았으며 중학부의 학생은 80여 명이었다. 지금도 와룡동에 가 보면 마을 동쪽 언덕에 1935년에 세운 “사은기념비”가 그대로 우뚝 서 있다.

상기에서 필자는 서전서숙을 발단으로 한 그후의 양정학당, 명동학교, 정동학교, 광성학교, 창동학교의 건립 맥락을 대충 헤아려 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는 당년 북간도의 4대중학교로 불리며 성망이 높았는데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런 학교의 교직원들 거개가 기독교출신들이고 이동휘계의 사람들로서 학교교육의 주체가 반일민족교육이었으며 1910년대 반일계몽운동의 주류를 이루며 1910년대 사립학교교육운동을 힘있게 앞으로 내밀었다.



4. 간도교육회와 간민회


1909년 9월에 일제는 청정부를 핍박하여 이른 바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간도협약에서 일제는 간도의 소속권이 중국에 속한다고 승인하였으나 대신 간도에 있는 조선이주민을 “한국교민”으로 하고 그에 대한 “보호권”을 취득하여 조선족들의 견결한 반대를 받았다. 이해 10월에 용정과 명동의 박무림, 김약연 등 30여 명 인사들은 “간도한인자치회”를 결성하고 연길지부에 수차 비준을 신청하였으나 일제의 반대와 연길지부 도빈의 거절을 받았다.(26) 어떤 글에서 보여지는 한인교민회나 간도교민회는 사실 간도한인자치회를 가리킨다.

그후 1910년 3월, 국자가를 중심으로 한 예수교와 천주교의 반일지사 40여 명도 연길지부 도빈에게 “간민교육회” 인가신청을 하였다. 도빈은 조선족학교에서 중국어로 교수하며 중국교과서를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준하고 일찍 귀화입적하고 변무공서 교섭과 통역을 맡은 “반일친중국”파이며 조선족교육가인 이동춘을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연길지부는 이동춘에게 노임을 발급하면서 2명의 서기를 배치하고 간도교육회 본부를 연길지부 내에 설치(27)하도록 하였다.

간민교육회는 회장에 이동춘, 부회장에 박찬익, 윤해, 평의장에 손운순, 재무장에 허순, 서기장에 허곤을 두고 여러 현에 지회를 두었는데 1911년에 벌써 회원이 130여 명에 이르렀다.(28) 한편 간민교육회는 조선이주민의 귀화입적을 선전하고 《월보》를 발행하면서 계봉우 등 학자를 청하여 조선족학교의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간민교육회는 간도조선족사회를 이끄는 이동휘 그리고 김립 등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를 받으면서 국자가에 길동기독학당(광성학교)과 길신여학교, 간민모범학당을 꾸리여 조선족교육발전을 크게 도모하기도 하였다.

1911년 2월 당시 간민교육회는 회원이 200여 명으로 발전(29)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이동휘의 측근들이다. 이동휘의 지도아래 간민교육회활동에서 중심이 된 이는 규암 김약연인데 그를 축으로 한 각 지역의 대표들이 뭉친데서 북간도에는 “72형제파”가 출현(30)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각지에서 학교를 꾸리며 교사를 파견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인재양성에 주력한데서 북간도 항일민족운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11년에 중국에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1912년이 신생한 중화민국의 원년으로 되었다. 신해혁명의 과실을 독점하고 북경정부 대통령으로 된 원세개가 “련성자치제(联省自治制)”를 주장하자 이동휘, 김립 등은 간도교육회의 이동춘, 정재면, 박찬익, 장기영 등 4명 대표를 북경에 보내어 연변조선족의 간민자치회 설립을 신청하였다. 북경 정부, 즉 중화민국 임시정부 부대통령 여원홍은 간민자치회의 자치를 삭제하고 간민회를 설립하도록 했다. 1913년 2월, 김약연, 이동춘 등에 의해 연길 지방정부에 간민회 신청서가 제기(31)되고 이해 4월 26월에 국자가에서 간민회총회가 열리었다. 이날 간민회규약이 통과되고 총회간부를 선거하였는데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총회장 김약연
총무 도성
서기 박찬익
민적연구과장 남공선
재정과장 조영하
식산흥업과장 이동춘
의사과장 김병흡
평의원 김영학, 조극, 왕금붕, 현영주, 정재면, 리중집 등.


간민회 각 현 지회로는 연길현이 이근식, 문경, 박동원, 주건이고 화룡현이 마진, 남위언, 박정훈, 김시형, 남세극, 김순문이고 왕청현이 최명록 등이다. 이들은 모두 간민교육회시기의 골간들로서 간민회는 간민교육회의 계승과 발전이었다. 이동휘가 이 시기 러시야 연해주로 간데서 김약연을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간민회의 간부들은 모두 이동휘의 두리에 뭉친 이동회계의 인물로서 당시 북간도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항일민족운동가들이었다.

간민회는 설립된 후 조선이주민의 귀화입적운동을 크게 추진하고 사숙개량운동을 전개하면서 사립학교운동을 계속 내밀었으며 야학교와 식자반을 꾸리고 문맹퇴치를 내밀었으며 각지 농촌들에서 식산흥업(殖产兴业)운동을 벌리며 농민들의 수입을 늘이도록 이끌었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이주민들 조건이 여하하든 무조건 귀화입적을 강요하고 간민회에 끼어 든 일부 불순분자들이 간민회를 턱 대고 농민들을 억압하며 사복을 채우기도 한 등 문제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북간도 조선족사회 항일민족운동의 토대를 마련하고 조선족사회의 새 기원을 열어놓은 역사적 역할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단 귀화입적 문제에서도 그러하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삼켜버린 후 민국정부가 중국적에 가입하지 않은 조선 이주민에 대해 백방으로 압력을 가한데서 입적고조가 재빨리 형성되었다. 그러나 지방관청에서는 “국적법이 나오지 않았기에 국제사이에서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입적수속을 해 주지 않았다. 이에 이동춘과 김립은 만세대의 조선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북경에 가서 민국 국무원에 “만호청원귀화입적서” (万户请愿归化入籍书) 를 제기하여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다.(32) 한데서 조선이주민들은 개인신분으로 입적수속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식으로 국가법률의 보호를 받았다.

그때 민국정부에서는 법령을 내려 조선이주민들의 토지몰수를 합법화하였다. 이동춘은 또 북경에 가서 초대 대통령 원세개를 찾아 법령에 밝힌 간민들의 토지몰수규정을 철회케 하는 한편 조선이주민들의 이름으로 토지소유를 합법화(33)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4년 말 간민회는 농무계와의 모순으로 하여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간민회의 주요한 간부들은 두 패로 나뉘어 활동하였다. 한 패는 김립, 오영선, 장기영, 김하석, 남공선, 문경 등이 이동휘를 따라 나자구에 가서 사관학교를 꾸리고 구춘선 등이 하마탕에 비밀활동기지를 꾸려 그 뒤 국민회총부소재지를 마련하였으며 다른 한 패는 김약연을 중심으로 김약연, 정재면, 김병흡, 김영학, 박동원, 이중집, 마진, 주건, 남세극, 최명록 등이 계속 각지에 남아 반일교육을 앞세우면서 항일인재육성에 전력하였다. 간민회가 해산된 후 이들은 북간도의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면서 중국 지방관헌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여 조선족의 자치를 도모하는 한편 후에 나온 상해임시정부에 의거하여 항일민족무장투쟁을 크게 내밀었다.


5. 나자구사관학교와 철혈광복단


1910년대 조선 이주민이 모여살고 있는 북간도는 각종 종교단체들의 중요한 활동지대였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교(기독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1913년에 이동휘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간도교육회의 기초에서 간민회를 설립한 후 조선인의 귀화입적을 주장하며 반일문화계몽운동을 내미는 한편 예수교의 명의로 맹활약을 벌리었다. 이 시기 이동휘는 훈춘현에 가서 이 현에서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반일독립지사 황병길과 연계를 맺고 예수교의 힘으로 민중을 쟁취하면서 반일의 힘을 키웠다. 하여 짧은 시간 내에 연변의 예수교신도는 10여 만으로 늘어나 큰 세력으로 발돋움 하였다. 1914년 봄에 이동휘는 소영자의 학교지도를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김립 등과 함께 왕청현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나자구로 갔다.

나자구는 지금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변계에 위치한 편벽한 고장이다. 1910년대 초 이 고장 조선이주민들 호구가 이미 1,000세대를 넘기었는데 그들 모두가 연변 개척 초기에 이 고장에 이주해 와서 자리를 잡은 조선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었다. 조선서 망명한 의병과 애국지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나자구의 삼도하자와 태평구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반일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중 태흥서숙은 구한말 대신이었던 이용익이 나자구 지방유지들의 지지로 세운 학교인데 1913년 3월 경에 태흥서숙에 중학부를 설치하고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결과 이 학교의 학생수는 시초의 80여 명으로부터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해 가을에 소영자 광성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밀려 들자 학생 수는 보다 상승선을 그었다. 1914년 12월에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이 태평구 태흥서숙과 광성학교를 토대로 무관학교를 세우니 창동, 정동, 명동 학교들과 조선,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무려 300여 명에 달했다. 학교교장은 이동휘이고 김립, 장기영, 오영선, 김영학, 김광은 등이 지도책임을 맡았다.(34)

태평구무관학교의 기본 교수내용은 군사훈련과 반일독립사상전수이고 기본취지는 항일민족운동을 위한 군사골간양성이었다. 학생들은 과당에서 군사지식을 배우고 운동장과 야외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애국가”, “독립운동가”의 노래소리가 우렁찼다.

1915년, 교장 이동휘는 무기구입차로 러시야 연해주로 갔다가 독일특무의 혐의로 짜리러시야 경찰한테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태평구에 세워진 나자구 무관학교는 엄중한 위기에 직면한 데다가 일제의 협박에 의한 중국 지방정부의 해산령으로 1915년 말경에 취체되었다. 남공선, 장기영 등은 일부 사생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가고 오영선 등 다수 사생들은 훈춘현 대황구로 옮겨가 당지의 양하구, 김남극 등 반일지사들과 상의하고 원래의 북일학교를 중학부가 달린 9년제 학교로 만들었다. 때는 1917년 1월이다.(35) 이동휘가 명예교장을 맡고 양하구가 교장, 김남극이 부교장, 오영선이 교장대리를 맡았다. 북일중학교는 나자구 사관학교의 후신으로서 사관학교의 맥이 그대로 이어졌다.

1910년대 중기 항일민족투쟁에서의 획기적인 사변을 나자구무관학교와 더불어 철혈광복단의 탄생으로 꼽을 수 있다. 철혈광복단은 1915년 전후에 북간도와 러시야 연해주 반일열혈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조직(36)이다. 말 그대로 비밀결사조직인데서 이 조직의 상세한 내막은 잘 알려지지 않으나 이동휘와 그의 기독교계 동지들에 의해 조직되고 움직여진 것은 사실이다. 철혈광복단은 결성된 후 이동휘 등에 의해 미국, 상해, 천진, 북경, 서울, 평양 등 각지의 반일지사들도 망라되었다고 하는데(37) 아직 이에 대한 연구자료가 잘 따르지 못하고 있다. 믿음직한 것은 1920년 1월, 15만 원 탈취사건참가자인 최봉설의 회상이다.

최봉설의 회상에 따르면 철혈광복단은 1914년 나자구사관학교출신인 남공선, 김립,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 등이 중심이 되어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등 수십 명 열혈청년들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38)라고 한다. 최봉설 등이 철혈광복단에 참가한 것은 1914년 8월 10일로서 무명지를 깨물어 “철혈광복단 맹세”란 혈서를 썼다(39)고 알려진다. 해당자료를 보면 1919년 3.13운동에서 희생된 박문호나 채창헌, 최익선도 나자구사관학교시절에 최봉설과 같이 벌써 철혈광복단 성원이었다. 최봉설은 또 “박문호는 창동학원의 교원이었는데 1915년에 남공선교원과 함께 임국정, 최봉설, 최익선 등을 데리고 나자구사관학교에 갔다가 임국정, 남공선과 함께 노령에 들어간 후 다시 돌아와서 서고성자에서 소학교교원을 담임하고 반일운동을 하였”다고 회상(40)하였다.

최근에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철혈광복단의 주성원인 채창헌의 유가족 채경숙 여사를 찾게 되고 취재하는 가운데서 채창헌의 가족내력을 다소 헤아려 보았다. 채창헌은 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흥진촌 사람이다. 1910년대는 연길현 수신향 오도구 흥연촌으로 통했다. 채창헌의 출생시간을 알 수가 없지만 채경숙여사가 구술한데 의하면 채창헌은 오두구 흥영촌 출생으로 알려진다. 채경숙여사는 2004년 76살로서 1929년 생인데 여사의 친할아버지 채창묵은 채창헌의 맏형이었다. 채창묵은 오두구에서 서당훈장으로 있었고 아래 채인묵, 채창호, 채창헌, 세 동생을 두었다. 즉 4형제였는데 채창헌은 형제중 막내로서 장가도 못 간 총각이었다. 생전에 오도구 사립경애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확실히 왕청현 나자구사관학교시절에 쳘혈광복단에 가입했었다.

철혈창복단은 1919년 용정 3.13운동을 앞두고 크게 확충되었다. 이해 2월 18일 밤, 조선독립의사회의 사회하에 국자가 박동원의 집에서 3.13운동의 희생을 예견하고 혈서를 쓰고 철혈광복단 가입의식을 가지었는데 이날 밤 혈서를 쓰고 새로 철혈광복단에 가입한 이들로는 아래와 같다.


국자가 지방: 이홍준, 이성근, 박동원, 김영학
용정지방: 김정
개산툰지방: 백유정
팔도구지방: 유례군
평강구지방: 고동환


이밖에도 일찍부터 반일운동에 나섰던 김순문, 강룡헌, 구춘선, 이성호, 고평, 최봉렬, 박정훈, 이동식 등도 철혈광복단에 대거 가입(41)하였다. 철혈광복단의 주체는 기독교출신으로서 이동휘계의 사람들이었다.


6. 3.13운동과 간도국민회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내놓은 “민족자결론”은 해내외 각지의 조선인들을 지대히 고무했다. 미국의 조선인들은 빠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념원에서 그해(1918년) 11월 중순에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전 미 조선인독립청원집회를 가지고 빠리에 파견할 대표를 선정하는 한편 이 운동을 위한 의연금모집활동을 벌리였다. 이 소식이 일본 고베의 해당 신문들에 실리고 로씨야 연해주땅에 알려졌다. 연변에서도 독립운동의연금 모집위원회가 나오고 선정한 민족대표를 연해주에 보냈다.

기독교계열의 국자가 항일운동가들은 조선 고종황제의 인산, 즉 국장을 계기로 요배식을 가지기로 하고 1919년 2월 18일과 20일, 항일운동가 33명은 국자가 연길도윤공서 외교과 관원 박동원의 집에 모여 당면 투쟁방침을 토의하고 조선 독립운동의사회를 구성(42)하였으며 철혈광복단 혈서서명을 가지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전민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3월 7일 밤에 서울의 독립선언서가 연변에 전해졌다. 용정, 국자가, 명동 등 지의 각 사립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가지고 연변의 반일집회를 촉구하였다. 3월 9일 저녁, 조선독립운동 의사회에서는 긴급회의를 가지고 연해주와 같이 행동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3월 13일 용정에서 먼저 “조선독립선언발표축하회”를 가지기로 결정 짓고 새 독립선언포고문 작성에 착수하였다. 이어 명동학교의 학생들은 정동학교와 연계를 맺고 320여 명의 충혈대를 조직하였다. 국자가 도립중학교에서는 자위단을 무었다.

1919년 3월13일, 용정에서는 연길, 화룡 등지의 민중 3만 여 명이 모여 전례없는 규모의 반일집회를 가졌고 성세호대한 반일대시위를 단행하였다. 경황실색한 중일군경들은 시위군중들을 잔혹하게 탄합하였는데 당장에서 10여 명이 죽고 20여 명이 부상당했다.

3월 13일 오후 대회해산 후 조직자들은 구춘선, 강봉우 등 5명 대표를 국자가에 파견하여 연길도윤공서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고 3월 17일에 제창병원 마당에서 3,000-4,000명이 참가한 14명 의사의 장례식을 성대히 가지였다. 오후3시에 합성리 동산묘지 장례식이 끝나자 렬사들 묘지 앞에는 나무묘패가 세워지고 그앞에 《충렬사제공지묘(忠烈士諸公之墓)》비석이 세워졌다. 그후 3.13중상자 중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등이 또 희생되다 보니 용정3.13운동에서 희생된 렬사는 도합 17명(19명라고도 함)이나 된다.(43) 용정 3.13후 이 운동은 북간도전역에서 맹렬히 터져올랐다.

1919년 3.13운동 이후 조선독립운동의사부는 3월 15일부터 21일까지 연길현 지인향 소완자(지금의 연길시 원 장백향 인평촌)에 모여 3.13학살 선후사업을 토의하고 독립운동 의사부를 “한족독립기성총회”로 개칭하였다. 개칭된 후의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회 장: 구춘선
부 회 장: 마진
의사부원: 유예균, 김병흡, 최원일, 고용환, 배형식, 강구우, 이대현, 이봉 우, 김순문, 김약연, 신명덕, 정재면, 김신근, 최자익, 박정훈
재무부원: 유찬희, 서성권, 진석함
교섭부원: 고용환(겸), 배형식(겸)
편집위원: 유하천, 최기학, 김정
통신부원: 이홍준, 강백규, 김상호,
경위부원: 박정훈(겸), 최웅렬, 이춘성, 장우범


3월 21일, 러시야에 간 김약연, 정재면 등 연변대표들이 국자가에 돌아와 2월 25일 러시야에 임시정부형식인 “국민의회”가 수립되었으니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러시야에서 이동휘, 국민의회 군사부장인 김하석과 토의한 무장투쟁방침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한족독립기성총회는 반일무장투쟁의 수요에 따라 3월 21일-31일 경에 대한간도국민회로 개편하였다. 대한간도국민회는 중앙총부와 5개 지방총회로 되었는데 그 조직구성(44)은 아래와 같다.


중앙총부:
회 장: 구춘선
부 회 장: 강구우(초기) 서상용(후기)
총 무: 김규찬
비 서: 최자익
재무부장: 유찬희
서무부장: 김승국
편집부장: 이 완
사범부장: 최익룡
군사부장: 한중근
통신부장: 김병흡
통신부원: 정기선, 황일보


※중앙총부 소재지는 처음에 구춘선이 활동하고 있는 연길현 하마탕에 설치하였다가 후에 연길현 의란구 구룡평으로 지대를 옮기였다.


중앙총부산하 5개 지방총회:


중부총회: 중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국자가서구(西沟)에 두고 산하에 두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중부지방회는 연길현 팔도구, 태양, 조양천 일대를 관할하고 제2중부지방회는 연길현 국자가 지방을 관할하였다.

동부총회: 동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지인향 화련리에 두었다가 연길현 용지향 화전자로 옮기였는데 산하에 두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동부지방회는 왕청현 양수천자(지금은 도문시에 귀속)일대를 관할하고 제2동부지방회는 용지향 화전자일대를 관할하였다.

남부총회: 남부총회는 소재지를 화룡현 지신향 명동에 두고 산하에 두 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남부지방회는 용정과 회령대안 일대를 관할하고 제2남부지방회는 화룡현 이도구, 삼도구, 무산대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서부총회: 서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숭례향 명월구에 두고 1.2지방회를 나누지 않았다. 대신 돈화현 관내의 국민회지회가 서부총회에 소속되고 명월구에 《4.1상점》을 꾸렸다. 또 초기에는 제1남부지방회를 서부지방회로 부르다가 후에 남부지방총회에 넘기였다.

북부총회: 북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춘화향 합수평 이대방자(지금은 왕청현에 소속)에 두고 산하에 두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북부지방회는 연길현 춘화향 일대(지금은 왕청현에 소속)를 관할하고 제2북부지방회는 연길현 춘양향일대(지금은 왕청현에 소속)를 관할하였다.

이상이 간도국민회 중앙총부와 다섯개 지방총회 개략적인 소개이다. 국민회는 각 지방회 산하에 80여 개의 총지회(지방지회)(45)를 두었는데 가장 많을 때에는 총지회가 무려 133개를 이루었다. 세력범위를 보면 남으로는 화룡현 남부의 덕화, 숭선 일대에 이르고 북으로는 왕청현 나자구, 동으로는 양수, 서로는 명월구, 돈화 일대에 이르렀다. 명실공히 연변지구에서 가장 큰 항일단체었는데 조직취지는 항일무장투쟁이였다. 간도국민회는 청일색의 기독교계열로 이루어졌으며 활동시 모두가 기독교명의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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