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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더불어 길이 빛날 청년문사
리광인
명동을 찾아 윤동주시인을 떠올릴 때 도저히 빠뜨릴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송몽규,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서 청년문사로 이름이 났다. 그는 윤동주보다 석달 앞선 1917년 9월 28일에 윤동주네 집에서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리만치 평생 특이한 관계속에서 살아간 사람이다.
윤동주연구자로서는 다 알다싶이 윤동주의 본관은 파평이다. 파평윤씨의 족보는 옛날 보령공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윤동주는 보령공으로부터 20대에 머무른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尹在玉,1844-1906)은 보령공의 17대손으로서 함경북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서 살다가 42살되던 해 1886년에 솔가하여 두만강을 건너 종성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에 자리잡았다. 그때 윤동주의 조부로 되는 큰아들 하현은 11살이고 둘째아들 덕현이는 8살인 모양이다.
1900년에 윤재옥은 또 일가식솔을 휘동하여 자동에서 명동촌으로 옮겨앉았다. 명동촌에서도 부유한 살림은 매일반이였다. 첫 자동이주시 11살 소년이였던 윤하현은 자동에서 어른으로 자라나 강씨처녀와 결혼하고 20살때 외아들 영석이를 보고 그 아래로 두딸 신영과 신진을 보았다. 영석과 신영은 자동에서 낳은 자식들인데 영석은 커서 윤동주의 아버지로 되고 신영은 커서 송몽규의 어머니로 되였다.
윤영석은 1909년부터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다가 북경류학을 하기로 하고 일본 도꾜에서 공부하며 1923년의 관동대지진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윤영석은 결혼하고 1917년 12월 30일에 아들 윤동주를 보았는데 그의 큰 누이동생 윤신영(1897년생)은 1916년 봄에 명동학교 조선어교원 송창희와 결혼하고 역시 이듬해 1917년 9월 28일에 장남 송몽규를 보았다. 그때 윤신영부부는 처가에 얹혀 살다보니 송몽규를 윤동주네 집에서 낳았던것이다.
송창희가 처가집에 얹혀살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는 명동사람이 아닌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출신으로서 웅상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공부하다가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그럴 때 서울 청년학관 출신이고 주시경선생의 제자인 친구 박태환이 초창기의 명동학교에서 조선어교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어느날, 명동의 어느 학자 집안에서 좋은 신랑감을 박태환선생께 부탁하였다. 이에 박선생에게 선참 떠오른것이 송창희여서 친구를 명동으로 불렀다. 송창희는 결국 김약연학자 집에 머무르다가 윤동주의 어머니가 된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의 욕심으로 윤동주의 고모 윤신영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 눌러앉기에 이르렀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고종사촌관계를 밝혀주는 가족의 래력이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어려서 한 가마밥을 먹고 한 지붕아래, 한 반, 한 교실에서 공부하면서 지극히 이어진 삶을 살았다.
그들 둘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동주와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그들이 다 읽은후면 동네아이들이 돌아가며 보았는데 그 시절에 벌써 송몽규네 학급은 문학소년반으로 널리 알려졌다. 5학년때에는 담임교원 한준명선생이 지어준 《새 명동》이름으로 등사월간잡지 몇호를 꾸리기도 하고 학기말이면 선생님의 지도하에 제법 연극을 놀기도 하였다. 문학기량을 닦아가는 좋은 기회였다.
송몽규가 명동소학교 4~5학년을 다니던 시절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그때 조공당만주총국 동만도의 활동은 성세를 일으키며 연변땅을 누비였고 사회주의사상은 갈수록 인심에 널리 침투되였다.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선생이 새 사상에 동조하는 축이였다면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선생도 그런 경향을 띠여갔다. 이는 10대의 송몽규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수 없었다.
1928년에 사회주의 새사조와 반종교운동의 충격하에서 명동학교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명동교회의 장로이고 교장인 김약연선생과 정면으로 맞다들었다. 그때 명동소학교 4학년생인 송몽규는 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앞에 척 나서서 학교교육은 반드시 교회와 분리하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로하였다.
1931년 3월, 송몽규는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윤동주와 더불어 달라자 현립 1교 6학년에 전학하고 룡정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윤동주의 공부로 동주의 가정이 룡정으로 이사하게 된데서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거처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송몽규는 은진중학교시절에 문학장끼를 떨치기 시작했다. 1934년 12월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작품을 응모했는데 송몽규의 작품 《술가락》(숟가락을 가리킴)이 콩트에 입선되여 1935년 1월 1일부 동아일보에 실리였다. 이에 앞서 송몽규는 1934년 중학교 3학년 시절에 자기의 호를 문해(文海)라고 짓고 작가로 되려는 굳은 포부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1935년 4월에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명희조선생의 파견을 받고 북경을 거쳐 남경에 가서 김구선생을 만났고 락양군관학교시절을 거치다가 제남주재 일본령사관에 체포되기도 한다. 락양군관학교시절에 송몽규는 군사훈련여가에 자기가 중심이 되여 300페지쯤 되는 등사책을 만든 문학청년이다. 김구선생이 몹시 칭찬하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된것은 1937년 4월이다. 1938년 초봄에 송몽규는 윤동주와 같이 서울에 가서 연전 입시에 합격되여 연희전문학교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때의 모습은 연전시절에 여러 학생들과 같이 찍은 사진에 그대로 잘 나타난다.
이 시절에도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학생회 문우회 문예부장을 맡고 문우회의 잡지 《문우(文友)》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문우지의 원고수집으로부터 배판, 검열, 교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였는데 《편집후기》도 송몽규가 직접 써냈다고 한다.
1942년 4월에 송몽규는 일본 교또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도꾜의 입교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명동의 한집에서 석달 간격으로 태여난 송몽규와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달라자 현립1교, 룡정 은진중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 일본류학 시절을 같이했다면 또 나흘을 앞두고 송몽규가 윤동주보다 먼저 사상범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1945년 일본의 후꾸오까형무소에서 또 한달간격으로 나란히 옥사당한 비극사를 가지였다. 이들은 참으로 길지 않은 인생길에서 생과 사를 함께 나눈 《쌍둥이》였다.
송몽규, 자기의 겨레와 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안고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투쟁에 힘을 보태겠다고 달리고 달리던 이 청년문사는 1945년 3월 10일에 이국땅에서 옥사한후 아버지 품에 안겨 고향땅으로 돌아왔다. 부모들은 아들을 그제날의 연길현 지신향 장재촌 북산 송씨가문묘지에 고이 묻어주었다. 묘비를 세운것은 그해 6월 29일로서 윤동주묘비보다 15일 뒤였다. 그러나 지난 8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연변의 고향사람들은 윤동주는 물론 송몽규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1985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교수가 연변대학에 객원교수로 오셨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름은 그때부터 연변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송몽규의 묘소도 룡정중학교 교장 류기천 등이 장재촌로인들을 통해 알게 되고 1989년 12월 18일에 권철교수, 류기천교장 등 일행이 비로소 선참 배알하게 되였다. 권철교수의 회상에 따르면 오래동안 가토를 하지 못한 무덤은 퍽 작아지고 잡초가 무성했으며 《청년문사 송몽규지모(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고 새겨진 묘비는 넘어져 있더란다.
1990년 4월 5일 청명날에 송몽규 청년문사의 묘소는 룡정중학동창회의 주최로 룡정시 동산 중앙교회묘지에 이장되였다. 윤동주시인의 묘소와는 서쪽으로 불과 10여메터 떨어진 곳이였다. 헌데 이것이 그제날 5대가문 후손들의 유감을 자아냈다. 5대가문이란 1899년 2월 18일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과 회령서 살다가 명동으로 집단이주한 김약연 등 네 가문, 총 141명과 그뒤 개산툰 자동서 명동에 들어선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일가를 가리킨다.
지난 10월 15일에 필자는 김약연선생의 증손 김재홍선생과 문익환선생의 딸 문영금, 문선생의 친동생 문영환선생 등 분들과 함께 명동과 장재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그날 명동일대의 소룡동과 대룡동, 명동마을 동쪽 언덕의 문씨선산 답사에 이어 문익환목사 생가터인 장재촌 동구, 김약연선생 묘소, 규암재자리 등을 답사하였는데 답사도중에 장재촌 동쪽언덕에 자리잡았던 송몽규묘소자리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때다. 김재홍선생과 문영금녀사는 움푹 패인 원 송몽규묘소를 안타까이 지켜보면서 송몽규묘소를 룡정동산묘지로 이장한 자체가 잘못이였다면서 그제날 5대가문 후손들의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인지 장재 송씨가문의 후손중의 한 사람인 한국 송우혜녀사(“윤동주 평전”을 펼친 사람)는 1993년 4월 5일에 벌써 송몽규묘소자리에 “청년문사 송몽규이묘유지”비석을 세워주었다. 비석은 자그만한 돌비석이였는데 외롭게 송몽규 원 묘소를 지켜주고있었다.
뒤늦게야 송몽규 원 묘소를 찾아본 필자는 “청년문사 송몽규이묘유지”비석이 갖는 의의를 깨닫고 송우혜녀사한테 진정 탄복이 갔다. 이 비석이 세워짐으로 하여 사람들은 송몽규묘소자리를 알게 되고 송몽규문사를 보다 기리게 되며 송몽규묘소자리가 명동일대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게 하였다.
송몽규, 민족의 정통문화를 지켜내기 위하여 이국땅 일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이 조선족청년문사는 드디여 고향사람들의 맘속에 영생하게 되였다.
(2004년 10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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