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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에서의 지장보살의 지위와 형상 문제
리 함
1. 제기되는 문제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남쪽가에는 불교명승지로 이름난 향로봉과 노봉선사가 있고 그 어구에 회계산 천복원과 지장전이 있다. 중국 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로 떠오른 지장보살, 그것도 지장보살의 부름을 딴 지장전이 왜 회계산 천복원 빈소에 일어섰을까? 2006년 9월, 필자는 남방 절강에 온후 이에 짙은 흥미를 갖고 지장보살님에 대해 주의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는 점차 연구과제로 형성되고 “남방백성들 속에서의 지장보살의 지위와 형상문제”를 선참 론문연구로 떠올렸다.
2. 지장보살은 역사 속 진실한 인물
할진대 중국 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님인 지장보살이란 누구인가? 이를 알자면 지장보살이란 과연 진실 역사 속 인물인가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고 보아진다.
지장보살은 흘러간 역사 속 실제인물로서 이름은 김교각이라고 부른다. 옛날 신라 김씨왕의 가까운 친척이라고도 하고 신라국의 왕자라고도 하는데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으며 출가한 것으로 알려진다.기원 653년(절강 천대산 국청사 자료에 이렇게 밝힘) 인 24살 때 신라에서 홀로 당나라 구화산으로 왔고 그때의 구화산은 원시림 무인지대었다고 역사자료들은 밝힌다. 깊은 산 속 생활은 지극히 어려워 시초 관음토와 도토리죽 을 끓여 먹으면서 도를 닦았다고 하니 불교에 심취한 신라사람 김교각님의 끈질긴 노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깊은 산속 석굴 속에서 홀로 도를 닦는 그 모습은 산아래 백 성들과 지방관리들을 감동시키었다. 그런 고로 천고의 원시림지대에 절이 지어지고 신도들이 사처에서 모여 들었으매 75년간의 설교속에 그 이름이 국내외에 뜨르르 했다고한다.그러던 김교각님이 99세에 구화산에서 시적하니 신도들은 한결같이 그를 지장보살이라고 칭하고 구화산을 지장보살 도장으로 불렀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안휘 구화산은 절강성의 보타산,사천성의 아미산,산서성의 오대산과 더불어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로 떠오르고 김교각은 보타산의 관음보살,아미산의 보현보살,오대산의 문수보살과 더불어 중국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로 떠오르게 되었다.
역사속으로 헤쳐본 신라인 지장보살님의 진실한 개괄이다.이런 지장보살님이 소흥 향로봉 아래 불교사원—노봉선사 종루에 모셔지고, 그 부근에 일떠선 웅장한 “지장전”에 모셔지고, 절강성내 또 하나의 불교성지 천대산 국청사에 모셔지고, 절강 서시의 고향—5설선사에 모셔지고, 항주 4대절의 하나로 근2000년의 유구한 역사 가진 불교성지 — 서호가 영은사 5백 라한당 등에도 정중히 모셔졌다. 그에 따라 필자는 절강 백성들, 더우기 남방 농촌들에서 지장보살에 대한 지장신앙이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마지 않았다.
3. 남방 농촌들에서의 지장신앙
절강성 천대현 현지(县志) 기재에 따르면 매년 음력 7월 30일 지장보살의 탄생일 저녁이면 집집마다 옥변로방(屋边路旁)에 향을 꽂고 향불을 피우는데 마을마다 거리마다 등불과도 같이 가관, 이튿날 이른 새벽이면 아이들은 앞다투어 향대를 뽑아들고 기꺼이 즐긴다고 한다. 민간의 이런 풍습은 오늘에도 여전한 모양이다.
그러면 남방의 민간들에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지장보살을 존경하며 극진히 모시는 걸까? 해당 자료를 더듬는 가운데서 나는 두 가지 원인에 기인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1첫째 원인: 지장보살의 지위가 지고무상하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중국 4대 불교성지는 절강성의 보타산, 사천성의 아미산, 산서성의 오대산 등을 두고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4대불교성지는 보타산의 관음보살, 아미산의 보현보살, 오대산의 문수보살, 구화산의 지장보살의 수행(修行)한 도장을 가리키는데 구화산이 불교 4대명산으로 받들리는 것은 지장보살이 변신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경에 따르면 김교각에 앞선 고불(古佛)보살은 원래 불교시조 석가모니의 힘을 빌어 중생을 구제하는 석가모니의 대업을 보좌한 보살로 알려진다. 그러던 석가모니가 입멸(入灭)하고 미래의 미륵이 인간세상에 내세하기 전 이 기나긴 세월에 부처가 없었는데 지장보살은 석가모니의 부탁을 받고 이 기나긴 세월 속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중임을 짊어지게 된다. 마침 신라왕족 김교각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와서 당나라 구화산에서 75년간 도를 닦다가 시적하게 되는데 시적한 후의 김교각의 모습이 불경에 기재된 지장보살의 모습과 꼭 같았기에 사람들은 지장보살이 구화산에서 변신, 즉 지장보살이 세상에 내려온 화신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적절히 말하면 김교각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대지에 내려와 대지처럼 넓은 흉금과 착한 마음씨로 인간, 천당, 지옥의 육도중생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김지장, 즉 지장보살이니 현세에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3.2둘째 원인: 지장보살의 숙원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직 “지장본원경”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본원경에는 석가모니가 일찍 지장보살을 불러 보살더러 영원히 유명교주(幽冥教主)가 되어 육도중생을 구제하며 다 같이 극락세계에 오르라고 부탁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고한다. 그런 지장보살님이기에 불교 시조의 막중한 부탁을 두고 불교 시조앞에서 바로 “지옥에 고통스러운 중생들을 몽땅 해탈시키지 못하면 천당으로 올라가도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했고 대원지장의 존호(尊号)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지장보살의 화신이니 신앙자들이 줄을 서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남방 농촌들에 보편적인 모양인데 그들이 즐기는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의 주요책임이 인간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이라 할 때 지장의 중책은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 하나는 밝은 세상이고 하나는 어두운 세상이다. 밝은 세상과 어두운 세상과의 관계형성은 회계산 천복원 지장전을 찾으면 터득이 가게 된다. 남방 민간에서 어찌하여 매년 음력 7월 30일 저녁이면 향불을 피우며 소박한 행동을 하는 지가 헤아려진다. 지장보살이 1000여 년 전 음력 7월 30일 저녁에 갑자기 시적한 후 그의 제자들은 7월 30일 을 지장보살 탄생일과 지장보살 도장의 창립일로 결정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매년 7월 15일부터 7월 30일까지 국내의 수많은 향객들은 구화산으로 몰려들고 7월 30일 밤이면 등불을 걸어놓고 종을 울리며 향불을 피우고 보살님께 절을 하며 경을 읽고 밤을 지새우는것은 이 때문이다.
4.지장보살 김교각은 신라인
지장보살—김교각은 신라인이였다. 절강 월수외국어대학에 와서 한족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면서 김교각에 대해 보다 이해하게 된다. 이같은 이해에 토대하여 본문에서 남방백성들 속에서 지장보살의 지위와 형상문제를 두고 실례를 들어 여러 모로 탐구하여 보았다. 이 속에서 우리는 신라인 김교각은 역사 속 이미 중국 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지장보살로 떠올랐고 남방의 백성, 더우기 농촌들에서 지울 수 없는 지위와 형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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