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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산순례】(3) 청양에서 자정을 보내다
2007년 07월 22일 01시 33분  조회:3464  추천:116  작성자: 리함

【구화산순례】(3)

 
 청양에서 자정을 보내다

 

    밤은 8일 자정을 넘어간다. 고마운 운전사 덕분에 청양에 와서 쉽사리 호텔을 잡았으나 하루간 호텔주숙비가 70원, 나는 에어콘이 있다니 두말않고 주숙수속을 마치였는데 고급방이라는 4층의 2호실은 어느 향촌의 려관집보다도 허수름하였다. 마침 바깥으로 이어진 베란다가 있어 바깥베란다에 서보니 야색에 잠긴 청양현성이 한눈에 안겨진다.

“?”

나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가 없다. 현성의 어느 모퉁이든, 현성의 교외이든 현성은 현성이겠는데 80년대의 연변 어느 현성마냥 스산하기가 그지없다. 구화산이 뜨고 지장보살님이 뜬다는 오늘의 중국불교 4대명산 지대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21세기에 잡아든 청양현성거리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될가?)

리해할수 없는 의문이 일순 온몸을 휩쓴다.

내가 왜 구화산순례 첫 걸음을 청양으로 잡았던가? 말하자면 1989년 1월에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출판하고 조선족고적총서로 된 “지장보살 김교각법사”책부터 얘기가 돼야 할것 같다.

당나라 지덕년간에 신라인 김교각이 자기가 나서자란 조국을 떠나 당나라에 온후 자리를 잡은것은 오늘의 강남 제일강산 - 구화산. 산이 높고 경치가 수려한 구화산은 장강의 동쪽, 즉 강남 지주의 청양현 경내에 자리잡았으니 지장보살 김교각님을 떠올리면 자연히 청양부터 떠올려야 했다.

김교각님으로 말할진대 청양은 갈라볼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다. 김교각님은  청양현 구화산에 이르러 산이 좋은것을 보고 마음 들어 오늘의 동애, 또는 동암이라고 불리우는 서쪽 산기슭 석굴에 헌 가마를 걸어 놓고 백토에 쌀을 약간 섞어 끼니를 이어가며 고심히 도를 닦고있었다.

그때가 20대중반의 한창 열혈나이. 당나라 지덕년초의 어느날 청양현의 신사 제갈절이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구화산의 산우평지에 올랐다가 김교각을 발견하고 감동된 나머지 귀가후 열성껏 의연금을 모아 김교각한테 절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구화산의 첫 불교사찰로 되는 화성사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건중년초에 이르러 강남의 지주군수 장암이 조정에 상주서를 올려 “화성사”란 편액을 하사받으니 중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화성사가 흥성의 일로를 걸었다고 전해진다.

김교각님이 처음 구화산에 자리잡고 도를 닦을 때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시절에 민양화라고 부르는 청양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구화산의 산주인이였다. 하루는 김교각님이 그를 만나 부처님 모실 땅을 달라고 청들자 민양화가 허락하매 김교각님이 입은 가사를 휙 펼치니 온 구화산이 덮이더란다. 민양화는 이 어른이 보통 어른이 아니라고 기끼어 땅을 희사하더니 그의 공자님까지 출가시킨다. 역시 김교각님에 걸맞는 청양땅이요, 청양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구화산순례에서 선참 찾고싶은 고장이 청양이였다. 청양이 현성이니까 청양을 찾으면 구화산을 쉽사리 찾을것 같았다. 과연 청양에서 구화산까지 32킬로메터 거리밖에 안되고 뻐스로 한참 정도면 간다니까 모든 시름을 덜어도 좋을것 같았다.

나는 이윽토록 청양의 밤거리를 일별하며 베란다를 떠나지 않았다. 그럴 때 한쌍의 젊은 남녀가 팔을 끼고 거리를 조용히 산책하고있었다. 보매 본지방 사람 같질 않았다. 야색속에 산책하는 그들을 내려다보노라니 불현듯 24년 남방행이 떠올랐다.

24년전의 나는 연변대를 갓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한창나이다. 금방 결혼하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 배치받았는데 상해, 소주, 구강, 남창, 광주 등지를 두어달 누비며 력사답사길에 올라야 했다. 도리대로 말하면 처음 밟는 중국 제1  대도시요, 만리 장강이요, 겨울에도 꽃피는 광주요∼ 응당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헌데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동행한 당사연구실의 왕청산선배 보고 말했다.

“남자 꼬부랑 둘이서 돌아다니니 상해요, 광주요 해도 멋이 없군요.”

“나도 쑈리와 같은 맘이네. 그래도 녀자가 있어야 멋이 나나 보지.”

조선말을 잘하는 선배 왕씨도 제법 동을 달아주었다. 정말이지 “선경”이라 해도 녀자없는 “선경”은 멋이 나지 않았었다.

그때 그 생각을 하며 나는 피씩 웃고말았다. 귀가행이 급하지 않았던들 이번 걸음에 안해와 경원이를 데리고 왔더면 얼마나 좋았으랴싶었다.

호텔침대에 누웠으나 이저리 궁싯거리며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언제 쪽잠에 곯아 떨어졌는지, 나는 달콤한 꿈나라에서 구화산을 찾아 헤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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