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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살님은 항일렬사의 조카였다
2007년 08월 25일 14시 10분  조회:3496  추천:97  작성자: 리함

해살님은 항일렬사의 조카였다

 

지난 8 11, 연우산악회 일원인 필자는 화룡시 관문산산행에 나섰다가 우연히도 신입회원 해살님—최성희씨가 필자가 한국서 출판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4권에 넣은 항일렬사 최병학, 리동순 부부의 조카라는 것을 알고 놀라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연우산악회 산행에서 20여년전 연변대 재학시절 수차 방문했던 항일투사를 그의 딸—최성희씨를 통해 다시 인연이 맺아지리라곤 전혀 생각밖이였지요.

최성희씨 아버지 최운학(일명 최영림)은 항일렬사 최병학의 친동생이였습니다.

아래 《부록》으로 정리한 글 한편《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4권에 넣은 렬사전기를 올리여 봅니다. 정리부록은 이제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국경58돌 기획도서로 곧 출판되는 필자의 저서--《겨레 항일지사들》(5)에 오르게 됩니다.

 

 

 

부록(1)

 

 

리동순렬사를 한국서 이미 출판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 3 녀성편에 넣었지만 그의 남편 최병학(崔秉学)렬사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였다. 그러던차 이번 여름방학에 절강에서 연길에 왔다가 렬사의 유가족 최성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여 가정래력을 새로 듣게 되였다.

2007 8 11, 일에 쫓기는 필자는 어쩌다가 시간을 내서 연우산악회 토요산행에 가담하게 되였다. 산행지는 화룡시 관문산이고 항일운동가인 라철, 서일, 김교헌 삼총사 무덤 추모활동도 가지게 되였다. 이것이 인상적이였는지, 처음 대하는 최성희씨는 연길에 와서의 모임에서 렬사문제를 꺼내게 되고 서로간의 이야기에서 최병학렬사의 조카임을 알게되였다. 다시말해 최병학렬사의 동생 최운학(영림)이면 최성희씨의 아버지였다.

이런고로 며칠후 8 18, 필자는 연길시에서 최성희씨 그리고 최병학렬사의 동생 최남학렬사의 최금선(79)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토요산행에 다녀온 며칠간 최성희는 가족의 년장자들을 찾으며 가족사를 새로 정리하며 바삐 보냈다고 터놓았다. 그에 따르면 할아버지 최수관은 항렬에서 셋째로서 한씨녀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넷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맏아들은 최상학이요, 둘째는 최병학, 셋째는 최남학, 아래 최귀인, 막내 최운학- 둘레둘레 남매 다섯이다. 부모들이 일찍 병가한데서 맏아들 최상학이 동생들을 돌보았는데 지난세기 20년대 후반에 벌써 그의 반일사상의 영향하에서 동생들은 모두 혁명자로 자라나 오늘의 도문시 월청일대서 한다하는 항일가족으로 솟아올랐다.

1930 연변 5.30폭동후 최씨형제는 어린 남녀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부부간과 더불어 중공당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 가을의 추수폭동과 1931 가을의 추수투쟁에서도 최씨가족은 투쟁의 주력이였다.

1932 봄부터 일제놈들의 대거토벌이 시작된후 맏이 최상학과 그의 안해는 조직의 지시로 서남으로 수십리밖의 두만강가 개산툰 연두봉일대로 전이하게 된다. 그러다가 추위와 굶주림에 어느 마을로 내려왔다가 불행히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한집에 갇힌채 살해되고 만다.

최병학부부는 우의 본문—리동순부분에서 서술하였기에 피하기로 하고 셋째 최남학은 신씨녀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하나를 두었다. 부부 모두가 중공당원, 1932 봄이후 적들의 겨끔내기 토벌로 낮이면 등산생활, 밤이면 하산생활로 투쟁을 견지하며 일제놈들이 새로 부설하는 연길현 조양천—개산툰구간 철도파괴투쟁에도 뛰여든다.

산속생활에 네살짜리 딸애가 문제거리다. 그들은 딸애를 화룡현 덕신사 남양동 서쪽너머 달라자의 한씨네 집에 부탁하고는 주저없이 떠나갔고 월청일대의 어느 고장에 땅굴을 파고 땅굴생활을 하다가 주구의 밀고로 기습당해 비장한 최후를 마치였다.

최귀인과 최운학은 두살차이다. 1931 추수투쟁때 17살인 최운학은 손우 누나와 함께 소선대에 가입하여 삐라를 뿌리고 통신을 나르는 일들에 발벗고 나섰는데 최운학은 코끄미, 걸만동, 마패 마을로 이루어진 소선대중대의 소대장으로 뛰고뛴다. 그러다가 연길현 동성용 베틀골(동성9) 전이하여 활동, 적들에게 체포되여 연길감옥에서 비인간적인 8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최병학부부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으나 남한테 주고간 그의 딸애 찾지 못하였다. 광복후 연길시 렬군속식당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조선으로 나가고 만나지 못하고만다. 학의 딸애 최금선은 13살에 친인들의 품으로 돌아왔고 79(2007 8) 할머니로 되여 필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알고보니 최씨가족은 항일렬사만도 최상학부부, 최병학부부, 최남학부부 6명이였다.

고마운 이는 최성희씨다. 연변 연우산악회가 인연이 되여 렬사의 유가족을 만날수 있었는데 1981년과1983, 1984년에 필자가 항일렬사조사로 연길현 조양천 교동의 원종농장으로 다니던 시절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필자를 보았다고 한다.

해방후 최성희씨 아버지 최운학(최영림) 선후로 왕청현 동신구 구위서기, 왕청현 농업국 국장, 부현장으로 뛰다가 두번이나 전국로동모범으로 되여 북경에 가서 모택동, 류소기, 등소평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 남명학 지도동지들과 두터운 우정을 맺는다. 1965년에는 새로 건설하는 단위인 연길현 원종농장을 먼저 1년쯤 맡아달라는 주덕해와 남명학의 지시를 받고 농장장으로 부임되여 간다. 자치주에 등용하려는 조치였으나 이듬해 문화대혁명이 터지며 물거품이 된다.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입다가 복직하고66세에 리직,  1994년에 81세로 사망되였다.

최성희씨는 문화대혁명후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 첫해 연변의학원에 입학하여 77년급 학생으로 되였으며 지금은 연변사회정신병원 중층지도일군으로, 정교수급 주임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2007 818, 연길에서

 

 

 

 

부록(2)

 

혁명의 승리만을 믿고

(1907-1934)

 

리동순은 1907년에 화룡현 월청사 기신촌 곡구미(창신평,오늘의 도문시 월청향 기신6)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생활형편이 어려운데서 학교갈 나이에 벌써 아버지,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나서야 했다.

    어느덧 열대여섯 살이 되었다. 돈벌러 연해주로 갔던 오빠가 돌아왔다.  동순이는 오빠한테 동동 매달리며 소련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소련의 사회주의현실은 들을수록 신나기만 하였다. 어린 동순의 가슴속에는 사회주의사상이 소리없이 흘러들었다.

   1926년경에 동순이는 한 마을의 혁명자 최병학과 결혼하고 살림을 차리였다. 별호는 《상고》로 통했다. 오빠와 남편의 영향하에서 동순이는 20년대 후기에 벌써 마을의 야학에 다니며 글을 익히였고 마을의 조공당부녀회원으로 활약하면서 혁명에 투신하였다. 시동생들인 둘째 남학이와 셋째 영림이도 투쟁의 골간으로 나섰다. 말그대로 한다하는 혁명가정이였다.

   1930 5.30폭동이후 리동순은 남편과 더불어 중공당원으로 되었다. 그들이 속한 지부는 중공개산툰구위산하 지부였는데 동순이는 지부의 부녀회책임을 맡아나섰다.

    부녀회의 활동가운데서 여자해방문제가 하나의 내용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서도 매매혼인문제는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났다. 마을의 리석현농군도 매매혼인을 극구 주장하다가 부녀회에 불리여가 한바탕 들볶이였다. 나중에 그는 울면서 자기가 못할 짓을 했다며 진심으로 속죄하였다.

    동순이는 보통 키에 시리시리한 편이여서 사람들에게 《뚱보》로 불리우나 워낙 천성이 활발하고 너그러운데서 사람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즐기였다. 게다가 그의 집이 지부통신처이다보니 드나드는 동지들이 많았다. 식량사정이 현실로 다가섰지만 그는 언제 한번 군소리없이 동지접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31년 가을 동만을 휩쓴 추수투쟁의 불길은 월청일대에서도 기세차게 타올랐다.

    개산툰구 사광사의 수천명 군중들이 중천평, 삼동포를 거쳐 창신방향으로 내려왔다. 월청사의 군중들까지 합치니 대오는 신속히 근 만 명으로 늘어났다. 동순이와 남편, 두 시동생은 기신촌의 투쟁골간으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수천명 시위대렬이 석건평아래 바위굽이에 이르렀을 때 두만강대안의 조선종성 일제수비대와 남양평, 걸만동경찰서의 100여 명 놈들이 마차 30여 대를 가지고 길을 막아나섰다.

    시위대렬은 즉각 따발진을 치고 놈들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각 마을의 적위대와 소선대원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바깥에 서서 간부와 군중들을 보호하였다.

    놈들은 해산하라고 고함치면서 바위에 대고 위협총질을 해댔다. 아츠러운 총소리가 메아리로 귀청을 때렸으나 시위대렬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악이 난  놈들은 10여 명 기병을 시위대렬속에 몰아넣었다. 적기병과 군중들사이에는 일장박투가 벌어졌다.

   약 두시간쯤이 지나자 따발진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그 틈을 타서 우리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들어서 결박해 놓았다.

   어느덧 체포된 사람들은 32명에 달했다. 적들이 그들을 마차에 싣고 조선으로 건너가려 할 때 군중들이 결사적으로 막아나서며 동지탈환투쟁을 벌리였다. 32명동지들속에는 기신촌의 사람만 해도 6명이였는데 그속에는 리동순의 시동생 최영림과 황금송도 들어있었다.

    리동순은 부녀들과 함께 주저없이 마차에 올라 말고삐를 낚아채며 《내 동생을 내놓아라!》하고 소리쳤다. 잇따라 부녀들이 아우성을 쳤다.

    《내 남편을 내놓아라!

    《내 오빠를 내놓아라!

    《내 아들을 내놓아라!

    수천명이 함께 웨쳐대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놀란 적들은 어리벙벙하여 일순 어쩔바를 몰랐다.

    동지탈환투쟁은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군중들은 끝내 결박당한 30여 명의 동지들을 몽땅 풀어냈다. 나중에 동순의 시동생 최영림과 황금송, 황운룡, 백원춘 등 10여명의 투쟁골간들이 끝내 적들에게 끌려갔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니 적들은 바위굽이에서 물러섰다. 그날 밤에 백원춘은 대안의 조선동관에서 풀려나왔다. 이튿날 아침에 또 조선 종성으로 끌려갔던 기신촌의 소선대원 최영림과 황금송이 풀려나왔다. 1983년에 필자가 용정시 조양천에서 노인이 된 최영림이를 만났을 때 그는 추수투쟁 때 그의 나이 17살이였고 큰아주머니 리동순은 그토록 이악스러웠다고 말하였다.

    적들이 물러간후 시위대렬은 계속 기풍현으로 몰려갔다. 당지 지주들은 반항할념도 못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지주들의 승낙을 일일이 받은후 이튿날 새벽에 흩어져 각자의 마을로 돌아갔다. 사광사와 월청사의 추수투쟁은 무려 4~5일간이나 지속되었다.

     1932년봄에 또 동만각지에서 춘황투쟁(즉 기민투쟁)이 고조를 이루었다. 월청사의 군중 500여명은 마패골어구에서 약 20리 들어간 삼동에 집결하여 주구 두놈을 투쟁하였다. 이시기 남편은 반제동맹 지부책임을 맡았다. 리동순은 남편과 함께 투쟁의 골간력량으로 나섰다. 이때 적《토벌》대가 밀려드는데서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해 5월에 권총대와 장총대로 무어진 연화현유격대 일행 50여 명이 주구청산차로 기신, 립봉, 걸만 일대에 나타났다. 이들 주구청산은 지방적위대와의 배합하에서 일어났는데 리동순 등 부녀회원들은 적극 받들어나섰다.

    한데서 월청사 범위내에서의 주구청산투쟁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기신촌의 주구 둘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중상입고 살아났으며 걸만일대의 부흥촌의 안일천은 수색중에 내닫다가 권총대의 총에 맞아죽었다.

    리동순의 남편도 개구유격대의 골간이였다. 그들 부부의 목표가 드러난데서 조직에서는 이들을 현위가 활동하고있는 평강구로 파견하였다. 그때 동순 부부에게는 애어린 딸애가 달려있었는데 지방에 떨구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시동생 남학에게도 딸애가 있었고 그가 1932년 《토벌》에서 희생된후 중국인집에 두었다가 찾아왔다고 한다.

    1932년 여름에 리동순부부는 조직의 배치대로 평강구의 장인강 구룡평에 자리를 잡았다. 이해 겨울에는 또 새로 창설된 어랑촌근거지로 들어갔다. 그뒤 얼마 안되어 어랑촌의 한 팔간집에서 화룡현유격대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12월의 일인데 근 30명 유격대원들이 일제히 새 군복을 떨쳐입고 소련홍군식 꼭두모자를 쓰고 나팔을 불면서 근거지에 드나들 때면 정말 성수가 났다. 리동순은 인제야 제 세상에서 사는것만 같았다.

    동순이와 그의 남편은 인차 어랑당지부에 망라되어 조직생활을 하였다. 사업의 수요로 남편이 어랑당지부책임을 맡았는데 이 지부에는 방승옥 (몽기동 사람, 선전위원), 리동규 (삼도구사람, 조직위원), 리명배 (당지 적위대원), 리화춘 (평강구사람, 원 평강구농민협회책임자), 안학선 (삼도구사람, 원 삼구구위서기), 원희숙 (평강구사람), 제국주의 (달라자사람), 정경옥 (약수동사람, 원 개구농민협회 부녀부책임), 오×× (어랑촌 사람, 중국인, 정경옥의 약혼자) 등 동지들이 소속되었다. 그들은 당지부 조직생활을 하면서 생산대와 청년돌격대에 망라되어 근거지의 한몫을 담당하여 나섰다.

    1932년말과 1933년초에 일제놈들은 어랑촌근거지에 대해 연속 2차의 《토벌》을 감행하였다. 근거지는 큰 손실을 당했으나 인차 원기를 회복하였다. 1933 4월에 당평강구위 부녀위원 박정자가 불행히 희생된후 리동순이 그를 이어 당평강구위 부녀위원의 책임부서에 나섰다.

    리동순은 구위 부녀위원책임을 맡은후 근거지로 들어오는 여성혁명자들을 배치하고 묶어세우며 적통치구역들에 비행선전대를 파견하거나 정치공작원들을 보냈는가 하면 작식대, 재봉대실, 병원, 철공장 등을 돌보며 유격대원호사업도 깐지게 내밀었다.

    1933년 여름에 중공중앙《1.26》지시편지가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 전해진 뒤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사업은 한층 활기를 띠였다. 근거지 군민 200여 명과 함께 5.1메데기념시위에 참가한 리동순은 혁명의 승리가 방불히 보이는듯 싶었다.

    그때 어랑촌근거지를 제외한 현안의 당조직과 혁명조직들은 거의가 파괴당하였다. 리동순은 현위의 지시에 따라 부녀비행선전대를 근거지주변의 봉밀거우와 쟈피거우, 고사리평 등지에 파견하였다. 리계순 등 동지들을 적들이 도사린 용정으로 들여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근거지 정부 회장 김승학 등 동지들과 함께 늘 직접 현안의 삼도구와 평강구 등지에 숨어들어 파괴된 조직선을 찾아 연계를 가지거나 삼도구 우복동에 자리 잡은 삼도구의 동지들을 여러 모로 도와주었다.

    1933년 봄이후 어랑촌근거지에서는 얼토당토한 반《민생단》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처음 어랑당지부의 리화춘이 잡혀나와 피살되더니 동순의 남편 최병학도 《민생단》으로 몰리였다. 1933년 가을부터 현당위 조직부장 요직을 차지한 리동규는 남편을 물고 놓질 않았다. 남편은 할수없이 안도 모 지방으로 피난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동순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남편이《민생단》이라니 웬말인가? 그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그는 남편의 영향하에서 혁명의 장도에 올랐고 남편의 인도하에서 어랑촌근거지로 들어선것을 잊을수가 없었다. 어떤 여인들은 핍박에 못이겨 남편과 리혼했거나 맘에 없이 중국인을 만나 운동을 피하기도 했다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꼬물도 없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느라면 조직에서 해명해 줄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적들의《토벌》이 거듭되고 반《민생단》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34년 새해가 밝아왔다. 뒤미처 우복동에서 투쟁을 견지하던 삼도구위가 파괴되고  구위서기 홍완구도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리동순은 현위의 지시로 회장 김승학과 같이 삼도구일대를 돌아보고오다가 토산자 쟈피거우일대에서 적들과 맞띄웠다. 김승학은 가까스로 포위를 헤치고나갔으나 리동순은 그만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리동순―혁명의 승리만을 믿고 남편의 청백함을 믿고 살아가던 이 구위 부녀위원은 근거지  변두리땅에 쓰러진채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뒤 이해 5월에 우심산―리동규가 근거지에서 도망한후 리동순의 남편 최병학은 근거지안의 버섯골로 돌아왔다가 왕우구에서 온 후임퇀정위 김락천에 의해 또 체포되고 말았다. 김락천은 이른바《심판대회》를 열고 최병학을《민생단》으로 몰아 살해하였다.

    때는 1934 7월경이다. 피살장소는 근거지의 최후의 보루―버섯골이였다고 한다.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3)》에서,

한국학술정보, 2005 10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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