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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초, 절강 소흥의 월수외국어대학에 와서 한국어교편을 잡은후 고대 신라인—김교각 지장보살님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것은 나의 생활의 일과로 되여 버렸다. 이해 11월 15일에는 항주, 천대산, 향로봉 등지 답사에 이어 절강 주산군도 보타산으로 갔다가 뜻밖에도 고대 이땅에서 활동한 우리 겨레 관련 신라초와 신라초기념비를 발견하고 나는 흥분해 마지 않았다.
11월 25일 아침 7시반에 나는 력사문화도시 소흥의 중심뻐스부에서 직행뻐스를 타고 곧장 주산군도 정해로 갔다. 동해명주로 불리우는 아름다운 주산군도는 중국의 제일 큰 군도이다, 이쯤은 지리상식으로 보아도 알고있는 터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소학교를 다녀서인지 우리 세대는 지리과를 배우지 못했는데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후 문과류에 지리가 있어 나는 세계지도, 중국지도, 세계지리, 중국지리를 놓고 죽을둥살둥 헤덤볐다. 그 덕에 지리성적이 86점, 78년급 연변대 조문학부를 지망한 내가 조선어문은 고작 60몇점인데도 총점에 의해 무난히 연변대에 입학할수 있었다. 지금도 세계지도요, 중국지도 쯤은 눈감고도 통달이여서 그속의 주산군도도 상식적으로 안다고 자부하는 나다. 그런 내가 30년 후에 주산군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니 꿈을 꾸는것만 같다.
감개속에서도 흥미로은 것은 내가 탄 직행쾌속뻐스가 주산군도 정해행이여서 녕파에 이른후 부근 부두에서 뻐스 그대로 배에 실려 바다건너 정해로 가는것이라 할까. 우리 말고도 숱한 크고작은 차량들이 대형 전문선박에 실려 한시간 미만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그리도 흥미로울수가 없다.
나로 말해 뻐스그대로 “바다”를 건넌것은 주산군도행이 처음이 아니다. 20여년 전이지, 그 시절 1983년 초여름에 나는 대학졸업후 처음으로 남방 겨레답사길에 올랐다가 강서 구강에 이른 적이 있다. 구강에서 남으로 파양호 좁은 구간너머 팽택현 경내에 이름난 석화암 동굴—룡궁동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동행한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왕청산선배님과 함께 무작정 왕선배 친척이 몰고 온 승용차에 앉았는데 이 승용차가 그대로 파양호 량안을 이어주는 선박에 실려 파양호를 건넜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6년 11월 25일, 이번에는 직행뻐스에 앉은채로 대형선박에 실려 망망대해를 질주하게 되니 그 기분이 별스러웠다.
바다건너 주산군도 정해부두에 이르니 보타산행 부두는 보타산섬과 마주하고 있는 심가항이라고 한다. 심가항이 어딘지 내가 어찌 알랴, 택시를 타는게 상수지. 택시는 반시간만에 어렵사리 심가항에 들어선다. 심가항은 크고도 큰 어항이라더니 택시가 어항을 따라 한식경이나 달려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택시기사와 물어보니 심가항은 세계 10대어항의 하나로서 요즘 들이닥친 태풍에 의해 길이 20리 어항에 대소어선 근 1만척이 정박했다가 풀리는 중이라나. 심가항이라는 이 세계적인 어항은 나를 또 하나의 지식의 세계에로 이끌어 주었다.
드디여 심가항부두 매표구. 보타산행 관광선박표를 끊으니 인민페 19원 50전. 보타산섬까지 거리는 6킬로메터 남짓하고 반시간거리, 태풍의 영향으로 비오는 날씨에 풍랑이 인다지만 내해나 다름없는 이 구간 바다길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관광용 소형선박은 풍랑속으로 바다를 헤가른다. 보타산부두에 오르자 나를 선참으로 흥분케 하는것은 “보타선경”이라는 보타산 입구정문이다.
“오, 끝내는 보타산에 이르렀구나!”
나의 마음은 대해의 파도마냥 설레이기만 했다. 어찌 그렇지가 않으랴, 50대 중반에 이르러 인생길이 흐름을 달리하여 연변서 6000리 밖 절강 소흥에 와서 대학교편을 잡게 되였으매 거퍼 두달도 안되는 사이 우리 고대겨레 지장보살님 발자취 따라 다닌 답사의 길 얼마였던가. 오늘은 답사의 길이 멀리 안휘 구화산 앞서 보타산으로 이어지게 되였으니 마음이 설레일만도 하지.
(오늘은 보타산—중국불교 4대명산의 하나에 무엇이 있을까? 과연 지장보살님 관련 무엇을 찾아낼수 있을까?)
나는 부푸는 기대안고 보타선경 정문을 지나 본격적인 답사의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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