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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환준이 말하는 김좌진장군 피살설
2010년 01월 23일 09시 31분  조회:1769  추천:14  작성자: 리광인



             량환준이 말하는 김좌진피살설

    
                                                      
     

   
 한국의 강경애 공범설에 대비해 필자는 며칠전에 "강경애는 김좌진 장군암살 공범인가?" 론문을 써서 김좌진장군피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고 밝히면서 자료래원을 량환준선생한테서 찾았다. 하다면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피살내막을 어떻게 알게 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지난세기 20년대 후기 량환준선생의 항일활동을 떠올려야 할것이다.
    
량환준선생은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사람이다. 그때는 연길현 수신향 명암촌이라 했다. 1920 10, 청산리전투 당시 조무래기였던 량환준선생은 저들 또래와 함께 명암촌에서 휴식하는 홍범도장군과 어리광을 부린적도 있다. 그러던 그는 몇년후 끌끌한 청년으로 자라나면서 조선공산당 화요파당원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고 1929 2월 초에 조공당만주총국 동만도위원회의 지령을 받고 길림으로 가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5 4 17일에 서울에서 탄생한 정당으로서 미구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국제공산당의 한개 지부로 되었다. 이듬해 1926 5 16일에는 흑룡강성 주하현 일면파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건립되면서 총부를 녕고탑에 설치하고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3개구역국을 두었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은 바로 조공당 만주총국의 지도를 받는 청년들의 선진조직이였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도 이런 선진청년조직의 산물이였다.
    1929
9월에 량환준선생은 남만에서 활동하는 외지혁명자들은 북만으로 철환하라는 조공당만주총국의 지령을 받고 고려공산청년회 남만도위원회 책임비서 김만흥(일명 김동만, 강철산, 박봉남), 조직부장 강석준 등 6명과 함께 길림을 떠나 도보로 녕안현 동경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 일행과 동만에서 온 주현갑, 유태순 등 도합 20명은 당지 조선인 사립학교에 모여 정치리론강습을 한달 푼히 받았다
.
   
정치리론강습반이 끝난후 량환준선생은 동만의 옹성라자구역 류수하에 가서 청년정치강습반 교원으로 뛰다가 1930 1월초에 조공당동만도위원회 책임비서 김창일의 지시를 받고 평강오도구로 갔으며 조선 광주학생반일시위성원투쟁의 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이해(1930) 2월하순에는 조공당만주총국의 지시를 받고 평강오도구를 거쳐 아성현 해거우(海沟)에 가서 고려공청만주총국 선전부장 중임을 짊어졌다. 때는 김좌진장군이 피살된지 한달이 지난 뒤였다
.
   
량환준선생의 위인됨을 알려주는 한단락 경력이라 하겠다. 그는 고려공청만주총국에서 활동하면서 김좌진장군피살과정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 글로 남긴 이 사실이 너무 개괄적인 편단이여서 유감으로 남을 뿐이다.

량환준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1930 3, 그는 조공당만주총국 소재지 아성현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나게 되었다. 공도진은 량환준선생과 더불어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 사람인데 1907 5 27일에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열한살때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땅 명암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량환준선생과 죽마고우로 되고 자라서 또 같이 조공당 지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28년 여름에 공도진은 조직의 지시로 녕안현에 갔고 김좌진장군 암살특수과업을 수행하였었다. 3월에 아성현 해거우에서 이들 둘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암살자가 바로 공도진이였던것이다.
    
듣고보니 암살지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 이로하여 량환준선생은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이였는가고 물어보았다. 김백파의 말도 공도진과 같았다. 다르다면 암살결정자가 바로 김백파를 수령으로 한 만주총국이였다. 그때 만주총국 책임비서가 김백파고 조직부장에 강화린, 선전부장에 장시우라고 할 때 김좌진암살결정권 행사는 그들이였을것이다
.
    
김백파는 김성득, 김득수라고도 했는데 1919 3.1운동때 남만의 통화신흥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성원으로 활약하였다. 3.1운동후 신흥학우단 성원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하였다고 하는데 1926 5월에 김백파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그는 1927 10월에 조공당만주총국 조직부장으로 임명되고 1928 9월에는 리동산의 후임으로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뛰여올랐다. 김좌진암살도 김백파가 조공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뛸 때 벌어졌다. 그러니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암살내막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   
    
그밖에 량환준선생은 지희겸도 이 사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장군도 자기의 회억록에 이 사실을 밝히였다고 서술하였다. 지희겸선생은 당년 조공당 엠엘파의 주요활동가로서 광복후 선후로 연변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위원장으로, 1기 연변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으로 사업한분이다. 이런 신분의 지희겸선생이니 당년의 김좌진피살형편을 알고 증실까지 하였던것이다
.
    
리연록장군은 이름난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이였다. 1931 9.18사변후 연길현 옹성라즈(오늘의 명월구)에 주둔하고있던 동북군 13혼성려 7 3영 영장 왕덕림이 결연히 항일의 기치를 들고 연길현 소성자에서 국민구국군을 조직하였을 때 그때 공산당원인 리연록은 중공연길현위의 파견을 받고 왕덕림구국군에 들어갔고 구국군 참모장으로 등용되였었다. 그러다가 그는 1934 10월에 중공밀산현위의 지도를 받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책임자로 되고 1936 1월에 동북 항일련군 제4군으로 개편된후 제4군 군장으로 싸운다. 유감스러운것은 필자가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을 접하지 못한것이다. 이 회억록에 김좌진암살사실이 적혀있다고 하니 또 다른 증실자료가 될수 있다고 보아진다
.
    
그후 1930 5월에 량환준선생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또 중공아성현위 선전부장, 현위서기로 뛰면서 피어린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이런분이니 량환준선생의 증실은 믿을만한것이다. 공도진도 말하고 김백파도 말하고 지희겸, 리연록장군도 증실하였다는 사실은, 김좌진장군피살은 조공당 만주총국(화요파)의 소행임이 틀림없다는것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고보면 여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공범이라는 설은 자연히 오류설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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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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