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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
올년초 1월 24일, 필자는 중국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 사이트에 올린 론문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에서 “강경애가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불린 연변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9년이다.”라고 쓴 바 있다. 솔직히 말하여 조선족역사연구자인 필자로 말하면 강경애 연구전문이 아니여서 1929년 설 근거를 연변대 채미화교수의 한편의 글에 두었었다. 이즈음 강경애관련 연구자료들을 깊이있게 연구하는 가운데서 이와 유사한 견해들이 여러 곳에서 보임을 알 수 있었다. 아래 유사한 견해들을 보기로 하자.
박충록교수(중국)는 “강경애의 작품세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1929년 겨울 중국북간도 용정일대에 근 2년 간 있으면서 임시교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무직업과 가난의 고초를 겪기도 하다가 1931년에 귀국했다.”①
은종섭선생은 “조선근대 및 해방전 현대소설사연구”에서 이렇게 밝히였다.
“강경애는 1929년에 간도에 들어가 용정일대에서 임시교원 등을 하였다. 그후 1931년 말에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음해 다시 용정에 들어”갔다. ②
김창현선생은 “그는… 숨막히는 고향을 떠나 중국 간도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하다가 1931년 고향으로 되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③
중국 연변의 김순금선생은 자기의 한편의 연재글에서 이런 자료들을 답습하고 있다.
강경애는 “생활난에 쫓기여 1929년에 중국 동북(간도)에 들어 왔다가 1931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갔음… 1932년에 다시 간도 용정에 이주하여 문학창작사업에 종사” ④
상기 채미화와 박충록, 은종섭, 김창현, 김순금 등 연구자들은 모두 중국과 조선의 해당 학자들로서 모두 강경애의 첫 간도행을 1929년으로 보고 있다. 하다면 이런 연구학자들의 자료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이즈음 필자는 한국 이상경교수가 엮은 수정증본 “강경애 전집”을 보고서야 여기에 시원을 두고 있었다. 하기에 한국의 이상경교수는 “강경애전집”에 실은 작품해석 “강경애의 시대와 문학”에서 김헌순의 연구는 강경애연구에서의 “최초의 본격적 작가론”이였다고 지적하였다.
이쯤까지 서술하고나면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29년인 것 같다. 또 강경애의 해당 평론과 수필, 시를 보지 않은데서 필자도 1929년 설을 따랐다. 연변대 채미화교수의 주장이고 강경애 연구 관련자이며 강경애 해당 글을 읽지 못한데서 나온 결과였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한국 이상경교수도 “강경애전집”에 올린 작품해석에서 강경애의 첫 간도행을 1929년 이전으로 쓰고 있다. 여러곳에서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보면 한국과 조선, 중국 학계의 견해대로 1929년설을 따라도 무방할 것 같다. 실수는 여기에 있었다. 학계과 필자도 조선 김헌순학자의 주장을 따른 결과 큰 실수를 빚어냈다. 왜냐하면 강경애가 자기의 첫 간도행에 대해서 여러 글들에서 똑똑히 밝히었기 때문이다.
강경애는 자기의 수필 “간도” 서두에서 쓰고 있다. “나는 간도를 안지 불과 이태에 지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간도를 자랑하고 싶다.”
이글은 1934년 5월 8일부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다.
강경애는 자기의 수필 “고향의 창공” 서두에서 또 쓰고 있다.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 것이다.”
이 글은 1935년 5월 “신가정”에 실린 글이다. .
강경애는 “신동아” 1934년 7월호에 실은 수필 “두만강예찬”에서는 자기의 첫 간도행을 일목료연하게 밝히였다.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이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신록이 무르익은 버들숲을 끼고 흐르고 흐르는 저 강수(江水)!”
이 격정이 넘치는 한편의 수필에서 강경애는 “누구든지 간도를 알아보려면 이 두만강부터 먼저 알아야 할것이다.”면서 자기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한 시간을 1931년 봄으로 적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는 수필이여서 믿기 어렵다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상기 수필과 “두만강예찬”은 모두 작가의 실생활 그대로 임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여류작가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 봄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떠나서 강경애연구에서의 최초의 작가론을 쓴 김헌순처럼 굳히 1929년 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실수에 실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가, 한국의 해당 인터넷을 검색하면 강경애의 첫 간도행을 1931년이나 1932년으로 썼고 1929년 설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이상경교수도 강경애의 1929년설에 대해 이의를 가지면서도 1929년 이전설을 따르는 유감을 남기고 있다.
기본상 할말은 다 한 것같다. 상세한것은 계속되는 논문연구에서 밝히기로 하면서 강경애작가의 지적을 떠난 실수를 더는 빚어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따라서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 동거범이라는 주장도 더는 발붙일 곳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해】
① 박충록, 조선문학간사, 연변교육출판사, 1987,강경애의 작품세계.
② 은종섭, “조선근대 및 해방전 현대 소설사연구”, 김일성 종합대학출판사, 1986년, 70쪽.
③ 김창현, 강경애의 소설 작품에 대하여, 현대조선문학선집 30, 장편소설 인간문제.
④ 김순금, 장백산, 1991년 제1호, 중국을 다녀간 백의문일들(연재1), 160쪽.
⑤ 김헌순, 강경애론, 현대작가론, 평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1, 296—297쪽
문화산맥 www.koreancc.com
2005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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