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지구소년
신민부의 공과 사를 두고
1
지난세기 20년대 초이후 동북지구 조선인반일단체들간의 통합운동이 무척 열기를 띠였다. 1923년 8월에는 집안을 중심으로 한 “참의부”가 설립되더니 1924년 10월에는 길림지구를 중심으로 한 “정의부”, 1925년 3월 10일에는 녕안에서 녕안현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가 조직되였다. 한데서 이 시기를 “3부정립”시기라고 하는데 김혁,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신민부는 로동강습소와 야간강습소를 꾸려 북만일대 조선족들의 문맹퇴치와 반일계몽운동을 추진하고 보안대와 별동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 친일단체 숙청운동, 조선국내 진군작전활동 등을 활발히 펼쳐갔다.
했으나 신민부는 창립이후 상기와 같이 공도 수두룩하거니와 사도 적지 않아 많은 물의를 빚어내며 점차 민중의 신임과 후원을 잃어버리고 최종 해체되는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혁이후 신민부의 대권을 틀어쥔 김좌진장군을 절대적 항일영웅으로 받들면서 력사상에서 일으킨 공적역할만 강조하면 력사의 편차를 가져오게 된다.
력사는 허위와 꾸밈을 모른다. 김좌진장군은 공도 크거니와 사도 큰 력사인물이여서 응당 력사의 저울에 의해 공정한 평가를 받아야 옳을것이다.
아래 력사상 존재했던 항일단체 신민부의 공과 사를 꾸밈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해 보기로 한다.
2
다 아는바와 같이 북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 교육회 및 북만지역, 조선국내 지역대표들은 목릉현에서 갓 조직된 “부여족통일회의” (1925년 1월) 토대우에서 1925년 3월 10일부터 15일까지 녕안현 현성에서 대회를 가지고 신민부의 창립을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창립대회는 신민주창립 선포문과 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그 조직체계는 중앙집행위원회(행정기관), 참의원(립법기관), 검사원(사법기관) 등으로 구성되였다. 이에 따라 선출된 인원은 아래와 같다.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민사부: 최호
군사부: 김좌진
참모부: 라중소
외교부: 조성환
법무부: 박성태
경리부: 유정근
교육부: 허빈
선전부: 허성묵
련락부: 정신
실입부: 리일세
심판부: 김돈
참의원 원장: 리범윤
참의원: 홍종림, 김진원, 김송암, 량재헌, 최문일, 황공삼, 윤각, 리장녕, 안호연, 안룡수, 허빈, 김규현, 남극, 차동산, 리백향, 송상현.
검사원 원장: 현천묵
검사원: 강규상, 로호산, 황국민, 강인수, 손일민, 김기남, 라중소, 지장희, 강명현, 양윤삼
중앙집행위원회는 산하에 지방총판부를 두고 총판부 산하에 구를 설치하였다. 1926년의 해당 통계에 따르면 지방총판부는 제1지방총판부, 제2지방총판부, 액목지방총판부, 돈일지방총판부로 이루어졌으며 총판부마다 자기 산하에 몇개 또는 10여개의 구를 두었다. 녕고탑에 소재지를 둔 제1지방 총판부는 17개구, 해림, 목단강 등지를 소재지로 하는 제2지방 총판부는 5개구, 돈화 삼도량자에 소재지를 둔 돈일지방총판부는 4개구를 설치하고 드센 활동을 벌리였다.
3
하다면 3부정립시기 녕안현을 중심으로 북만에서 활동한 신민부의 주요활동은 어떠한가, 이를 두고 교육활동, 무장투쟁 등으로 나누어 보기로 하자.
1. 교육활동:
1) 학교교육
신민부 창립대회 결의안에 의하면 소학교 과정은 6년이고 중학교 과정은 4년이며 관할구역내 매 100호이상의 마을마다 1개의 소학교를 둔다고 하였다. 과연 신민부는 창립후 목릉, 주하, 밀산, 요하, 돈화 등 15개구역에 50여개의 소학교를 두었는데 그 주요한 학교는 이러하다.
해림 서두가 신창학교
목릉현 원동학교
아성 개신학교
녕고탑 동명학교
아성현 이층전자 이층전자학교
모아산 신창학교
아성현 취원창 동원학교
석두하자 영신학교
아성현 탄자황산 부달학교
채가툰 삼가자학교
안도현 삼인방학교
상기 학교들은 일반적으로 교원이 2-3명이고 학생은 20~60명 쯤이였다. 학교의 기본과업은 문맹자들에 대한 문화지식전수와 청소년들에 대한 반일민족의식 주입이였는데 수신, 지리, 력사 등 한글 교과서를 자체로 편찬하고 사용하였다. 1927년 8월 1일에는 북만한인교육대회가 해림에서 소집되기에 이르렀다.
2) 사회교육
당시 북만일대의 조선족농민들은 거의가 문맹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신민부에서는 관할지역내 조선족들이 살고있는 마을마다 로동강습소와 야간강습소를 세워 40살이하 사람들이 봄과 여름 두기씩 매일저녁 한시간 강제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40살이상 사람들은 야간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3) “신민보” 발행
신민부에서는 자체발전의 수요에 따라 1925년 4월 1일부터 이듬해 4월까지 월간 또는 순간(旬刊)기관지 “신민보”를 발행하였다. 1926년 4월, 할빈일본령사관의 간섭으로 신민보는 부득불 페간할수밖에 없었다.
2. 무장투쟁:
1) 보안대와 별동대
신민부 반일무장투쟁의 조직형식은 보안대와 별동대였다. 군사부에서 보안대와 별동대를 지도하였는데 그 조직부서는 아래와 같다.
총사령: 김좌진
총사령부관: 주혁
보안대 총지휘: 박두희
보안대 1대 대장: 문우천
보안대 2대 대장: 백종렬
보안대 3대 대장: 오상세
보안대 4대 대장: 주혁
보안대 5대 대장: 장동철
별동대 대장: 문우천
2) 사관학교
신민부는 창립후 목릉현 소추풍에 반일군사인재양성을 목표로 하는 성동사관학교를 세우고 2기 속성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장은 김혁이고 부교장은 김좌진, 교관은 오상세, 박두희, 백종렬 등 8명, 고문은 리범윤, 조성환 등이고 선후 수백명의 졸업생을 키워냈다.
신민부는 또 시초에 녕안현의 산림속에 병영을 짓고 집중군사훈련을 시도했으나 무기공급과 식량공급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무장부대내 둔전제실시도 수포로 돌아갔다. 1927년 5월, 안도와 돈화에서의 새로운 군사기지설치실패가 그러하다. 병영과 군량문제로 만 18살이상 40살이하 남자를 대상으로 한 군사훈련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3) 친일주구와 친일단체 청산
①1925년 9월, 신민부 별동대 대장 황덕환 등 6명은 명령을 받고 일제주구인 “해림조선인민회” 회장 배두산을 미행하다가 한 산기슭에서 처단했다.
② 1925년 9월 26일, 별동대는 대장 황덕환의 인솔하에 할빈조선인민회를 습격하여 친일주구들에게 반성문을 씌우며 엄포를 놓았다.
4) 국내진군활동
1927년 8월 3개 특수공작대가 조선국내에 파견되였다. 주요과업은 작전지도작성, 지리상황료해, 대중선동사업, 일본군 주둔지확증 등이였다.
제1조 활동: 압록강건너 강계, 평양일대
제2조 활동: 백두산기슭에서 떠나 함경도, 강원도, 경산도를 경과, 전라도 지리산 일대.
제3조 활동: 두만강건너 종성, 북청일대
결과 3개 특수공작대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맡은바 과업을 수행하고 그해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밖에 1927년 초봄에 신민부 총사령 겸 중앙집행위원장 직을 맡은 김좌진은 백두산 서쪽 산림속에 진을 둔 중국구국군 제13군사령관 양수일과 합작을 도모하고 중국국민당 만주공작책임자 공패성, 구국군 악유준, 사가헌과도 련합투쟁을 시도했다. 또 국민당 및 풍옥상부대와의 련계를 다그치고 조선공산당 엠엘파 최창익을 통해 쏘련의 군사위원장 뜨로쯔끼와도 련계를 가지였다. 하여 20년대 말에 이르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해당 학교들에 수많은 조선인학생들을 보낼수 있었다.
4
상기서술은 력사적으로 보는 신민부와 신민부지도자 김좌진장군의 일대 공적이라 하겠다. 그러면서도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신민부는 학교교육에서 재정난이 심하다고 학부형들에게 재정부담을 가중시킨 결과 점차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군자금해결에서도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기다가 뜻대로 안되니 강제실시하기도 하였다. 신민부의 리백호 등은 빈주현에서 강박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징수하다가 백성들의 불만을 사고 무고한 백성을 해치는 류혈사건, 즉 빈주사건을 빚어냈고 훈춘에 파견된 모금대는 군자금징수를 거부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결과 신민부는 말 그대로 민중들의 신임과 후원을 잃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였다. 민중을 떠난 그 어떤 반일투쟁이란 운운할수 없다는것을 력사는 알려주고 있었다.
또, 기타 민족주의단체와 마찬가지로 흥기하는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조공측도 력사적인 오유가 있었다)과 무조건 엇서니 선진청년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점차 민중을 리탈하게 되였다. 지방단체들과도 권력다툼을 하고 정의부와도 지방쟁탈을 하니 민중들의 신임을 보다 잃었다. 나중에 신민부 내부의 분렬과 대립은 최종 해체의 국면을 초래하였으니 그 직접적인 책임을 김좌진장군이 안아야 했다. 일제와 싸우는데서는 목표가 일치하기에 공산주의계나 민족주의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지만 김좌진장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장군은 그 당시 중국구국군이나 중국 국민당과도 합작 또는 련합하고 쏘련과도 련계를 가질지언정 조선공산당과는 합작을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 김좌진장군의 치명적인 오유가 아닐수 없다.
신민부나 김좌진장군의 력사적오유에 대해서는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기에 이 글에서는 더 전개하지 않으려 한다.
신민부의 공과 사는 력사적산물이기에 그대로 서술하는것만이 력사와 그 인물을 대하는 바른 태도라고 말하고싶다. 이를 떠나서 신민부의 공적만, 김좌진장군의 공적만 력사라고 하면서 신민부를 모두가 옳다고 하면 진실한 력사에 책임지지 못하는 오유를 범하게 될것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