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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 (1)
2010년 01월 28일 16시 03분  조회:1746  추천:16  작성자: 리광인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1)

 

 

1. 강경애 공범설과 한국지성인들 반론                              

 

지난 2005 1월 중순, 조선일보 월간조선의 뜻하지 않은 2월호 한 기사에 의해 일제강점기 대표적 녀류작가 강경애는 일약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동거범으로 몰리며 한때 찬기운이 뼈속을 핥는 액운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한국과 중국 연변의 여러 지성인들의 드센 반발과 피타는 노력으로 강경애의 명예는 원상복구되였지만 베일에 가리였던 김좌진장군 피살배후는 아직도 한국의 학계와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것 같다. 과연 김좌진장군은 어찌하여 피살되였고 그 피살배후는 어떠한가, 그때 그 시절의 력사를 펼치면 김좌진 장군의 피살배후는 서서히 드러난다.

몇달전 강경애 공범설이 떠오르며 판을 칠때까지만 해도 김좌진장군피살은 강경애가 이른바 그의 애인 김봉환과 같이 1927년 봄에 중국 해림역에 도착해 동거생활을 하다가 두 사람이 할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형사의 회유로 변절하고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1930 1 24일 암살한것으로 나타난다. 김좌진장군의 측근이고 장례대변인을 맡기로 한 이강훈 전 광복회장이 생전에 증언한 내용이 였다니 정설로 굳어진것 같다. 력사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한때 녀류작가 강경애는 온 한국국민의 타매해야 할 궁지에 몰려야 했다. 이에 강경애를 2005 3월의 문화인물로 추천했다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교수는 김장군의 암살배후에 대해 아직 학계에 정설이 없다.”, “심지어 강씨가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고, 김봉환의 애인이 였다는 것도 분명치 않다.”,  어떤 책에서는 김경애라고 자칭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져 학계에서 신뢰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는 김좌진장군은 일제에 의해 죽은것이 아니라 간도지방에 지부를 두고있는 적기단이 감행한것으로 알고있다. 직접적인 암살자는 박상실이 확실하지만 배후는 더 연구해야 한다.”고 모를 박았다.

강경애 공범설이 휩쓸 때 한국지성인들의 반론이다. 그때 형편에서 한국의 지성인들이 이같이 반발해도 감좌진장군의 피살배후를 알수 없은데서 적기단의 감행으로 리해해야만 했다. 김좌진장군 암살사건 자체가 베일에 가려 있었고 이강훈 옹까지 그때의 진실한 암살사건내막을 알수가 없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2. 김좌진장군 암살자는 누구인가

 

돌이켜보는 강경애의 삶에서 우리는 일제강점기 녀류작가 강경애는 이주 후 거의 룡정에서 생활하면서 가정주부로 청빈한 삶, 작가적 삶, 불행한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활동에도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어떻게 보아도 강경애는 1930 1월의 김좌진장군 암살과 이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경애는 김장군 암살 공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월간조선》2월호 기사를 인용했다는 조선일보 인터넷은 강경애가 그의 애인 김봉환과 같이 1927년 봄에 해림역에 도착해 동거생활을 하다가 두 사람이 할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의 회유로 변절(공산주의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 변절)하고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1930 1 24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적고 있다. 《월간조선》 2월호 기사나 조선일보 인터넷은 여기에서 무책임한 치명적인 두 가지 약점을 드러냈다.

첫째 치명적인 약점은 1927년 봄에 강경애가 북간도나 해림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경애를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둘째 치명적인 약점은 이른바 김봉환의 애인이라는 강경애 혹은 김경애가 우리가 말하는 녀류소설가 강경애가 옳은가 하는 점이다. 기사나 인터넷은 아무런 분석이나 분별이 없이 그저 이름만 보고 강경애라고 점찍었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기었다. 실수를 저질러도 이런 실수가 어디 있는가, 확실히 강경애라고 한다면 그의 래력과 해림에 나타나게 된 계기를 구체적으로, 설복력 있게 피력하여야 보는 이들이 수긍이라도 하겠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물론 이강훈 옹의 증언에 의해 시름을 놓은 데서 인기되었겠으나 김좌진장군 암살사건 자체가 베일에 가려있다는 자체는 떠올려야 했다. 베일에 가렸기에 김좌진장군 암살 며칠후에야 현장에 이른 이강훈 옹의 증언도 흔들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강훈 옹은 그때의 진실한 암살사건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믿음직한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 암살자는 김봉환이나 그가 시킨 박상실도 아닌 타인으로 나타난다. 아래 당년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이었고 항일로선배였던 량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하자.

 

조공 아성총국(만주총국)에서는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어 김좌진을 없애치우기로 결정지었다. 1929년 가을에 총국에서는 공도진(최동범, 리복림)을 산시에 잠입시켜 김좌진일파가 경영하는 정미소에 일군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임을 얻게 하였다. 1930 1 24, 김좌진이 부하 몇을 데리고 정비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 공도진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김좌진에게 거퍼 두방을 갈겼다. 김좌진이 거꾸러지자 그 부하들이 어쩔 바를 모르는 사이에 공도진은 삼림 속으로 냅다 뛰어 도망쳐 버렸다.

공도진은 화룡현 서성향 명암촌 사람으로서 필자와 한 마을 사람이며 조공의 한 지부내의 성원이었다. 1928년 여름에 그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녕안현에 들어 갔었는데 1년 후 산시에 파견 되어 가서 이 특수한 과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필자가 1930 3, 아성현에 갔을 때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김좌진을 죽이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고, 필자가 조공 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버렸는가 물어보았더니 김백파도 우에서 말한 사실들을 또 나에게 해설해주었다. 이밖에 지희겸(당년 엠엘파조공 주요간부, 항일로선배)도 이 사실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에도 이 사실이 적혀있다.

 

이는 1985 11, 《연변문사자료》 제4집에 실린 량환준 선생의 글 《20년대 후기 재만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반영된 내용인데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이를 두고 필자는 량환준 선생 생전에 수차 방문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력사를 깊이 있게 터득하면서 수긍이 갔다.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면밀히 짜고 든 조직적인 행동이었다. 그 구체적인 집행자가 바로 공도진, 최동범 등으로 불린 리복림이였다.

리복림은 본명이 공도진이고 때에 따라 최동범이라고도 불렸다. 리복림은 1907년 함경북도 명천군 출생으로서 1925년경에 연길현 수신향 명암촌(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에 이주하였고 조공동만도 간부인 당시 리동선(항일렬사)의 소개로 조공당에 가입하고 1928 8월에 녕안현으로 전이하였다. 1930 10월에는 중공 아성현위서기로, 1932년 봄에는 중공 만주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주하현에 가서 주하중심현위 조직부장으로, 1933 10월에는 주하항일유격대 주요책임자로, 1936 8월 이후에는 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합동지대사령, 중공 북만림시성위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7 4월에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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