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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2)
3. 김좌진장군 피살원인
우에서 필자는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공당 만주총국의 조직적인 행동이고 그 구체적인 집행자는 공도진, 즉 리복림이라고 제나름의 견해를 밝히었다. 헌데 조공당에서는 어인 원인으로 김좌진을 피살하기에 이르렀을까, 아래 계속하여 량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한다.
청산리 전투 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역사사실은 김좌진도 월경했음)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양식상점을 털어먹었다. (원 필자주: 지금 북만의 70여세 되는 노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에서 굶어 자진하였다. 김좌진은 부하 수십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내지 않아 폐교하고 말았다. 1925년 산시일대에 가서 《통치식》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었으니 밀산, 목릉, 동녕, 녕안(동남부)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29년, 그가 벌린 주요활동은 :
①중장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사복한 부하를 시켜 중동철도기차에서 공산당혐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함부로 체포하였다.
② (략)
③신숙, 정신 등 인과 가장 반동적인 《한민총련합회》를 성립하였다. 김좌진은 이와 같이 조선족인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24일, 조선공산당 무장공작대 대원 공도진이 산시 정미소에서 그를 처단하였다.
《연변문사자료》제4집《20년대 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실린 서술이다. 지금 보면 대단히 과격하고 극단적인 견해가 그대로 보인다. 이는 량환준 로선배가 스스로 지어낸 력사근거가 아니다. 조공만주총국에서는 상기 이유로 김좌진을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어 없애치우기로 결정》하고 행동하였던 것이다. 이제 다른 한편의 글에서 한족총련합회가 조직한 이른바 “토공대”(討共隊)가 당년 동북군 돈화 제7퇀과 야합하여 우리 연변 중국공산당 조직과 조선족 항일지사들을 마구 살해한 치떨리는 죄악들을 드러내겠지만, 그때면 이땅의 우리 겨레들치고 격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4. 량환준 항일로선배가 말하는 김좌진피살설
한국의 강경애 공범설에 대비해 필자는 "강경애는 김좌진장군 암살 공범인가?" 론문을 써서 김좌진장군 피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고 밝히면서 주요자료를 량환준선생한테서 찾았다. 하다면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 피살내막을 어떻게 알게 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지난세기 20년대 후기 량환준선생의 항일활동을 중점적으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량환준선생은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사람이다. 1930년 2월하순에 그는 조공당 만주총국의 지시를 받고 화룡 평강 오도구를 거쳐 아성현 해거우(海沟)에 가서 고려공청만주총국 선전부장 중임을 짊어졌다. 때는 김좌진장군이 피살된지 한달이 지난 뒤였다.
량환준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1930년 3월, 그는 조공당만주총국 소재지 아성현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나게 되였다. 공도진은 량환준선생과 더불어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 사람인데 1907년 5월 27일에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열한살때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땅 명암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량환준선생과 죽마고우로 되고 자라서 또 같이 조공당 지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28년 여름에 공도진은 조직의 지시로 녕안현에 갔고 김좌진장군 암살특수과업을 수행하였었다. 3월에 아성현 해거우에서 이들 둘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암살자가 바로 공도진 본인이 였던것이다.
듣고보니 암살지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 이로하여 량환준선생은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야 했는가고 물어보았다. 김백파의 말도 공도진과 같았다. 다르다면 암살결정자가 바로 김백파를 수령으로 한 만주총국이였다. 그때 만주총국 책임비서가 김백파고 조직부장에 강화린, 선전부장에 장시우라고 할 때 김좌진암살결정권 행사는 그들이였을것이다.
김백파는 김성득, 김득수라고도 했는데 1919년 3.1운동때 남만의 통화신흥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성원으로 활약하였다. 3.1운동후 신흥학우단 성원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하였다고 하는데 1926년 5월에 김백파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그는 1927년 10월에 조공당만주총국 조직부장으로 임명되고 1928년 9월에는 리동산의 후임으로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뛰여올랐다. 김좌진암살도 김백파가 조공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뛸 때 벌어졌다. 그러니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암살내막을 제대로 알게 되였다.
그밖에 량환준선생은 지희겸도 이 사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장군도 자기의 회억록에 이 사실을 밝히였다고 서술하였다. 지희겸선생은 당년 조공당 엠엘파의 주요활동가로서 광복후 선후로 연변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위원장으로, 제1기 연변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으로 사업한분이다. 이런 신분의 지희겸선생이니 당년의 김좌진피살형편을 알고 증실까지 하였던것이다.
리연록장군은 이름난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이였다. 유감스러운것은 필자가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을 접하지 못한것이다. 이 회억록에 김좌진암살사실이 적혀있다고 하니 또 다른 증실자료가 될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후 1930년 5월에 량환준선생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또 중공아성현위 선전부장, 현위서기로 뛰면서 피어린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이런분이니 량환준선생의 증실은 믿을만한것이다. 공도진도 말하고 김백파도 말하고 지희겸, 리연록장군도 증실하였다는 사실은, 김좌진장군피살은 조공당 만주총국(화요파)의 소행임이 틀림없다는것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고보면 녀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공범이라는 설은 자연히 오류설에 지나지 않는다.
5. 중공만주성위 관련 문건들에서 (략)
6. 중국조선족 학계의 관련 글들에서 (략)
7. 일대 력사의 비극
본문에서 1930년 1월 김좌진장군 피살배후를 중점적으로 헤아려 보았다. 장군피살의 가장 주되는 원인은 기타 민족주의단체와 마찬가지로 흥기하는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면서 조공당과 엇서며 사회주의 계렬 선진청년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점차 민중을 엄중히 리탈한데 있다고 보아진다. 김송죽선생의 얘기처럼 김좌진장군이 “시종 바란것은 대동단결”이지만 실상은 중국구국군 제13군, 중국 남방지역의 국민당, 쏘련과는 련합할지언정 선진세력으로 광범한 인민대중의 옹호와 지지를 받고있는 조공당과 중공당,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렬과는 철저히 담을 쌓고 적대시했으니 1929년 6월에 벌써 조공당만주총국에서는 “신민부와 같은 부패한 민족단체는 매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중공만주성위에서 신민부, 한족련합회를 반공단체로 보고 련속 결의문을 내며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의 조선인 민족주의계나 조공당, 중공당 공산주의계 대립과 투쟁은 네가 죽고 내가 사느냐, 내가 죽고 네가 사느냐 하는 사활적인 투쟁으로 번져졌다. 일제와 싸우는데서는 목표가 일치하기에 공산주의계나 민족주의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지만 항일명장 김좌진장군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런 력사현실에서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에서는 결단하고 암살행동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력사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이것이 김좌진장군의 진실한 피살배후이다. 어찌하든 항일독립운동가이고 명장인 김좌진장군의 공은 혁혁하다. 장군의 생애를 조명하면 이는 력사의 긍정을 받아야 하고 또 받고있다. 하나 신민부, 한족련합회를 둘러싼 그 지도자로서의 김좌진장군의 이런저런 사도 력사의 현실이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살아가다보면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신선이 아닌 이상 이러저러한 오유, 즉 과오를 피면키 어렵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고 력사속의 모든 인물들도 그러하고 김좌진장군도 그러하다.
2010년 1월 28일, 보충수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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