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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발자취(11)-윤씨네 정착마을은 자동 부령촌
2010년 02월 26일 22시 17분  조회:1331  추천:20  작성자: 리광인


    【
윤동주 발자취(11)

 

 

윤씨네 정착마을은 자동 부령촌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에 다녀온 이튿날은 9 3일이다. 날씨는 의연히 좋아 한낮에 이르러 몹시도 뜨겁기만 한다. 아침식사후 연길을 출발했다지만 개산툰에 이르러 먼저 광소촌에 가서 이미 페교된 정동중학교 교문자리 등을 사진 찍노라니 자동 3대에 이른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나서였다.

자동 3 장기철로인댁을 찾아 인사드린후 나는 철길넘어 4대에 가서 향화촌 패말, 살구나무, 철교, 철교에서 내려다보이는 3대와 4대를 사진 찍어보았다. 점심식사후 나는 장로인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직접 자동의 윤씨네를 둘러싸고 흘러갔다.

장로인의 안로인 되는분은 차신옥이고 62, 명동출신, 재혼관계였다. 장로인의 부인은 개산툰 광소촌녀자로서 1964년도에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 하나 둘을 두게 되였다. 아들은 부대 갔다와서 한국에 가고 큰딸은 쿠웨이트에, 막내딸은 미국에 간데다가 1999 몸에 로친이 사망하니 장로인 한분이 외톨로 집을 지켜야 했다.

재혼은 4년전, 안로인 차신옥은 령감이 사망한후 장로인한테로 옮겨앉게 되였다. 인젠 구면이고보니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는데 예견대로 자동서 가장 오랜 마을은 부령촌이였다.

부령촌은 70세대의 마을이였으나 지금은 45세대쯤밖에 없습니다. 장씨, 한씨네가 많고 많던 윤씨네는 한세대도 없습니다.”

장로인의 계속되는 마을소개에 따르면 마을의 마지막 윤씨네는 윤영일이라고 부르는 , 부대에서 제대한후 룡정현 무장부 부장, 연변농학원 무장부 부장으로 사업하다가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이른바 외국특무로 몰려 피해 받고 사망에 이르렀다. 윤영일씨 부모들은 부령촌에서 사망되여 집이 부령촌의 마지막 윤씨네로 되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장로인의 경력담을 둘러싸고 이어지다가 다시 현실생활 이야기로 돌아왔다. 부치는 토지는 수전 석짐, 한전 여섯짐하여 모두 한헥타르쯤인데 일년농사는 수입이라야 5000, 정도수입으로는 먹고사는 정도밖에 안된단다.

농업세감면에 300, 종자보충수입 200원하여 모두 500원이라지만 대신 농약이 값이 올라 화학비료 1500, 농약 500원이다. 5000 수입에서 2000원을 떼내면 3000원쯤밖에 남지 않는다.

한마디로 지금의 농촌농사는 리득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80년대초 호도거리 3--4년간 생활이 펴이였다지만 그후 생활은 내리막질을 거듭, 출국바람에 마을에 늙은이들만 남으니 생활은 보다 하강선을 긋는다.

아기돌잔치 먹어본지 15년됩니다. 출생률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한해 치고 초상집은 몇세대에 이르러 여러번 가야 합니다.”

마을엔 30여살 총각이 4~5, 홀애비가 5명쯤에 이릅니다. 40대녀자를 볼수조차 없고 50대가 보입니다. 많은 가정이 혼자여서 로인들 사망률이 높습니다.”

이왕의 취재경험으로 보아 흐르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보아 막아나서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가 가끔가끔 토막나면 취재는 흔히 제곩으로 흘러들지 못하지. 이에 비추어 이야기가 마무리되여 장로인의 아버지 이주시간을 물으니 1910년쯤, 그때 벌써 자동일대에 조선이주민 세대수가 많더라고 들었다는 장로인.

이는 력사기재와도 어울려 떨어진다. 광서 7년이면 1881년인데 그해 길림장군 명안은 조정에 상주하여 선참으로 두만강이북지구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훈춘에 연변의 최고행정기관 부도통(副都統)아문을 설치한다.

봉금령해제와 개방조치는 숱한 조선이주민을 받아들여 오늘의 연변 해란강이남지역에 벌써 5590여세대의 조선이주민들이 밀려들었고 훈춘 부도통은 이들 개간구역에 따라 4대보(4大堡) 39개사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자동일대는 4대보중의 녕원보관할구역에 속했는데 녕원보의 소재지가 오늘의 개산툰진 광소촌이였다.

룡정현 광개향 자연툰 건툰(建屯)시간자료에 다르면 오늘 자동의 응달촌, 리화동, 부령촌, 후저동 마을의 형성시간은 광서초년이다. 광서원년이 1875년이니 윤동주의 윤씨가문이 두만강을 너머 자동으로 올때는 광서12년인 1886, 광서초년에 해당된다. 그때 이미 여러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말인데 20세기초에 이르러 자동 여러개 마을의 조선이주민은 200여세대에 달했다. 1910년쯤에 이미 200여세대를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무언가 륜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나는 장로인과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은 팔간기와집을 물었다. 100년도 넘는 팔간기와집이라고 하는데 원주인은 알수가 없지만 명동집으로 통했다는 기억이 난다고 했다. 명동집 래력을 물으니 의회단운동때인가 명동에서 몇집이 부령촌으로 와서 새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중대한 돌파구였다. 연변사학계의 권위인물 연변대 박창욱교수의 론문룡정의 명동중국조선족 근대문화의 발상지”(룡정문화총서, “일송정5, 연변교육출판사, 2002 8) 의하면 1900 그해 중국 의화단사건으로 하여 명동의 김하규 가족들이 자동으로 피난을 갔고 의화단사건이 즘즘하여지니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자동에 가서 새집을 짓고 살았다는것은 모르고있었다.

1899 2, 조선 종성과 회령의 김약연 4 가문이 명동으로 이주할 먼저 자동으로 이주한 윤씨네와 련락하고 취한 행동인데 1900년에 의화단사건이 터지니 그들은 윤씨네를 찾아 자동으로 가서 새집까지 짓고 한시기 살았었다. 마을이 부령촌이니 윤동주 조부네가 생활하던 마을이 부령촌이였음은 두말이면 잔소리다.

2005 9 2일과3, 이틀간에 걸쳐 자동 부령촌에서 만난 장기철로인, 이분과의 이얘기 저얘기에서 끝내 윤동주조부네가 1900년까지 14년간 자동에서 생활한 마을이 드러나고말았다. 윤씨네는 김하규 가족을 따라 다시 명동으로 이주하여 명동사람들로 알려졌으니 인젠 시름을 놓아도 좋을것 같다.

꿈에 별하늘, 깨여나 새벽의 밝은 , 그별 방향 따라 자동으로 달려갔더니 윤씨네 정착마을은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3--부령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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