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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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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세상에 어려운 일 없어라 모든 일은 하기에 달렸거늘
2016년 02월 19일 17시 46분  조회:1064  추천:0  작성자: 최고관리자


세상에 어려운 일 없어라 모든 일은 하기에 달렸거늘
 
ㅡ림장춘 연변일보 전임부사장 인터뷰

지난 세기 후반 격변의 년대인 1984년부터 16년간 연변일보 조선문판 주관 부사장 겸 부주필로 신문개혁의 최전선에서 지휘봉을 잡았던 림장춘선생은 항시 새로운 사유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면서 어렵고 민감한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그 당시 지구급 소수민족신문사로서는 거의 실현불가능한 일들을 하나하나 슬기롭게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위태롭지만 안정된 그의 고공줄타기와 같은 사업과정에서의 희로애락을 편린으로나마 더듬어보았다.

  ㅡ신문운영에서 새로운 사유로 신문의 가독성과 뉴스성을 강조한다고 했는데 낡은 신문운영의 틀에서 어떻게 벗어날수 있었는가?

  1986년 10월에 불을 지폈던 “신문관념갱신에 대한 대토론”은 전 편집부를 뒤흔들어놓았다. “관념을 바꾸고 새로운 사유로 창조적인 사업을 전개하자”는것이 당시 내건 슬로건이였다. 이는 연변일보 편집부가 오랜 전통적인 신문관념에서 헤여나와 신문법칙에 좇아 신문을 꾸리는 력사적인 대전환이였다. 당시 조선문판을 주관하던 나는 전국소수민족신문사업회의에서 돌아온후 사상해방에 관한 대토론을 조직하였다. 이 토론은 사내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고 사원들의 관념은 전례없는 활약을 보였으며 많은 고정된 틀들이 깨여지기 시작했고 신문의 모습도 커다란 전변을 보이기 시작했다. 뒤미처 11월부터 가독성이 향상된 “주말특집”, “사회생활”, “사색의 여울목” 등 새로운 전문란들이 생겨났고 좋은 제목 달기, 짧은 뉴스 쓰기 등 활동들도 이어졌다.

  ㅡ지방의 작은 신문은 국제성적인 활동을 보도하지 못한다는 관례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촌에 유일한 조선문신문을 배송시킬수 있은 비결은 무엇인가?

  연변일보사에서 신문관념을 갱신하고 현지보도에 치중하고있을 무렵인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을 맞이하게 되였다. 이는 국제성적인 현지보도를 체험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지방신문이나 소수민족신문이 국제성적인 활동을 직접 보도한 사례는 없었다. 연변일보는 지방신문이고 소수민족신문이지만 또한 당보에 속하므로 참여할 자격이 있다. 조건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일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 아닌가. 문제는 적극적으로 쟁취하느냐에 있다. 주견이 서자 나는 안면이 있는 신화사 비서장 장국량씨에게 련락해 아시안게임 취재권을 따줄것을 청구하는 한편 사람을 북경에 급파하여 따라다니며 교섭하게 하였다. 끈질긴 공작끝에 장국량씨는 사람을 아시안게임촌과 국가체육총국에 보내여 끝내 취재권을 얻어내였다.

  신문사에서는 즉시 장정일부총편집을 단장으로 하고 오기활, 오인철 등으로 구성된 취재단을 북경에 파견하여 처음으로 팩시를 리용해 원고를 전송해와 밤도와 찍어서는 이튿날 전문인원을 보내여 아시안게임촌 뉴스센터에 신문을 송달하였다. 이렇듯 북경아시안게임기간 연변일보는 지방의 소수민족신문으로는 유일하게 아시안게임의 취재권을 따내였을뿐아니라 매일 신문을 경기장에 들여보내였다. 아시안게임장내의 유일한 조선문신문으로 연변일보의 해외영향력을 넓혔다. 많은 한국언론 기자들은 아시안게임장에서 연변일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ㅡ통념상 언론은 외자와 외상을 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북경에서 연변일보 해외판 《일요경제》(주간)을 꾸릴수 있었던것은?

  1992년 나는 미국적 한인 박영회장과 함께 북경에 진출해 연변일보 해외판 《일요경제》(주간)을 꾸림으로써 북경, 천진 등 지역에서의 외상, 외자기업에 대한 연변일보의 영향을 넓혀보려 했다. 당보와 외국인이 손잡고 신문을 꾸린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불허사항이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개혁개방시대 경제부문에서 외상, 외자를 리용할수 있는데 문화부문은 왜 안되는가? 경제토대가 앞서고 상부구조가 뒤따르는것은 법칙인만큼 조만간에 실행될 사항이다. 이런 신념하에 우리는 편집위원회를 소집하여 외상과 손잡되 우리가 책임지고 신문을 꾸리며 외상은 광고를 책임지고 북경에서의 신문운영경비를 책임지도록 토의결정했다. 연후 우리는 편집판공실 김천주임(현임 부총편집)이 박수산, 김삼, 방홍국, 리영식 등을 이끌고 북경에 들어가 현지취재를 하고 김경석주임이 집에서 편집, 출판을 맡도록 했다. 이 결정은 당시 연변주위선전부장이였던 장룡준의 지지를 받았다. 이 신문은 대외경제와 외상에 대한 보도를 위주로 하였는데 내용이 새롭고 본간과 뚜렷하게 구별되여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리현덕서기의 지지를 받았으며 국내외의 호평을 받았다.

  이 신문은 후에 《월요경제》로 고쳐 줄곧 1999년까지 꾸려왔다. 이는 연변일보에서 사상 처음으로 당보의 전통관념을 깨뜨리고 과감히 외자와 외상을 리용해 자체의 내실을 다졌고 본지역을 떠나 새로운 보도령역을 개발하는 유익한 시도를 하였다.

  ㅡ어려운 고비를 뚫고 북경 등 여러곳에 지사를 세울수 있게 된 경험을 소개한다면

  대외영향을 확대시키고 새로운 광고자원을 개척하기 위해 우리는 1992년부터 선후하여 북경(지사장 박수산), 천진(지사장 방홍국), 청도(지사장 김삼), 심양(지사장 전관룡) 등지에 지사를 세웠다. 이런 지사들은 중앙선전부, 중국기자협회, 신화사의 지지와 유관 각 지역 당위 선전부문의 방조하에 합법적으로 세워진것이다. 이런 지사들의 설립은 당시 지구급 신문으로서는 유일무이한것이였다. 따라서 애로도 컸다. 이를테면 북경지사를 설립할 때 처음에는 북경시위 선전부에서 연변의 지리적위치조차 모르고있어 연변일보를 연안일보로 오인하기도 했다. 북경에서는 상해, 천진 같은 일부 대도시들만이 지사를 특설할수 있고 기타 지역은 일률로 비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직접 나서서 소수민족신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중국기자협회, 중앙선전부 신문국 등을 찾아다니며 지지와 협조를 간절히 부탁하며 설득한 끝에 마침내 특허증을 얻어냈다. 드디여 연변일보 북경지사가 맨처음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잇따라 천진 등 기타 지역의 설립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이와 동시에 1999년에는 또 한국 서울의 중심구역에 있는 중앙일보사 울안에도 연변일보 서울지사(지사장 김영옥)의 간판을 내걺으로써 남상복, 전평선, 리득룡 등 연변주위 책임자들의 칭찬을 받았다.

  ㅡ여러 차례에 걸쳐 적지 않은 외자를 도입해 “조국변경만리행”취재활동 등 대형 행사를 조직한바 있다는데

  1990년대 후기 개혁개방의 심입과 더불어 우리 나라에는 발달한 동남부와 상대적으로 락후된 서북지역의 발전이 불균형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아직 이 방면에 관련된 심층적인 계렬보도가 없었다. 나는 이런 광활한 변경지역이 신문보도분야로 말하면 사각지대이므로 많은 가치있는 뉴스거리가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연변일보가 생존발전할수 있는 공간이 생길지도 모르므로 취재단을 보내여 계렬보도를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장비도 없고 자금도 없다. 어떻게 할것인가? 지방신문으로 재력이 딸리기때문에 자체로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언론에서는 외자를 리용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경제부문이나 일찍 개방한 심수특구신문 같은 언론들에서 이미 외자를 리용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우리도 외자를 도입하여 “만리행”취재활동을 조직해볼수 있다. 1995년 여름 나는 중로 량국 동포언론인대표단 단장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 기회를 빌어 나는 지인인 중앙일보 경제부 박병석주임(현임 한국국회의원)을 통해 삼성그룹과 련락을 취해 취재차 한대를 지원해줄것을 요구했다. 대방에게는 취재차에 “삼성그룹찬조”라는 광고패를 내걸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외자도입과정은 어렵기만 했다. 그렇게 큰 대재벌이 20만원을 내는것은 소털 한대를 뽑아내는것처럼 쉬웠지만 이리저리 따지면서 번복하군 해 1년이 걸려서야 20만원을 받아낼수 있었다. 뒤이어 취재차를 구입하고 동남변경만리행 취재로선을 확정한후 정경락(부총편집)의 인솔하에 김창진, 허성, 민춘호 등 기자들로 취재활동을 시작했다.

  1996-1997년기간 취재단은 최동단 훈춘 방천에서부터 해남도 삼아에 이르기까지 5개월에 걸쳐 8만리를 행군하면서 30개의 특집면을 편집해내여 조선문 연변일보의 대외적영향을 넓혔으며 젊은 기자들을 단련시켰다. 이번 행동에 대해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소동승서기는 수도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장에서 “연변일보에서 조직한 만리행 보도는 우리 나라 신문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칭찬했고 중앙선전부 신문국의 책임자는 “‘만리행’은 일대 장거”라고 평가했다.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수도 12개 언론들에서도 이에 대해 보도를 했다. 이기간 나는 외자를 도입하여 취재활동을 진행한 연변일보의 행위를 합법화하려는 의도로 중국기자협회에서 나서서 뉴스발표회를 갖게 하였는데 그 결과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동시에 1996-1999년기간 한국의 지인 변선생을 통해 선후하여 한국 대한항공, 제일제당 등 기업으로부터 20여만원의 외자를 쟁취하여 꽃씨를 사고 연변주교통국, 주공청단위 등과 손잡고 “연길-장백산 도로에 코스모스심기활동”을 조직하여 연길-장백산, 연길-훈춘의 천리꽃길을 조성함으로써 연변을 미화하였다. 듣자니 이 꽃길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꽃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에 대해 한국일보는 “평양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왜곡했고 외교부의 추궁을 받았다. 당시 길림성위서기였던 장덕강(현임 국무원부총리)은 연변주위에 엄중히 조사처리할것을 요구했고 심어놓은 코스모스를 밀어버리게 했다. 이번 사실의 전후시말을 잘 모르는 주위선전부장 리득룡과 연변일보사 강룡운사장은 나의 정치적전도에 대해 걱정을 했다. 그러나 나는 두려울것이 없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지고 문제가 있어도 내가 담당한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두려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튿날 나는 외교부에 보고를 상정하여 이번 활동의 동기와 외자도입경로 및 구체적인 활동조직 등 전반 과정을 여실히 밝혔다. 내가 보고를 제출한후 기세등등하던 추궁은 사라져버렸고 코스모스심기활동은 저지되지 않았으며 나의 “벼슬”도 무사했다.



  ㅡ한때 서울에서 “연변일보 한국판”을 꾸린적도 있다는데

  중한간 경제개방과 문화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본 지역, 본국 울타리를 넘어 한국에서 신문을 꾸림으로써 선전을 확대하고 광고시장을 넓힐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정례대로라면 지방신문으로, 소수민족신문으로 국외에 나가 신문을 꾸린다는것은 절대불가능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경제분야에서는 국외에 회사를 차릴수 있고 인민일보나 남방일보 등 언론계에서도 미국에 나가 해외판을 꾸린 사례가 있지 않은가. 우리 신문은 왜 안되는가? 모두 당보로서 규모차이가 있을뿐 연변일보도 국외에서 신문을 꾸릴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 이리하여 1998년 하반년부터 준비를 거친후 내가 직접 서울로 건너가 김영옥지사장과 함께 연변일보한국판을 꾸리기로 하였다. 떠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걸음의 성공여부는 짐작키 어렵지만 나는 책임을 질것이요. 신문개혁의 희생양으로 되여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소.”

  서울에 도착한후 중앙일보의 협조와 한국기업의 후원을 받아 자금을 해결하고 본사의 돈은 한푼도 쓰지 않았다. 5월 31일 드디여 20개면 칼라판 《연변일보한국판》 시험호가 출간되였다. 전국의 공백을 메운 이 일은 주관 주위서기 김진길의 찬양을 받았다. 주장 남상복, 부주장 전평선 등은 선후하여 중앙일보사 별관에 내건 연변일보서울지사 간판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중앙일보 등 한국의 10여개 언론사들에서도 한국판의 출간에 대해 보도하였다.

 ㅡ언론사에서는 국제성적인 학술활동을 조직할수 없다고 들었는데 1998년 연변일보사 창간 50주년 행사기간 조직한  “제3회두만강지역개발국제학술회의”는 어떻게 된것인가?

  일반적으로 언론사에서는 국제성적인 학술활동을 조직할수 없다는것이 국내의 불문률이다. 하지만 지난 1998년 연변일보사 창간 50주년 경축행사기간 우리는 신문사의 돈을 쓰지 않고 “제3회두만강지역개발국제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 회의에는 중국, 일본, 한국, 미국, 몽골 등 나라의 50여명 학자와 관원들이 참가해 연변일보의 대외영향을 넓혔다. 언론기관으로서, 더우기 지방성 신문으로서 이런 활동을 조직한다는것은 당시로서는 허용치 않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주위선전부와 김진길 주관서기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보다도 지방신문과 소수민족신문으로서 자금래원도 없고 대외초청권도 없는 상황하에서 대규모 국제성적인 학술회의를 조직한다는것은 어려움이 컸다. 공식적인 절차대로라면 외사, 공안, 안전 등 부문은 그만두고라도 가장 익숙한 선전 주관부문에서도 동의하지 않을것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나는 관광초청 등 실시가능한 융통성있는 조치를 대여 신문사의 지지를 얻었으며 최종적으로 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이처럼 나는 재직시 선전부, 외교부, 중국기자협회, 신화사 등과 교섭하면서 지원을 받았고 미국적한인, 한국재벌들, 일본학자 등 외국인들과 사귀면서 찬조를 쟁취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이 당보의 주요책임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당성원칙과 신문법칙에 따라 처사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외사규률을 지키면서 새로운 사유로 창조적인 사업을 전개하니 좋은 결과를 볼수 있게 되였다.

  ㅡ오래동안 한국에 체류한걸로 알고있는데 그기간 주로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한국체류기간 나는 강의를 하는외 한국언론계와의 인맥관계를 리용해 적극적으로 연변일보를 위해 찬조를 쟁취하고 광고를 유치하였으며 남상복, 김진길 등 연변주위, 주정부 책임자들의 방한을 위해 연줄을 달아주는 등 일을 하였다. 2000년 여름 남상복주장이 270명의 대형 투자유치단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할 때 서울에서 고층차의 뉴스발표회를 조직해줄것을 요구하였다. 1996년 “만리행”취재활동시 북경에서 중국기자협회를 통해 인민일보, 신화사 등 10여개 주요 언론사가 참가한 뉴스발표회를 조직한 경험이 있는 나는 한국언론계의 인맥을 리용해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15개 주요 언론사가 참가한 뉴스발표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중앙일보에는 남상복주장의 인터뷰가 실렸고 3분의 1의 가격으로 연변을 소개하는 전면광고가 실렸다. 이에 남상복주장은 “지방의 소수민족신문사 책임자로서 이렇게 넓은 인맥관계와 뛰여난 조직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ㅡ행정적으로 출세할 기회도 많이 있었을텐데

  신문사업에 20여년간 몸담아있으면서 나에게도 행정적으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번 그 기회를 포기했다. 1993년 신문개혁에 열을 올리고있을 무렵 연변주위선전부장 리정문이 나에게 주위선전부 부부장으로 전근해 함께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여러번 제의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절했다. 정치에 자신이 없었고 행정쪽 일을 할 마음이 없었기때문이다. 그것은 문화대혁명후기 “516”혐의로 수감되고 로동개조를 했던 일이 나의 마음속깊이 깊은 상처를 남겼기때문이기도 했다. 그때의 억울함이 깊이 맺혀서일가 나는 “정치”하면 혐오감을 느꼈고 평생 행정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연고로 1975년 “516” 력사문제가 해명된후 현위조직부에서 모 공사 당위부서기로 임명하는것을 사절하고 중학교 부교장직을 선택했으며 1980년에는 훈춘현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임명하는것을 사절하고 연변일보 기자직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일말의 후회도 없이 20여년간을 시종여일하게 신문사업에만 매달렸고 지어 집착한 나머지 피곤한줄도 몰랐다. 노력은 결실을 맺기 마련이다. 1994년 나는 고급편집으로 평의되였고 선후하여 연변주기자협회 부주석, 길림성보도부문고급직무심사위원, 중국지구급신문연구회 부회장, 중국기자협회 리사를 담임했다. 1991년 중국언론대표단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했고 1995년에는 중로해외동포언론대표단 단장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1995년에는 일본동아연구소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렇듯 나는 국내외 언론계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였고 연변일보의 대외영향력을 넓혔다.

  ㅡ퇴직후의 생활은?

  지난 한때 오직 “신문”이라는 한우물만 파오다 여생의 마무리단계에서도 신문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단순한 기사읽기가 아닌 평보에도 시간을 할애하면서 후배들에게 귀띰해주는것을 선배로서의 자신의 의무로 간직하고있다. 독보, 독서외 매일 인터넷과 함께 하는 시간은 하루 네시간 정도, 이 시간에는 몇몇 고정된 사이트를 훑어보는외에 8년 동안 줄곧 한국 한자총련합회 월간지에 송고하는 한자 중국어 관련기사 원고 작성 그리고 후세에 넘겨줄 자서전 출판준비 등으로 재직시절 못지 않게 바쁜 만년을 보내고있다.

  퇴직생활을 더 이야기하자면 1999년 내가 서울에 나가 연변일보한국판을 창간할 때의 과정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당시 나는 제2선에 물러서게 되여 본의아니게 계속 남아서 일을 해야 했다. 초빙에 따라 나는 한국성공회대학에서 중국어학과를 새로 개설하고 이 학과의 첫 외국인교수로 되였다. 일을 맡았으니 잘해야 한다. 한국내에서 한창 붐을 일으키고있는 중국어열조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2년여 동안 저녁시간을 리용해 중국어 및 중국문화에 대한 책 3권을 편찬, 출판했다. 나는 저녁마다 책을 만들기에 골몰하느라 밤가는줄도 몰랐다. 나를 동반해 한국에 나온 부인이 타자를 하는 등 일손을 도왔다. 책이 출판된후 서점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그중 《중국어간체자쉽게배우기》라는 책은 편폭(430페지)이 크고 가격(한화 2만원/책)이 비쌌지만 7차나 재판되였으며 한국 각 서점의 잘 팔리는 책으로 되였다. 나는 이 3권의 책이 출판된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은 이런 책들이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문화를 리해하는데 필요한것이고 또한 중한 두 나라의 교류와 발전에 약간이나마 기여할수 있었다고 믿기때문이다. 나는 이미 《중국어간체자쉽게배우기》와 《간체자천자문》을 위해 저작권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남기는 유물이 되였으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ㅡ후배언론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언론인으로서 독서, 특히 신문업무리론공부에 게으름없는 노력을 경주하라고 거듭 당부하고싶다. 신문은 역시 하나의 학문이다. 기본적인 업무리론토대가 결핍한 명기자, 명편집은 나올수 없고 또 창의적으로 대담히 사업을 추진하는 현명한 지도자도 나올수 없다. 《신문학개론》, 《취재학》, 《편집학》 원리공부는 기본이고 《신문전선》(인민일보사 출판), 《중국기자》(신화사 출판) 등 국내 언론미디어분야의 권위성간행물을 필수리론공부도서로 정하고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곧바로 관념이 갱신되고 사유가 새로워지며 아울러 국내외 언론발전추이정보를 정확히 파악할수 있어 참신한 아이디어가 창출되는것은 물론 담략이 커지고 지혜가 늘고 방법도 생기게 될것이다.   

윤재윤 기자

인터넷료녕신문 20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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