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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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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진으로 보는 그 때 그 시절 댓글:  조회:749  추천:0  2021-02-04
  1992년 12월 15일, 북경지사 설립 기념 촬영. 중국기자협회서기처 리현덕 서기 (뒤줄 좌3)외 본사 파견 중견기자 편집들인 앞줄 좌1 김삼, 좌2 박수산, 뒤줄 좌1 리영식, 좌2 김천, 좌4 림장춘, 좌5 방홍국, 좌6 오인철    1992년말, 해외판 주간지 북경진출 운영에 관련, 주간지 팀 멤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적 미국인 박영 회장 (앞줄 좌1)과 합작협의서에 조인하고 있는 림장춘 부사장 겸 부주필 (앞줄 중)  "일요경제" 시범호 출간후 외국인 파트너 박영 회장이 북경'보배원'에서 베푼 축하파티의 한 장면    
17    무한도전이 남기는 그라프 댓글:  조회:544  추천:0  2021-02-03
무한도전이 남기는 그라프 -쉼없는 언론인 림장춘선생의 거침없는 질주     안려홍      림장춘선생을 다루는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앞서 텔레비죤에서 자주 나오는 〈무한도전(无限挑战)〉이라는 프로그람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림장춘선생의 언론인생애가 이 명사와 신통히도 맞물린다는 판단에서였다. 견물생심이라 할가, 이 참에 흔히 쓰는 이 어휘의 뜻을 보다 정확히 알고 싶어 사전을 뒤적여보았다.       무한—한이 없음.   도전—비유적으로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갱신에 맞섬.   이번에는 ‘한’을 따로 찾아보았다.   한—넘지 못하게 정하거나 이미 정해진 정도의 범위.     이 해석들을 퍼즐같이 맞춰보면 ‘무한도전’의 뜻을 대체적으로 추려낼 수 있다.       주인공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가 걸어온 생애와 이루어놓은 무훈담을 보고 우리 스스로 지어낸 이름의 ‘쉼없는 언론인’은 일찍 연변일보사 부사장, 부총편집을 맡고 조선문판을 주관해온 림장춘선생이다.      림장춘선생이 불꽃 튀는 언론현장을 떠난 지도 어느덧 20년이 다가온다. 1942년생이니 어언 팔순을 지척에 두고 있다. 다만 팔순을 지척에 둔  로인답지 않게 젊음이 넘쳐흐른다. 첫만남이라면 누구도 그를 팔순 로인으로 짚기 힘들다. 그만큼 ‘쉼없는 언론인’, ‘청년 림장춘 총편집’이라고 부르는 게 가슴에 편안하게 와닿는다. 사실상 그는 오늘도 현역에 짝질세라 신문 관련건으로 분주히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다. 퇴직후 2013년부터 《연변일보》 조문판편집부의 고문을 맡고 기자들의 신문기사 원고평의를 맡아함과 동시에 2014년부터는 연변일보사의 리퇴직부서(190명) 당지부서기직까지 맡고 있다.      림장춘선생은 1942년 4월 29일, 훈춘현 마적달향(지금은 하다문향) 탑자구촌에서 태여났다. 1958년 9월부터 1959년 8월까지 훈춘현 춘화중학을 다니였다. 춘화라면 훈춘에서도 치벽진 변경향이고 오지인 연변에서도 또 오지에 속한다. 교통이 숨막히던 그 시절, 연길에서 도문, 훈춘을 거쳐 춘화에 이르자면 뻐스를 타도 세시간 반이나 걸린다. 이 깊숙한 산골중학교에서 당시 16세 나이에 글쓰기를 무등 즐겼던 소년 림장춘은 《춘화중학보》의 집행부주필을 맡게 된다. 하긴 지금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등사신문이였음에도 그의 글쓰기 싹수가 인정받았다는 대목이다.        1964년부터 1967년 8월, 중앙민족학원(지금의 중앙민족대학) 한어문 문학학부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 과정에도 림장춘선생은 학교 벽신문—《단결보》의 편집을 맡고 글쓰기 기량을 꾸준히 닦았다. 아무튼 오지 시골에서 수도 북경에 와서 거친 대학공부는 림장춘선생의 시야를 틔워주었고 넓은 세상으로 진출해야만 오지의 미래도 밝다는 상상을 키워주었음에 분명하다. 북경에서의 대학공부에서 그는 향후 사회에 진출하여 맞게 될 무수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을 의욕을 다지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2월부터 훈춘현 외사판공실에 배치되여 신나게 일하던 와중 억울하게도 대학시절 문화대혁명시기의 ‘전과’라는 얼토당토 않는 ‘로동개조’를 감내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듯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글쓰기라는 초심만은 잊지 않았다. 1975년에 ‘무죄’로 시인되여 훈춘현 선전부에 전근되여 보도과장을 맡게 되면서 언론과 보다 가깝게 다가가게 되였다. 1980년에 《연변일보》의  훈춘주재기자로 있으면서 림장춘선생은 조선문판, 한문판에 보다 전방위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개방을 서두르고 있는 동북아의 삼각주—훈춘과 관련된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지금도 당년의 《연변일보》를 펼쳐보면 림장춘선생이 부지런히 뛰여다니며 써낸 기사를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림장춘선생은 당시 연변주위의 후비 간부임명에서 내놓은 혁명화, 전문화, 년소화 등 기준을 딛고 연변일보사의 일반 편집기자로부터 부총편집, 부사장으로 전격 임명되였다. 훈춘 오지로부터 연길로의 진출로 그는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 정거장에 이르게 되였다. 아니, 첫 단추를 끼웠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종착지는 아니였다. 이 때로부터 2002년에 퇴직할 때까지 림장춘선생은 일개 지구급 소수민족 당기관지인 《연변일보》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연변일보》를 무게 있고 독자들이 반기는 신문으로 꾸릴 의욕으로 정열을 불태워왔다. 언론인 생애에서 이룩한 성취를 인정 받아 1994년에 고급편집 직함을 받고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제4기 중국기자협회 리사로 당선되는 영예도 누렸다. 또 중국소수민족신문연구회 부회장, 길림성신문계렬고급직함심사위원 등 묵직한 사회직무를 력임해왔다.    언론인생애에서 림장춘선생이 이룩한 성취들은 하도 많기에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여기에서는 다만 동료들과 손 잡고 《연변일보》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연변일보》가 국내, 국외로 진출하는 처녀지를 열어가면서 힘든 가시밭길을 헤쳐온 몇몇 이야기에만 펜을 대볼가 한다. 그 과정은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같이 짜릿하면서도 흥미롭다.        당시 《연변일보》는 관련 규정에 따라 연변을 벗어난 타지역의 뉴스를 보도할 수 없는 국한성을 갖고 있었다. 지역에만 한정되다 보니 독자들을 확 끄당길 만한 뉴스거리가 적었고 꽤 단조로웠다.     마침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이 열리게 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역신문이 국제적인 행사를 현장에서 취재하여 기사화한 사례는 없었다. 일찍 4년전인 1988년 상반년, 상해 복단대학 신문학부에서 개최한 전국 언론사 총편집연수에 참가해 계통적으로 신문리론 지식을 터득한  림장춘선생은 북경아시안게임이야말로 천재일우의 돌파구라고 판단하게 되였다. 판단은 판단이고 그 가능성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게 안개속에 가리워져있었다. 우선 그는 친분이 있는 신화통신사 장국량(张国良) 비서장한테 련락하여 취재권을 따줄 것을 간곡히 청구했다. 림장춘선생의 간청에 감화된 장비서장이 직접 전국체육총회에 제기하는 한편 해당 일군을 파견하여 교섭하여 드디여 북경아시안게임 취재권을 거머쥐게 되였다. 이어 《연변일보》는 장정일 부총편집이 단장을 맡은 5명의 취재팀을 북경에 급파했다. 모든 부서가 아시안게임보도를 주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북경 쪽에서 취재팀이 팩스로 원고를 전송해오면 신문사에서는 이튿날 바로 신문을 찍어서 렬차로 북경에 보내 아시안게임촌에 송달하는 수순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북경아시안게임촌에 배송된 조선문신문으로는 《연변일보》 하나뿐이였다. 물론 어벌 크게도 지역신문으로도 유일하였다. 북경아시안게임 기간에 《연변일보》가 매일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서 수많은 한국언론사 기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연변일보》의 위상을 현지에서 일별하게 되였다. 이 역시 그 뒤 《연변일보》의 해외진출에 멍석을 깔아둔  셈으로 되였다.      독자군이 제한되여있고 정보원천이 적은 등 소수민족신문으로서의 아쉬움을 장점으로, 우세로 활용할 수 있는 지름길이 없을가 하고 림장춘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타지역에 기자소를 세우자는 발상도 이 고민 속에서 나오게 되였다. 여기에서 뚫어야 할 첫 관문은 당연히 수도 북경이였다. 당시만 해도 북경에 기자소를 세운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능성이 전무하다 할 아츠란 벽이였다. 심의가 하도 까다로워 상해, 천진 등 일부 대도시외 기타 지역은 일률로 비준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있었다. 길림성에서도 그 때까지 북경에 기자소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림장춘선생은 소수민족신문이라는 어딘가 불리한 조건을 리로운 조건으로 내세우는 역사유로 부딪쳐보았다. 그는 선후로 중공중앙선전부, 신화통신사, 북경시당위를 일일이 찾았다. 중공중앙선전부의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찾아 반복적으로 설득하고 간곡히 부탁하여 그나마 통과하고 보고문을 작성하여 북경시당위를 찾아갔을 때는 문턱에 걸렸다. 북경시당위 선전부 책임자들은 연변의 지리적 위치도 모르거니와 《연변일보》를 섬서성의 《연안일보》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연변일보》라는 작은 지역 신문인 걸 알고 나서 소수민족신문이 무슨 기자소냐고 어림도 없다는 태도로 나왔다. 그러자 림장춘선생은 소수민족일수록 더 배려해줘야 되지 않느냐, 왜 차별대우를 하느냐 하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북경시당위에서는 《연변일보》가 북경에 기자소를 세우도록 특별비준하였다. 1993년, 북경에 기자소를 세운 데 이어 1~2년 사이에 천진, 청도, 심양, 영구, 목단강 등 기타 지역에도 기자소가 일사천리로 세워지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서울의 정치중심이라 일컫는 종로구에 《연변일보》 서울지사라는 큼직한 간판까지 버젓이 내걸었다. 이로 《연변일보》는 새로운 정보원천을 개척하고 대외련락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대외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였다.     1992년, 림장춘선생은 몸소 북경에 진출하여 미국적 한국인 박영 회장과 손 잡고 《일요경제》라는 《연변일보》 해외판을 꾸리게 되였다. 〈외국인 투자, 신문사 편집출판, 광고 공동경영〉이라는 구도로 판을 짜고 발행대상은 북경, 천진 및 연해 개방도시 3자기업(중국내의 외국독자기업, 중외합자기업, 중외합작기업의 통창)으로 잡았다.     외국인과 손 잡고 신문을 꾸리는 극히 민감한 문제에서, 심수나 광주 등 남방에서는 가능한데 왜 북방은 안되며 한족은 가능한데 왜 우리 조선족은 안되는가 라는 것이 림장춘선생이 당시 이 아이디어를 면밀하게 타진하며 과감히 추진하게 된 결정적 근거였다. 이 결정은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선전부 책임자와 새로 부임된 연변일보사 강룡운 사장의 지지를 받았다. 《일요경제》는 당시 시대의 흐름에 알맞게 대외경제와 외상 관련 보도를 위주로 다루었는데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리현덕 서기의 지지를 받았고 국내외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였다. 《일요경제》는 그 때 흔치 않게 북경에 김천 편집부 주임(현임《연변일보》  부사장, 부총편집)이 이끄는 편집기자팀을 두고 현지에서 취재, 편집하여 연길본사에 보내여 출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였다. 그만큼 정보량이 많고 신선하고 내용이 광의적이였기에 독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 시대 독자들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주는 특간이였다. 특간이라는 개념도 그 무렵에 정착되였다고 추정하게 되는 대목이다.     림장춘선생의 머리에서는 언제나 ‘파격’이라는 두 글자가 떠난 적 없었다. 개혁개방이 파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그 앞에서 리드해나가야 할 언론이 뒤꽁무니를 따른다면 시대에 부끄럽다는 맥락에서 홀제 ‘만리기행’을 머리에 그려보게 되였다. 그 때 주관적, 객관적 원인으로 우리 나라 동남부연해지대와 서북부발전은 불균형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매체로 말하면 이 테마는 그 때까지 사각지대나 다름없었다. 개혁개방의 열기로 끓어오르는 대표적 연해지역과 중점도시들을 답사하여 기사화하면 연변의 경제발전에도 소중한 ‘경서’를 제공할 수 있고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뉴스거리를 선물할 수 있다는 장미빛 청사진 앞에서 림장춘선생은 편안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취재팀을 묶은 시리즈보도가 필수적인 만큼 만만치 않은 인력, 물력, 재력이 따라가야 하는, 《연변일보》 력사에서도 전례 없는 대역사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자금이 발을 묶었다. 지방재정에 기댈 수 없는 상황이기에 스스로 자금을 해결해야만 기획을 차질없이 추진해나갈 수 있었다. 당시 일찍 개방한 《심수특별구보》 등 신문매체에서 이미 외국자본을 리용한 선례는 림장춘선생에게 황금 같은 정보였다.     마침 1995년 여름에 림장춘선생은 중국—로씨야 량국동포언론인방문단 단장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그 기회에 지인인 《중앙일보》 경제부 박병석 부장(현임 한국 국회의장)을 찾아갔고 그 인맥으로 삼성그룹과 련락이 닿아 취재차 한대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삼성그룹에서는 흔쾌히 답복하면서 취재차에 ‘삼성그룹 협찬’이라는 광고를 걸어달라는 협찬조건을 내놓았다. 방문기간에 계약을 맺고 속이 든든하여 귀국했지만 정작 외자도입과정은 말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다국적기업인 삼성그룹을 놓고 말할 때 인민페 20만원 정도는 거뜬히 내놓을 수 있었음에도 꼬박 1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받을 수 있었다. 자금이 해결되자 취재차 한대를 구매하고 정경락 부총편집을 선두로 4명의 기자를 취재팀으로 묶어 미리 짜놓은 취재코스 대로 ‘만리기행’의 시작을 알렸다. 뒤미처 이를 알게 된 당시 연변TV방송국 채영춘 국장도 기자를 급파하여 ‘만리기행’ 취재팀에 합류하면서 문자, 사진, 영상을 포괄적으로 갖춘 종합실력을 갖추게 되였다.     안해와 더불어 출간의 희열을   1996년 9월부터 1997년 1월까지 5개월 동안 취재팀은 우리 나라 최동단 훈춘 방천에서 출발하여 최남단 삼아에 이르기까지 8만리를 달리면서 취재해 근 40개 특집면을 줄줄이 내놓았다. 가는 곳마다에서 취재도 하고 연변을 홍보하면서 《연변일보》의 대외영향력을 크게 넓혔다.   취재차가 북경에 들어설 무렵 림장춘선생도 북경에 이르렀다. 그는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기자협회 리사였기에 발언권을 가지고 있은 만큼 중국기자협회와 교섭하여 중국기자협회의 명의로 소식공개회를 가졌다.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수도 12개 주요언론매체 기자들이 참석한 기자회견장에서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소동승(肖东升) 서기는 “연변일보사와 연변TV가 조직한 ‘만리기행’ 보도는 우리 나라 신문분야에 하나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중공중앙선전부 신문국의 책임자는 “‘만리기행’이야말로 일대 장거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만리기행’취재활동은 전국에 쫙 알려지게 되였다. 당시 조남기 상장(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리영태 중장(공군 부사령원) 등 지도자들도 취재팀을 접견하고 따뜻이 격려해주었다.     전통관념, 관행 대로라면 지역 신문사이자 소수민족신문사인 《연변일보》가 국외에 진출하여 신문을 꾸린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였다. 림장춘선생은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인민일보》나 《남방일보》 등 언론매체들도 미국에 진출해 해외판을 꾸린 사례가 있는데 《연변일보》가 안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또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1998년 하반년부터 사전준비작업에 들어가 이듬해초 편집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드디여 한국에 진출해 《연변일보》 한국판을 꾸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해당 준비사업을 마친 후 림장춘선생은 직접 서울에 나가 지사장을 맡은 김영옥기자와 함께 《연변일보》 한국판 출간을 서둘렀다. 떠나기 앞서 림장춘선생은 중층급 이상 간부들을 소집해놓고 “이번 길의 성공 여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모든 책임은 나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것을 오늘 약속한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신문개혁의 희생양으로 되겠다.”라고 비장하게 각오를 밝혔다. 《중앙일보》의 협조와 한국기업들의 후원을 딛고 1999년 5월 31일, 드디여 20개 컬러면으로 된 《연변일보》 한국판 시험호를 내놓았다. 이는 우리 나라로서는 최초로 한국문화관광부에 등록하고 한국에서 출판, 발행된 첫 중국 조선문신문이였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주관 책임자는 해외판의 출간을 격려, 긍정하였고 남상복 주장, 전평선 부주장 등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책임자들도 선후하여 《연변일보》 서울지사 간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 고무해주었다. 《중앙일보》, 《동아일보》등 한국의 메이저매체들도 《연변일보》한국판의 출간을 대거 보도하였다.    아시안게임 보도, 북경기자소 설립, ‘만리기행’취재, 《일요경제》, 《연변일보》 한국판  창간 등 굵직굵직한 행사들은 림장춘선생이 무에서 유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은 획기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들이다. 이처럼 림장춘선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흔들림없는 집념과 파격적인 도전으로 하나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루어놓았다.    퇴직한 후에도 림장춘선생의 하루하루는 분주하다. ‘쉼없는 기자정신’을 끈끈히 이어오고 있다. 일찍 재직시절에 펼쳐낸 신문학 저서 《신문학강좌》(1985년, 공저)를 비롯한 《연변일보 50주년기자작품선》(1998년, 주필), 《연변일보 50주년 통신원작품집》(1998년, 주필)에 이어 정년퇴직후에도 부지런히 붓을 놀려 《중국어간체자 쉽게 배우기》(2001년, 서울 출판), 《간체자 천자문》(2004년, 서울 출판), 《간체자와 번체자 대조해석》(2004년, 서울 출판), 《세기를 주름 잡는 〈연변일보〉》(2015년) 등 도서들을 펴내였다. 그중 한국 체류기간 성공회대학의 첫 외국인교수로 초빙되여 교수를 하는 동안 내놓은 《중국어간체자 쉽게 배우기》(430페지)는 여덟번 재판될 만큼 베스트셀러로 떠올라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이젠 퇴직후여서 집에도 사랑을 쏟을 여유가 있게 되였다. 그 하나가 손녀의 일기쓰기지도이다. 현재 중학교 3학년생인 손녀는 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현재까지(12월 20일) 무려 2,970편의 일기(80여만자)를 써왔다. 지난 2018년에는 소학교졸업기념으로 일기작품집 《중국꿈, 나의 꿈》까지 묶어내게 되였다.   지금 림장춘선생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병마를 이겨내면서 한뉘 신문이라는 한 우물만 파온 일생을 정리한 신문작품집과 자서전 출판 준비를 다그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안해 김정희(76세)씨가 이미 35만여자에 달하는 원고 타자를 마무리한 상황, 래년 출판을 앞둔 막바지 작업으로 꽤나 드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편 그는 태여난 마적달 탑자구촌 촌사 편찬을 인생의 마지막 도전, 마지막 작업으로 밀고나가고 있다. 누가 쓰라고 해서가 아니라 촌 력사의 진실을 기록해서 후세에 넘겨주려는 사명감에서이다. 자료수집, 정리도 태반이 된 상황이다. ‘쉼없는 언론인’ 림장춘선생은 촌사쓰기로 기자리레를 멋지게 이어가고 있다. 무한도전의 종착지가 과연 어디까지일지 심히 기대된다.     2021년 제1기 
16    林长春:跨世纪延边新闻史的见证人 댓글:  조회:1570  추천:0  2016-06-03
林长春:跨世纪延边新闻史的见证人   本报记者 陈颖慧     当你捧起散发着清新书香、刚刚出版发行的《跨世纪的(1998-2013)》这本书,阅读书中那些真实的记录,品味字里行间那流淌的真挚感情,每一位曾经或正在从事延边新闻事业的人也许会不由自主地将目光投向本书的编著者——林长春。     林长春可以称得上是延边日报社“老报人”了。他曾于1984年1月至2002年8月担任延边日报社副社长兼副总编辑工作,亲历了延边日报社在世纪交替、改革发展岁月中的一段历史;见证了延边日报社在反映社会民生、记录时代变迁、宣传改革开放、推动社会进步方面所发挥的不可替代的历史作用;而今又编著了《跨世纪的(1998-2013)》一书,真实记录了世纪之交阶段珍贵的历史。林长春说,这是他此生最引以为自豪和欣慰的一件事。      《跨世纪的(1998-2013)》,是一部继《延边日报新闻志(40年史)》、《延边日报50年史》,续写跨入新世纪前后(1998年∼2013年)阶段《延边日报》发展历史的又一本“社志”。 此书同时收录延边各族人民跨入新世纪前后年代团结进步、奋力推进改革开放全过程的“大事记”,犹如一部延边“地方志”。此书不局限于本地区,还收录我国(包括本省)政界重要人事变动、重大决策以及在国内外享有一定名气的全国范围内朝鲜族知名人士事迹和活动,故具有一定的收藏、实用价值。 《延边日报》创刊于1948年4月1日,至今67年来,始终坚持正确的舆论导向,努力宣传党的路线、方针、政策,为维护国家统一、民族团结,促进民族经济、社会、文化事业的发展,积极向海内外宣传延边等方面作出了重大贡献;同时及时反映广大群众的呼声,成为党联系群众的桥梁和纽带。《延边日报》一直是延边地区乃至中国朝鲜族社会公认的主流媒体。书写延边日报社“社志”,真实记录延边日报社的发展历程,意义重大。     外表总是谦和儒雅的林长春,工作起来真有股子“拼命三郎”的劲头。记得那是2013年春天,在延边日报社办公大楼里,见到了已退休多年、年逾七旬的林长春,他面带笑容地告诉记者,准备编撰一本记录延边日报社近16年发展历程的一本书。当时这本书还没有名字。从那以后,每天都能看到他不知疲倦的身影。不论风霜雨雪,他像一位在职员工一样,早晨和大家一起上班,中午在食堂就餐,埋头在卷帙浩繁的资料中挑选着、整理着,撰写着。他把整理好的素材拿回家,又求年过70的老伴儿帮他打字,形成书的初稿。历时一年,林长春每天坚持工作六七个小时,翻阅了自1998年至2013年间《延边日报》朝、汉两个文版3万多个版面,以及自1948年创刊以来的所有历史档案资料。一本37万字,时间跨度达16年的《跨世纪的(1998-2013)》终于脱了稿。回首编撰细节,林长春激动地说:“说实话,刚开始着手编这本书,我有所顾虑,生怕自己年迈力衰,力不从心,半途而废。可这一年的紧张工作,我有机会翻阅跨世纪前后延边发展的历史记录,抚摸改革开放时代的脉搏,受益匪浅,同时也对自己的体力、精力及记忆力进行了自检,经过‘实战’检验,这‘三力’都过‘关’,而且比我想象得还要好。”    《跨世纪的(1998-2013)》一书承接过往,将延边日报社66年的历史完整地接续起来,成为人们了解《延边日报》,再现延边新闻史发展的一面真实的“镜子”。     这部志书分为21章,但内容主要由“概况”、“大事记”两大模块组成。在编写过程中,林长春忠实于历史,恪守实事求是原则,按照新闻规律和新闻价值要素原理,将历史事实客观地记录下来,既肯定了主流,又没回避问题。至于其中一些是非曲直,则留待后人去评说。     《旧唐书·魏征传》中有这样一段话:夫以铜为镜,可以正衣冠,以史为镜,可以知兴替,以人为镜,可以知得失。林长春编著的这本《跨世纪的(1998-2013)》告诉人们,只有改革创新,与时俱进,延边日报社才能适应当今多媒体激烈竞争中继往开来,谱写出更加辉煌的新篇章。 刊于2015年10月16日《延边日报》(汉文版)第6版
15    第十章 广告事业 댓글:  조회:1211  추천:1  2016-04-21
第十章 广告事业   第一节 朝汉文版广告处 广告处是延边日报社的重要经营部门,多年来一直实行承包经营。延边日报社广告处现分朝、汉文两个部门,其中,广告经营收入以汉文版广告为主,约占年度总经营额的80%左右。汉文广告部现有广告编采及美术、排版人员10余名,朝文版广告人员8名。 随着《中华人民共和国广告法》的实施及各种广告法律法规的逐步完善,延边日报社的广告经营事业也逐渐步入正轨。作为地区一级党报的广告处,历来重视树立党报形象,维护党报声誉,坚决杜绝虚假广告。尤其对食品、药品、保健品、医疗类广告严格把关,无相关审批证明的广告以及与审批内容不相符的广告一律不予刊登。 广告收入是报社经营收入的重中之重,广告经营的好坏直接影响报社的整体运行。多年来,广告处为了做大做强报纸广告,曾多次到南方媒体考察,汲取先进的广告经营理念与经营方式,充分利用延边地处东北亚经济圈的区位优势,不断扩大广告源,增加了广告收入。经广告处全体人员的奋发努力,报社朝、汉两文版广告收入一年一个台阶,逐年得到增加,1998年广告收入实现210多万元。 然而,近年来,随着互联网、手机网络等多媒体及城市LED广告平台的出现,纸质媒体受到极大的冲击,广告业绩受到严重影响。广告处及时调整广告经营结构,充分利用党报主流媒体的优势,转而经营各级政府部门及与广大人民群众生活相关的各类《公告》。广告人员深入全州各地、各行各业、各个部门逐一走访,联系《公告》事宜,成功地将全州大部分《公告》拉到《延边日报》上刊登,终于止住延边日报社广告经营的溃滑颓势。到2013年末,两文版广告经营额累计达到近千万元,创报社广告收入新纪录。 随着广告经营状况的逐步好转,广告部的各项软硬件设施也从无到有,办公条件有了很大的改善。为了提高广告的设计水平,力争广告客户满意,广告处曾两次在社会上公开招聘广告设计人员,并大量购进广告设计软硬件设备及所需图库等,极大地提高了广告设计制作水平。精心设计制作的广告文案多次在国家、省州有关部门的评比中获奖,为延边日报社赢得了良好的声誉。 1998年以来,延边日报社广告处曾多次获得省州各级有关部门的嘉奖。如2009、2010年先后被吉林省广告协会授予“吉林省先进单位”称号。广告处处长边文利亦多次被国家、省州有关部门授予先进个人及优秀经营工作者称号,并被东北报业协会授予终身成就奖。   第二节 国际广告公司(1989~2013)   延边国际广告公司是1989年由国家工商局特批的延边州内唯一能代理国内外企业商品广告经营权的有法人资格的国有经济实体。 该公司是由延边日报社投资兴建的隶属企业,具备策划、创意、设计、制作等全面服务能力,全方位为广告客户代理国内外各地报纸、广播、电视、杂志及户外广告业务。 历年来,延边国际广告公司在遐迩闻名的中华名山“长白山”旅游胜地、长吉图开发开放先导区域中心地段,投巨资开发了各种户外广告媒体,并为韩国LG集团、三星电子、DACOM、韩国航空、中国移动、中国电信、保险、BC啤酒等国内外广告客户代理发布广告,从而创造了可观的经济效益和社会效益,为报社经营创收做出了积极贡献。
14    第九章 发行工作 댓글:  조회:1075  추천:0  2016-04-21
第九章 发行工作   延边日报社报刊发行经历多种形式、多种途径,但其基本形式是邮局发行与自办发行两种。 回顾《延边日报》发行历程: 1948年4月1日报纸创刊到1950年末的《延边日报》发行,靠各县供销社系统代办; 1951年《东北朝鲜人民报》(《延边日报》、哈尔滨《民主日报》、沈阳《团结日报》三社合并为一社)阶段发行,通过新华书店代办; 1952年10月开始(1955年1月1日报头改为《延边日报》)到1988年底36年期间发行,根据中央精神,“由地方邮局接管”代办; 进入改革开放年代以后,1989年到1993年、2004年初至年末(成立报刊发行公司,经理为边文利),先后两次实施自办发行; 2005年至2013年期间发行,再次交邮局代办。 由此可见,延边州邮局利用其四通八达的邮路和训练有素的投递员工为《延边日报》的发行做出了重大贡献,此功不可没。 进入新世纪前后两个时段,延边日报社曾实施两次自办发行,但都不尽如人意,又交邮局代办。报社之所以甘愿两次自办发行,是因为舍不得“肥水往外流”,欲将占报纸销售总额30-35%的发行费(100-130多万元)归己留用。然而自办发行谈何容易?在自办发行期间,尽管报社投入9名管理人员、300多名发行员,从社长、总编辑到编辑、记者、行政人员倾巢出动,人人抓发行,发行量仍然走不出低谷。 几次自办发行实践证明,报社实行自办发行条件尚不成熟,若要再增大投入,势必导致入不敷出。最后得出结论:就目前本地区环境和本社实际情况考虑,发行还得靠邮局代办才是正道。于是从2005年开始,再次将发行包给了邮局。州邮政局自2006年起买断朝汉两文版《延边日报》征订量,进一步扩大了党报的覆盖面和影响力。 一直以来,州委及下属各级党委十分关心和支持《延边日报》的发行工作,每年都把征订《延边日报》视为一项政治任务,加以重视,具体落实。经州委宣传部的协调,2012年末,州委、州政府批准决定,自2013年开始《延边日报》的订报款由州县财政直接列支,有力地保证了州委机关报稳中有升。
13    第八章 通联工作(1998年~2011年) 댓글:  조회:1109  추천:0  2016-04-21
第八章 通联工作(1998年~2011年)   进入新世纪前后10多年间,延边日报社继续坚持贯彻“全党办报,全民办报”方针,重视抓通联工作,不断地扩大稿源,增强了报纸同人民群众的密切关系。 1.每年主管总编辑带领主管部主任和驻在记者,协同各县市委宣传部以及通讯协会开展通讯员培训、写稿评稿、联谊、总结表彰等一系列通联活动。截止2000年末,先后组织13期培训班,共培养1000多名通讯员;每年举行“全州延边日报社通联工作总结表彰大会”,总结当年的通联工作,表彰优秀通讯员、优秀通联协会、优秀通联干部。经10多年培养出来的《延边日报》骨干通讯员,先后被聘为中央人民广播电台朝鲜语台、《吉林朝文报》、《黑龙江新闻》、《辽宁朝文报》、延边人民广播电台、延边电视台等朝鲜语新闻媒体的特约记者或特约通讯员。 2.为提高通讯员的业务素质,到2001年每年编辑出版《延边日报通讯》(月刊);2002年,此刊更名升级为《新闻研究》,刊发新闻理论以及编辑记者撰写的业务论文,为全国朝鲜族新闻媒体采编人员提供了交流新闻实践经验的平台。 3.根据新世纪新闻报道的新形势、新特点,延边日报社自2004年至2011年,从实际出发改革通联工作,在整顿全州200多名通讯员队伍的基础上,先后在延吉市、龙井市、安图县成立通联报道中心,在珲春市、图们市、汪清县、和龙市设立通讯员协会。与此同时,聘请10名特约撰稿人、8名特约记者、90名通讯员,广为报道北京、上海,黑龙江省哈尔滨、牡丹江、密山,吉林省长白县以及韩国、日本、美国等国内外朝鲜族聚居地区生活状况,为《延边日报》扩大报道领域做出了积极贡献。 4.报社与各县市委宣传部、通联协会联手,多次组织骨干通讯员深入工厂车间、林场、农村进行联合采访活动,并在现场组织评稿会,对拟采用优秀稿件当场颁发证书。2006年,安图县通联中心组织10多名特约记者、特约通讯员,从“长白山下第一村”出发,历时三个月深入万宝镇、永庆乡、福兴乡、明月镇、石门镇等全县几十个村,采写50多篇反映朝鲜族生产、生活、娱乐等状况的新闻稿件,给朝鲜族社会带来了新鲜的冲击。还与朝阳川镇党委、通联协会联手召开座谈会,围绕延边日报社记者的见报稿进行评议,并将评议内容反馈给编辑部有关人员,对促进采编人员进一步提高业务素质,增强责任心方面起到积极作用。 5.2011年,先后在报纸第三版开设《读者园地》、《舆论天地》、《读者之页》等专刊,发表通讯员的大量稿件,活跃了通联工作。但到2012年这些专刊全部被取消。与此同时,2012年报社又取消各种通联组织,并解散了通讯员、特约通讯员、特约记者队伍。此举妥当与否,有待于历史的评判。 6.通联工作不只限于写稿、评稿,而根据报社的实际,也开展“读者问卷调查”、“征订党报”等利于报社的活动。如从2004年至2012年,通联部每年通过通联组织进行有关《延边日报》办报方面的问卷调查。通过发放1000多份调查表,征求对《延边日报》的意见、建议和要求,供报社领导班子作参考。不仅如此,自2004年至2011年,各县市通联组织每年自发组织特约记者、特约通讯员及一般通讯员,开展订阅、征订《延边日报》活动,为《延边日报》的发行工作做出了应有贡献。
12    第七章 延边日报社人事、分配、经营管理改革 댓글:  조회:1328  추천:0  2016-04-07
第七章 延边日报社人事、分配、经营管理改革   上世纪末,延边日报社在经营管理方面实行了“经费包干制”。 1997年初,延边日报社委会在社长、总编辑姜龙云的带领下,研究决定实行经费包干制,首先在朝、汉两个文版编辑部试行。结果,两个编辑部精打细算,年末都有了一定的结余。这一年的实践证明,划小核算单位,变吃大锅饭为分灶吃饭,实行责、权、利相挂钩的办法,有利于调动各方面的积极性,有利于减少办报政策性亏损,有利于改变长期积累下来的经济困难局面。基于这种认识,1998年出台《社内职工内退若干规定》、“分灶吃饭”等多项改革方案,并正式开始实施“办报、广告、发行”一条龙承包办法。 改变报社延续半个世纪的全社统收统支管理机制,划小核算单位,实行分级管理,变吃大锅饭为分灶吃饭,这是报社内部管理体制上的一项重大改革。 跨入新世纪后,延边日报社实行承包经营。 2003年实行社长、总编辑许龙锡聘任副手合同制度,进一步增强责任感,朝、汉两个文版开始全面承包经营。这一年在全州事业单位改革中,延边日报社委会集思广益,深化内部改革,对报社的人事、分配、经营等各方面进行改革,为报社摆脱困境,逐步迈入良性发展轨道奠定了一定基础。 在人事管理上,实行全员聘任制。2004年末大刀阔斧进行减员分流:朝文版由原来的87名减到50名,汉文版由原来的84名减到50名,行政部门由原来的91人减到26名。聘任后留用126名,减员、分流136名,减轻了财政压力。在此基础上,建立“能上能下、能进能出”的竞争、鼓励机制,针对过去人事管理上存在的“职务能升不能降,待遇能高不能低,人员能进不能出”的问题,采取由副社长、副总编辑招聘分管部门中层干部,各部主任再聘其科员的逐级选聘方式。在明确各个岗位的职责、任职条件、权利义务和有关待遇的情况下,打破身份、部门界限,竞争上岗。朝、汉文编辑部和行政后勤先后召开竞聘大会,择优聘用。全员聘任制的实行,建立了竞争机制,也形成了监督机制。 在经营管理上,实行放权经管。按照“能放就放”的原则,把以前报社统一管理的广告等经营管理权限下放给朝、汉文版,实行自主经营,相对独立核算。朝汉文版广告部每年定额上交,报社每年给朝汉文版各拨付包括工资在内的办报经费。从此以后,朝、汉文版职工的工资、稿费以及办报、经营等方面一切费用均由两个文版在报社所拨款中自行管控、发放。 在分配制度上,打破平均主义,坚持按劳取酬原则。采取以岗位工资为基础,重实绩、重贡献的绩效工资等多种分配形式,体现了职工在“德、能、勤、绩”等方面的差异。根据新闻单位的行业特点,实施津贴的40%加稿费以及其他可供分配的收入捆绑,再根据工作业绩重新分配的办法,做到干什么岗位的活,完成什么岗位任务,拿什么岗位工资。 2006年社长、总编辑李荣根据州事业单位改革方案进行改革试点,推出了一系列适合报社的人事、分配、经营管理方面的改革措施。 人事制度方面,全面推行聘任制度,实行“能上能下,能进能出”、“评聘分离”的用人机制。对中层干部实行竞争上岗制,有些岗位实行聘用合同制,有些岗位实行自收自支合同制,有些岗位实行临时短期试用制,专业技术人员实行评聘分离制度。对职工关心的职称问题也动真格,2006年实行“评聘分离”制,共聘用139名专业技术人员、16名管理人员和22名工人。与此同时,让56名职工提前离岗退养,逐步形成适合报业发展的用人机制。 经营管理方面,实行编采费用及广告收入包干制。报社内部实行目标责任制,社长与分管朝、汉两个文版副社长签订《经营管理目标责任书》,核定年度经营指标,每月进行考核;实行办报费用包干制,自负盈亏,做到自主经营,分级管理,调动了全员工作积极性、主动性和创造性。通过实行目标管理责任制,经营由分散型向集约型方向发展,使报社经营管理逐步走上了规范化、制度化的轨道。 收入分配方面,对编辑记者实行绩效工资制,行政人员实行岗位工资制,特殊岗位实行合同工资制,子报、广告等经营部门实行自收自支效益工资制(经营职能部门实行效益工资制,即取消基本工资,按工作业绩兑现工资),保洁员等实行计时工资制,对一些加班、夜班岗位进行补贴等灵活多样的分配方式,调动了全体职工的工作积极性,初步形成适合报业发展的分配机制。 以人为本,努力改善办报环境,积极为职工办实事。 全力解决职工工资问题,首先稳定了人心。由计划经济转向市场经济后,报社的日子一天比一天难过,职工待遇与其他新闻单位的差距越拉越大,严重影响了编辑记者的工作积极性。进入新世纪后,报社社委会不厌其烦地向上级反映真实情况,引起州委、州政府的重视。州委常委会决定,从2005年1月1日起对报社实行新的财政补贴政策,补贴额度由238万元增加为631万元。2005年年底,新财政补贴政策终于落实到位,报社职工8年来第一次拿到足额工资,长期没有得到解决的职工工资问题开始有了着落。 在此基础上,2007年争取州财政资金60万元,2009年一次性又多争取财政补贴250万元,解决117名离退休人员2004年之前被拖欠的工资和阳光工资,彻底解决了离退休人员拖欠工资遗留问题。继而2010年在争取财政补贴131万元的基础上自筹资金330万元,补发了所有在职职工8年间的拖欠工资,从而解除了他们的后顾之忧。 创造条件,搞好福利。报社党组力求把改革和经营成果最大限度地惠及全社职工。2006年5月,自筹资金,参加医疗保险,解决了职工看病难问题;办理64户职工10年久拖未决的房照和土地证;同年开始为全社400多名职工统一进行免费体检,建立了职工健康档案;协助延边报捷印务有限公司承建印刷厂,并还清新建19层办公大楼所欠基建款700多万元;2008年7月,自筹资金,让报社全员参加住房公积金;每年投入37万元。 加大投入,改善工作条件。经多年努力,使报社职工人手拥有一台配有液晶显示器的电脑;2007年以来,争取资金94万元(投资60余万元),为编辑部安装北大方正全媒体新闻采编系统(系省内报业系统中最先进设备);争取赞助,投入10万元,给朝汉两文版各配备一套照相机和配套设备,使两文版照相设备达到州内一流水平;开源节流,投入10多万元,增添电脑等设备,使朝汉文版现代化办公水平上一个新档次;为摄影部记者购置了价值30多万元的新型五D3佳能照相机等先进设备,提高了照片质量;投入8万元给60多名一线记者购买录音笔,并配备6台笔记本电脑,为一线现场采访提供了方便。与此同时,提高一线采编人员的待遇,每月岗位绩效津贴由200元提高至400元,并增加出差补助费;编办正副主任周日加班津贴也提高了2.5倍。 如今,报社的各项工作基本走上了良性循环轨道。良好的办报环境和各种待遇,为办好党报奠定了一定的物质基础。在这改革发展过程中,特别值得一提的是,第16任社长兼总编辑李荣对延边日报社“转危为安”工作中所做出的努力和贡献。在他的带动和社委会成员的共同努力下,近几年,延边日报社先后争取省、州多项补助资金978万元,减免各种税费1020万元,还清各类债务1245万元(含拖欠工资),从而甩掉“债务大户”帽子,使延边日报社走上了良好发展的轨道。 进入新世纪以后,延边日报社努力改善经营管理,在办报业务及职工福利事业方面取得了一定的成绩,但至今仍存在办报经费不足、广告增收空间受限、报纸发行难以再突破等不少问题。尤其是近年来随着物价指数和职工工资的逐年增加,报社的办报成本明显上升,政府的财政补贴额也随之增加,到2013年财政补贴额竟达到1498.84万元。就目前实际情况而言,上述这些困难和问题,除报社自身努力节支创收之外,还得依靠政府的财政扶持才能得到解决   纵观历史,在延边日报社经营史上,仅于1954年首次、而且是唯一盈利3万元上交过州财政。除此之外,一直是靠政府的财政扶持过日子。1996年之前,报社(系州财政差额补贴事业单位)经营虽有一定困难,但还能够保证职工工资足额发放。但是,从1996年开始,延边日报社被列入改革试点单位,财政补贴额度一下降低20%,给报社的办报业务以及职工生活带来极大困难。据州审计部门对延边日报社的审计报告资料显示,1999年末延边日报社累计亏损额为7703581元,到2005年12月末累计亏损额为14169555元,不仅没有减少,反而负增长近两倍。这一状况一直持续到2004年末。由此看来,当年大幅度降低财政补贴额,是导致报社多年陷入困境的一个主要原因。 面对这些实际困难,中共延边州委常委会非常重视,2004年8月11日专题研究决定,自2005年1月开始州财政增加补贴额度,每年为631.1万元。从此,报社结束了职工连续8年每年仅拿65~70%档案工资,勒紧腰带坚持工作的历史。以上事实告诫人们:在少数民族地区,尤其对延边日报社这样一个发展空间相对狭小的特殊群体的改革,应持慎重、求实原则,根据实际情况,摸索出一条切实可行的办法和途径,切不可操之过急,一刀切。      
11    第六章《延边日报》新闻改革 댓글:  조회:1787  추천:0  2016-03-31
第六章《延边日报》新闻改革   改革创新,是党报舆论宣传工作永恒的课题。跨世纪的《延边日报》继续坚持报纸的党性原则,遵循新闻(传播)规律不断进行探索,在新闻改革与创新方面取得明显效果,已形成新世纪少数民族地区一级党报的独特风格。其主要特点:   一、发挥党报政治优势,树立时政新闻报道权威 时政新闻报道作为新闻报道的“重头戏”,所报道的信息,体现党和国家的路线、方针、政策,代表一级党委、政府对重大问题的看法和主张,无论普通百姓还是国内外政要无不关注,具有很强的影响力和权威性。《延边日报》在本地区舆论宣传报道中拥有其他新闻媒体所不可比拟的权威性,是因为它是中共延边州委机关报。按我国惯例,事关中央和地方的重大决策、重大部署等重要时政信息,基本首先发布在各级党委机关报上。《延边日报》也凭这一特殊优势,优先参加州委、州政府决策层的重要会议以及重要人物的重大活动,能够及时获得许多权威信息,并有权“先声夺人”,第一时间向社会发布重要时政新闻。 一直以来,《延边日报》发挥州委机关报的政治优势、时政信息源优势以及高素质采编队伍优势(在职正高编辑、记者6名,副高编辑、记者43名),认真组织重大时政新闻报道,赢得了州委、州政府的肯定和赞扬。尽管有些新闻报道,因多种客观原因,发布得不尽如人意,但因其报道基本都属于权威信息、独家新闻,人们也就自然形成“大事还得看《延边日报》”的习惯。如1984年5月时任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主席金日成访苏途经图们时的新闻报道(延边日报社总编辑吴泰镐专程采访)、1991年1月15日江泽民总书记在延边考察的新闻报道(延边日报社副社长兼副总编辑于永才随同采访)、1995年8月新加坡总统王鼎昌访问延边时的新闻报道(延边日报社副社长兼副总编辑林长春和编委陈守斌随同采访)、1998年7月全国人大常委会委员长李鹏视察长白山时的新闻报道(延边日报社政治部主任朱义强随同采访)等重大活动报道,均由省、州委办公室点名指派州委机关报—延边日报社领导或业务骨干参加采访。在这些重大报道活动中,除了《延边日报》和延边电视台,其他媒体则没有机会参与现场采访活动。 长期以来,读者对会议及领导人活动新闻的兴趣远远低于社会新闻。然而《延边日报》是党报,而且是州委机关报,不仅要报道州委、州政府的重要会议以及主要领导人活动的时政新闻,而且要求务必报道好,这是一级党委机关报的政治属性所决定的;同时,重要会议、领导人活动恰恰又是新闻媒体的重要信息源。所以,如何改进时政新闻报道,使会议、领导人活动报道创新出彩,成为长期以来新闻媒体所要解决的一个重要课题。 进入新世纪以来,《延边日报》不仅充分利用机关报的政治优势,积极主动围绕中心唱响主旋律,搞好主题宣传和重大事件的报道,得到州委、州政府肯定的同时,在时政新闻报道的改进和创新方面也进行大胆的探索,受到广大读者的好评。 在时政新闻报道的创新方面,《延边日报》主要把握住了两点:首先,把握好会议、领导人活动的指导性、权威性;其次,把握住社会和读者感兴趣且具价值的信息。在采写与版面安排上,敢于按新闻规律去打破传统报道方式和传统编排模式,依照新闻价值五要素去确定取舍。有些州一级会议或领导人的活动报道,不一定照本宣科,全程实录,也不一定都安排在一版头题位置。如:2009年12月25日《延边日报》头版头题刊发记者郑永哲采写的州委常委会议消息,写法新颖,很有特色。这次常委会议程有4项内容,记者善用新闻规律,按新闻价值去衡量会议内容,努力找出亮点,最终只选取“两节”前领导干部廉政建设这一项内容作为报道主题,并将时任州委书记邓凯在会上讲的原话“不该交的朋友要疏远点儿”作为主(标)题,以“邓凯警告领导干部在‘两节’期间要自律”作为副题,写出很有分量的新闻稿。文中还引用邓凯讲话的精辟论述“各级领导干部不能乱交朋友,各级主要领导要带头做到不该交的朋友不交,不该去的场合不去,不该喝的酒不喝”,引用得相当精彩,恰如其分。这条时政新闻,可以说是对重要会议、领导人活动时政新闻(报道)的一次成功探索。 创新会议新闻报道方面,《延边日报》努力找准着力点,挖出闪亮点,为读者提供实用、有价值的信息。如2010年1月21日《延边日报》头版三题报道时任全国人大常委会委员、州人大常委会主任金硕仁在省11届人大3次会议期间的发言内容。金硕仁向省政府提出有关“延龙图经济一体化”和珲春对外开放方面5条“要求”,其中一条为珲春市的行政体制升格问题。金硕仁提出的几项“要求”都很实际,《延边日报》在编译稿件时,没按老方法写会议程序,面面俱到,而是按新闻价值五要素,找准着力点,挖出闪亮点,只抓住与全州人民在地理、心理和切身利益方面最接近的内容,即提升珲春市行政体制升格问题,单刀直入破题,很有可读性。此篇报道主标题为“应提升珲春市的行政级别”,指出“提高珲春市的行政级别,有利于吸引人才、留住人才,要使该市的各项决定权力和发展目标对等”。这也是党报在处理会议、领导人活动新闻报道方面所探索出的成功一例。 会议报道程序化、领导讲话条条化是党报新闻报道改革的又一老大难问题。怎样去改革,《延边日报》进行多方面的探索。如2011年8月11日《延边日报》朝、汉文第二版头题“州市政法委协助组织部管理政法部门领导干部”,是一篇加强政法机关领导班子建设工作会议消息报道。在这次会议上,时任州委常委、州政法委书记高杰讲了话。参会记者认为,这次会议亮点和人们关心的问题是政法委到底能管哪些事项。可记者发现,与会领导讲话中的4点“指示”纯系工作部署,不易报道,而在会上所发的文件中却找到有关具体内容。于是就大胆避开领导讲话内容,而着重写会议文件的具体实施措施,使读者一目了然。这是利用会议文件进行新闻报道的成功一例。这与有些记者不亲临现场,道听途说、抄写文件进行报道是有本质区别的。 领导机关调研活动报道也是新闻界常遇到的问题。如何去创新?如2011年4月26日《延边日报》第二版头题“房地产市场‘粥少和尚多’”做出了一个样板。这是一篇州政协调研组对全州房地产市场进行调研的报道。报道打破传统写法,没写哪级领导具体调查哪些项目等公式化、格式化的内容,而主要抓住调研过程中发现的因市场开发过热、主管部门管理混乱、导致违规预售、建房无照、破产无人过问等社会问题,提出主管部门的改进意见,很有接近性、指导性和说服力。尤其此篇报道标题语言形象生动,比喻恰如其分,一下子抓住了读者的心。 在报纸整体编排方面,《延边日报》大胆进行有益的尝试,打破第一版充塞会议、领导人物活动新闻的传统编排原则和方法,将一般性新闻集中安排在第二版,以减轻头版压力,进而达到突出头版要闻的宣传效果。如2010年2月5日《延边日报》朝汉两文版都大胆地将州委常委、宣传部长李兴国参加的“全州宣传工作会议”消息及州委常委、政法委书记高杰参加的“全州中俄段边境管控工作会议”等纯会议新闻挪到第二版处理(朝文5条、汉文4条),以做到突出一版,要闻(朝文版头题为“珲春市加强对图们江地域国际合作牵引作用”,汉文版头题为“州政府与海航集团达成战略合作框架协议”)新鲜(汉文版“天池工贸董事长赵长寿获150万元重奖”,朝文版“去年延边查出‘小金库’违法违规金额268万元”),体裁多样,图文并茂,很有可读性。这期报纸,可视为进入新世纪以来办得最好的一期,尤其一、二版的创新作法值得继续发扬。   二、图们江区域开发权威报道,体现党报地区特点 世人瞩目的图们江区域开发报道,是《延边日报》突出地区特点,注重重大新闻报道的成功尝试之一。延边地区在世界知名度的提升,得益于图们江区域开发。若无图们江区域开发,延边地区仍可能还是一个被世人遗忘、冷落的偏僻、落后、封闭、欠发达的边疆少数民族地区。自从1992年3月国务院批准珲春开放城市以来,延边州委、州政府一直将图们江区域开发、招商引资工作视为本地区深入改革开放,带动经济及各项事业实现腾飞的引擎,努力推进有关各项事业,而且逐年加大了工作力度。 《延边日报》作为州委机关报,每年都根据州委、州政府提出的“开放带动”这一工作中心,将图们江区域开发及相关工作当作每年主题宣传报道内容,积极策划,系统报道,不漏报一个重要信息,逐步树立起发布有关珲春、图们江区域开发信息方面的权威。 回顾珲春开放及图们江区域开发全过程,《延边日报》比起国内任何一家新闻媒体都报道得早,而且全面、系统和最有力度(初始,《人民日报》、新华社等中央媒体对珲春开放以及图们江区域开发,或许“鞭长莫及”, 或许考虑全局,未曾进行早期报道)。《延边日报》有关图们江地域开发报道的全过程,大体分三个阶段进行。第一阶段为上世纪80年代开发前期造舆论,第二阶段为上世纪90年代公开造舆论,第三阶段为自1992年3月至跨入新世纪后国际合作开发舆论阶段。 第一阶段:在党的十一届三中全会精神鼓舞下,《延边日报》编委会自从上世纪80年代中期开始大胆解放思想,以超前思维“小心翼翼”地开始报道珲春与俄罗斯滨海边疆区,珲春、图们市与朝鲜相邻地区之间的民间交往与边境民间贸易。如1985年10月6日刊发“珲春县与朝鲜咸镜北道赛别尔郡边境贸易正式开始”等,每年发稿10~20篇。1988年5月10日国务院批准设立珲春长岭子对苏贸易通商口岸后,《延边日报》开始较详细地报道珲春及延边州加速铁路、公路、通讯、联检所等基础设施建设情况,每年报道数十篇。如1990年9月8日《延边日报》刊发“珲春通商口岸正式对外开放”、12月12日至16日刊发“以珲春市市长李文恒为团长的经贸代表团访问苏联滨海边疆区”等消息,为进一步加快对外开放大造舆论。从此,《延边日报》开始成为国内外了解珲春地区开发开放情况的一个重要信息窗口。 第二阶段:1991年1月8日《延边日报》一版头题转发新华社电文——“东北打开‘金三角’,延边成为新热点”。此篇报道可以说是代表我国政府官方发布的首次导向性新闻报道,很快受到海内外的普遍关注。如果说,此前图们江区域开发信息报道尚属“严控”阶段的话,从此以后的《延边日报》报道则显得“无拘无束”,十分活跃。如当年1月开始《延边日报》就在第一版设立栏目——《珲春经济开发区》,大力报道珲春市与苏哈桑区经贸、文化交流的情况;2月15日,由副社长兼副总编辑林长春带领李任远、姜永赞等骨干记者到珲春长岭子对苏口岸采写现场新闻“解冻时分”(获全国记协现场短新闻三等奖);8月27日刊发“以全哲洙为团长的我州经贸代表团访苏经珲春海关归国”;9月19日第三版《学习》栏目刊发“东北亚经济圈与图们江三角地域开发”,首次将“图们江区域‘金三角’”这一新提法加以理论化。 第三阶段:在这图们江区域开发开放的社会舆论氛围中,1992年3月9日国务院批准成立珲春边境经济合作区。当月12日,《延边日报》头版头条转发新华社电讯:“国务院决定进一步对外开放珲春市等东北四省边境城市”。国家将扩大4城市对外经贸管理权限,将在4城市建设边境经济合作区,对国内外投资者提供优惠待遇。国务院的决定,标志着珲春地区开放、图们江地域开发已从理论阶段正式进入实施、操作阶段。《延边日报》积极、主动配合州委、州政府的中心工作,从14日开始连续刊发“我们都是受惠者”、“珲春开发意义重大”、“抓住机遇,乘风而上”、“招贤纳士搞活开放”等系列评论。珲春、图们江区域开发报道如虎添翼,十分活跃,上升到一个新阶段。也正因为《延边日报》是延边州委机关报,外界更关注《延边日报》的相关报道。《延边日报》自然也就成为世人了解珲春边境开放、延边地区改革开放、图们江地域国际合作开发进展情况的一个主要信息窗口。韩国《中央日报》、《东北亚报》,日本《朝日新闻》、《新潟新闻》、《东亚评论研究》月刊等大量转载《延边日报》刊发的图们江开发信息。《延边日报》也成为国外新闻媒体介绍延边改革开放、图们江区域开发的一个重要信息港。 图们江区域开发,不仅逐步上升为国家发展战略,而且成为联合国UNDP、工发组织与周边多国合作共同操作的联合行动。如在15年前延边州第一次举办的“’98中国图们江地区珲春国际投资贸易”洽谈会,就是联合国计划开发署和联合国工业发展组织直接插手,协调周边多国合作开发的联合行动。此次图洽会有5大洲20多个国家和地区516名客商参加(国内12个省市1144名),签约投资项目117项,投资总额达11.9亿美元。对此次洽谈会,延边日报社打破常规,有史以来第一次派出大型记者团,两个文版都由主管副社长、副总编辑带队,共率领12名记者到现场采写各类题材新闻80多篇,配发评论3篇,有力地配合了州委、州政府的中心工作。不仅如此,延边日报社还在纪念本报创刊50周年之际,与日本东亚综合研究所联办题为“东亚经济发展与图们江多国合作开发”的国际学术会。来自中国、日本、韩国、美国、蒙古的110名专家、学者交流了30多篇论文,为图们江地域开发大造国际舆论,并为延边州的进一步改革开放提供了科学的理论依据。 进入21世纪后,《延边日报》将招商引资、图们江区域旅游合作、旅游文化节活动及各县市经济开发区建设报道当作一项重要主题宣传内容加以升级,并予以经常化。结合每年举办的“延吉图洽会”、“长春东博会”,2007年重点报道“大通道”、“大项目”、“大招商”、“大开发”以及“延龙图经济一体化”;2008年重点报道“加快推进图们江地区国际合作开发”、“实施延龙图一体化,培育区域中心城市”;2009年重点报道“大项目招大商”、“长吉图规划纲要”;2010年重点报道“推进长吉图开发开放先导区建设”;2011年重点报道“第7届延吉•图洽会”、“中国图们江区域合作开发规划纲要实施两周年”;2012年重点报道“中国图们江区域(珲春)国际合作示范区”;2013年重点报道“大力实施开放先导区发展战略”等,为中国图们江区域国际合作开发跃升一个新档次营造了良好的舆论氛围。   三、唱响民族团结进步主旋律,体现党报民族特色 “民族团结进步”,是《延边日报》作为一级党报每年都要下大力气进行的永恒的主旋律报道题目。 “民族团结进步”宣传教育和创建活动始创于延边。建州以来,延边州坚持用“爱党、爱国、爱家乡”的共同价值理念凝聚民族团结正能量。自1953年开始,将每年9月定为“民族团结宣传月”,要求做到“抓9月带全年”。一级党委和政府的工作重心在不同年代、不同时期会有所变化,但在延边州,“民族团结进步”这一主旋律是永世不变的,无论任何时候都得唱响。所以,称“民族团结进步”,既是“永恒的工作主题”,也是“永恒的新闻报道主题”。 翻开《延边日报》65年报章,随处可见延边州历届党委和政府在贯彻党的民族政策,推进民族团结、共同进步方面所做出的努力和取得辉煌成果的详实报道。这些真实、系统、完整的新闻报道和所配发的社论、评论员文章,是对延边州民族团结进步工作的最好诠释,是一部极其珍贵的传统教育教材。在这方面,国内没有一家新闻传媒能与《延边日报》相媲美。 跨入新世纪以来,《延边日报》在深入进行新闻改革实践中,不断加大对民族团结进步方面的报道力度,不仅将民族团结进步这一永恒的主题贯穿于改革开放、发展经济、稳定社会、促进文明的报道全过程,而且根据州委“抓9月带全年”、突出“民族团结宣传月”活动的工作部署,努力改进和提升一年一度的州庆报道,力争做到“窥一斑知全豹”。如2002年州庆50周年,既有庆典活动,又有图洽会、民俗旅游节等大型活动,需要同时报道好,这在延边日报社历史上还是第一次。为了全面、准确、及时地做好州庆各项活动报道,“9·3”期间,社领导坚持值夜班,每日凌晨两三点才下班。朝汉两个文版共派出68名记者进行采访,共开设9个专栏(109期),刊发消息、通讯、评论、图片、回忆录等多种体裁新闻稿542篇。 朝文版为做好州庆50周年报道,共召集11次编委会专题会议,周密、细致地制定报道计划,先后派出27名骨干文字记者和摄影记者,分16个专题进行多种形式的报道。其中,策划系列报道“50 周年献礼工程”、“那时那人”和“2002年延边中国朝鲜族民俗文化旅游节”等最为突出,共刊发包括73篇系列报道在内的350多篇新闻稿件。 汉文版为了做好州庆报道,返聘回已退二线的副总编辑王建民初审稿件,协助总编辑把好关。整个州庆期间,全社上下一条心,努力工作,创造了《延边日报》历史上的“7个第一”:即9月3日,州庆当日加版出刊28个版,日采发稿件42篇;3~4日,有记者一日采写新闻稿达6篇;2~4日,相关编辑、记者每日连续工作13个小时;出版发行24个版的珍藏版。 2012年州庆60周年报道,副社长兼副总编辑陈冬梅提前精心谋划,并成功地组织和指挥“9·3”节前、节日当天及节后的宣传报道,受到州委领导的好评。在她的指挥下,汉文版早在2011年9月1日,距州庆60周年还有368天时就开设倒计时栏目,分两个阶段进行大量报道。如开设《自治州档案》专栏,独家刊发70多篇历届10年州庆回眸;开展“我身边的民族团结进步模范”、“放歌60年,情寄新延边”征文活动(刊发92篇),连续刊出“争做文明延边人”、“延边好人”等系列报道,节前营造了浓厚的迎州庆氛围。 9月3日节日当天,隆重推出“9·3”州庆特刊40个版、100多篇报道。如3日六、七、八版刊发建州60年综述:“回眸沧桑历程数说辉煌篇章”、百姓纪事:“一个普通农民的生活巨变”、延边州历届10年州庆回眸:“民族团结的欢歌继往开来的伟业”以及“三大件里看变化”等专题报道,传递了普通人的记忆和感受,深受读者欢迎。同时推出全州8个县市成就报道专版——《延吉:巨变无声》、《汪清:向自治州汇报》、《龙井:在党旗指引下崛起》、《珲春:巨轮赴征程扬帆正当时》、《敦化:60年华丽转身 60年激情跨越》、《图们:奋力跨越的图们江畔第一城》、《经济发展社会和谐幸福安图》、《风雨60载巨变话和龙》等,深入宣传60年来全州各族人民在党的民族政策指引下所取得的辉煌成果,为州庆60周年营造了空前的节日氛围。 节后,又组织编采人员“马不停蹄”地深入挖掘“州庆精神”,刊发“州庆精神是怎样形成的”等系列报道和“大力弘扬顽强拼搏精神”等5篇评论员文章,鼓励人们继续发扬传统,奋发图强。 尤其,州庆期间延吉市1万人参与的中国朝鲜族文化品牌——大型广场舞艺术表演的新闻报道和画刊《延边赞歌》,更让世人耳目一新,深刻感悟本地区民族特色。 这一年是重大主题报道最多,采编任务最重,临时增版加刊、加班加点最多的一年。仅增版就达140多个,创下了延边日报社有史以来迎州庆、唱响主旋律的新纪录。 不仅如此,朝文编辑部也提早动手采写报道国内外知名的朝鲜族专家、学者、企业家(43名)事迹,并编辑出版州庆60周年献礼图书—《创造奇迹的朝鲜族领军人物》,也为州庆60周年增添了民族特色。   四、创新、强化新闻评论,构筑党报舆论引导高地 新闻评论是报纸的旗帜和灵魂,是对党和政府工作的重大决策、社会重大事件的深层解读。它唱响主旋律,传递正能量,对社会各种舆论起引领、带动作用。新闻评论搞得如何,可以衡量一家媒体的综合实力。 在传媒高度发展的时代,传媒不再是单靠独家新闻取胜,而是靠独家观点、独家见识取胜。新世纪新闻媒体的竞争由“独家新闻之争”逐步向“独家评论之争”转变之际,《延边日报》朝文版编辑部为了进一步强化新闻评论,自2000年开始专门设置评论部,开设言论专版,围绕社会、经济、文化诸领域的热点(话题)、难点发表评论,引起各级政府及社会的广泛关注。 2009年,延边日报社结合“科学发展观教育”开展“创新年”活动,加大了言论报道的力度。在增加新闻评论数量的同时,创新多种言论报道方式,提高了党报的舆论引导能力。报社大力倡导编辑记者围绕州委、州政府的中心工作撰写言论,并规定社论为A稿,评论员文章为B+稿,而且在绩效考评上给予倾斜鼓励。 首先,重视撰写社论。对州委、州政府的重大会议,都能够及时配发社论。如年初州政府部署全年工作任务,《延边日报》当即配发社论“一年之计在于春”;州委、州政府召开全州贯彻实施《长吉图规划纲要》动员大会之时,就配发社论“举全州之力抓好天字号工程”;全州开展第四次争创“全国模范自治州”活动之际,配发社论“永远高举模范自治州的旗帜”;为关注民生、促进就业,配发社论“当前要高度重视就业问题”等近10篇。 其次,集中社内外多方力量撰写评论员文章。不仅动员一线记者、各部主任配合新闻稿件撰写评论员文章,而且邀请有关职能部门领导、专家、学者撰写评论。这些言论有高度、有力度,有效地扩大了宣传效果。2009年围绕全州各阶段的重点工作,先后策划、组织、刊发4组特约评论员的17篇评论,撰稿人均为州分管部门的主要领导。如项目建设方面,邀请州发改委主任蓝公海撰写了5篇;工业强州应对金融危机方面,邀请州工业和信息化局局长郭文君撰写了4篇;延龙图一体化方面,邀请州委副秘书长高鹏飞撰写了4篇。不仅如此,这些评论员文章大都以系列评论的形式刊出。如应对金融危机方面,配发10篇评论员文章;图们江区域合作开发方面,陆续刊发了10篇评论员文章。这一年,《延边日报》共刊发社论、评论员文章、短评58篇;《时评》、《思索的漩涡》、《说长道短》等署名文章50余篇,创历年言论发稿数量之最。 再次,鼓励有学识、有特长、有名望的退职专家、学者、教授撰写各种评论,聘他们为特约评论员,组建一支由20多人组成的编外评论员队伍,每年收稿近百篇。原州委宣传部副部长蔡永春,原延边日报社副总编辑张正一,评论部部长张京律,原延边电视台副总编辑金喜宽、金永泽,原州爱卫会主任戴宝柱,延边大学教授禹相哲、金虎熊(在职)、金仁燮(辽宁)等特约评论员,时常对人们所关心的新闻事件各抒己见,传递思想。他们撰写的评论,有事例、有观点、有文采,令读者喜闻乐见。   五、创名牌,出精品,增强党报可读性 写好精品稿件,努力创办品牌专版、专刊、专栏,是《延边日报》力图提高报纸质量,增强报纸可读性的重头戏。朝文版编辑部在副社长兼副总编辑金川的带领下,以创品牌、树形象为出发点,大胆设想、策划,对报纸的版面和内容重新规划,推进了从版面、栏目、标题到报头、字体、字号、网纹、网线的重新设定等一系列整体改革,到2013年上半年,基本完成延续60多年的老报旧版式的改革,做到“旧貌换新颜”。其中,被读者公认的品牌特刊—《周末特版》(其前身为2003年6月在副社长、副总编辑洪吉男的提议下创办的《星期一特刊》),打破传统版面设计模式,用更具创意的形式刊载读者喜闻乐见的内容,增强民族文化特色,颇受广大读者的好评。 汉文版的品牌栏目—《记者体验新闻》,已开办10年之久,越办越有起色,成为州内外新闻界公认的名副其实的名专栏。2004年下半年,由副社长兼主管汉文版副总编辑孙治堂策划,率先在我国平面媒体中开设了《记者体验新闻》专栏,并亲自带领采编人员深入基层,采写读者喜闻乐见的体验(类)新闻500多篇,收到极佳效果。其中,记者鲁伟采写的《守望大山》荣获吉林省好新闻一等奖。 进入新世纪以来,《延边日报》坚持为读者服务的理念,紧紧围绕社会热点、焦点问题和读者的需求,精心组织策划风格迥异的专版,尽力使专版满足不同读者的口味。 如社会部的《百姓热线》、《社会》、《民生》专版,紧紧围绕社会焦点组织专题报道,得到了社会各界的普遍好评;《爱心广场》(사랑한마당)专版,唤起社会的爱心,帮助弱势群体,助推构建和谐社会的进程。此专版不负众望,超越地域,影响面波及全国乃至韩国、美国等国家,成为一个社会公认的品牌精品专版,荣获2006年度吉林新闻优秀版面奖;《生活健康》、《养生保健》专版,抓住读者对健康知识方面渴求,提供健康知识,深受读者喜爱;汉文版的《公安周刊》、《法制廉政》专版,以公、检、法、司等部门办理的具体案例为主要内容,提高读者法制意识,依法保护个人权益。此外,提供各种经济信息的经济部的《消费市场》、《旅游》、《财政视点》,解读各项政策的特刊部的《政策动向》,介绍朝鲜族社会名流动态的《民族之窗》,提供最新体育文化动态的《体育》、《足球》、《文化》等专版,因其具有丰富的信息量和可读性深受读者的欢迎。两文版文艺副刊,以其丰富内容、多样体裁、精美文字和精致版面,成为读者喜爱的精品专版。朝文版的《海兰江》(其前身《文艺》首期出刊于1948年10月17日,1958年5月18日开始正式冠以《海兰江》刊头。之后20年间,先后5次更易刊头),仅自1978年11月20日至2013年底,35年间共出刊1552期;汉文版的《山泉》也连续刊出30多年,从未中断。时事部的国内、国际版注重国内外重大新闻的时效性、可读性,认真组稿,精心编版,使读者能在第一时间了解国内外重要时事。值得一提的是,朝文国际国内部自从2000年起,每年都应全国人大和全国政协大会秘书处的邀请,派遣1~2名资深翻译人员前往北京参与“两会”文件民族语文翻译工作,不仅为“两会”的顺利进行做出了贡献,也提高了延边日报社的对外声誉。 创建网站,做好报纸的“二次传播”,进一步扩大了《延边日报》的对外影响。2013年延边日报社在越发激烈的多媒体竞争环境中,加大了对两个文版网站的建设力度,在资金、人员、技术等方面给予了全面保证。两个网站剥离成为独立科室,增配了专职人员,同时邀请高端软件专家对网站进行全面改版升级。2007年4月6日开通的朝文版《延边日报网》,已完成全面升级改造(现更名《延日网》),并将服务器托管给北京的8M独享光缆的多线路机房;2011年11月11日开通的汉文版《延边日报网》也经改版升级更名为《延边网》,正式开通。到目前,《延日网》访问量节节上升,达到每日2万人(次)以上,其中40%的访问量来自国外71个国家和地区,成为目前中国最大的朝鲜文网站。《延边网》(汉文版)已具国家一类网站规模,其关注度、影响力和权威性也日益提升。《延边日报》朝汉两文版网站已成为韩国、朝鲜、俄罗斯、日本等周边国以及美国、欧洲、澳大利亚等世界各国了解中国,掌握延边权威信息的平台,同时也成为在国外求学、务工的几十万延边人了解家乡的主要信息窗口。   六、注重深度报道,提升党报品位 深度报道是新闻报道的高端产品。进入新世纪以来,《延边日报》加大策划力度,注重新闻报道的深度,大力提倡记者多侧面、多角度采写重点、系列报道稿件,而且要使作品篇篇成为精品。《延边日报》所刊出的这些报道,不仅有围绕州委、州政府的战略决策、关注社会民生等重大题材的重磅深度报道,也有相关领域读者关心的多元化轻量级深度报道。报道体裁也多种多样,有消息报道、侧记、专访、综述,也有系列评论等,不断使报纸品位得到提升,扩大了对外影响力。 如朝文版在副社长兼副总编辑崔虎、洪吉男、金川的策划、指挥下,先后成功地组织5次大型系列报道活动: 其一为2001年12月开始由海外事业部李哲亿连续两年采写的系列报道——在韩朝鲜族《现场照明》,用大量真实、生动的事例照明了在韩朝鲜族劳务人员的辛酸苦辣;其二为2001∼2002年间策划组织的系列报道——《我们江巡礼》、《我们山》,发掘和宣扬本地区悠久的历史文化(共刊发30多期),有力地配合了全民“爱国主义教育”活动;其三为2001年组织的大型策划系列报道——《这就是竞争力》(共发14期),将首尔、东京、罗马等发达国家及我国北京、上海等文明城市的社会秩序、公共交通、社会道德、礼仪教育等社会文化与本地区的不文明现象加以对照,客观地指出差距,提出了改进意见;其四为2005年“阿里郎采风团”所进行的大型策划系列报道——《走进朝鲜族生活现场》活动。由池哲虎、金龙波、尹贤均等记者组成的采访团自当年3月11日到7月5日,行程2万多公里,深入到沈阳、哈尔滨、青岛、威海、北京等国内15个重点城市,采写朝鲜族社会的政治、经济、文化、教育现状,共刊发70多篇文字新闻和100多幅摄影作品,反映在改革开放大潮流中挺进内陆大中城市,进行大转移的朝鲜族社会变革;其五为2004年∼2005年派中坚记者金哲浩领衔、组织的大型系列报道——《让我们正确认识历史》(《우리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 》), 共刊发94期, 全面展现了中国朝鲜族社会的百年历史。 再如汉文版在副社长兼副总编辑孙治堂、陈冬梅的带领下,2010年积极配合州委、州政府“推进长吉图开发开放先导区建设”战略,在头版设立《争做文明延边人》栏目,从3月30日“您,会说话吗?”为开篇,陆续刊发“您,会开车吗?”、“您,会喝酒吗?”、“您,爱延边吗?”等10多篇系列报道。这些报道富有创意,契合实际,且很有说服力,对提高全民文明素质方面,起到积极的推动作用,得到上级领导的称赞。 2012、2013年朝汉两文版刊发的深度报道,有经济部策划的系列报道——“年轻企业家创业历程”、“我州IT领域探访”,集中反映了我州青年企业家的经营诀窍和创业雄心;特刊部的迎州庆大型人物系列报道——“创造辉煌的朝鲜族精英”,历时一年,共采写60多位州内外朝鲜族知名人士;“普通人的人生轨迹”,反映了我们身边既普普通通,但又认认真真对待人生的“小人物”;政治部的系列报道——“走进创新教育现场”,历时半年,集中反映了步入21世纪后的朝鲜族学校教育从量到质、从规模性到效益性的转变过程;文化部的大型系列报道——“我州非物质文化遗产巡礼”,通过对我州非物质文化遗产的梳理,助推民族文化遗产的传承与发展;出版设计部推出的系列公益广告“讲文明树新风”及“中国梦”,大力培育和践行社会主义核心价值观,为实现“中国梦”提供强大精神动力。此外,社会部推出“出国劳务面面观”、“朝鲜族人口负增长”等系列报道,披露朝鲜族社会出现的新情况、新问题,提出解决问题的可行性意见;体育部的年末专题系列报道——“2012年延边甲A风云录”、“盘点2013年延边甲A”,以记者独特的视角和锐利的分析,查找延边足球队及其俱乐部内部存在的各种弊端,提出了合理的建议。这些报道不仅具有独家性,同时又有专业性和权威性,引起社会强烈反响,得到广大读者的好评。 2013年汉文版配合州委、州政府中心工作精心策划、组织的深度系列报道—《年终特稿·回眸2013》专栏,推出了“‘开放先导’:延边跨越发展最重要的主体”、“‘民营经济’:从草根到‘丛林’的嬗变”、“‘文化引领’:在文化惠民中实现文化引领”等10篇系列综述,很有分量,取得了良好的社会宣传效果。 采写重磅重点稿件,是进行深度报道的又一个重要部分。在这一方面,前任副社长兼副总编辑、二级高级记者孙治堂在30多年间采写出近百篇获奖重点稿件,不仅受到各级领导和普通百姓的关注,而且为年轻记者、编辑做出榜样,带出了一批业务骨干。他思想深邃,着眼全局,善于把握大主题,先后采写的新闻特写“四问‘冰川’”、“‘双星’辉映——延烟与昆烟强强战略联盟写真”等,有深度、力度和高度,文笔气势恢宏,文章生动感人,多篇获得全国及省优秀新闻奖。   七、坚持“走转改”,践行党报“三贴近” 在深入“走转改”的实践活动中,坚持“三贴近”,改进报纸的文风,增强新闻报道的亲和力,进而提高新闻队伍的整体素质。 领导带头深入基层,采写现场新闻稿件。如2010年抗洪抢险救灾活动中,李荣、刘华春、陈冬梅、金川等社一级领导带领记者深入抗灾一线,仅8月一个月期间就采写、刊发200多篇各种体裁的新闻报道。这些新闻报道,内容充实、文笔朴实、感染力强,极大地鼓舞灾区干部群众的抗洪救灾斗志,也充分展示新一代新闻队伍的风采,有9名社级领导和记者受到省、州的表彰。 汉文编辑部早自2004年下半年始在一版要闻版开设《记者体验新闻》专栏,积极开展“走、转、改”活动,要求编辑记者做到“三个一”:即到最艰苦的一线扮演一个角色,跟采访对象劳动一天或住宿一天之后写一篇体验新闻,做到选题贴近百姓、素材取自基层、内容鲜活生动、文风朴实亲切,增强了新闻报道的亲和力、吸引力和感染力。汉文版还将“走基层”作为编辑记者全年业绩考核的重要指标,实施一票否决,要求每个记者必须采写“走基层”稿件。如完不成此项任务,被视为未完成全年任务,不得评先选优,进一步增强了记者深入基层写稿的自觉性。 开设《记者体验新闻》栏目,恰恰是一个对记者工作作风的大校正,“逼”记者到基层去,到群众中去。开展活动后,有的记者清晨去扫大街当清洁工,有的深夜在火葬场这一人生最后驿站当火化工,有的去麻风病院当护理员,有的深入千尺井下当采掘工,还有的下苦力当搬运工、拉板车,还有的当“破烂王”,可以说是五花八门,林林总总。这样写出的新闻,都是自己亲身体会到的,没有什么官样文章,实实在在,有血有肉,生动感人。如2008年11月汉文经济部记者牛泽刚到中铁十六局路桥公司打隧道,写出现场新闻“体验‘凿山人’”。在令人惊惧的打隧道作业现场,他用震得发麻的双臂打炮眼、凿山,屏住呼吸安装炸药,启动爆破按钮,整整体验了24个小时。由于记者有生以来第一次经受如此刻骨铭心的体验,甚至是生死考验,写出来的新闻就有真情实感,尤其对一些细节的描写,心理状态的描述,更使人看了感人,可亲、可信。 10年来,汉文版通过《记者体验新闻》专栏,有效地锻炼了记者,提高了队伍素质,给新闻报道带来了一股清新的文风。 此外,坚持元旦、春节、“5·1”、“10·1”等节假日期间出动记者采写当日现场新闻,也给报纸带来浓郁的现场感和新鲜、亲近感,很受读者欢迎。
10    第五章《延边日报》版面、栏目及网站 댓글:  조회:1957  추천:0  2016-03-31
第五章《延边日报》版面、栏目及网站   第一节 朝文版面(图表 2013年)   版面 名称 栏目 备考   1版   要闻版 刊发重要新闻。 考虑到版面审美效果,尽可能避免、少用专栏题。若开设专栏题,则要精心制作,力求与版面整体相协调,做到“锦上添花”。       2版     综合新闻版 主要刊发综合新闻,追求图片新闻大型化。 此版要求必须标明主标题和副标题,而且主标题要靠左对齐,以便吸引读者的视线。 此版右上端,设有《时评》专栏。   3版 时事新闻版 设有《国际、国内新闻》,每周三集中刊发国际新闻。设有《新闻分析》、《国际观察》、《新华时评》等专栏。   4版 广告、足球版 除《专业足球》(周一)专版,其他均为广告版。   5版 经济、社会、民族之窗、文化专版 设有《经济》(周四)、《社会》(周二)、《民族之窗》(周三)、《文化》(周五)等专版。 《经济》—主要刊发策划报道。刊发把脉、分析我州经济现状的深层报道;《生活经济》—以报道生活为主线,诊断、分析诸多经济现象,解析人民群众在消费、流通等领域遇到的问题。 《社会》—主要刊发社会普遍关注的热门话题。包括民生、交通、健康、案件、事故等。 《民族之窗》—主要反映朝鲜族人民群众的日常生活。《生活故事》—对普通朝鲜族家庭的日常生活状况进行故事化的系列报道。 《文化》—通过深入挖掘文化领域内涵,报道具有典型意义的文化现象和文化人物。此版还设置了《风向标》专栏。   6版 综合专版 设有《经济》(周二)、《社会》(周四)、《政策动态》、《科学》、《地球村》、《海兰江》文艺副刊(周三、周五)等版面。 《政策动态》—主要刊发国内最新政策动态和信息。《科学》 —刊发国际、国内最新科学成果和信息。《地球村》—主要刊发世界性热门话题。《海兰江》作品专版—主要刊载朝鲜族文人的代表性散文和诗作。     7版   综合专版 设有《朝鲜族之窗》(周二)、《体育》(周五)、《言论》、《环境》(两周一版)、《爱心广场》、《教育》、《法治》专版。   8版 广告、县市专版 广告   注 每周六为《周末特刊》版 头版上切刊登大幅新闻图片,剩余空间配发相关内容的软新闻;二版为朝鲜族英模、伟人专辑连载版;三版为图书、健康、娱乐版;四版为时尚、美食版。     第二节 汉文版面(图表 2013年)   版面 名称 栏目 备考   1版   要闻版 《大力实施开放先导发展战略》、《大力实施项目带动发展战略》、《大力实施城乡统筹发展战略》、《大力实施文化引领发展战略》、《大力实施民生优先发展战略》、《新春记者走基层》、《走基层,看发展,话巨变》、《走基层,寻访十佳魅力乡村》、《争做五个表率》、《一事一议》、《延边好人》、《就业民生》、《延边环保世纪行》、《深入学习贯彻习近平总书记系列讲话精神》、《建设特色乡镇,打造特色乡村》、《加快推进全州农村危房改造》、《发展专业农场,促进土地流转,推进城镇化》、《学习贯彻十八大务实重行2013》、《贯彻州委十届三次全会精神》、《县市委书记访谈》、《突出发展民营经济》、《我为民营经济做了什么》、《深入开展“突出发展民营经济”大讨论》、《解放思想改革创新,治理环境优化服务》、《突出发展民营经济—创业者之歌》、《突出发展民营经济—县市委书记访谈》、《年终特稿回眸2013》         2版     本地要闻版 3版 时事新闻版(周一)、社会新闻版(周二至周五) 《记者调查》、《读者来信》、《百姓热线》、《反邪教阵地》、《百姓故事》等专栏   4版 广告版 广告   5版 县市专版、教育专版、养生保健专版 《校园内外》、《教师风采》、《作文天地》、《健康生活》、《时尚健康》、《养生常识》、《饮食禁忌》、《日常保健》等专版、专栏。     6版 专版 设有《经济视点》、《文化广场》、《大千世界》、《养生保健》、《茶余饭后》、《影视娱乐》、《足球》、《体育时空》、《山泉副刊》、《时事新闻》等专版。     7版   专版 8版 广告版 广告   注 每周六为《公安周刊》专版 《警务速递》、《警事传真》、《法治论坛》、《立法动态》、《特别关注》等栏目。     第三节 朝文网站(www.iybrb.com)  《延边日报》朝文网站《延日网》,现已发展成为全世界70多个国家和地区网民访问的全球性新闻网站。 2006年4月开通的《延边日报》网站,2013年通过大规模升级改版,到10月初实现了脱胎换骨的转变。经过近一年的运行,目前每天平均IP访问量和PV访问量均已突破100万人次。 重新改版的《延日网》,以全球性眼光刊发丰富多彩的信息,形成自己鲜明的特色。每天及时更新几十条新闻及其他信息,不断巩固国内最大朝鲜文新闻网站地位。 《延日网》先后开设宣传中国政治、经济、文化的《中国之窗》,反映朝鲜族社会现象的《民族之窗》,汇聚全球爱心人(士)的《爱心广场》,体现民族体育精神的《朝鲜族足球》等信息栏目,深受网民欢迎。   第四节 汉文网站(www.hybrb.com)   《延边网》是由《延边日报》汉文版主办的延边朝鲜族自治州官方主流媒体新闻网站。 《延边网》自2013年10月全新改版以来,每天都发布《延边日报》朝、汉文版近百名记者采写的原创稿件,而且每天都开设互动话题,受到网民青睐。 《延边网》作为延边官方重点主流媒体,实行严格审稿制度,坚决抵制虚假新闻,及时、准确地正面报道本地重大新闻,不仅第一时间把党和政府的声音传递给人民群众,而且随时向朝鲜、韩国、俄罗斯、日本等周边国家以及美国、加拿大等世界各国网民提供延边地区真实可靠的权威信息。
9    第四章 机关党委 댓글:  조회:1821  추천:0  2016-03-31
第四章 机关党委 延边日报社机关党委隶属于延边州直机关党工委。机关党委下设朝汉文版两个党总支、7个党支部、2个直属党小组。现有党员217名(其中,离退休、退养党员126名),书记为社长、总编辑李荣兼任,副书记为王彩莲(专职,兼管共青团、工会)。同时设有延边日报社纪委,书记为王彩莲。 近几年来,报社机关党委成员团结一心,带领全社党员干部,为全面推进报社各项工作的创新发展提供了思想和组织保证。 一、强化党的领导,落实“一岗双责”制度 成立党组,充分发挥核心领导作用。2006年3月,新一届报社领导班子把党建工作摆在重要位置,成立党组,确立了“围绕中心抓党建,抓好党建促工作”的工作思路,并出台了党组《议事规则》。 健全党的组织,开创抓党建良好局面。为了防止党务与业务工作“两层皮”现象,社党组将游离于机关党委之外的班子成员及时吸补为党委委员。主管业务部门的兼职“委员”参与党建工作,形成报社领导班子“一岗双责”,分管领导直接抓党建,党委委员兼职党务工作者具体抓党建的良好局面。 整顿、调整基层组织,理顺党的隶属关系。强化党支部建设,首先配齐配强党总支书记和支部书记,把两个文版党支部调整为2个党总支,下属6个党支部,由两位副社长分别兼任总支书记,编辑部主任也兼任党支部书记,行政后勤部门合并为一个支部。“一岗双责”落到实处,兼职书记不仅在工作中是骨干,在各项活动中也都起带头作用。 二、加强党员教育管理,培育先进典型 重视积极分子培养,强化基层党支部积极分子的培养力度,积极选树、培养、推荐身边成长的优秀分子。仅2006年至2008年3年期间,发展新党员9名,按期转正10名。报社党委与州委组织部联网,推进党员管理规范化建设,基本实现了党员管理规范化、信息化。注重发挥党员在本职岗位、社会活动中的骨干、带头、表率作用。近10年来,报社涌现出全国优秀新闻工作者、省优秀党务工作者李荣,享受国务院特贴待遇新闻专家、省优秀编辑孙治堂,省十佳新闻工作者、省“5·1”巾帼标兵陈冬梅,省优秀新闻工作者李贵友、车顺姬,州劳动模范朴寿山、李叶军,州优秀专业技术人才董乐平,州优秀党务工作者王彩莲等先进人物。榜样的力量,推动了全社爱岗敬业、助人为乐的文明风尚的形成,好人好事不断涌现,学先进、赶超先进的风气促进了报社各项事业不断发展。 三、以争创为目标,扎实开展各项活动 落实中宣部等5部门对新闻战线开展“走基层,转作风,改文风”活动的部署,开展争做“五个模范”活动,即:以新闻战线“三项教育”为载体,争做学习模范;以新闻系统“走转改”活动为载体,争做“三贴近”模范;以开展写好稿、评好稿活动为载体,争做打造精品模范;以各种策划活动为载体,争做创新模范;以“送温暖”活动为载体,争做服务民生模范。 四、健全制度,强化监督,增强领导班子和党员廉政意识 报社领导班子成员每年签订《党风廉政责任书》,设定“高压线”,做到令行禁止;社党组制定完善了《延边日报社固定资产管理办法》、《延边日报社公车管理及使用暂行办法》等涉及报社党风廉政的各项制度。 中层以上干部按照“谁主管、谁负责,一级抓一级,层层抓落实”的要求,实行目标分解、责任共担的连带机制;签订《党风廉政建设责任状》,将党风廉政建设和反腐倡廉工作贯穿于报社的各项活动之中。 为贯彻落实中央“八项规定”,社党组规范公务活动及车辆管理。在接待方面,严格控制陪同人员和陪餐人员;用餐不上高档烟酒、菜肴,不送土特产、纪念品;在车辆管理方面,实施严禁公车私用,采访车入库等制度。仅此一项,同比降低了20%的支出。 五、增强民族团结,重视培养少数民族新闻业务骨干 报社党委认真贯彻执行《民族区域自治法》、《延边朝鲜族自治州自治条例》,把一大批年富力强的朝鲜族干部提拔到中层领导岗位,在选拔后备干部时也重点向年轻干部倾斜。2011年,经组织推荐朝文编辑部的郑永哲、张雪花、崔美兰成为州管副县级后备干部。与此同时,深入开展“三个离不开”和马克思主义民族理论、党的民族政策和民族知识的宣传教育。通过学习、宣传活动,“汉族离不开少数民族,少数民族离不开汉族,各少数民族之间也相互离不开”的思想深入人心。维护民族团结、社会稳定和国家统一,成为报社各民族干部群众的传统道德风尚。  
8    第三章 机构设置(图表) 댓글:  조회:2075  추천:0  2016-03-31
第三章 机构设置(图表) 第一节 采编出版部门、行政管理部门、党、团、工会组织 第二节 外派机构(历届记者站)   ①长春记者站:吴正军(1954~1960,中共延边地委宣传部特批建站) ②龙井(延吉县)记者站:金秉权、金升吉、崔元根、朴万春、张京律、赵永男、吴京俊(1957~1999) ③珲春记者站:林雄吉、崔永哲、陶双福、林长春、姜珉根、梁正吉、相恒波、朴得龙(1958~至今) ④和龙记者站:金正宗、吴正乭、李昌役、洪春植、安昌郁、尹泰渊、赵昌浩(1958~至今) ⑤安图记者站:元台常、杨昌学、白喜春(1958~1986) ⑥敦化记者站:宋全林、杨凯、韩宝义、边文利、邢玉才(1958~至今) ⑦汪清记者站:金成徹、石立学、方春万、金铁永、黄河、傅裕(1960~2013) ⑧图们记者站:李今锡、吴基活、方龙男、李虎林、崔国哲(1980~1999) ⑨延吉记者站:黄荣权、池春昱、池哲虎、金铁永、蔡春姬、申贤淑、王春荣、张渊荷(1988~2000) ⑩牡丹江记者站:金有权(1986~1994) ⑪北京记者站:金川、朴寿山、方洪国、金森、李永植、姜永赞、李兰(特聘)(1992~2005) ⑫天津记者站:方洪国(1994~1996) ⑬青岛记者站:金森、吴成镐、许强一(1994~1996,2011~至今) ⑭沈阳记者站:田官龙(1997~2002) ⑮韩国首尔支社:赵根佑(韩国人)、金英玉(1993~2003) ⒃驻韩(首尔)海外事业部:李哲亿(2001~2005)
7    第二章 领导体制 댓글:  조회:2343  추천:1  2016-03-31
  第二章 领导体制 延边日报社历任社长、总编辑及副社长、副总编辑(图表)   任序 姓名 社长、总编辑 任职期限 副职(副社长、副总编辑) 1 崔采   社长 1948.4.1~1948.8 石果(任副社长,1948. 4.1~年末)、林民镐(任责任总编辑1948.4.1~年末) 2   崔采         社长(兼任延边地委宣传部长)     1948.9   李旭成(任副社长,主持工作1949.3)、金东久(任总编辑,1949.3)、白南杓(任副总编辑1949.4)、裴在华(任副总编辑) 1952.9 (挂职) 李羲一(任总编辑,主持工作1952.10)郑龙水(任副总编辑,1953.3) 3 李羲一     社长 总编辑 1953 1954.12~1956.12 郑龙水(任第一副总编辑,1954.12) 4 郑龙水     总编辑 1957.1~1962.4 李根全(1957.11任)、黄舜明(1957.6任)、李大万(1957.6任)、杨振茂(1957.11任)、张进发(1960.7任,1961.5免) 5 金承玉   总编辑 1962.5~1965.6 杨振茂、南相烈(1962任,1964.9调离)、孙继远(1965.4任)、郑永录、黄舜明(1962.6.26免,1964.3再任副总编辑) 6 张奎星   总编辑 1965.6~1967.2 杨振茂、孙继远、郑永录、黄舜明 7 宋洪山   革委会主任(军代表) 1967.2~1973.7 荣印兰(副主任、军代表)、谷道宗(副主任、主管汉文版)、玄云鹤(副主任、主管朝文版)、黄显文 8 张奎星   总编辑 1973.8~1978.6 杨振茂、黄显文、谷道宗、黄舜明、玄云鹤、张文学 9 金益宪   总编辑 1978.8.~1981.8 杨振茂、黄显文、黄舜明(1978.12免)、柳玉哲、张志鹏(1979.5~1981.8)、吴泰镐、金泽(1978.10~1980.8) 10 柳玉哲   总编辑 1981.9~1983.12 黄显文、吴泰镐、于永才、郑永录、孙尚明 11 吴泰镐   总编辑 1984.1~1985.12 于永才、林长春、朴河林、张文学、张正一、曹正、朱京和 12 金成桂       社长兼总编辑 1985.12~1990.9   于永才(兼任副社长,1985.12)、林长春(兼任副社长,1985.12)、张文学、朴河林、张正一、曹正、朱京和、韩昌益(任副社长,1989.12) 13 李得龙     社长 1990.10~1992.2 于永才(兼副社长)、林长春(兼副社长)、张文学、张正一、曹正、朱京和、王建民、韩昌益(副社长) 14 姜龙云                 社长兼总编辑 1992.11~1999.7 于永才(兼正处级副社长,1998.5免)、张文学(兼任副社长,1998.5)、林长春(兼副社长)、许昌范(任副社长1995.3)、许龙锡(1994.3任,1995.3免)、郑庆洛(1995.3任)、张正一、曹正(1995.3免)、朱京和(1995.3免)、王建民、徐振清(1995.3任)、金川(1995.3任)、孙治堂(1997.3任)、韩昌益(免副社长,1995.3) 15 许龙锡 社长兼总编辑             1999.7~2006.3 林长春(兼副社长2000.3免)、崔虎(兼任副社长,2000.3,2002.3免)、徐振清(2000.3免)、张文学(兼副社长,2003.4免)、孙治堂(兼任副社长,2003.4)、洪吉男(兼任副社长,2003.4)、王建民(2000.6免)、金川、艾贵生(2000.6任)、张正一(2000.9免)、陈冬梅(2003.4任)、金东焕(2000.5任,2003.4免)、崔虎(2004.10调入) 16 李荣 社长兼总编辑           2006.3~2014.5 孙治堂(兼副社长,2010.11免,任正处级副总编辑)、洪吉男(兼副社长,2010.4免)、刘华春(兼任副社长,2009.12,2011.10免)、陈冬梅(兼任副社长,2010.11)、金川(兼任副社长,2012.10)、艾贵生(2012.8免)、崔虎(2009.9免)崔清吉(2010.10任) 17 安国贤 社长兼总编辑       2014.5~   陈冬梅(兼副社长)、金川(兼副社长)、崔清吉、高吉龙(2014.5任)、董乐平(2014.5任)  
6    第一章 延边日报社概况 댓글:  조회:2884  추천:0  2016-03-24
新建19层办公大楼 自创刊初期至本世纪初的旧办公楼 第一章 延边日报社概况   《延边日报》是中共延边朝鲜族自治州委员会的机关报,最早创刊于1948年4月1日,位于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原社址在光明街1号)。 延边日报社用朝、汉两种文字出版6种报纸,即朝文版《延边日报》、汉文版《延边日报》及子报朝文版《综合新闻》、《朝鲜族中学生报》、《东北朝鲜族科技报》、《上海周刊》,并拥有朝文版延边日报网站《延日网》(www. iybrb.com /2007年4月6日开通)和汉文版延边日报网站《延边网》(www. hybrb .com /2013年开通)。报纸总发行量为10万余份。 被誉为“中国朝鲜族社会最早新闻媒体”的朝文版《延边日报》,于1948年4月1日创刊,对开8版,周6刊,截至2013年12月31日,共出刊20514期;延边地区第一主流媒体汉文版《延边日报》,于1958年1月1日创刊,对开8版,周6刊,截至2013年12月31日,共出刊16775期。子报—朝文版《综合新闻》报(其前身《参考消息》),于1979年10月1日创刊,4开32版,周1刊,截至2013年12月 30日,共刊发1014期;《朝鲜族中学生报》,于1989年5月1日创刊,4开8版,周1刊,共出刊1174期;《东北朝鲜族科技报》,于1981年9月3日创刊,4开8版,周1刊,共出刊1296期;《上海周刊》,于1999年10月10日创刊,4开44版,供出刊680期。 《延边日报》系本地区(汉文版)乃至全国众多朝鲜文报刊中(朝文版)创刊最早、且唯一的一级党委机关报,因而具有其独特的政治优势和权威性。《延边日报》又是本地区(汉文版)乃至全国朝鲜语言文字新闻传媒中(朝文版)唯一的“中国记协”(全称为“中华全国新闻工作者协会”)团体理事单位。自1991年“中国记协”第4届理事会开始,《延边日报》社领导一直被推选为“中国记协”理事,先后有林长春(第4届)、姜龙云(第5届)、许龙锡(第6届)、李荣(第7届)当选历届理事,足以说明其代表性。 延边日报社现有职工341名(2013年末至2014年初)。其中,在职人员168名(朝族86名,汉族82名),离退休人员173名(离休9名,退休164名)。具有高级职称119名(在职正高6名、副高43名),中级职称124名(在职中级37名)。 回首既往,《延边日报》创刊65年来,职工队伍不断发展壮大,总数比创刊初期增加3倍还要多。 1948年全社职工只有101名(朝鲜族99名,汉族2名)。其中,编采人员35名,管理人员12名,工人54名。 40年后的1988年全社职工391名。其中,编采人员196名(朝鲜族124名,汉族72名),行政管理人员52名,印刷工人143名。具有新闻专业职称者188名(含离退休),其中,高级职称18名(含离休3名),中级职称99名(含退休5名),初级职称 71名。 50年后的1998年全社职工375名(在职227名,离退休148名)。其中,朝鲜族248名,汉族127名。具有新闻专业职称者222名,其中,高级职称63名(含离退休22名),中级职称159名(含离退休45名)。 60年后的2008年全社职工381名(在职239名,离退休142名)。其中,在专业人员中,朝鲜族57名,汉族58名,满族1名,蒙古族1名。具有中级以上新闻专业职称者222名(含离退休)。其中,高级职称102名(含离退休)、中级职称120名(含离退休)。 抚今追昔,如今延边日报社工作环境、办报设备、生活条件大有改善。延边日报社现入住新闻综合大楼(19层)位于延边朝鲜族自治州首府延吉市中心地段,可一眼俯瞰延吉市全貌。现拥有建筑物总面积达10800平方米。(其中,19层综合大楼5600平方米、12层办公大楼5200平方米) 办报、办公设备日趋现代化、自动化和网络化。比起创刊初期简陋厂房,陈旧设备,艰苦的办报条件,已有天壤之别,今非昔比。现拥有电脑295台、电传机5台、PJ787一台,电脑联网、网站、电讯接收设备和照片传真等设备也基本配套。到2013年,5个独立刊号的报纸,业已实现运用东北3省最前沿的方正全媒体新闻采编系统,从而使采、编、校对程序彻底摆脱纸和笔,大大提高了工作效率。购置专业级佳能照相机10部,给主要采访部门配备了全套设备,为办好报纸提供了硬件保证。与此同时,给朝汉两个网站新配备数码相机、打印机、扫描仪、文件拍摄仪等现代化设备,提高了独立工作能力。 跨世纪的《延边日报》,历经风霜,与时俱进,顺利走过了65年的光辉历程;如今的《延边日报》,新闻事业创新发展,新闻队伍不断壮大,办报条件日臻完善,各项事业并驾齐驱,职工生活蒸蒸日上,已成为一个具有现代化设施,顺应全媒体信息化时代大潮的独具自己风格、特色的新闻机构。  
5    序言 댓글:  조회:1402  추천:0  2016-03-24
序言(一)   《延边日报》作为延边地区乃至中国朝鲜族社会的主流媒体,自1948年4月1日创刊至今,始终坚持报纸的党性原则,正确把握舆论导向,以宣传党和国家的路线、方针、政策和民族理论为宗旨,为维护国家统一、民族团结,促进民族经济、社会文化事业的发展,积极向海内外宣传延边等方面作出了重大贡献。与此同时,聚焦社会弱势群体,及时反映广大群众的呼声,为读者提供大量生活信息和服务资讯,成为党联系群众的桥梁和纽带。 真实的记录才能留存历史的真实。年已古稀的延边日报社原副社长兼副总编辑林长春先生,继《延边日报新闻志(40年史)》(1988年,金秀国、朱玉斌共著)和《延边日报50年史》(1998年,吴泰镐著),撰写出《跨世纪的》(1998年~2013年),将《延边日报》66年史贯穿起来,全面真实地反映中国朝鲜族社会的巨大变迁,其意义非同一般。 《跨世纪的》大致分为“概况”、“大事记”两大部分。其中,“概况”部分简要介绍了延边日报社的基本情况,内容简练充实、叙事客观、文风朴素,颇有古代史籍的遗风。正如作者在《后记》中所述,“概况”严循实事求是之原则,概按《延边日报》版面文字和有关历史档案资料如实记述。“大事记”部分,则由从16年来刊登在朝、汉两文版《延边日报》第一、二、三版9万多条新闻中筛选的3000多条新闻稿件组成。在这里,作者从一个忠实的记录者嬗变为一个严谨的筛选者。 新闻是新近发生的事实的报道。正因为如此,新闻既是再现历史的镜子,又是展望未来的参照系。从理论上讲,新闻理应最为真实、最为鲜活,但它不可能面面俱到、无所不包。新闻好比聚光灯,聚焦身边发生的最新时政动态以及人民大众普遍关心的事情。正如作者在《后记》中所披露,“大事记”的新闻稿件,都是作者按照新闻规律和新闻价值精选出来的。在我看来,这与作者的履历、素质有很大关系。作者在延边日报社工作20多年,既当过一线记者,又当过引领改革的社一级领导,可谓视野开阔、经验丰富、理论精湛。应该说,“大事记”正得益于作者的上述历练和优势。 作为上世纪80~90年代曾经引领《延边日报》改革,又受聘在延边大学讲授新闻学理论的作者,以新闻学的视角聚焦《延边日报》改革,在第六章“新闻改革”部分以开阔的视野和独特的视角,总结出《延边日报》新闻改革“七大特点”。此章节堪称本书的精髓所在,从中可见作者从业多年积累的深厚功力和对新闻作品的独到见解,可谓殚精竭虑,用心良苦。这也应是本著作异于其他社志类作品之处。从此意义上讲,作者已不只是一位忠实的记录者和严谨的筛选者,而是一位满腹经纶的学者型新闻工作者。 总而言之,《跨世纪的》是对近来一段《延边日报》历史的真实记录,也是一部进入新千年前后16年延边地区政治、经济、文化、社会发展的缩影,更是亲历世纪之交《延边日报》的历史变迁,且古稀暮年笔耕不辍的一位新闻工作者呕心沥血的结晶。   延边大学新闻系教授 李逢雨 2015年2月1日           序 言(二) 阅后感怀   有幸优先阅览即将出版的《跨世纪的》,先睹为快,不胜感慨。 这是继第一本《延边日报新闻志(40年史)》(1988年,金秀国、朱玉斌共著)和第二本《延边日报50年史》(1998年,吴泰镐著),续写跨入新世纪前后(1998年~2013年)阶段《延边日报》发展历史的又一本“社志”,值得一读! 日前,后辈同僚、前任副社长兼副总编辑林长春破格邀我们老报人为其所著作序,委实叫我们犯难了。这是因为,我们既非领导,又非名人,为人著作作序岂非有悖于本分?可他执意恳求称:四位老前辈曾先后参与《延边日报》朝汉文版报纸的创刊及其后发展全过程,是《延边日报》历史的见证人,资深望重,若能如约为拙著作序,将会给新著增光添彩,提高公信力。 恭敬不如从命,执拗不过,便答应了下来。 这是一部著书者收集大量资料,认真核对史实,详实记录《延边日报》历届领导体制及近16年来新闻事业发展的志书。此书同时收录延边各族人民跨入新世纪前后年代团结进步、奋力推进改革开放全过程的“大事记”,犹如一部延边“地方志”。此书且不局限于本地区,还收录我国(包括本省)政界重要人事变动、重大决策以及在国内外享有一定名气的全国范围内朝鲜族知名人士事迹和活动,故具有一定的收藏、实用价值。 志书内容丰富,涵盖广泛,层次分明;编排、章节有序,条目清晰,一目了然。从报社的领导体制、机构设置到新闻的编采、出版、印刷、发行及大事记,都记述得非常详尽。 这部志书共分21章,虽内容繁多,但并没平分秋色,而是将新闻改革和人事、分配、经营管理改革分作两个章节浓墨重笔,重点记述,是一个显著特点,可看出著书者的匠心。 改革是一切事物发展的动力,只有坚持改革,才能不断发展,与时俱进。报纸、新闻工作也如此,只有改革,不断创新,才能适应当今多媒体激烈竞争的新形势。 如今《延边日报》正处在继往开来的最佳历史时期,但愿《延边日报》越办越成熟,不断开创灿烂未来!   《延边日报》老报人: 金柱哲(1948年入社、85岁)张瑞云(1949年入社、84岁) 明耀庭(1957年入社、84岁)朱玉斌(1958年入社、80岁) 2015年1月12日
4    《跨世纪的<延边日报>》目录 댓글:  조회:1837  추천:0  2016-03-24
《跨世纪的》 (1998.1~2013.12)   目录   序言 (一) ┅ ┅ ┅ ┅ ┅ ┅  李逢雨(延边大学新闻系教授)(1) 序言 (二) ┅ ┅ ┅   老报人 金柱哲、张瑞云、明耀庭、朱玉斌(2) 第一章 延边日报社概况 ┅ ┅ ┅ ┅ ┅ ┅ ┅ ┅ ┅ ┅ ┅  () 第二章 领导体制 ┅ ┅ ┅ ┅ ┅ ┅ ┅ ┅ ┅ ┅ ┅ ┅ ┅  () 延边日报社历任社长、总编辑及副社长、副总编辑(图表)┅ ┅ () 第三章 机构设置(图表) ┅ ┅ ┅ ┅ ┅ ┅ ┅ ┅ ┅ ┅ ┅ ┅ () 第一节 采编出版部门 ②行政管理部门 ③党、团、工会组织 ┅ ┅ ┅() 第二节 外派机构(历届记者站)┅ ┅ ┅ ┅ ┅ ┅ ┅ ┅ ┅ ┅() 第四章 机关党委 ┅ ┅ ┅ ┅ ┅ ┅ ┅ ┅ ┅ ┅ ┅ ┅     () 第五章 《延边日报》版面、栏目及网站 ┅ ┅ ┅ ┅ ┅        () 第一节 朝文版面(图表) ┅ ┅ ┅ ┅ ┅ ┅ ┅ ┅ ┅ ┅ ┅  () 第二节 汉文版面(图表)  ┅ ┅ ┅ ┅ ┅ ┅ ┅ ┅ ┅ ┅ ┅  () 第三节 朝文网站  ┅ ┅ ┅ ┅ ┅ ┅ ┅ ┅ ┅ ┅ ┅      () 第四节 汉文网站  ┅ ┅ ┅ ┅ ┅ ┅ ┅ ┅ ┅ ┅ ┅      () 第六章 《延边日报》新闻改革 ┅ ┅ ┅ ┅ ┅ ┅ ┅┅ ┅ ┅ () 第七章 延边日报社人事、分配、经营管理改革 ┅ ┅ ┅ ┅ ┅() 第八章 通联工作   ┅ ┅ ┅ ┅ ┅ ┅ ┅ ┅ ┅ ┅ ┅      () 第九章 发行工作  ┅ ┅ ┅ ┅ ┅ ┅ ┅ ┅ ┅ ┅ ┅      () 第十章 广告事业   ┅ ┅ ┅ ┅ ┅ ┅ ┅ ┅ ┅ ┅ ┅     () 第一节 朝汉文版广告处 ┅ ┅ ┅ ┅ ┅ ┅ ┅ ┅ ┅        () 第二节 国际广告公司 ┅ ┅ ┅ ┅ ┅ ┅ ┅ ┅ ┅          () 第十一章 印刷厂 ┅ ┅ ┅ ┅ ┅ ┅ ┅ ┅ ┅ ┅ ┅ ┅ ┅  () 第十二章 《综合新闻》 报  ┅ ┅ ┅ ┅ ┅ ┅ ┅ ┅ ┅      () 第十三章 《朝鲜族中学生报》  ┅ ┅ ┅  ┅ ┅ ┅ ┅        () 第十四章 《东北朝鲜族科技报 》┅ ┅ ┅ ┅ ┅ ┅ ┅ ┅      () 第十五章 《上海周刊》 ┅ ┅ ┅ ┅ ┅ ┅ ┅ ┅ ┅        () 第十六章 《延边日报》重大事件 ┅ ┅ ┅ ┅ ┅ ┅ ┅ ┅ ┅   () 第十七章 对外协作及友好往来 ┅┅ ┅ ┅ ┅ ┅ ┅ ┅ ┅ ┅ () 第十八章 硕果殊荣 (图表-按英文字母姓氏排列)  ┅ ┅ ┅        ( 第一节 获省、州(州委、州政府)级以上先进、模范奖 ┅ ┅       () 1、集体 ┅ ┅ ┅ ┅ ┅ ┅ ┅ ┅ ┅ ┅               () 2、个人 ┅ ┅ ┅ ┅ ┅ ┅ ┅ ┅ ┅ ┅               () 第二节 省级以上好新闻作品  ┅ ┅ ┅ ┅ ┅ ┅ ┅ ┅ ┅    () 1、朝文版 ┅ ┅ ┅ ┅ ┅ ┅ ┅ ┅ ┅ ┅              () 2、汉文版 ┅ ┅ ┅ ┅ ┅ ┅ ┅ ┅ ┅ ┅              () 3、退休办 ┅ ┅ ┅ ┅ ┅ ┅ ┅ ┅ ┅ ┅              () 第三节 省级以上优秀论文  ┅ ┅ ┅ ┅ ┅ ┅ ┅ ┅ ┅       () 1、朝文版 ┅ ┅ ┅ ┅ ┅ ┅ ┅ ┅ ┅ ┅              () 2、汉文版 ┅ ┅ ┅ ┅ ┅ ┅ ┅ ┅ ┅ ┅              () 3、退休办 ┅ ┅ ┅ ┅ ┅ ┅ ┅ ┅ ┅ ┅              () 第四节 著作 ┅ ┅ ┅ ┅ ┅ ┅ ┅ ┅ ┅ ┅ ┅ ┅ ┅      () 1、朝文版  ┅ ┅ ┅ ┅ ┅ ┅ ┅ ┅ ┅              () 2、汉文版  ┅ ┅ ┅ ┅ ┅ ┅ ┅ ┅ ┅              () 3、退休办 ┅┅ ┅ ┅ ┅ ┅ ┅ ┅ ┅ ┅              () 第十九章 《延边日报》大事记(1998.4~2013.12) ┅┅┅ ┅ ┅   () 第二十章 历史资料 ┅ ┅ ┅ ┅ ┅ ┅ ┅ ┅ ┅ ┅ ┅       () 有关政策规定9件 ┅ ┅ ┅ ┅ ┅ ┅ ┅ ┅ ┅       ()        1、《关于会议及领导同志活动新闻报道的若干规定》的通知 ┅  () 2、延边日报关于办报把好政治关的有关规定 ┅ ┅ ┅ ┅ ┅ () 3、关于“走基层、转作风、改文风”活动实施方案(摘要)┅ ┅() 4、延边日报社关于搞好新闻图片报道的意见 ┅ ┅ ┅ ┅ ┅ () 5、“延边日报社关于获奖新闻作品奖励暂行办法” ┅ ┅ ┅  () 6、延边日报社关于把好广告内容关的暂行规定 ┅ ┅ ┅ ┅  () 7、延边日报社关于职工出国(境)须知 ┅ ┅ ┅ ┅ ┅     () 8、延边日报社工作人员违反工作纪律处理暂行规定 ┅ ┅ ┅ () 9、延边日报社党组议事规则     ┅ ┅ ┅ ┅ ┅     () 第二节 州领导讲话  ┅ ┅ ┅ ┅┅ ┅ ┅ ┅ ┅┅ ┅ ┅    () 1、延边州政府金振吉州长在延边日报社调研时的讲话 ┅ ┅    () 2、延边州政府李龙熙州长在延边日报社调研时的讲话 ┅ ┅    () 第三节 50周年社庆有关报道  ┅ ┅ ┅ ┅ ┅┅ ┅ ┅ ┅ ┅   () 1、创刊50周年社庆大会盛况            ┅ ┅ ┅ ┅      () 2、省委常委、州委书记王儒林讲话 ┅ ┅ ┅ ┅ ┅          () 3、社长、总编辑姜龙云致辞 ┅ ┅ ┅ ┅ ┅               () 4、50周年社庆国际学术会 ┅ ┅ ┅ ┅ ┅               () 第四节 60周年社庆有关报道  ┅ ┅ ┅ ┅┅ ┅ ┅ ┅ ┅     () 1、创刊60周年社庆大会盛况         ┅ ┅ ┅ ┅ ┅    () 2、社论 ┅ ┅ ┅ ┅ ┅┅ ┅ ┅ ┅ ┅                () 3、中共中央政治局委员、国务院副总理张德江贺词 ┅┅┅      () 4、全国政协原副主席赵南起、中央统战部副部长李德洙等题词 ┅  () 5、社长、总编辑李荣致辞  ┅  ┅ ┅ ┅ ┅              () 第二十一章 附录(花名册)┅ ┅ ┅ ┅ ┅ ┅ ┅ ┅ ┅       () 第一节 延边日报社在职人员名单 ┅ ┅ ┅ ┅ ┅              () 1、朝文版 ┅ ┅ ┅ ┅ ┅┅ ┅ ┅ ┅ ┅              () 2、汉文版 ┅ ┅ ┅ ┅ ┅┅ ┅ ┅ ┅ ┅              () 3、行政管理部门 ┅ ┅ ┅ ┅ ┅ ┅ ┅ ┅ ┅           ()       第二节 离退休、退养人员名单  ┅ ┅ ┅ ┅ ┅ ┅            () 第三节 死亡人员名单(自1998~2013年底) ┅ ┅ ┅ ┅        ()  后记   ┅ ┅ ┅ ┅ ┅ ┅ ┅ ┅ ┅┅ ┅ ┅ ┅ 林长春      ()        
세상에 어려운 일 없어라 모든 일은 하기에 달렸거늘  ㅡ림장춘 연변일보 전임부사장 인터뷰 지난 세기 후반 격변의 년대인 1984년부터 16년간 연변일보 조선문판 주관 부사장 겸 부주필로 신문개혁의 최전선에서 지휘봉을 잡았던 림장춘선생은 항시 새로운 사유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면서 어렵고 민감한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그 당시 지구급 소수민족신문사로서는 거의 실현불가능한 일들을 하나하나 슬기롭게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위태롭지만 안정된 그의 고공줄타기와 같은 사업과정에서의 희로애락을 편린으로나마 더듬어보았다.   ㅡ신문운영에서 새로운 사유로 신문의 가독성과 뉴스성을 강조한다고 했는데 낡은 신문운영의 틀에서 어떻게 벗어날수 있었는가?   1986년 10월에 불을 지폈던 “신문관념갱신에 대한 대토론”은 전 편집부를 뒤흔들어놓았다. “관념을 바꾸고 새로운 사유로 창조적인 사업을 전개하자”는것이 당시 내건 슬로건이였다. 이는 연변일보 편집부가 오랜 전통적인 신문관념에서 헤여나와 신문법칙에 좇아 신문을 꾸리는 력사적인 대전환이였다. 당시 조선문판을 주관하던 나는 전국소수민족신문사업회의에서 돌아온후 사상해방에 관한 대토론을 조직하였다. 이 토론은 사내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고 사원들의 관념은 전례없는 활약을 보였으며 많은 고정된 틀들이 깨여지기 시작했고 신문의 모습도 커다란 전변을 보이기 시작했다. 뒤미처 11월부터 가독성이 향상된 “주말특집”, “사회생활”, “사색의 여울목” 등 새로운 전문란들이 생겨났고 좋은 제목 달기, 짧은 뉴스 쓰기 등 활동들도 이어졌다.   ㅡ지방의 작은 신문은 국제성적인 활동을 보도하지 못한다는 관례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촌에 유일한 조선문신문을 배송시킬수 있은 비결은 무엇인가?   연변일보사에서 신문관념을 갱신하고 현지보도에 치중하고있을 무렵인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을 맞이하게 되였다. 이는 국제성적인 현지보도를 체험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지방신문이나 소수민족신문이 국제성적인 활동을 직접 보도한 사례는 없었다. 연변일보는 지방신문이고 소수민족신문이지만 또한 당보에 속하므로 참여할 자격이 있다. 조건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일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 아닌가. 문제는 적극적으로 쟁취하느냐에 있다. 주견이 서자 나는 안면이 있는 신화사 비서장 장국량씨에게 련락해 아시안게임 취재권을 따줄것을 청구하는 한편 사람을 북경에 급파하여 따라다니며 교섭하게 하였다. 끈질긴 공작끝에 장국량씨는 사람을 아시안게임촌과 국가체육총국에 보내여 끝내 취재권을 얻어내였다.   신문사에서는 즉시 장정일부총편집을 단장으로 하고 오기활, 오인철 등으로 구성된 취재단을 북경에 파견하여 처음으로 팩시를 리용해 원고를 전송해와 밤도와 찍어서는 이튿날 전문인원을 보내여 아시안게임촌 뉴스센터에 신문을 송달하였다. 이렇듯 북경아시안게임기간 연변일보는 지방의 소수민족신문으로는 유일하게 아시안게임의 취재권을 따내였을뿐아니라 매일 신문을 경기장에 들여보내였다. 아시안게임장내의 유일한 조선문신문으로 연변일보의 해외영향력을 넓혔다. 많은 한국언론 기자들은 아시안게임장에서 연변일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ㅡ통념상 언론은 외자와 외상을 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북경에서 연변일보 해외판 《일요경제》(주간)을 꾸릴수 있었던것은?   1992년 나는 미국적 한인 박영회장과 함께 북경에 진출해 연변일보 해외판 《일요경제》(주간)을 꾸림으로써 북경, 천진 등 지역에서의 외상, 외자기업에 대한 연변일보의 영향을 넓혀보려 했다. 당보와 외국인이 손잡고 신문을 꾸린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불허사항이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개혁개방시대 경제부문에서 외상, 외자를 리용할수 있는데 문화부문은 왜 안되는가? 경제토대가 앞서고 상부구조가 뒤따르는것은 법칙인만큼 조만간에 실행될 사항이다. 이런 신념하에 우리는 편집위원회를 소집하여 외상과 손잡되 우리가 책임지고 신문을 꾸리며 외상은 광고를 책임지고 북경에서의 신문운영경비를 책임지도록 토의결정했다. 연후 우리는 편집판공실 김천주임(현임 부총편집)이 박수산, 김삼, 방홍국, 리영식 등을 이끌고 북경에 들어가 현지취재를 하고 김경석주임이 집에서 편집, 출판을 맡도록 했다. 이 결정은 당시 연변주위선전부장이였던 장룡준의 지지를 받았다. 이 신문은 대외경제와 외상에 대한 보도를 위주로 하였는데 내용이 새롭고 본간과 뚜렷하게 구별되여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리현덕서기의 지지를 받았으며 국내외의 호평을 받았다.   이 신문은 후에 《월요경제》로 고쳐 줄곧 1999년까지 꾸려왔다. 이는 연변일보에서 사상 처음으로 당보의 전통관념을 깨뜨리고 과감히 외자와 외상을 리용해 자체의 내실을 다졌고 본지역을 떠나 새로운 보도령역을 개발하는 유익한 시도를 하였다.   ㅡ어려운 고비를 뚫고 북경 등 여러곳에 지사를 세울수 있게 된 경험을 소개한다면   대외영향을 확대시키고 새로운 광고자원을 개척하기 위해 우리는 1992년부터 선후하여 북경(지사장 박수산), 천진(지사장 방홍국), 청도(지사장 김삼), 심양(지사장 전관룡) 등지에 지사를 세웠다. 이런 지사들은 중앙선전부, 중국기자협회, 신화사의 지지와 유관 각 지역 당위 선전부문의 방조하에 합법적으로 세워진것이다. 이런 지사들의 설립은 당시 지구급 신문으로서는 유일무이한것이였다. 따라서 애로도 컸다. 이를테면 북경지사를 설립할 때 처음에는 북경시위 선전부에서 연변의 지리적위치조차 모르고있어 연변일보를 연안일보로 오인하기도 했다. 북경에서는 상해, 천진 같은 일부 대도시들만이 지사를 특설할수 있고 기타 지역은 일률로 비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직접 나서서 소수민족신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중국기자협회, 중앙선전부 신문국 등을 찾아다니며 지지와 협조를 간절히 부탁하며 설득한 끝에 마침내 특허증을 얻어냈다. 드디여 연변일보 북경지사가 맨처음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잇따라 천진 등 기타 지역의 설립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이와 동시에 1999년에는 또 한국 서울의 중심구역에 있는 중앙일보사 울안에도 연변일보 서울지사(지사장 김영옥)의 간판을 내걺으로써 남상복, 전평선, 리득룡 등 연변주위 책임자들의 칭찬을 받았다.   ㅡ여러 차례에 걸쳐 적지 않은 외자를 도입해 “조국변경만리행”취재활동 등 대형 행사를 조직한바 있다는데   1990년대 후기 개혁개방의 심입과 더불어 우리 나라에는 발달한 동남부와 상대적으로 락후된 서북지역의 발전이 불균형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아직 이 방면에 관련된 심층적인 계렬보도가 없었다. 나는 이런 광활한 변경지역이 신문보도분야로 말하면 사각지대이므로 많은 가치있는 뉴스거리가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연변일보가 생존발전할수 있는 공간이 생길지도 모르므로 취재단을 보내여 계렬보도를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장비도 없고 자금도 없다. 어떻게 할것인가? 지방신문으로 재력이 딸리기때문에 자체로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언론에서는 외자를 리용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경제부문이나 일찍 개방한 심수특구신문 같은 언론들에서 이미 외자를 리용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우리도 외자를 도입하여 “만리행”취재활동을 조직해볼수 있다. 1995년 여름 나는 중로 량국 동포언론인대표단 단장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 기회를 빌어 나는 지인인 중앙일보 경제부 박병석주임(현임 한국국회의원)을 통해 삼성그룹과 련락을 취해 취재차 한대를 지원해줄것을 요구했다. 대방에게는 취재차에 “삼성그룹찬조”라는 광고패를 내걸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외자도입과정은 어렵기만 했다. 그렇게 큰 대재벌이 20만원을 내는것은 소털 한대를 뽑아내는것처럼 쉬웠지만 이리저리 따지면서 번복하군 해 1년이 걸려서야 20만원을 받아낼수 있었다. 뒤이어 취재차를 구입하고 동남변경만리행 취재로선을 확정한후 정경락(부총편집)의 인솔하에 김창진, 허성, 민춘호 등 기자들로 취재활동을 시작했다.   1996-1997년기간 취재단은 최동단 훈춘 방천에서부터 해남도 삼아에 이르기까지 5개월에 걸쳐 8만리를 행군하면서 30개의 특집면을 편집해내여 조선문 연변일보의 대외적영향을 넓혔으며 젊은 기자들을 단련시켰다. 이번 행동에 대해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소동승서기는 수도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장에서 “연변일보에서 조직한 만리행 보도는 우리 나라 신문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칭찬했고 중앙선전부 신문국의 책임자는 “‘만리행’은 일대 장거”라고 평가했다.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수도 12개 언론들에서도 이에 대해 보도를 했다. 이기간 나는 외자를 도입하여 취재활동을 진행한 연변일보의 행위를 합법화하려는 의도로 중국기자협회에서 나서서 뉴스발표회를 갖게 하였는데 그 결과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동시에 1996-1999년기간 한국의 지인 변선생을 통해 선후하여 한국 대한항공, 제일제당 등 기업으로부터 20여만원의 외자를 쟁취하여 꽃씨를 사고 연변주교통국, 주공청단위 등과 손잡고 “연길-장백산 도로에 코스모스심기활동”을 조직하여 연길-장백산, 연길-훈춘의 천리꽃길을 조성함으로써 연변을 미화하였다. 듣자니 이 꽃길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꽃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에 대해 한국일보는 “평양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왜곡했고 외교부의 추궁을 받았다. 당시 길림성위서기였던 장덕강(현임 국무원부총리)은 연변주위에 엄중히 조사처리할것을 요구했고 심어놓은 코스모스를 밀어버리게 했다. 이번 사실의 전후시말을 잘 모르는 주위선전부장 리득룡과 연변일보사 강룡운사장은 나의 정치적전도에 대해 걱정을 했다. 그러나 나는 두려울것이 없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지고 문제가 있어도 내가 담당한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두려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튿날 나는 외교부에 보고를 상정하여 이번 활동의 동기와 외자도입경로 및 구체적인 활동조직 등 전반 과정을 여실히 밝혔다. 내가 보고를 제출한후 기세등등하던 추궁은 사라져버렸고 코스모스심기활동은 저지되지 않았으며 나의 “벼슬”도 무사했다.   ㅡ한때 서울에서 “연변일보 한국판”을 꾸린적도 있다는데   중한간 경제개방과 문화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본 지역, 본국 울타리를 넘어 한국에서 신문을 꾸림으로써 선전을 확대하고 광고시장을 넓힐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정례대로라면 지방신문으로, 소수민족신문으로 국외에 나가 신문을 꾸린다는것은 절대불가능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경제분야에서는 국외에 회사를 차릴수 있고 인민일보나 남방일보 등 언론계에서도 미국에 나가 해외판을 꾸린 사례가 있지 않은가. 우리 신문은 왜 안되는가? 모두 당보로서 규모차이가 있을뿐 연변일보도 국외에서 신문을 꾸릴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 이리하여 1998년 하반년부터 준비를 거친후 내가 직접 서울로 건너가 김영옥지사장과 함께 연변일보한국판을 꾸리기로 하였다. 떠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걸음의 성공여부는 짐작키 어렵지만 나는 책임을 질것이요. 신문개혁의 희생양으로 되여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소.”   서울에 도착한후 중앙일보의 협조와 한국기업의 후원을 받아 자금을 해결하고 본사의 돈은 한푼도 쓰지 않았다. 5월 31일 드디여 20개면 칼라판 《연변일보한국판》 시험호가 출간되였다. 전국의 공백을 메운 이 일은 주관 주위서기 김진길의 찬양을 받았다. 주장 남상복, 부주장 전평선 등은 선후하여 중앙일보사 별관에 내건 연변일보서울지사 간판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중앙일보 등 한국의 10여개 언론사들에서도 한국판의 출간에 대해 보도하였다.  ㅡ언론사에서는 국제성적인 학술활동을 조직할수 없다고 들었는데 1998년 연변일보사 창간 50주년 행사기간 조직한  “제3회두만강지역개발국제학술회의”는 어떻게 된것인가?   일반적으로 언론사에서는 국제성적인 학술활동을 조직할수 없다는것이 국내의 불문률이다. 하지만 지난 1998년 연변일보사 창간 50주년 경축행사기간 우리는 신문사의 돈을 쓰지 않고 “제3회두만강지역개발국제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 회의에는 중국, 일본, 한국, 미국, 몽골 등 나라의 50여명 학자와 관원들이 참가해 연변일보의 대외영향을 넓혔다. 언론기관으로서, 더우기 지방성 신문으로서 이런 활동을 조직한다는것은 당시로서는 허용치 않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주위선전부와 김진길 주관서기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보다도 지방신문과 소수민족신문으로서 자금래원도 없고 대외초청권도 없는 상황하에서 대규모 국제성적인 학술회의를 조직한다는것은 어려움이 컸다. 공식적인 절차대로라면 외사, 공안, 안전 등 부문은 그만두고라도 가장 익숙한 선전 주관부문에서도 동의하지 않을것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나는 관광초청 등 실시가능한 융통성있는 조치를 대여 신문사의 지지를 얻었으며 최종적으로 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이처럼 나는 재직시 선전부, 외교부, 중국기자협회, 신화사 등과 교섭하면서 지원을 받았고 미국적한인, 한국재벌들, 일본학자 등 외국인들과 사귀면서 찬조를 쟁취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이 당보의 주요책임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당성원칙과 신문법칙에 따라 처사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외사규률을 지키면서 새로운 사유로 창조적인 사업을 전개하니 좋은 결과를 볼수 있게 되였다.   ㅡ오래동안 한국에 체류한걸로 알고있는데 그기간 주로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한국체류기간 나는 강의를 하는외 한국언론계와의 인맥관계를 리용해 적극적으로 연변일보를 위해 찬조를 쟁취하고 광고를 유치하였으며 남상복, 김진길 등 연변주위, 주정부 책임자들의 방한을 위해 연줄을 달아주는 등 일을 하였다. 2000년 여름 남상복주장이 270명의 대형 투자유치단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할 때 서울에서 고층차의 뉴스발표회를 조직해줄것을 요구하였다. 1996년 “만리행”취재활동시 북경에서 중국기자협회를 통해 인민일보, 신화사 등 10여개 주요 언론사가 참가한 뉴스발표회를 조직한 경험이 있는 나는 한국언론계의 인맥을 리용해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15개 주요 언론사가 참가한 뉴스발표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중앙일보에는 남상복주장의 인터뷰가 실렸고 3분의 1의 가격으로 연변을 소개하는 전면광고가 실렸다. 이에 남상복주장은 “지방의 소수민족신문사 책임자로서 이렇게 넓은 인맥관계와 뛰여난 조직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ㅡ행정적으로 출세할 기회도 많이 있었을텐데   신문사업에 20여년간 몸담아있으면서 나에게도 행정적으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번 그 기회를 포기했다. 1993년 신문개혁에 열을 올리고있을 무렵 연변주위선전부장 리정문이 나에게 주위선전부 부부장으로 전근해 함께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여러번 제의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절했다. 정치에 자신이 없었고 행정쪽 일을 할 마음이 없었기때문이다. 그것은 문화대혁명후기 “516”혐의로 수감되고 로동개조를 했던 일이 나의 마음속깊이 깊은 상처를 남겼기때문이기도 했다. 그때의 억울함이 깊이 맺혀서일가 나는 “정치”하면 혐오감을 느꼈고 평생 행정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연고로 1975년 “516” 력사문제가 해명된후 현위조직부에서 모 공사 당위부서기로 임명하는것을 사절하고 중학교 부교장직을 선택했으며 1980년에는 훈춘현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임명하는것을 사절하고 연변일보 기자직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일말의 후회도 없이 20여년간을 시종여일하게 신문사업에만 매달렸고 지어 집착한 나머지 피곤한줄도 몰랐다. 노력은 결실을 맺기 마련이다. 1994년 나는 고급편집으로 평의되였고 선후하여 연변주기자협회 부주석, 길림성보도부문고급직무심사위원, 중국지구급신문연구회 부회장, 중국기자협회 리사를 담임했다. 1991년 중국언론대표단 일원으로 조선을 방문했고 1995년에는 중로해외동포언론대표단 단장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1995년에는 일본동아연구소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렇듯 나는 국내외 언론계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였고 연변일보의 대외영향력을 넓혔다.   ㅡ퇴직후의 생활은?   지난 한때 오직 “신문”이라는 한우물만 파오다 여생의 마무리단계에서도 신문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단순한 기사읽기가 아닌 평보에도 시간을 할애하면서 후배들에게 귀띰해주는것을 선배로서의 자신의 의무로 간직하고있다. 독보, 독서외 매일 인터넷과 함께 하는 시간은 하루 네시간 정도, 이 시간에는 몇몇 고정된 사이트를 훑어보는외에 8년 동안 줄곧 한국 한자총련합회 월간지에 송고하는 한자 중국어 관련기사 원고 작성 그리고 후세에 넘겨줄 자서전 출판준비 등으로 재직시절 못지 않게 바쁜 만년을 보내고있다.   퇴직생활을 더 이야기하자면 1999년 내가 서울에 나가 연변일보한국판을 창간할 때의 과정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당시 나는 제2선에 물러서게 되여 본의아니게 계속 남아서 일을 해야 했다. 초빙에 따라 나는 한국성공회대학에서 중국어학과를 새로 개설하고 이 학과의 첫 외국인교수로 되였다. 일을 맡았으니 잘해야 한다. 한국내에서 한창 붐을 일으키고있는 중국어열조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2년여 동안 저녁시간을 리용해 중국어 및 중국문화에 대한 책 3권을 편찬, 출판했다. 나는 저녁마다 책을 만들기에 골몰하느라 밤가는줄도 몰랐다. 나를 동반해 한국에 나온 부인이 타자를 하는 등 일손을 도왔다. 책이 출판된후 서점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그중 《중국어간체자쉽게배우기》라는 책은 편폭(430페지)이 크고 가격(한화 2만원/책)이 비쌌지만 7차나 재판되였으며 한국 각 서점의 잘 팔리는 책으로 되였다. 나는 이 3권의 책이 출판된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은 이런 책들이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문화를 리해하는데 필요한것이고 또한 중한 두 나라의 교류와 발전에 약간이나마 기여할수 있었다고 믿기때문이다. 나는 이미 《중국어간체자쉽게배우기》와 《간체자천자문》을 위해 저작권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남기는 유물이 되였으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ㅡ후배언론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언론인으로서 독서, 특히 신문업무리론공부에 게으름없는 노력을 경주하라고 거듭 당부하고싶다. 신문은 역시 하나의 학문이다. 기본적인 업무리론토대가 결핍한 명기자, 명편집은 나올수 없고 또 창의적으로 대담히 사업을 추진하는 현명한 지도자도 나올수 없다. 《신문학개론》, 《취재학》, 《편집학》 원리공부는 기본이고 《신문전선》(인민일보사 출판), 《중국기자》(신화사 출판) 등 국내 언론미디어분야의 권위성간행물을 필수리론공부도서로 정하고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곧바로 관념이 갱신되고 사유가 새로워지며 아울러 국내외 언론발전추이정보를 정확히 파악할수 있어 참신한 아이디어가 창출되는것은 물론 담략이 커지고 지혜가 늘고 방법도 생기게 될것이다.    윤재윤 기자 인터넷료녕신문 2010.9.25 원문보기
2    림장춘의 《세기를 뛰여넘은 연변일보》 출간 댓글:  조회:1012  추천:0  2016-02-19
림장춘선생의 《세기를 뛰여넘은 연변일보》(1998-2013)가 최근 연변대학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세기를 뛰여넘은 연변일보》(1998-2013)는 《연변일보신문지(40년사)》(1988년, 김수국, 주옥빈 지음)와 《연변일보 50년사》(1998년, 오태호 지음)에 이어 세번째로 《연변일보》의 력사를 진실하게 기록,  《연변일보》 66년의 력사 흐름을 한줄로 꿰놓음으로써 전반적으로 중국조선족사회의 거대한 변천을 진실하게 반영한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있다. 책은 크게 “개황”과 “대사기” 2개 부분으로 구성됐다. 그중 “개황”부분에서는 연변일보사의 기본정황을 간단하게 소개했는데 그 내용이 충실하고 서술이 조리분명할뿐만아니라 글의 풍격 또한 소박해 고대력사서적의 유풍이 다분하게 배여있다. “대사기”부분은 16년간 조문, 한문 판 《연변일보》의 1면, 2면, 3면에 실렸던 도합 9만여개의 보도원고중 선택한 3000여개의 보도원고로 구성됐다. 저자는 서언에서 “책은 내용이 풍부하고 장절마다 순서가 분명하며 조리있게 꾸며져있다. 신문사의 령도체제와 기구설치에서부터 보도의 취재, 편집 그리고 출판, 인쇄, 발행 및 대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여있다”고 적었다. 신연희 기자 연변일보 2015년 09월 28일 원문보기  
1    림장춘 프로필 댓글:  조회:1405  추천:0  2016-02-19
【 林长春 简 历 】   1942.4.29  出生于珲春县马滴达乡塔子沟村 1956.9-1959.8 珲春县春化中学。期间,任《春化中学报》(八开四版油印报)执行总编辑 1962.9-1967.8  中央民族大学 汉语言文学系毕业,任校刊《团结报》编辑 1970.2-1975.2  珲春县外事办公室(秘书)、珲春酒厂(涉嫌“5.16劳改”)、哈达门中学(副校长)。先后创办珲春酒厂报-《奋进》及哈达门中学报-《劲松》,任总编辑) 1975.2-1980.1 珲春县委宣传部(报道科长)                 1980.1-2002.8 延边日报社(副社长兼副总编辑、1994年被评为高级记者) 1988.2-1988.8上海复旦大学新闻学院总编辑班进修半年 1999.3-2005.9 被聘韩国圣公会大学中国语专业首任外国人教授 2004.2-2005.7 在韩国创办《中国经济时报》,任执行总编辑(社长为金鶴哲) 2013 –至今 《延边日报》朝文编辑部顾问   历任中国记者协会第四届理事、中国少数民族新闻研究会副会长、延边州记者协会副主 席、吉林省新闻系列高级职称评委、延边大学朝文系新闻专业兼职教授、韩国全国汉字教育促进总联合会指导委员。   主要著作:《新闻学教程》(合)、《延边日报50周年记者作品选》(主编)、《延边日报50周年通讯员作品选》(主编)、《简化字与繁体字对照诠释》(韩国出版)、《世界最初简化字千字文》(韩国出版)、《韩国人必学简化字500》(韩国出版)、《跨世纪的》(延边大学出版社)。另有1000余篇多种体裁新闻作品,其中20多篇被评为国家、省、州级优秀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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