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이 남기는 그라프
-쉼없는 언론인 림장춘선생의 거침없는 질주
안려홍
림장춘선생을 다루는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앞서 텔레비죤에서 자주 나오는 〈무한도전(无限挑战)〉이라는 프로그람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림장춘선생의 언론인생애가 이 명사와 신통히도 맞물린다는 판단에서였다. 견물생심이라 할가, 이 참에 흔히 쓰는 이 어휘의 뜻을 보다 정확히 알고 싶어 사전을 뒤적여보았다.
무한—한이 없음.
도전—비유적으로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갱신에 맞섬.
이번에는 ‘한’을 따로 찾아보았다.
한—넘지 못하게 정하거나 이미 정해진 정도의 범위.
이 해석들을 퍼즐같이 맞춰보면 ‘무한도전’의 뜻을 대체적으로 추려낼 수 있다.
주인공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가 걸어온 생애와 이루어놓은 무훈담을 보고 우리 스스로 지어낸 이름의 ‘쉼없는 언론인’은 일찍 연변일보사 부사장, 부총편집을 맡고 조선문판을 주관해온 림장춘선생이다.
림장춘선생이 불꽃 튀는 언론현장을 떠난 지도 어느덧 20년이 다가온다. 1942년생이니 어언 팔순을 지척에 두고 있다. 다만 팔순을 지척에 둔 로인답지 않게 젊음이 넘쳐흐른다. 첫만남이라면 누구도 그를 팔순 로인으로 짚기 힘들다. 그만큼 ‘쉼없는 언론인’, ‘청년 림장춘 총편집’이라고 부르는 게 가슴에 편안하게 와닿는다. 사실상 그는 오늘도 현역에 짝질세라 신문 관련건으로 분주히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다. 퇴직후 2013년부터 《연변일보》 조문판편집부의 고문을 맡고 기자들의 신문기사 원고평의를 맡아함과 동시에 2014년부터는 연변일보사의 리퇴직부서(190명) 당지부서기직까지 맡고 있다.
림장춘선생은 1942년 4월 29일, 훈춘현 마적달향(지금은 하다문향) 탑자구촌에서 태여났다. 1958년 9월부터 1959년 8월까지 훈춘현 춘화중학을 다니였다. 춘화라면 훈춘에서도 치벽진 변경향이고 오지인 연변에서도 또 오지에 속한다. 교통이 숨막히던 그 시절, 연길에서 도문, 훈춘을 거쳐 춘화에 이르자면 뻐스를 타도 세시간 반이나 걸린다. 이 깊숙한 산골중학교에서 당시 16세 나이에 글쓰기를 무등 즐겼던 소년 림장춘은 《춘화중학보》의 집행부주필을 맡게 된다. 하긴 지금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등사신문이였음에도 그의 글쓰기 싹수가 인정받았다는 대목이다.
1964년부터 1967년 8월, 중앙민족학원(지금의 중앙민족대학) 한어문 문학학부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그 과정에도 림장춘선생은 학교 벽신문—《단결보》의 편집을 맡고 글쓰기 기량을 꾸준히 닦았다. 아무튼 오지 시골에서 수도 북경에 와서 거친 대학공부는 림장춘선생의 시야를 틔워주었고 넓은 세상으로 진출해야만 오지의 미래도 밝다는 상상을 키워주었음에 분명하다. 북경에서의 대학공부에서 그는 향후 사회에 진출하여 맞게 될 무수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을 의욕을 다지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2월부터 훈춘현 외사판공실에 배치되여 신나게 일하던 와중 억울하게도 대학시절 문화대혁명시기의 ‘전과’라는 얼토당토 않는 ‘로동개조’를 감내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듯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글쓰기라는 초심만은 잊지 않았다. 1975년에 ‘무죄’로 시인되여 훈춘현 선전부에 전근되여 보도과장을 맡게 되면서 언론과 보다 가깝게 다가가게 되였다. 1980년에 《연변일보》의 훈춘주재기자로 있으면서 림장춘선생은 조선문판, 한문판에 보다 전방위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개방을 서두르고 있는 동북아의 삼각주—훈춘과 관련된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지금도 당년의 《연변일보》를 펼쳐보면 림장춘선생이 부지런히 뛰여다니며 써낸 기사를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림장춘선생은 당시 연변주위의 후비 간부임명에서 내놓은 혁명화, 전문화, 년소화 등 기준을 딛고 연변일보사의 일반 편집기자로부터 부총편집, 부사장으로 전격 임명되였다. 훈춘 오지로부터 연길로의 진출로 그는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 정거장에 이르게 되였다. 아니, 첫 단추를 끼웠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종착지는 아니였다. 이 때로부터 2002년에 퇴직할 때까지 림장춘선생은 일개 지구급 소수민족 당기관지인 《연변일보》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연변일보》를 무게 있고 독자들이 반기는 신문으로 꾸릴 의욕으로 정열을 불태워왔다. 언론인 생애에서 이룩한 성취를 인정 받아 1994년에 고급편집 직함을 받고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제4기 중국기자협회 리사로 당선되는 영예도 누렸다. 또 중국소수민족신문연구회 부회장, 길림성신문계렬고급직함심사위원 등 묵직한 사회직무를 력임해왔다.
언론인생애에서 림장춘선생이 이룩한 성취들은 하도 많기에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여기에서는 다만 동료들과 손 잡고 《연변일보》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연변일보》가 국내, 국외로 진출하는 처녀지를 열어가면서 힘든 가시밭길을 헤쳐온 몇몇 이야기에만 펜을 대볼가 한다. 그 과정은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같이 짜릿하면서도 흥미롭다.
당시 《연변일보》는 관련 규정에 따라 연변을 벗어난 타지역의 뉴스를 보도할 수 없는 국한성을 갖고 있었다. 지역에만 한정되다 보니 독자들을 확 끄당길 만한 뉴스거리가 적었고 꽤 단조로웠다.
마침 1991년, 북경아시안게임이 열리게 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역신문이 국제적인 행사를 현장에서 취재하여 기사화한 사례는 없었다. 일찍 4년전인 1988년 상반년, 상해 복단대학 신문학부에서 개최한 전국 언론사 총편집연수에 참가해 계통적으로 신문리론 지식을 터득한 림장춘선생은 북경아시안게임이야말로 천재일우의 돌파구라고 판단하게 되였다. 판단은 판단이고 그 가능성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게 안개속에 가리워져있었다. 우선 그는 친분이 있는 신화통신사 장국량(张国良) 비서장한테 련락하여 취재권을 따줄 것을 간곡히 청구했다. 림장춘선생의 간청에 감화된 장비서장이 직접 전국체육총회에 제기하는 한편 해당 일군을 파견하여 교섭하여 드디여 북경아시안게임 취재권을 거머쥐게 되였다. 이어 《연변일보》는 장정일 부총편집이 단장을 맡은 5명의 취재팀을 북경에 급파했다. 모든 부서가 아시안게임보도를 주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북경 쪽에서 취재팀이 팩스로 원고를 전송해오면 신문사에서는 이튿날 바로 신문을 찍어서 렬차로 북경에 보내 아시안게임촌에 송달하는 수순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북경아시안게임촌에 배송된 조선문신문으로는 《연변일보》 하나뿐이였다. 물론 어벌 크게도 지역신문으로도 유일하였다. 북경아시안게임 기간에 《연변일보》가 매일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서 수많은 한국언론사 기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연변일보》의 위상을 현지에서 일별하게 되였다. 이 역시 그 뒤 《연변일보》의 해외진출에 멍석을 깔아둔 셈으로 되였다.
독자군이 제한되여있고 정보원천이 적은 등 소수민족신문으로서의 아쉬움을 장점으로, 우세로 활용할 수 있는 지름길이 없을가 하고 림장춘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타지역에 기자소를 세우자는 발상도 이 고민 속에서 나오게 되였다. 여기에서 뚫어야 할 첫 관문은 당연히 수도 북경이였다. 당시만 해도 북경에 기자소를 세운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능성이 전무하다 할 아츠란 벽이였다. 심의가 하도 까다로워 상해, 천진 등 일부 대도시외 기타 지역은 일률로 비준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있었다. 길림성에서도 그 때까지 북경에 기자소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림장춘선생은 소수민족신문이라는 어딘가 불리한 조건을 리로운 조건으로 내세우는 역사유로 부딪쳐보았다. 그는 선후로 중공중앙선전부, 신화통신사, 북경시당위를 일일이 찾았다. 중공중앙선전부의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찾아 반복적으로 설득하고 간곡히 부탁하여 그나마 통과하고 보고문을 작성하여 북경시당위를 찾아갔을 때는 문턱에 걸렸다. 북경시당위 선전부 책임자들은 연변의 지리적 위치도 모르거니와 《연변일보》를 섬서성의 《연안일보》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연변일보》라는 작은 지역 신문인 걸 알고 나서 소수민족신문이 무슨 기자소냐고 어림도 없다는 태도로 나왔다. 그러자 림장춘선생은 소수민족일수록 더 배려해줘야 되지 않느냐, 왜 차별대우를 하느냐 하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북경시당위에서는 《연변일보》가 북경에 기자소를 세우도록 특별비준하였다. 1993년, 북경에 기자소를 세운 데 이어 1~2년 사이에 천진, 청도, 심양, 영구, 목단강 등 기타 지역에도 기자소가 일사천리로 세워지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서울의 정치중심이라 일컫는 종로구에 《연변일보》 서울지사라는 큼직한 간판까지 버젓이 내걸었다. 이로 《연변일보》는 새로운 정보원천을 개척하고 대외련락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대외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였다.
1992년, 림장춘선생은 몸소 북경에 진출하여 미국적 한국인 박영 회장과 손 잡고 《일요경제》라는 《연변일보》 해외판을 꾸리게 되였다. 〈외국인 투자, 신문사 편집출판, 광고 공동경영〉이라는 구도로 판을 짜고 발행대상은 북경, 천진 및 연해 개방도시 3자기업(중국내의 외국독자기업, 중외합자기업, 중외합작기업의 통창)으로 잡았다.
외국인과 손 잡고 신문을 꾸리는 극히 민감한 문제에서, 심수나 광주 등 남방에서는 가능한데 왜 북방은 안되며 한족은 가능한데 왜 우리 조선족은 안되는가 라는 것이 림장춘선생이 당시 이 아이디어를 면밀하게 타진하며 과감히 추진하게 된 결정적 근거였다. 이 결정은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선전부 책임자와 새로 부임된 연변일보사 강룡운 사장의 지지를 받았다. 《일요경제》는 당시 시대의 흐름에 알맞게 대외경제와 외상 관련 보도를 위주로 다루었는데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리현덕 서기의 지지를 받았고 국내외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였다. 《일요경제》는 그 때 흔치 않게 북경에 김천 편집부 주임(현임《연변일보》 부사장, 부총편집)이 이끄는 편집기자팀을 두고 현지에서 취재, 편집하여 연길본사에 보내여 출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였다. 그만큼 정보량이 많고 신선하고 내용이 광의적이였기에 독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 시대 독자들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주는 특간이였다. 특간이라는 개념도 그 무렵에 정착되였다고 추정하게 되는 대목이다.
림장춘선생의 머리에서는 언제나 ‘파격’이라는 두 글자가 떠난 적 없었다. 개혁개방이 파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그 앞에서 리드해나가야 할 언론이 뒤꽁무니를 따른다면 시대에 부끄럽다는 맥락에서 홀제 ‘만리기행’을 머리에 그려보게 되였다. 그 때 주관적, 객관적 원인으로 우리 나라 동남부연해지대와 서북부발전은 불균형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매체로 말하면 이 테마는 그 때까지 사각지대나 다름없었다. 개혁개방의 열기로 끓어오르는 대표적 연해지역과 중점도시들을 답사하여 기사화하면 연변의 경제발전에도 소중한 ‘경서’를 제공할 수 있고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뉴스거리를 선물할 수 있다는 장미빛 청사진 앞에서 림장춘선생은 편안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취재팀을 묶은 시리즈보도가 필수적인 만큼 만만치 않은 인력, 물력, 재력이 따라가야 하는, 《연변일보》 력사에서도 전례 없는 대역사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자금이 발을 묶었다. 지방재정에 기댈 수 없는 상황이기에 스스로 자금을 해결해야만 기획을 차질없이 추진해나갈 수 있었다. 당시 일찍 개방한 《심수특별구보》 등 신문매체에서 이미 외국자본을 리용한 선례는 림장춘선생에게 황금 같은 정보였다.
마침 1995년 여름에 림장춘선생은 중국—로씨야 량국동포언론인방문단 단장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그 기회에 지인인 《중앙일보》 경제부 박병석 부장(현임 한국 국회의장)을 찾아갔고 그 인맥으로 삼성그룹과 련락이 닿아 취재차 한대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삼성그룹에서는 흔쾌히 답복하면서 취재차에 ‘삼성그룹 협찬’이라는 광고를 걸어달라는 협찬조건을 내놓았다. 방문기간에 계약을 맺고 속이 든든하여 귀국했지만 정작 외자도입과정은 말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다국적기업인 삼성그룹을 놓고 말할 때 인민페 20만원 정도는 거뜬히 내놓을 수 있었음에도 꼬박 1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받을 수 있었다. 자금이 해결되자 취재차 한대를 구매하고 정경락 부총편집을 선두로 4명의 기자를 취재팀으로 묶어 미리 짜놓은 취재코스 대로 ‘만리기행’의 시작을 알렸다. 뒤미처 이를 알게 된 당시 연변TV방송국 채영춘 국장도 기자를 급파하여 ‘만리기행’ 취재팀에 합류하면서 문자, 사진, 영상을 포괄적으로 갖춘 종합실력을 갖추게 되였다.
안해와 더불어 출간의 희열을
1996년 9월부터 1997년 1월까지 5개월 동안 취재팀은 우리 나라 최동단 훈춘 방천에서 출발하여 최남단 삼아에 이르기까지 8만리를 달리면서 취재해 근 40개 특집면을 줄줄이 내놓았다. 가는 곳마다에서 취재도 하고 연변을 홍보하면서 《연변일보》의 대외영향력을 크게 넓혔다.
취재차가 북경에 들어설 무렵 림장춘선생도 북경에 이르렀다. 그는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기자협회 리사였기에 발언권을 가지고 있은 만큼 중국기자협회와 교섭하여 중국기자협회의 명의로 소식공개회를 가졌다.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수도 12개 주요언론매체 기자들이 참석한 기자회견장에서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소동승(肖东升) 서기는 “연변일보사와 연변TV가 조직한 ‘만리기행’ 보도는 우리 나라 신문분야에 하나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중공중앙선전부 신문국의 책임자는 “‘만리기행’이야말로 일대 장거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만리기행’취재활동은 전국에 쫙 알려지게 되였다. 당시 조남기 상장(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리영태 중장(공군 부사령원) 등 지도자들도 취재팀을 접견하고 따뜻이 격려해주었다.
전통관념, 관행 대로라면 지역 신문사이자 소수민족신문사인 《연변일보》가 국외에 진출하여 신문을 꾸린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였다. 림장춘선생은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인민일보》나 《남방일보》 등 언론매체들도 미국에 진출해 해외판을 꾸린 사례가 있는데 《연변일보》가 안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또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1998년 하반년부터 사전준비작업에 들어가 이듬해초 편집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드디여 한국에 진출해 《연변일보》 한국판을 꾸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해당 준비사업을 마친 후 림장춘선생은 직접 서울에 나가 지사장을 맡은 김영옥기자와 함께 《연변일보》 한국판 출간을 서둘렀다. 떠나기 앞서 림장춘선생은 중층급 이상 간부들을 소집해놓고 “이번 길의 성공 여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모든 책임은 나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것을 오늘 약속한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신문개혁의 희생양으로 되겠다.”라고 비장하게 각오를 밝혔다. 《중앙일보》의 협조와 한국기업들의 후원을 딛고 1999년 5월 31일, 드디여 20개 컬러면으로 된 《연변일보》 한국판 시험호를 내놓았다. 이는 우리 나라로서는 최초로 한국문화관광부에 등록하고 한국에서 출판, 발행된 첫 중국 조선문신문이였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주관 책임자는 해외판의 출간을 격려, 긍정하였고 남상복 주장, 전평선 부주장 등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책임자들도 선후하여 《연변일보》 서울지사 간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 고무해주었다. 《중앙일보》, 《동아일보》등 한국의 메이저매체들도 《연변일보》한국판의 출간을 대거 보도하였다.
아시안게임 보도, 북경기자소 설립, ‘만리기행’취재, 《일요경제》, 《연변일보》 한국판 창간 등 굵직굵직한 행사들은 림장춘선생이 무에서 유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은 획기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들이다. 이처럼 림장춘선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흔들림없는 집념과 파격적인 도전으로 하나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루어놓았다.
퇴직한 후에도 림장춘선생의 하루하루는 분주하다. ‘쉼없는 기자정신’을 끈끈히 이어오고 있다. 일찍 재직시절에 펼쳐낸 신문학 저서 《신문학강좌》(1985년, 공저)를 비롯한 《연변일보 50주년기자작품선》(1998년, 주필), 《연변일보 50주년 통신원작품집》(1998년, 주필)에 이어 정년퇴직후에도 부지런히 붓을 놀려 《중국어간체자 쉽게 배우기》(2001년, 서울 출판), 《간체자 천자문》(2004년, 서울 출판), 《간체자와 번체자 대조해석》(2004년, 서울 출판), 《세기를 주름 잡는 〈연변일보〉》(2015년) 등 도서들을 펴내였다. 그중 한국 체류기간 성공회대학의 첫 외국인교수로 초빙되여 교수를 하는 동안 내놓은 《중국어간체자 쉽게 배우기》(430페지)는 여덟번 재판될 만큼 베스트셀러로 떠올라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이젠 퇴직후여서 집에도 사랑을 쏟을 여유가 있게 되였다. 그 하나가 손녀의 일기쓰기지도이다. 현재 중학교 3학년생인 손녀는 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현재까지(12월 20일) 무려 2,970편의 일기(80여만자)를 써왔다. 지난 2018년에는 소학교졸업기념으로 일기작품집 《중국꿈, 나의 꿈》까지 묶어내게 되였다.
지금 림장춘선생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병마를 이겨내면서 한뉘 신문이라는 한 우물만 파온 일생을 정리한 신문작품집과 자서전 출판 준비를 다그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안해 김정희(76세)씨가 이미 35만여자에 달하는 원고 타자를 마무리한 상황, 래년 출판을 앞둔 막바지 작업으로 꽤나 드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편 그는 태여난 마적달 탑자구촌 촌사 편찬을 인생의 마지막 도전, 마지막 작업으로 밀고나가고 있다. 누가 쓰라고 해서가 아니라 촌 력사의 진실을 기록해서 후세에 넘겨주려는 사명감에서이다. 자료수집, 정리도 태반이 된 상황이다. ‘쉼없는 언론인’ 림장춘선생은 촌사쓰기로 기자리레를 멋지게 이어가고 있다. 무한도전의 종착지가 과연 어디까지일지 심히 기대된다.
2021년 제1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