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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컵] 가난에 삐걱이던 우리 집 밀차바퀴
2020년 11월 06일 10시 08분  조회:531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가난에 삐걱이던 우리 집 밀차바퀴

김동진


가난을 패물처럼 허리에 차고 아글타글 살아본 사람에게는 가난에 찌든 추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빈곤은 죄가 아니다”라고 한 G.허버트의 말로 자신의 가난을 위안하면서 가난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온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서글픈 에피소드이다.

나의 생활환경에 변화가 생긴 건 1980년대 무렵이였다. 성동이라는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내가 녕안현조선족문화관의 책임자로 임명이 되여 현성에 가서 살게 된 것이였다. 마을에서는 나에게 출세 길이 열렸다고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나 또한 현성에 가면 여러모로 편하리라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있었다.

돌이켜보아도 객관현실과 주관욕망은 조화가 되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모순덩어리였다. 시골사람이 기회를 잡아 시내로 갔다고 살림이 하루아침에 확 펴리라는 건 사치였다. 오히려 시골에서 살 때보다 경제적으로 더구나 쪼들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색이 세대주라고 한해가 지나 시골에 두고 온 식솔들을 데려다 시내살림을 차렸는데 식구가 자그만치 여섯명이나 되였으니 말이다. 100원에 꼬리가 조금 붙는 나의 로임을 가지고 골증식으로 허리마저 펴지 못하는 엄마와 직업이 없는 안해 그리고 중학교와 소학교를 다니는 세 아이가 살아가야 했으니 우리 집은 어쩔 수 없이 빈궁의 모자를 쓴 도시빈민의 대렬 속에 끼우고 말았다.

그래도 고마운 사람은 안해였다. 푼돈도 쪼개 써야 하는 궁핍한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언제 한번 짜증을 내거나 눈물을 짜거나 바가지를 긁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빈궁으로 하여 겪어야 하는 가정주부의 모든 괴로움과 서러움을 자강과 자존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모지름 쓰는 외유내강의 녀인이였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상황이 그렇다보니 궂은일, 마른일을 가려 할 처지가 못되였다. 안해는 마늘을 뽑는 채소대의 계절공으로 일했는가 하면 2백여리 상거한 얼짠(尔站)의 산발을 타고 산나물 부업도 해보았으며 개체호 식당의 복무원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길을 박은 게 짠지장사였다. 하긴 먼저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 한물이 지나갔다만 장사에 미립이 튼 역빠른 장사군들이 바야흐로 남방의 연해도시로 진출하여 새로운 짠지시장을 개척하면서 비여있는 그 자리가 안해한테는 기회가 되였던 것이다.

마음을 다졌으니 곧바로 실천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안해는 우선 호주머니를 털어 밑반찬감을 사오고 밀차도 한대 마련하였다. 무거운 반찬그릇을 보자기로 싸가지고 장마당까지 날라가려면 무엇보다 운반도구가 필수적이였다.

“큰마음 먹고 30원을 주고 하나 샀어요.”

밀차를 사온 날, 안해가 나를 들으라고 한 말이다.

알고보니 그 30원짜리 밀차는 보기에 허술해도 ‘수입제’였다. 강 건너 나라에 친척방문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파는 걸 안해가 사왔던 것이다. 쌀 한주머니 정도의 짐을 싣고 다니도록 각철로 무어 만든, 폭이 좁은 밀차였는데 바퀴는 직경이 한자 가량 되는 통고무로 되여있었다. 바람을 넣을 일이 없으니 섬약한 그녀의 체질로 다루기에는 안성맞춤한 간이밀차였다.

안해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공치는 날이 없이 그 밀차를 밀고 부지런히 거리로 나갔다. 남들이 먼저 우려먹은 자리에서 뒤늦게 시작한 장사인지라 하루 수입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을 찾지 못해 집에 앉아있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번 푼돈으로 세 아이의 공부 뒤바라지에 보탤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가고 두달이 지나가고 한해가 지나갔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날마다 꼭두새벽에 밥을 지어놓고 나서 짠지보따리를 싣고 나갔다가 가로등이 길을 환히 비추는 늦은 저녁에야 돌아오는 그녀의 행색은 한마디로 ‘초라함’ 그 자체였다.

여름날 해볕에 그을려 까맣게 탄 얼굴, 바람과 소금물에 갈라터진 손등도 궁상인데 겨울이면 낡은 솜저고리에 아들애가 입다가 내놓은 낡은 골덴옷을 껴입고 얼음 깔린 아스팔트길에서 한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빨갛게 언 두 손을 입김으로 녹이다가 돌아오는 안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신의 무능함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언제 한번 팔을 걷고 나서서 도와주지 못한 나도 참으로 답답하고 꽉 막힌 남편이였다. 출근을 해야 하고 회의를 가야 하고 하향을 해야 하고 집에 있는 날이면 습작을 해야 하는 남편인지라 안해도 웬만해서는 나의 손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밀차바퀴를 도적 맞히는 일이 벌어졌다.

그 날, 헛간 곁에 밀차를 세워놓고 집에 들어와 점심을 먹고 난 안해가 다시 나가 보았더니 밀차바퀴 하나가 없어졌다. 손이 거친 어느 량반이 진작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기회를 엿보아 손을 쓴 게 분명했는데 인기척에 놀라 한쪽 바퀴만 뽑아가지고 달아났던 모양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였다. “약한 다리에 침질”이라더니 하필이면 가난한 집의 소중한 물건을 훔쳐가다니… 문제는 ‘수입산’이라 그런 바퀴는 상점에도 파는 것이 없었다.

밀차가 굴러가지 못하는데 짠지장사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목 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급해난 안해가 며칠 뒤 방법을 찾아냈다. 풋면목을 익힌 용접공을 찾아가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서 크기가 비슷한 쇠바퀴를 하나 만들었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우리 집 밀차는 한쪽은 고무바퀴, 다른 한쪽은 무쇠바퀴로 된, 세상에 둘도 없는 특이한 밀차로 변신했다. 고무바퀴는 소리없이 굴러갔는데 무쇠바퀴는 아무리 윤활유를 발라도 “삐익, 삐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저 바퀴소리가 창피해서 못해먹겠어요.”

안해의 푸념을 들으면서 나는 하도 부끄러워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안해한테 변변한 밀차 하나 갖춰주지 못하면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안해의 곁을 지켜준단 말인가? 하긴 내 마음이라고 가벼운 것은 아니였다.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겁다”고 한 B.프랭클린의 말을 제대로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말로는 창피하다고 하면서도 안해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밀차를 그대로 밀고 다니면서 짠지장사를 이어갔다. 밀차바퀴 소리야 하늘을 찌르든 말든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고 공부도 척척 잘해서 아마도 그게 창피스러움을 이겨내는 정신적인 힘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녕안진의 남쪽 켠, 동서로 넓게 트인 포장도로 우에서 날마다 이른새벽과 늦은 저녁이면 시간을 어길세라 삐익 하며 울어대던 우리 집 밀차바퀴 소리!

그것은 안해의 고달픈 가슴을 허비는 소리였고 무능한 나를 꼬집는 소리였다. 좀 다르게 표현한다면 축을 갉아먹는 무쇠바퀴의 ‘삐익’ 소리, 그것은 우리 집의 가난을 서러워하는 절규였다.

어쩌면 안해는 그 소리마저 숙명으로 받아들인듯 용하게 참아내고 있었다. 아무튼 그녀는 가난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가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았으며 왜소한 몸으로 가난을 딛고 일어설 줄 아는 전통적인 외유내강의 조선족녀인이였다.

우리 집의 보잘것없는 재산목록에 등록되여 “삐익삐익—” 아츠러운 소리를 만들어내던 30원짜리 밀차는 번화거리에 소음을 보탠 잘못은 있다 해도 돈잎을 만져보겠다고 밤잠을 설치는 안해의 일손을 도와 옹근 다섯해를 굴러다녔으니 공로까진 몰라도 고생을 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런 밀차와 ‘빠이빠이’한 것은 1992년, 내가 신형의 변경 개방도시―훈춘을 내 삶의 새로운 요람으로 선택하고 사업전근을 하면서였다. 트럭이 와서 이사짐을 싣는데 보기에도 궁상맞은 짝짝이바퀴 밀차를 차마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없어 망설이는데 마침 달라는 사람이 있어 그대로 줘버렸던 것이다. 우리 집은 이렇게 쇠를 갉아먹는 소리로 가난에 삐걱이던 밀차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사 초기에 우리는 낯선 고장에서 집이 없는 고생도 해보았고 고용일군 노릇도 해보았다. 안해는 한동안 산간의 림장마을에 가서 바닥재와 목편을 생산하는 사영기업의 검측원 겸 출납으로 일하였고 또 단기비자로 한국 로무도 다녀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가정과 자식을 위한 그녀의 애면글면은 헛되지 않았는바 후날 아들딸 셋이 모두 대학공부를 마치고 직장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게 되였다. 아이들이 자립하면서 우리 집도 점차 의식주에 근심걱정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였다. 좋은 세월에 좋은 시책을 만난 덕분으로 고진감래의 길에 오른 것이다.

나와 안해는 식탁에 마주앉을 때마다 이따금 가난에 삐걱이던 우리 집 그 밀차바퀴를 외우면서 오늘의 이 여유로운 생활의 소중함을 다시금 다듬질해보군 한다.


《로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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