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삼촌
한경애
밤하늘의 뭇별마냥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 속에서도 가장 고맙고 행복했던 추억을 꼽는다면 당연히 안흥룡삼촌과의 추억을 짚고 싶다.
수십년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삼촌의 모습이 우렷이 떠오른다. 보통키에 뚱뚱한 몸집, 배는 항상 남산처럼 불러있었고 짙은 쌍겹눈과 유별나게 두툼하고 넙적한 귀방울은 마치 부처님의 귀를 방불케 했는데 거무스름하고 둥글넙적한 얼굴은 그렇게 인자할 수 없었다.
삼촌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 가족은 지금도 모여앉으면 어김없이 삼촌과의 이왕지사를 떠올리며 행복한 추억려행을 떠나군 한다.
안흥룡삼촌은 아버지와 피를 나눈 친형제는 아니더라도 우리 사이에는 피보다 진한 두터운 정으로 맺어진 인연이 있었다. 삼촌은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이자 우리 집을 지켜준 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촌과 아버지의 끈끈한 우정은 동란의 세월 속에서 그 진가를 더욱 유감없이 드러냈다.
아버지와 삼촌의 첫 인연은 50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해림현 시하진 동풍촌이라는 180여호가 살고 있는 작은 조선족마을에도 광란의 거센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 때 당시 아버지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매일 모진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타박상을 입고 숨이 간들간들해진 아버지는 이대로 있다간 생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예감에 기회를 봐서 밤도와 8리 떨어진 신안진의 삼촌네 집으로 피해버렸다.
하도 혼란한 시국인지라 아버지를 숨긴 사실이 들통나는 날엔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삼촌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를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삼촌은 의사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채에 숨겨둔 채 석달 동안 매일같이 중약을 달여 대접하고 고약을 붙여주면서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마음씨 착한 삼촌댁은 삼시 알뜰하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석달 내내 그렇게 살얼음판 우를 걷는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신경을 조이며 지냈겠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그러니 우리 가족에서 평생 동안 기억하고 고마워해야 할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삼촌 내외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온 세상이 나를 등지고 떠날 때 나를 품어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다.”라는 말처럼 아버지에게 삼촌은 둘도 없는 소중한 은인이였다.
내가 태여나던 해, 삼촌이 우리 마을에 와서 의사로 일하게 되면서 우리와 삼촌네는 서로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가깝게 지내게 되였다. 내가 다섯살 되던 해, 삼촌은 다시 신안진으로 옮겨갔는데 부모님 산소가 우리 마을에 있었던지라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성묘차로 왔다가 꼭꼭 우리 집에 들리군 했다. 째지게 가난했던 우리 사정을 누구보다 환히 꿰뚫고 있었던 삼촌은 올 때면 늘 돼지고기며 내가 좋아하는 ‘개눈깔사탕’이며 과자를 량손 가득 들고 왔다. 손도 어찌나 컸던지 돼지고기는 항상 다섯근이 푼히 넘게 사오군 했는데 돼지고기 먹는 날이 명절날이나 다름없던 그 시절, 나는 삼촌이 오는 날을 늘 손꼽아 기다리군 했다.
삼촌이 돼지고기를 사오면 엄마는 처마 밑에 달아두었던 시라지를 넣고 돼지고기시라지장국을 끓였다. 삼촌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시라지쌈이였다. 한소끔 푹 끓여서 삶아낸 시라지는 쌈으로, 돼지고기는 두툼하게 썰어서 수육으로 상에 올렸다. 그렇게 삼촌이 사온 돼지고기로 상이 차려지면 그 날은 실로 설을 쇠는 듯한 분위기였다. 푹 삶은 돼지고기를 양념 간장에 찍어먹으면 입안에서 고기가 살살 녹으면서 고소한 향이 입안가득 퍼져나갔다. 가난했던 우리는 그렇게 삼촌이 사온 돼지고기로 쌓였던 썰썰함을 달래군 하였다. 삼촌은 넙적한 시라지잎을 한장 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 우에 이밥과 찐 된장을 한술 얹어 큼직하게 쌈을 싸서 볼이 미여지게 드셨다. 복스럽게 쌈을 싸서 잡수는 삼촌을 옆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삼촌을 따라 시라지를 손바닥에 척 얹는다. 유난히 땀을 잘 흘렸던 삼촌은 목에 흰 수건을 두른 채 땀을 연신 훔치면서 시라지쌈을 부지런히 잡수셨다. 그러더니 “숱한 장을 먹어봐도 우리 아즈마이 만든 된장이 최고요! 돼지고기는 된장국에 삶아야 제맛이구. 돼지고기와 된장이야말로 천상배필이지. 형님, 안 그렇소?”라고 칭찬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아버지도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허허—” 하며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가 “생원, 시라지쌈만 들지 말구 고기도 좀 잡수오.”라며 고기가 담긴 접시를 삼촌 앞으로 밀어놓으면 삼촌은 “아즈마이, 난 고혈압에 심장도 안 좋아서 고기는 적게 먹어야 하오. 아즈마이 많이 잡수오.”라며 고기접시를 엄마 앞으로 도로 밀어놓고는 “오늘 시라지쌈 덕에 생일을 쇴소. 허허—” 하며 넉살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삼촌이 사온 돼지고기로 밥상에 오구작작 모여앉아 행복의 꽃을 피우던 일이 어제일인듯 기억에 생생하다.
삼촌은 내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이였다. 내가 결혼할 때 삼촌은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손수 나에게 편지를 써주었다. 편지에는 시부모님을 잘 공대하며 남편과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삼촌의 진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나중에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종종 삼촌의 편지를 꺼내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고 힘을 내군 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짐승도 은혜를 입으면 갚는데 사람은 더욱 그래야 한다. 은혜도 모르는 건 사람된 도리가 아니다. 삼촌의 고마움을 잊지 말고 꼭 갚아야 한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늘 째지게 가난했던 우리는 항상 받기만 했을 뿐 삼촌에게 제대로 된 보은을 하지 못하였다. 삼촌은 59세 되던 해 심장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뭐가 그리 급했던지 삼촌은 우리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아버지는 삼촌을 잃은 충격으로 매일 밤잠을 설쳤고 나도 긴 시간 동안 삼촌을 잃은 실의감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삼촌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전하지 못한 아쉬움은 오랜 세월을 거듭하면서 앙금으로 굳어 나의 가슴을 후비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늘 가난했어도 삼촌이란 친구를 둔 덕에 누구보다 풍요로운 마음의 부자로 살았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쯤 두분은 하늘나라에서 재회해 힘들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정답게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월은 류수처럼 흘러 모든 것이 다 변하더라도 내 추억 속의 삼촌만은 항상 변함없이 내 마음속 한구석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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