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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늦바람
2020년 12월 29일 09시 21분  조회:783  추천:1  작성자: 로년세계
어머님의 늦바람


박은자

“며느리는 얼마나 좋겠소? 나가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글도 쓰고… 너무 부럽소!” 그러는 어머님께 당신도 잘살아오셨다고 하면 한뉘 가마목 운전수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어머님은 나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인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에 왕청현 송림동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딸로 태여났다. 한창 꿈을 키울 사춘기에 접어들어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형편상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이 되는 게 시어머님의 꿈이였다. 어린시절, 성적이 우수하여 ‘꼬마선생님’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다녔는데도 가난 때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접어야만 하는 숙명과 부딪쳤다. 담임선생이 하도 아쉬워서 집까지 찾아오셔서 청을 들었지만 남자아이라면 어떡하나 방법을 대보겠는데 녀자는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된다면서 선생님을 다시 돌려보냈다. 흑룡강에 가면 이밥과 고기를 매일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변에서 흑룡강으로 이사 간 지 얼마 안되던 무렵이였고 학비가 고작 1원 50전이였는데도 그것마저 대줄 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님은 열여섯살 때부터 어른들과 함께 생산대 일에 땀 뿌렸으나 나이가 어려서 일을 아무리 악착같이 해도 어른들과 같은 공수를 받기 힘들었다. 19살 나는 해, 어머님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훈춘으로 이사 가게 되였다. 그 때가 바로 ‘3년 재해’로 온 국민이 겨떡으로 배를 채우는가 하면 희멀건 죽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고난의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시외할머니께서 임신을 하게 되였다.
하루는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님을 불러놓고 생산대 일을 며칠 못 나오더라도 벼이삭을 주어 쌀을 좀 준비하라고 시켰다. 산모가 출산을 하고 나서 필요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해놓으라는 당부였다.
그렇게 이튿날부터 날이 밝아오기 전 어두운 새벽이면 어머님은 남의 눈을 피해 이삭주이를 다니는 할머니들을 따라나섰다. 엄동설한에 솜옷도 없이 홑옷바람으로 20리 새벽길을 걸어갔다. 논밭에서 눈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온종일 벼이삭을 주었는데도 량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았다. 겨떡 하나로 점심을 에때우고 계속하여 벼를 주었는데 저녁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거의 녹초가 되여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멀건 죽물 한사발로 저녁을 때우고는 주어온 벼이삭을 손매돌로 갈아 벼껍데기를 벗겨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쌀을 다섯근이나 모으게 되였다.
시외할머니는 엄동설한 날씨의 새벽에 아이를 출산하였다. 석탄불을 피워 산모한테 대접한다고 밥을 지어놓고 숟가락을 얹어놓았는데 잠 자던 4살짜리 남동생이 어디선가 밥냄새가 난다며 벌떡 일어나니 모두가 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쌀밥이라고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그 세월, 얼마나 배고팠으면 밥냄새에 잠을 깨였을가 하며 어머님은 지금도 그 세월을 회억할 때면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군 한다.
21살에 소개로 아버님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시집도 역시나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는 형편이였다. 림장의 부기원인 아버님이 산으로 들어가있는 시간이 많았던지라 어머님은 치매로 앓고 계시는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혼자서 돌보아야 했다. 하도 외롭고 무서워서 주위가 고요한 밤이면 친정집이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가난해도 다섯 형제가 시끌벅적하던 친정이 그리워 남몰래 눈물을 흘린 밤이 기수부지였다.
2년 터울로 세 아이가 태여나면서 어깨에 놓인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 싶어 어머님은 농사일이 끝나면 아이들만 집에 남겨둔 채 부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된 육체로동으로 다리가 성할 날이 없었는데 추운 겨울이면 그 통증이 더 심해졌다. 아이들이 점차 자라고 생활이 펴이면서 숨을 돌릴 만하니 아버님이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렸다. 하지만 어머님은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였으며 아버님이 돌아가는 날까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에 욕창 하나 생길세라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18년전,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어머님은 한동안 남편과 사별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생의 동반자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오래도록 헤여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이모님께서 어머님을 로인대학으로 이끌었다.
로인대학의 시간표는 꽤나 알찼다. 노래교실, 건강교실, 하모니카교실… 어머님은 일주일에 세번씩 열심히 로인대학을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인가 반에서 반장으로 당선되였다. ‘모범학생’이라고 칭찬을 해줬더니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님한테도 귀여운 데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를 청하였더니 이모님이랑 두 손을 맞잡고 진지하게 나섰다. 은방울자매가 따로 없었다. 살짝 웃는 칠순 넘는 노인의 얼굴에서 나는 수줍고 약간 들떠있는 소녀의 감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음정에 맞춰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어머님을 보면서 꽃보다도 더 고왔을 청춘, 가족을 받드느라 끝없는 희생으로 취미도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을 과연 누가 미봉해줄가 하는 이쉬움이 들면서 눈시울이 촉촉해났다. 가사가 너무 좋다며 설명절에 만나면 며느리인 나에게도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한뉘 고생만 했으니 아버님을 보내고 나서 그 힘든 병수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셨다 했는데 어머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였다. 두분이서 함께 했던 지난 시절이 그리도 그립단다. 유족하지 못해도 다섯식구가 단란히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픈 몸이여도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얼마나 좋겠느냐며 애석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님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났다.
로년대학을 드나들며 자신만을 위한 여생을 디자인하며 삶을 꽃 피우던 어머님께서 결국에 자식을 위해 로년대학교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오시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서 직장생활을 하는 외손녀의 뒤바라지로 북경행을 결심하게 되였던 것이다. 시누이네 부부가 20년 동안 로씨야 장사를 하다보니 시조카는 돌이 지나서부터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님의 슬하에서 자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동네에 살게 되였다만 출근한다는 핑게로 자주 들여다보지 못하고 가끔씩 색다른 음식을 만들 때면 어머님과 조카를 부르군 했다.
연변에서 살다가 한족동네에 오신 어머님이 인차 적응을 할 수 있을는지 은근히 걱정부터 앞섰다. “성 쌓고 남은 돌”이라며 혹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세라 어머님은 매일 운동하느라 움직였고 조카한테 부탁하여 한어공부 책까지 주문하였다. 가족들이 함께 외식을 할 때마다 어머님은 식당간판에서 아는 한자를 찾아내 손녀들 앞에서 글자를 맞추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자기관리를 잘하시고 긍정적으로 로후를 보내니 자식으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였다.
어머님께 북경에 있는 로인회관을 추천했더니 고향처럼 지척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차들이 많아서 자신이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셨다. 조카가 출근하면 빈집에 혼자 계실 게 뻔했는데 우리도 평시에는 출근을 하다보니 주말에나 가끔씩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만나기만 하면 지나간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님의 며느리로 20여년을 살면서 어떤 이야기는 열번도 더 들어 달달 외울 지경이다. 문득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학공부를 함께 하자고 청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어머님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나의 제안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책장에서 뽑아준 수필집을 가지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 어머님께서 육필로 열페지나 되는 원고를 써가지고 오신 게 아니겠는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내려간 글을 보면서 하마트면 인재를 놓칠 번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정말 글로 낼 수 있느냐며 재차 확인을 하셨다. 스토리는 좋으나 문맥을 잘 다듬어야 한다고 수정의견을 드렸다. 여러번의 퇴고에도 끄덕없이 다섯번의 수정을 거쳐 어머님의 처녀작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 일흔다섯〉이 《연변녀성》에 실렸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 큰 보물을 얻기라도 한듯 어머님은 잡지를 받아들고 감격해마지않았다. 허리에 힘이 들어간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 잡지를 머리맡에 소중히 두고 하루에도 몇번씩 펼치는지 모른다며 조카가 만날 때마다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들려주었다.
그 뒤로 어머님은 글쓰기에 아주 푹 빠져버렸다. 어떤 날은 맛 있는 반찬까지 해놓고 이 ‘선생님’을 청해서 수정을 부탁하는가 하면 독후감을 써서 공유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함께 문학교실로 가자고 팔을 끌었더니 무식쟁이 로친네가 그런 데를 어떻게 가느냐며 어머님은 한사코 도리질을 했다. “배움에 나이가 있나요?”라고 류행가요 가사까지 곁들여가며 유혹했더니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척을 했다. 조용히 청강하는 모습이 영낙없는 모범학생이였다. 세상 참 좋다며, 무식쟁이 할미도 교수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옆에 앉아서 사진 찍는 영광을 누렸다고 입이 함박 만해졌다.
가슴 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욕망 때문이였던지 어머님의 열정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내가 바쁘다는 핑게로 어머님이 써온 원고를 한켠에 놔두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조카가 결혼하면서 어머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고 슬쩍 물어봐서야 부랴부랴 원고를 찾아 훑군 하였다. 여러번 다시 돌려보내도 언제 한번 락심하거나 수정을 미루는 법이 없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했기에 타자는 내가 해서 투고를 하기로 하였다. 쓰는 원고마다 채용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수 있지 않겠느냐며 힘을 넣어주었다.
어머님이 고향에 돌아가신 후의 어느 날, 잠간 여유가 나져서 어머님이 썩전에 보냈다는 원고를 찾아보았는데 오간 데 없었다. 온 가족이 움직여 둘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아도 없었다.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같았다.
하필이면 그 때 어머님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몇마디 안부인사가 오가고 어머님은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바쁜 사람에게 괜히 늙은이가 주책이라며 도리여 미안해하는 어머님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났다. 다행히 수정전의 육필원고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여 안도의 숨이 나왔다. 어머님은 원고를 다시 수정하여 핸드폰으로 찍어 나한테로 보내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투고한 원고 3편이 선후로 잡지에 모두 채용되였다. 잡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람으로 어머님은 추운 겨울날 눈길도 마다하고 친구와 함께 책가게에 다녀왔다. 어머님은 글쓰기로 지난날의 고된 삶 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계셨다. 원고가 선정되였다는 소식에 본인이 쓴 글이 활자로 찍혀나올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설레였던 시간들이였을 것이다. 딸애의 일이라면 그렇게 등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쁘다는 리유로 어머님의 기다리는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건 누가 봐도 너무나 볼품없는 변명이였다. 글을 어느 정도 쓰고 나면 기가 빠지고 귀찮아서 포기할 줄 알았다.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다 쏟는 게 젊은이들만의 특권인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였다. 어머님을 보면서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79세 고령임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어머님은 나한테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벌써 봄이다. 개나리며 벗꽃이 앞다투어 피여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노란색, 하얀색, 핑크색으로 사람들의 오감을 유혹하는 꽃들도 예쁘지만 묵은 가지에서 빠끔히 돋는 연초록색 새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울긋불긋 피여나 어여쁨을 뽐내는 꽃이야 이리 봐도 곱고 저리 봐도 곱지만 오늘따라 묵은 가지에서 돋는 새싹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리유는 무엇일가?
20여년전, 고부간으로 만나 어머님의 사랑 속에서 모난 마음을 갈아 둥글게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시집 와서 받은 첫 선물이 어머님이 그동안 소중히 모아둔 《생활안내》신문이여서 새삼 놀란 적도 있었다. 딸애를 출산하고 나서 병실에서 나오니 어머님이 등을 내밀어 나를 업어주었다. 백살까지 살게 해준다고 70일 동안 손에 물 한방울 못 대게 하고 엄동설한에 재래식 시골집에서 산후조리에 정성을 다하신 어머님이다. 가끔은 남편에게 서운해 일러바치는 나에게 “남자는 죽을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며 언제나 내 편이 되여 서리가 내린 내 마음을 다독여주신 것도 어머님이였다. 친정엄마가 없는 나에게 각별한 사랑을 준 어머님에게 해드린 것이 없는 나다. 이제라도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켜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하면서 당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따스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꼭 발표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가 아니여도 좋다. 소중한 꿈 하나를 수중에 간직함으로써 마음속에 어여쁜 꽃들을 가꾸어내 그 아름다운 정기를 다 받아들여 밭고랑 같은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으면 좋겠다. 꿈은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늦바람을 응원한다고 전화를 드려야겠다. “며느리는 얼마나 좋겠소? 나가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글도 쓰고… 너무 부럽소!” 그러는 어머님께 당신도 잘살아오셨다고 하면 한뉘 가마목 운전수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어머님은 나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인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에 왕청현 송림동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딸로 태여났다. 한창 꿈을 키울 사춘기에 접어들어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형편상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이 되는 게 시어머님의 꿈이였다. 어린시절, 성적이 우수하여 ‘꼬마선생님’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다녔는데도 가난 때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접어야만 하는 숙명과 부딪쳤다. 담임선생이 하도 아쉬워서 집까지 찾아오셔서 청을 들었지만 남자아이라면 어떡하나 방법을 대보겠는데 녀자는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된다면서 선생님을 다시 돌려보냈다. 흑룡강에 가면 이밥과 고기를 매일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변에서 흑룡강으로 이사 간 지 얼마 안되던 무렵이였고 학비가 고작 1원 50전이였는데도 그것마저 대줄 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님은 열여섯살 때부터 어른들과 함께 생산대 일에 땀 뿌렸으나 나이가 어려서 일을 아무리 악착같이 해도 어른들과 같은 공수를 받기 힘들었다. 19살 나는 해, 어머님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훈춘으로 이사 가게 되였다. 그 때가 바로 ‘3년 재해’로 온 국민이 겨떡으로 배를 채우는가 하면 희멀건 죽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고난의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시외할머니께서 임신을 하게 되였다.
하루는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님을 불러놓고 생산대 일을 며칠 못 나오더라도 벼이삭을 주어 쌀을 좀 준비하라고 시켰다. 산모가 출산을 하고 나서 필요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해놓으라는 당부였다.
그렇게 이튿날부터 날이 밝아오기 전 어두운 새벽이면 어머님은 남의 눈을 피해 이삭주이를 다니는 할머니들을 따라나섰다. 엄동설한에 솜옷도 없이 홑옷바람으로 20리 새벽길을 걸어갔다. 논밭에서 눈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온종일 벼이삭을 주었는데도 량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았다. 겨떡 하나로 점심을 에때우고 계속하여 벼를 주었는데 저녁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거의 녹초가 되여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멀건 죽물 한사발로 저녁을 때우고는 주어온 벼이삭을 손매돌로 갈아 벼껍데기를 벗겨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쌀을 다섯근이나 모으게 되였다.
시외할머니는 엄동설한 날씨의 새벽에 아이를 출산하였다. 석탄불을 피워 산모한테 대접한다고 밥을 지어놓고 숟가락을 얹어놓았는데 잠 자던 4살짜리 남동생이 어디선가 밥냄새가 난다며 벌떡 일어나니 모두가 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쌀밥이라고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그 세월, 얼마나 배고팠으면 밥냄새에 잠을 깨였을가 하며 어머님은 지금도 그 세월을 회억할 때면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군 한다.
21살에 소개로 아버님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시집도 역시나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는 형편이였다. 림장의 부기원인 아버님이 산으로 들어가있는 시간이 많았던지라 어머님은 치매로 앓고 계시는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혼자서 돌보아야 했다. 하도 외롭고 무서워서 주위가 고요한 밤이면 친정집이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가난해도 다섯 형제가 시끌벅적하던 친정이 그리워 남몰래 눈물을 흘린 밤이 기수부지였다.
2년 터울로 세 아이가 태여나면서 어깨에 놓인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 싶어 어머님은 농사일이 끝나면 아이들만 집에 남겨둔 채 부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된 육체로동으로 다리가 성할 날이 없었는데 추운 겨울이면 그 통증이 더 심해졌다. 아이들이 점차 자라고 생활이 펴이면서 숨을 돌릴 만하니 아버님이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렸다. 하지만 어머님은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였으며 아버님이 돌아가는 날까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에 욕창 하나 생길세라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18년전,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어머님은 한동안 남편과 사별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생의 동반자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오래도록 헤여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이모님께서 어머님을 로인대학으로 이끌었다.
로인대학의 시간표는 꽤나 알찼다. 노래교실, 건강교실, 하모니카교실… 어머님은 일주일에 세번씩 열심히 로인대학을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인가 반에서 반장으로 당선되였다. ‘모범학생’이라고 칭찬을 해줬더니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님한테도 귀여운 데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를 청하였더니 이모님이랑 두 손을 맞잡고 진지하게 나섰다. 은방울자매가 따로 없었다. 살짝 웃는 칠순 넘는 노인의 얼굴에서 나는 수줍고 약간 들떠있는 소녀의 감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음정에 맞춰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어머님을 보면서 꽃보다도 더 고왔을 청춘, 가족을 받드느라 끝없는 희생으로 취미도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을 과연 누가 미봉해줄가 하는 이쉬움이 들면서 눈시울이 촉촉해났다. 가사가 너무 좋다며 설명절에 만나면 며느리인 나에게도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한뉘 고생만 했으니 아버님을 보내고 나서 그 힘든 병수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셨다 했는데 어머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였다. 두분이서 함께 했던 지난 시절이 그리도 그립단다. 유족하지 못해도 다섯식구가 단란히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픈 몸이여도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얼마나 좋겠느냐며 애석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님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났다.
로년대학을 드나들며 자신만을 위한 여생을 디자인하며 삶을 꽃 피우던 어머님께서 결국에 자식을 위해 로년대학교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오시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서 직장생활을 하는 외손녀의 뒤바라지로 북경행을 결심하게 되였던 것이다. 시누이네 부부가 20년 동안 로씨야 장사를 하다보니 시조카는 돌이 지나서부터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님의 슬하에서 자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동네에 살게 되였다만 출근한다는 핑게로 자주 들여다보지 못하고 가끔씩 색다른 음식을 만들 때면 어머님과 조카를 부르군 했다.
연변에서 살다가 한족동네에 오신 어머님이 인차 적응을 할 수 있을는지 은근히 걱정부터 앞섰다. “성 쌓고 남은 돌”이라며 혹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세라 어머님은 매일 운동하느라 움직였고 조카한테 부탁하여 한어공부 책까지 주문하였다. 가족들이 함께 외식을 할 때마다 어머님은 식당간판에서 아는 한자를 찾아내 손녀들 앞에서 글자를 맞추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자기관리를 잘하시고 긍정적으로 로후를 보내니 자식으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였다.
어머님께 북경에 있는 로인회관을 추천했더니 고향처럼 지척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차들이 많아서 자신이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셨다. 조카가 출근하면 빈집에 혼자 계실 게 뻔했는데 우리도 평시에는 출근을 하다보니 주말에나 가끔씩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만나기만 하면 지나간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님의 며느리로 20여년을 살면서 어떤 이야기는 열번도 더 들어 달달 외울 지경이다. 문득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학공부를 함께 하자고 청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어머님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나의 제안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책장에서 뽑아준 수필집을 가지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 어머님께서 육필로 열페지나 되는 원고를 써가지고 오신 게 아니겠는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내려간 글을 보면서 하마트면 인재를 놓칠 번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정말 글로 낼 수 있느냐며 재차 확인을 하셨다. 스토리는 좋으나 문맥을 잘 다듬어야 한다고 수정의견을 드렸다. 여러번의 퇴고에도 끄덕없이 다섯번의 수정을 거쳐 어머님의 처녀작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 일흔다섯〉이 《연변녀성》에 실렸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 큰 보물을 얻기라도 한듯 어머님은 잡지를 받아들고 감격해마지않았다. 허리에 힘이 들어간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 잡지를 머리맡에 소중히 두고 하루에도 몇번씩 펼치는지 모른다며 조카가 만날 때마다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들려주었다.
그 뒤로 어머님은 글쓰기에 아주 푹 빠져버렸다. 어떤 날은 맛 있는 반찬까지 해놓고 이 ‘선생님’을 청해서 수정을 부탁하는가 하면 독후감을 써서 공유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함께 문학교실로 가자고 팔을 끌었더니 무식쟁이 로친네가 그런 데를 어떻게 가느냐며 어머님은 한사코 도리질을 했다. “배움에 나이가 있나요?”라고 류행가요 가사까지 곁들여가며 유혹했더니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척을 했다. 조용히 청강하는 모습이 영낙없는 모범학생이였다. 세상 참 좋다며, 무식쟁이 할미도 교수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옆에 앉아서 사진 찍는 영광을 누렸다고 입이 함박 만해졌다.
가슴 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욕망 때문이였던지 어머님의 열정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내가 바쁘다는 핑게로 어머님이 써온 원고를 한켠에 놔두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조카가 결혼하면서 어머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고 슬쩍 물어봐서야 부랴부랴 원고를 찾아 훑군 하였다. 여러번 다시 돌려보내도 언제 한번 락심하거나 수정을 미루는 법이 없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했기에 타자는 내가 해서 투고를 하기로 하였다. 쓰는 원고마다 채용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수 있지 않겠느냐며 힘을 넣어주었다.
어머님이 고향에 돌아가신 후의 어느 날, 잠간 여유가 나져서 어머님이 썩전에 보냈다는 원고를 찾아보았는데 오간 데 없었다. 온 가족이 움직여 둘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아도 없었다.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같았다.
하필이면 그 때 어머님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몇마디 안부인사가 오가고 어머님은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바쁜 사람에게 괜히 늙은이가 주책이라며 도리여 미안해하는 어머님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났다. 다행히 수정전의 육필원고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여 안도의 숨이 나왔다. 어머님은 원고를 다시 수정하여 핸드폰으로 찍어 나한테로 보내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투고한 원고 3편이 선후로 잡지에 모두 채용되였다. 잡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람으로 어머님은 추운 겨울날 눈길도 마다하고 친구와 함께 책가게에 다녀왔다. 어머님은 글쓰기로 지난날의 고된 삶 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계셨다. 원고가 선정되였다는 소식에 본인이 쓴 글이 활자로 찍혀나올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설레였던 시간들이였을 것이다. 딸애의 일이라면 그렇게 등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쁘다는 리유로 어머님의 기다리는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건 누가 봐도 너무나 볼품없는 변명이였다. 글을 어느 정도 쓰고 나면 기가 빠지고 귀찮아서 포기할 줄 알았다.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다 쏟는 게 젊은이들만의 특권인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였다. 어머님을 보면서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79세 고령임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어머님은 나한테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벌써 봄이다. 개나리며 벗꽃이 앞다투어 피여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노란색, 하얀색, 핑크색으로 사람들의 오감을 유혹하는 꽃들도 예쁘지만 묵은 가지에서 빠끔히 돋는 연초록색 새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울긋불긋 피여나 어여쁨을 뽐내는 꽃이야 이리 봐도 곱고 저리 봐도 곱지만 오늘따라 묵은 가지에서 돋는 새싹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리유는 무엇일가?
20여년전, 고부간으로 만나 어머님의 사랑 속에서 모난 마음을 갈아 둥글게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시집 와서 받은 첫 선물이 어머님이 그동안 소중히 모아둔 《생활안내》신문이여서 새삼 놀란 적도 있었다. 딸애를 출산하고 나서 병실에서 나오니 어머님이 등을 내밀어 나를 업어주었다. 백살까지 살게 해준다고 70일 동안 손에 물 한방울 못 대게 하고 엄동설한에 재래식 시골집에서 산후조리에 정성을 다하신 어머님이다. 가끔은 남편에게 서운해 일러바치는 나에게 “남자는 죽을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며 언제나 내 편이 되여 서리가 내린 내 마음을 다독여주신 것도 어머님이였다. 친정엄마가 없는 나에게 각별한 사랑을 준 어머님에게 해드린 것이 없는 나다. 이제라도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켜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하면서 당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따스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꼭 발표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가 아니여도 좋다. 소중한 꿈 하나를 수중에 간직함으로써 마음속에 어여쁜 꽃들을 가꾸어내 그 아름다운 정기를 다 받아들여 밭고랑 같은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으면 좋겠다. 꿈은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늦바람을 응원한다고 전화를 드려야겠다.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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