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절의 사랑
설날. 어머니와 삼형제. 가족이 모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지 예전처럼 흥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집에 있었다.
어머니만 살고 있는 집이지만
가족이 모이면 그 집은 가족 전체를 감싸고 보살피는
당신의 커다란 손길로 변한다.
갖은 음식은 당신의 몸에서 자라난 것 같고,
집안의 온기는 당신의 품 속 그대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내 짐을 넣어둔 방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새로운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어릴 적 내 옷을 산 기억이 별로 없다.
넉넉하지 않는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우가 자라기 전까지는
사촌형들과 친형의 옷을 입었고,
아우가 다 자란 후에는 아우가 산 옷도 입었다.
처음엔 옷 투정도 하곤 했지만
이내 어려운 가정 형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 어머닌 내 옷을 챙기신다.
가족하면 가장 먼저 어머니가 떠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그렇다.
고1 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간경화 때문에 대구의 유명한 병원을 다니곤 했는데
살 수 있다는 3년이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선친은 세상에 대한 도전도 남달랐지만,
세상에 대한 비관도 대단했다.
날로 늘어만 가는 한탄과 화풀이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당신에게 우리는 그날그날의 불화가 빨리 잦아들게 하기 위해
당신이 모든 짐을 지시길 강요하곤 했다.
힘들어도 선친에게 맞추어 살면서
화목한 가족이 되는 것을 위해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던 당신에게
그냥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그러시라며 당신의 편이 되어드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선친의 말씀에
형제들이 흩어져 어머닐 찾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부둣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닐 발견했다.
그 후론 물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다가도
자식들이 물에 어른거려 그러질 못했노라고 늘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학에 들어가고 머리에 쓸데없는 지식이 들어차면서
내 자신을 '모성결핍'이라고 진단하였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처음으로 같이 산 기억은
9살 여름방학 부터였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날 때 건축업에 종사하던 선친은
공사 중이던 건축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갓 태어난 나를 업고 어머니가 시작한 일은 장사였고,
큰 시장에서 나를 등에 업고 무거운 배추와 무를 이고 들고,
힘겨운 걸음을 터벅거리며 먼 길을 오가며
길가에서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20대가 되기 전까지 내 기관지는 매년 한두 차례 탈이 났고,
기침 소리가 날 때마다 마치 힘겨웠던 그때의 무거운 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어머닌 안쓰러운 생각에 그때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하셨다.
선친이 출감한 뒤 두 분은 어린 아우만 데리고 경찰을 피해 도피생활을 했었고,
형과 나는 큰댁과 이모 댁을 오가며 자랐다.
내 기억에는 가끔 어머니가 나타났고,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가 깨면 이미 사라져버린 당신을 찾아,
‘엄마’를 부르며 온 동네를 울면서 뛰어 다녔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성결핍은 작은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어릴 적엔 형과 아우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가 있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무뚝뚝한 외모에 늘 사마귀와 티눈이 얼굴과 손발에 가득했고,
눈에는 화상 자국도 나 있어서 그다지 호감이 가는 얼굴도 아니었다.
형제에 비해 작았고, 'ㅅ'발음도 되지 않아서
거의 불구자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을 30살이 넘도록 하곤 했다.
식당을 하는 어머니를 돕는다고 나름 노력했지만,
잘못을 저지를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가게에 가서 술을 몇 병 사오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보통은 술을 배달해 주는 차가 오지만 그 차가 오기 전에 술이 떨어지면
인근 가게에서 좀 더 비싸게 술을 사 오곤 했다.
그렇지만 가게에서 사오는 술보다 우리 집에서 파는 술은 더 비쌌다.
안주도 나가고 자리도 차지하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당시 어린 생각에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차액에 맞추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사고는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잔돈이 없다는 내 말을 듣고 가게에 다녀오시더니
집 앞에 서 있는 나는 보시고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당시 선친의 사업은 몇 년의 실패 끝에 마침내 일어나고 있었지만
물건을 사간 사람으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해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을 하시는 어머니였지만,
철없는 자식을 나무라진 않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1년마다 있는 군민체육대회 때였다.
우리 면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우리 집에서 맡게 되어
인근 고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불을 때고 솥을 걸었다.
나는 고기를 사오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평소 잘 아는 집이었지만, 그날따라 아주머니가 없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고기를 반만 썰어서 내게 건넸다.
반박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게 전부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는 또 묵묵히 일을 하셨다.
나는 그 시절 어머니 마음만 아프게 하는 못난 사람 같았다.
나의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를 착하다고 자랑했다.
착하다고. 착하다고.
마치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그 주문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래서 어머니의 자랑이 사실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주문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어릴 적 친구들처럼 어두운 세계로 걸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준점이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때가 되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모이게 된다.
어머니가 있는 곳이 바로 사랑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게 있어 어머니의 사랑은 믿음인 것 같다.
어머니가 내가 있는 곳의 기준점이라면
이 믿음은 내가 가야할 곳에 대한 좌표라고나 할까?
당신이 믿어주시는 만큼 나는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은 자식에 대한 당신의 사랑만큼이나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내가 한없이 어리석고 부족해서일 뿐일 것이다.
언제 어느 때고 전화하시곤 밥은 챙겨먹고 있냐고 물으시는 어머니.
그 마음은 온 우주를 덮고 있는 사랑의 파장에 연결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9년간 떨어져 살던 때에도,
형제를 편애한다는 생각을 할 때에도,
어디에서 그 어떤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조차도
그 사랑의 마음과 믿음은 얇지만 질긴 옷처럼
항상 나를 감싸고 어루만져왔을 것이다.
그 옷이 펄럭이며 내게 이야기한다.
지금보다 백배 천배 어머닐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단 한나절 나를 사랑한 어머니의 고마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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