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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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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민테른 선전원 신분으로 ‘광주공산당’설립에 참여한 김만겸
2021년 07월 14일 15시 24분  조회:446  추천:1  작성자: 박문봉
 

  박문봉     조선민족당사인물 추적 
 

코민테른 선전원 신분으로 ‘광주공산당’설립에 참여한 김만겸
 

중국의 초기공산주의자들과 교왕하기 시작한 조선민족 공산주의자 김만겸(중국의 사료에는 ‘谢列勃里亚科夫’로 나오며 ‘米诺尔’으로도 나온다)은 대표적 인물이다.
 

1920년 5월 김만겸은 코민테른 선전원 신분으로 중국으로 오는데, 그는 상해와 북경에서 ‘사회주의자동맹’결성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광주공산주의소조인 ‘광주공산당’설립에도 참가하게 된다.
 

보이틴스키를 보좌해 부전권위원으로 중국으로 오다

1919년 9월, 빌렌스키(Vilenskii, 维连斯基)라는 쏘련공상당 고위관료가 모쓰크바 중앙정부 외교인민위원부 극동사무국 전권대표의 신분으로 극동에 파견되고, 빌렌스키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국사업전담기구로 ‘해외사업처’(Inotdel)(또는 외무과) 를 설립하며, 1920년 4월 당시 코민테른 극동부 블라디브스토크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보이틴스키(Grigorii Voitinsky, 维经斯基)를 전권위원으로 중국에 파견한다. 이때 김만겸도 동양학연구소를 졸업한 티토프(Totov)와 함께  부전권위원으로 동행하게 된다. 

1920년 4월, 중국으로 떠나는 보이틴스키 일행에게 빌렌스키가 내린 주요한 사명은 림시 ‘코민테른 동아시아비서부’를 설립하고 소속으로 중국부, 한국부, 일본부를 두어 동아시아의 사회주의혁명세력들을 통합하는 것이였다. 빌렌스키가 1920년 9월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러한 사실들이 확인된다. 그리고 보이틴스키 일행에 망라된 김만겸은 코민테른 선전원 신분이지만 쏘련정부의 동양담당 선전기관에서 파견한 사람이였다.

중국의 적지 않은 글들에서도1920년 4월, 코민테른의 비준을 받고 로씨아 공산당(볼세비키) 극동국 블라디보스토크 분국에서 공산당원 보이틴스키와 그의 두 명의 조수인 티토프(季托夫)와 스테파노비치(谢列布里亚科夫, 조선의 저명한 사회 활동가 김만겸)이 중국으로 왔으며 그들의 과업은 중국국내 상황을 료해하고 중국의 선진분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상해에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동아시아 서기처를 설립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이 시기 보이틴스키와 함께 동행한 김만겸에 대해서는 구 쏘련의 기밀문서가 해제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구 쏘련의 기밀문서에는 1920년초 ‟로씨아공산당(볼세비키) 극동국은 블라디보스토크 소속으로 외교과를 설립하였다. 이 외교과에서는 4월에 일행을 중국(상해)으로 파견하였는데 전권대표 그리고리 보이틴스키(魏金斯基), 티토프(季托夫, 동방학원 졸업)와 스테포노비치(谢列勃里亚科夫; B.Серебряков;저명한 조선사회활동가)등이였는 데 세 사람은 모두 공산당원이였다.”고 하였다. 이 문서에 나오는 스테포노비치는 바로 김만겸이다.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조하다

우에서 언급한 보이틴스키 일해에 주어진 임무에서 ‘중국의 진보세력과 관계를 맺는다’는 부분은 로씨아공산당과 코민테른이 1919년 말⁓1920년 초부터 중국에서 공산당 창건사업과 통일전선 형성이라는 두 가지 로선을 동시에 전개했다는 력사사실과 관련시켜 볼 때 이들이 중국에서 협력대상을 물색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상해에 코민테른 동아서기처 건립여부를 고찰한다’는 부분은 코민테른이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하나로 중‧한‧일 3국에서 사회주의 선전과 조직사업을 하려는 것과 관련해 그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려던 것이다. 이는 박진순이 1920년 9월 ‘코민테른 재외 전권위원’이라는 직위와 함께 ‘동양공산당’, 즉 동아시아 혁명의 중앙기관을 결성하는 임무를 띠고 재차 상해로 온 것과 맥을 같이 한다.   

5월, 보이틴스키 등은 상해에서 코민테른 동아시아 서기처를 설립하고 소속으로 중국과, 조선과와 일본과를 두었다. 보이틴스키 등의 도움으로 조기 중국공산주의자들은 로동자들 속으로 들어가 조직적이고도 계획적으로 선전사업과 조직사업을 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의 창건을 위해 사상적으로, 조직적으로 준비를 해 나간다. 따라서 중국의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보이틴스키 등을 통해 쏘베트로씨아와 쏘련공산당의 상황을 더욱 잘 알게 되였고 ‘로씨아인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보이틴스키 일행은 ‘중국 국내 상황을 리해한 후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공산주의(사회주의)소조를 건립하는 것에 협조하며, 장차 이러한 소조들이 모아 공산주의(사회주의)정당을 수립한다. 둘째, 지식분자 조직을 통해 로동자와 관계를 맺는다. 셋째, 각 혁명 파벌의 활동에 협조하는데, 여기에는 아나키스트와 국민당을 포함한다”등이다. 

상해에 도착한 후 김만겸은 이상의 임무에 따라 우선“대중을 확보하고 있는 ‘한민족의 중앙기관’(대한민국 림시정부)에 영향력을 가진 리동휘와 접촉했다. 1922년 10월 국제공산당 극동부장 보이틴스키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김만겸은 한인사회당 위원장이며 림시정부 국무총리인 리동휘를 만나 한인사회당을 ‘공산주의 조직’으로 재조직하라고 제안하자, 리동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상해에 있던 한인사회당의 당원은 모두 6명이였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조직’(공산주의자 그룹)을 만들었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김만겸은 이렇게 상해 활동 기간에 리동휘와 함께 상해에서 한인사회당을 ‘공산주의 조직’인 고려공산당으로 개조하였으며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였다. 보이틴스키를 협조해 상해대한인민단(1920년에 련이어 상해거류민단, 상해대한인거류민단, 대한교민단으로 개칭함)단장 및 신한청년당의 총무를 맡은 저명한 민족주의 의사 려운형(吕运亨)과 접촉하게 하고 그를 설득시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중국공산당의 모체가 되는 ‘혁명국’결성에 참여하다

‘혁명국’이라는 조직은 과거 중국공산당 초기조직에 관한 론저와 회고록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쏘련의 해체로 로씨아 현대사문서보관 및 연구센터(옛 쏘련공산당 중앙사회주의 이론과 력사연구원 중앙당무기록관)의 관련 기록이 공개되면서 이 ‘혁명국’의 실체가 상세하게 들어나기 시작했다. 1920년 8월 17일 보이틴스키가 이르쿠츠크에 있는 로씨아공산당(볼세비키)중앙위원회 씨베리아국 동방민족부 보낸 보고서에서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기간에 거둔 사업성과는 상해에 혁명국을 설립한 것이다.…”고 기재하고 있다.

비밀이 해제된 옛 쏘련의 여러 문서 등에 따르면 김만겸은 보이틴스키 등과 함께 상해에서 이 ‘혁명국’의 설립에 참여했고, 보이틴스키의 명을 받아 폴레보이와 함께 북경혁명국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광주로 파견되여 가 진독수와 함께 광주혁명국, 즉 광주공산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김만겸이 참가했다는 이 ‘혁명국’은 1920년 5월 경 보이틴스키 등이 중국에 와 8월 경 상해 등 지역에서 중국공산주의자들을 도와 공산주의소조의 초기 조직으로 설립한 것을 가리킨다. 이 ‘혁명국’과 초기 상해 등 지역의 공산주의소조와의 관계에 대해 중국학자들 속에서는 부동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 이 ‘혁명국’은 ‘사회주의자동맹’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리단양은 “사회주의자동맹은 각 파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통일전선모식의 조직이며”, “공산주의소조의 외곽조직으로 중국공산당이라는 태아를 배태한 모체이다”라고 하였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출판된 중국공산당 창건 관련 연구서나 론문을 보면 ‘사회주의자동맹’이 실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모체인 공산주의소조와 관련한 자료집이나 회고록에서도 나오고 있다. 원진영(袁振英)은 중국공산당 창건초기에 관한 회고에서 특별히 ‘상해공산당 조기 조직의 국제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상해의 공산당 조기 조직에는 외국인이 많이 들어 있었다. 지점이 ‘중국’일 뿐이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원진영의 기억 속 상해의 공산당 조기 조직은 국제적인 조직으로 각국의 인사가 들어있었는데 성원은 중국사람과 로씨아사람 외에도 조선사람, 일본사람, 인도사람과 영국사람이 있었다. 원진영의 회고는 중국공산당 창건사업에 참가한 기타 조기 참여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원진영의 당시 특수한 역할에서 답안을 찾을 수 있겠다. 원진영은 영어에 능숙했는데 당시 상해에 있는 쏘베트로씨아대표는 물론 각국의 사회주의자들과 직접 교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진독수와 각국의 혁명자들 사이에는 왕래가 빈번했는데 원진영은 그들 사이에 교량작용을 놀았다. 원진영은 진독수의 소개로 로어신문인 《상해로어생활보》의 번역원으로 일했고, 《신청년》잡지의 ‘로씨아연구’전문코너의 주필로도 일했다. 때문에 자료수집과 번역 등 사업의 수요로 그는 늘 외국의 혁명가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협력하군 하였다. 때문에 그는 코민테른과 중국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왕래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직관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인상은 강렬했던 것이다.

사실 당시 ‘사회주의 동맹’은 사회주의를 신앙하는 동방 각국의 혁명가들을 회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나오도록 촉진하였다. 사실적으로 보이틴스키는 1920년 5월 당시 중국에 온 후 주요한 정력을 중국공산당을 조직하는데 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절대 다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지어는 상해에 있는 일본과 조선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까지 모두 단합시키는 련합조직을 내오는데 두었다. 

그래서 원진영은 이 시기의 상황을 ‟우리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집합시켰다. 때문에 일본인이 《로동년간》에 우리의 경과를 상세하게 기술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보이틴스키 등 3명 공산당원의 중국행 활동과 관련하여 1920년 12월 21일 로씨아공산당(볼세비키)중앙위원회 씨베리아국 동방민족부가 코민테른집행위원에 보낸 보고서에서도 ‟이번 거동은 우리가 극동 국가들에 계획적으로 조직사업을 진행하는 데 초석을 깔아 놓았다.”고 평가했다.

당시 보이틴스키 일행에게 주어진 과업은 “중국국내의 상황을 리해하고, 중국의 진보세력과 관계를 맺으며 동시에 상해에 코민테른동아서기처 설립여부를 고찰하는 것”이였다. 여기서 ‘중국의 진보세력과 관계를 맺는다’는 부분은 로씨아공산당과 코민테른이 1920년 초부터 중국에서 공산당창건과 통일전선 형성이라는 두 가지 로선을 동시에 전개했다는 력사사실과 관련시켜 볼 때, 이들이 중국에서 협력대상을 물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상해에 코민테른 동아서기처 건립여부를 고찰한다’는 부분은 코민테른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하나로 중‧한‧일 3국에서 사회주의 선전과 조직사업을 하려는 것과 관련해 그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려던 것이다.

보이틴스키 일행은 ‘중국 국내 상황을 리해’한 후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공산주의소조를 건립하는 것에 협조하여, 장차 이러한 소조들이 모아 공산주의정당을 수립한다. 둘째, 지식분자조직을 통해 로동자와 관계를 맺는다. 셋째, 각 혁명파벌의 활동에 협조하는데, 여기에는 아나키스트와 국민당을 포함한다”등이다.

1920년 7월 19일, 보이틴스키는 진독수에게 위탁하여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을 소집하여 련합대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영향력 있는 무정부주의자 정패강(郑佩刚)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어느 날 저녁, 우리는 어양리(渔阳里) 1번지에 있는 진독수의 집에서 ‘사회주의자동맹’회의를 가졌다. 코민테른의 정신을 전달하고 사회혁명사업문제에 대해 토론을 전개했다. 출석자는 (로씨아인)Stumisky, 양명제(杨明斋), 진독수, 리한준(李汉俊), 위극수(尉克水), 원진영(袁振英), 유수송(俞秀松), 김모(조선사람, 김구?)이고 이 밖에도 인도인과 내가 있었다. 의안은 많았으나 중점은 선전사업이였다. 사회주의자동맹은 우선 자기의 인쇄기관과 선전진지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으며 당일 밤으로 전투력이 있는 인쇄소를 세우기로 결정했으며 내가 위탁을 받았다. Stumisky가 2천원을 진군(陈君)을 통해 나에게 전달했으며 인쇄소를 세우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이 인쇄소는 유신인쇄소(又新印刷所)라 하였다.…나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았는데―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공산당선언》을 인쇄하였다.”

여기에서 조선사람 김모는 괄호 안에 김구가 아닐가고 물음표를 달았는데 사실은 우에서도 언급했듯이 김만겸이다. 이에 대해 역시 정패강의 회고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1920년 여름의 어느 날 저녁, 보이틴스키, 양명제와 동행인 조선사람 그 조수와 진독수, 리한준, 유수송 등과 인도인과 무정부주의자 원진영, 위극수, 정패강 등이 참가하였다”고 회고하였는데 여기서 ‘조선사람 조수’는 바로 구 쏘련이 해제한 기밀문서가 밝힌바와 같이 김만겸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패강은 계속하여 "우리 사회주의자동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접수한 후로 활동이 많아졌다.…사회주의자동맹의 활동중심은 북방은 북경이였고, 화동은 상해였으며, 남방은 광주였는데 상해가 가장 활약적이였다.”고 회고했다.

이 유신인쇄소를 통해 고려공산당에서 번역한 《공산당선언》, 《공산주의 ABC》등 조선문 책자와 《공산》이란 잡지도 인쇄발행하였으며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기관보 《신대한독립보》도 인쇄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서는 신 정당조직의 명칭을 ‘사회당’으로 하느냐 ‘공산당’으로 하느냐 열띤 토론을 하였는데 결과 포용성이 강한 특징을 띤 ‘사회주의자동맹’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이틴스키를 망라한 5인 지도자핵심을 내오고 ‘혁명국’이라 하였다고 한다. 보이틴스키는 8월 17일 이르쿠츠크에 있는 상급조직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보고서에서는 ‟회의에서 ‘5인혁명위원회’를 설립하였고…우선 먼저 각 중소공업도시에서 상해혁명위원회와 같은 조직을 내오고, 연후 각 혁명위원회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중국공산당조직을 창립할 것을 제기하였다”고 하였다. 보이틴스키가 자기의 보고서에서 지칭한 ‘혁명국’은 사실상 ‘사회주의자동맹’을 가리킨다. 당시 거의 모든 정력을 진독수와 당의 조직건설을 위해 사업한 원진영은 1920년 10월 영국의 철학자 루소(罗素, Russell)에게 보낸 편지는 이 점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편지 말미에 ‘각하의 형제 같은 동지 원진영’이라 달고 괄호 안에 ‘사회주의동맹 비서’라고 밝혔다. 이는 당시 원진영이 ‘사회주의자동맹’조직 내에서 담당한 역할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상해에서 조직된 ‘사회주의자동맹’이 바로 ‘상해공산주의소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강서사범대학의 주리성(周利生)은 “로씨아 측에서 해제한 비밀문서나 기타 자료를 분석해보면 상해‘혁명국’은 바로 상해공산주의소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도 주장하였다. 심해파(沈海波)도 보이틴스키가 자신의 지도로 진독수, 리한준, 등 4명이 참가해 만든 ‘상해혁명국’은 8월에 설립된 ‘상해소조(상해공산주의소조)’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그만큼 상해에서 조직된‘사회주의자동맹’은 ‘공산주의소조’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김만겸은 바로 이 상해 ‘사회주의자동맹’결성을 추진하는 일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중국 최초의 공산주의소조(상해소조)의 정확한 성립시기와 구체적인 성원에 대해 부동한 기술이 있다. 그것은 결정적인 자료가 부족하고 주로 개인 회고록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런저런 자료와 연구결과를 모아보면 1920년 5월, 진독수는 보이틴스키 일행에 상해의 진보적 인사들을 여럿 소개시켰고 몇 차례의 모임 결과 ‘맑스주의 연구회’를 결성했다. 그 사이 여러 번 모임, 토론 등 과정을 거치면서 빠질 사람을 빠지고, 또 새로 가담할 사람은 가담하고 하여 8월 진독수, 리한준, 유소송, 시존통 등이 보이틴스키 일행과 진독수의 집에서 회의를 열어 공산주의정당을 준비하여 ‘사회당’이라고 명명하게 된다. 후에 진독수가 북경의 리대소와 상의한 끝에 ‘공산당’으로 바꾸었고 곧 이어 ‘중국공산당’으로 고쳤다. 

이 ‘사회주의자동맹’은 폴레보이(S,Broway 鲍立维,혹은 S,Polevoy 柏烈伟)등 로씨아공산당 요원들과 진독수, 리대소 등 사이에서 구상되였던 것이다. 이 폴레보이는 《시경》을 연구한 로씨아 한학자로 로씨아공산당원이자 아나키스트이다. 

폴레보이가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그의 신분은 로씨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지구위원회 산하 블라디보스토크 분국 공작원이였고, 보이틴스키의 중국 방문 이후에는 코민테른 동아서기처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였다. 1918년 하반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국으로 와 천진대학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얼마 후부터는 북경대학에서도 로씨아어 강의를 맡아 천진과 북경을 오가며 중국의 상황을 파악했다. 폴레보이는 북경대학 기간에 리대소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호적(胡适), 문화학장이였던 진독수를 알게 되였다. 또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로신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작가인 곽말약에게 로씨아 고전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오패부(吳佩孚), 풍옥상(冯玉祥) 등의 군벌이나 손문(孙文, 손중산) 등 많은 이들과 교류를 하였다.

폴레보이의 제의 하에 1920년 3월 천진에서 진독수와 리대소는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할 것에 서로 동의하였으며, 이렇게 동의한 이후 리대소는 1920년 3월 북경에서 맑스주의학설연구회를 조직했고 두 달 후인 1920년 진독수는 상해에서 맑스주의 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이러고 보면 ‘동맹’은 로씨아공산당 요원들과 진독수, 리대소 등의 적극적인 구상과 협력 하에 중국 각지에서 결성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중국공산당상해력사》에서도 1919년 9월 리대소가 로씨아공산당원 보트만, 하하로푸친 등을 만났으며, 1920년 2월 리대소가 비밀리에 진독수를 북경에서 천진을 호송하면서 두 사람이 천진에서 로씨아공산당원인 폴레보이 등을 만나 ‘사회주의자동맹’설립문제 등을 토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공산주의소조의 결성과정에 참가했던 소력자(邵力子)는 “약 반년이 지난 후에 연구회가 공산주의소조로 성격을 바꾸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5월에서 8월에 이르는 4달 동안 연구회로부터 공산주의소조로 ‘성격이 바뀌였다’는 것이며 이 전환과정에서 여러 번의 회의와 론의들이 있었다고 장국도와 리달도 회고하고 있다. 론의하는 과정에서 대계도(戴季陶)와 같은 일부 초기 멤버들은 리탈해 나갔다고 한다.

보이틴스키 등은 연구회가 공산주의소조로 점차 바뀌게 되는 모든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연구회 멤버들은 ‘중요한 문제’를 론의하기 위해 보이틴스키 일행을 자주 방문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여러 번의 회의와 론의를 거친 후에 중국공산주의소조는 마침내 1920년 8월 《신청년》잡지사무실에서 조직되고 진독수가 서기로 선출된다.

보이틴스키의 조수로 중국에 온 김만겸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보이틴스키가 로씨아공산당에 보낸 보고서 내용을 주목해보면 답이 나온다. 1920년 6월 보고서에는 “…각 조직의 활동을 협조 집중하기 위해, 현재 화북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련합대표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매우 명망 있고 큰 영향력이 있는 교수가 각 도시의 혁명가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번 회의의 의제와 장소 및 시간을 확정하였다. 우리는 회의준비사업(일정과 결의결정)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회의에도 참가할 것이다.” 라고 하였고 1920년 8월 17일 보고서에서는 “내가 이곳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사업성과로는 상해에 5인(4인의 중국인과 나) 혁명국(혹은 혁명위원회)을 성립시킨 것이다…우리들의 현재 임무는 중국의 각 공업도시에 상해혁명국과 비슷한 국을 건립하고 국의 대표회의에 힘을 빌려 사업을 집중시키는 것이다.…현재는 1개의 북경국이 더 건립되였을 뿐이며 내 지시로 스테파노비치와 폴레보이 동지가 합작하고 있다. 현재 나는 스테파노비치 동지를 천진에서 광주로 파견할 것이며, 그가 현재에서 또 하나의 혁명국을 만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다싶이 스테파노비치, 즉 김만겸은 상해사회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로씨아 공산당 측의 자료에 따르면 보이틴스키의 지시에 따라 ‘북경국’의 설립에도 참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광주공산당’ 설립에 참가하다

김만겸의 ‘북경국’ 설립 과정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중국 측의 자료에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더 세심한 고찰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광주공산당’, 즉 광주공산주의소조설립에는 참여하였다는 것이 자료에서 그 륜곽이 나타나고 있다.

1919년 여름 북경대학교의 구성백(区声白)  등이 고향인 광주로 남하해 잡지를 꾸리는 등 신문화운동을 선전했고, 이 시기 광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미 로동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광주에도 로씨아공산당에서 파견한 밀사가 두 명 나타나는데 미노르(米诺尔)와 베슬린(别斯林)이다. 이들 두 사람은 사실 1920년 8월 경 보이틴스키가 파견한 스토야노비치(스테파노비치, 김만겸)와 사하야노바이다. 미노르와 베슬린은 그들의 가명이다. 이들 두 사람은 천진에서 광주로 내려왔는데 그들의 과업은 혁명국, 즉 공산주의소조의 건립을 돕는 일, 지식인 조직을 건립해 로동자와 련계하는 일, 아나키스트와 국민당원 등 다른 혁명파의 활동을 돕는 일 등이였다. 이들은 북경에서 리대소의 소개를 받아 광동적 북경대학생 황릉상(黄凌霜)과 함께 내려왔으며 곧 같은 해 9월 7명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9명이 이른바 ‘광동공산당’, 즉 보이틴스키가 말하는 ‘광주혁명국’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의 많은 자료들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한 론문에 따르면 진독수가 광주에 내려 온 후 1920년 여름에 ‘광동공산당’을 만들었으며 두 명의 로씨아사람과 7명의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되였다고 하였다. 주도자가 진독수로 바뀐 것 밖에 기타 참가자 명단과 그들이 《로동자》주간을 창간한 광주소조의 구성원이였던 류석심(刘石心)의 회고에 따르면 1920년 가을 그들은 광주에서 사회주의를 찬성하는 동지들을 모아 ‘사회주의자동맹’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동공산당은 광주사회주의동맹과 같은 단체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광동에 온 진독수는 12월 19일 담평산, 진공박, 양빙현, 구성백, 황존생, 류석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공산당소조 모임을 주최하였다. 이 모임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 사이에 넘지 못할 갈등이 생겼고, 그 후 자연스레 로씨아 사람들과 광주아나키스트 간의 접촉 역시 소원해졌다. 상해에 있던 보인틴스키도 1920년 12월 광주로 내려왔다. 그는 아나키스트와의 갈등문제, 광주공산주의 소조의 건립문제, 손문과의 회담문제, 진형명에 대한 탐색 문제 등을 해결해 중국혁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 했다. 그런데 보이틴스키는 진독수와 마찬가지로 “비록 공산당이 조직되였으나 공산당이라고 칭했을 뿐, 실은 아나키즘적 공산당”이라고 판단하여, 광주공산당소조 모임에 참석해 한편으로 기존의 로동운동성과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소조의 구성원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령에 찬성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대다수의 성원들이 거절했고, 결국 기존 소조는 해산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광주공산당’은 1921년 3월 진독수의 주도와 두 로씨아공상당 밀사의 참여하에 다시 만들어진다. 진독수가 서기로 되고 성원은 담평산(谭平山), 진공박(陈公博), 담식당(谭植棠), 미노르(米诺尔, 김만겸), 베슬린(别斯林), 원진영(袁振英), 리계(李季), 신현로(沈玄庐) 등으로 구성되였다. 이 광주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초기 6개 국내 지방조직(공산주의소조) 중의 하나로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열린 후 중국공산당 광동지부로 개칭되였다.

 

주:
李丹阳, <朝鲜人‟巴克京春”来华组党述论>, 《근대사연구》, 1992년 제4기;

리단양‧류건일, 〈“革命局” 辨析〉, 《사학집간(史学集刊)》, 2004 제3기;

《联共布‧共产国际与中国国民革命运动》(1920-1925), 북경도서관출판사, 1997;

중공중앙당사자료수집위원회 편, 《共产主义小组》(상), 중공중앙당사자료출판사, 1987년;

周利生, 〈上海“革命局"就是上海共产主义小组〉, 강서사범대학학보(철학사회과학판), 2003.5;

리단양, 〈AB合作在中国个案研究〉, 《근대사연구》2002년 제1기;

沈海波, 〈关于中共早期组织与“革命局”的史实辨析〉, 《상해혁명사자료와 연구》제3집, 상해고적출판사, 2003;

任武雄, 〈荷荷诺夫金: 推动南陈北李建党的第一位俄密使〉, 《百年潮》, 2005 제2기;

중공중앙당사연구실, 《共产国际、联共(布)与中国革命档案资料丛书》(1), 북경도서관출판사, 1997;

杨汉卿, 〈广东共产党早期组织的创建及其革命活动〉, 《红广角》(월간), 2015년 제6기;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제1연구부 역, 〈维连斯基-《联共(布), 共产国际中国国民革命运动(1920-1925)》, 북경도서관출판사, 1997 등 중문자료를 위주로 

윤상원, 〈1920년대 초반 로씨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과 코민테른-김만겸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16호, 2006 등 한국자료를 보충자료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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