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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포화가 피워낸 붉은 장미 / 노인기
2022년 10월 31일 13시 11분  조회:517  추천:0  작성자: 설야
[중편소설]
포화가 피워낸 붉은 장미
 

노인기

 

군악대의 연주가 요란하게 울린다. 참전 용사들은 마치 그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뛴다. 환영행사가 끝나고 인터뷰가 이어진다.

 

“한국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나 잊혀지지 않는 사연이나 일화(逸話)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저는 미 육군 00사단 제 00연대에서 복무했어요. 이름은 제럴드. 참전 당시 계급은 중위로 중대장이었어요.”

제럴드! 그도 이번 초청에 포함되었다. 60년이 흐른 지금 87세의 노구로 자신의 수한(壽限)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초청에 응했다. 그때 그는 삶과 죽음의 근사(近似値)에 한번 두 번 놓였던 것이 아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자신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인터뷰에 응했다. 오래전 그때를 떠올리므로 가슴이 벅차서일까? 그의 말은 조금씩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1

풀벌레조차 고요히 잠든 새벽이었다. 북한 정권의 무력 침략으로 전쟁은 일주일 만에 조선인민군의 승리로 끝날뻔하였다. 낙동강까지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군은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이틀 뒤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또다시 후퇴를 감행한다. 미 육군 제00사단 소속 00중대는 유독 한국 지형에 적응을 못 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벌써 전사자가 중대원의 절반이나 발생했다. 계속해서 북한과 중공 연합군은 155mm 박격포를 마치 별똥별처럼 마구 쏘아댄다. 이번 폭격에 거의 다 죽고 겨우 9명만 남았다. 폭격을 피해 벗어나려는 순간 마지막 포탄의 파편이 그만 중대장 제럴드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관통하여 뚫고 나간다. 매우 다급한 상황으로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선 붉은 피가 군복 상의를 서서히 적시기 시작했다. 고막을 찢는 요란한 폭격 소리에도 전우들이 자신을 부르는 고함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깨의 통증으로 눈을 떴다. 그사이 폭격은 멈췄고,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가 흐릿했다. 몸을 돌리려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상처를 보니 다행히 출혈은 멈춰있었다. 깔때기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는 허술한 참호에 자신의 몸이 뉘어있는 것을 알고 땅 위로 납작 엎드려 기어오르는데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가까워져 온다. 일개 소대 정도의 중공군들이 폭격이 지나간 곳의 수색을 나온 것이었다. 나 뒹굴어져 있는 미군 시체들을 발견하고는 주머니를 뒤진다. 지갑과 시계, 총과 칼등을 탈취하고는 군화발로 시체를 밀어 넣는다. 광대뼈가 유독 큰 군인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자

“에잇~ 아무것도 없네” 이것도 전리품으로 각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데 미군 전사자의 몸에서 취한 것으로 자기네들끼리 낄낄대며

“오늘은 수확이 괜찮은걸” 묵직한 시계를 손에 차고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자랑한다. 자랑하던 그놈이 찬 시계는 죽은척하며 위기를 넘긴 제럴드의 시계였다. 권총과 대검 그리고 자신의 총까지 수거하다시피 해갔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제럴드 중위는 힘겹게 일어나서 비로소 주변을 살펴보았다. 동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처참한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군번줄을 취하여 한 개는 이사이에 박아넣고, 또 한 개는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한편 중공군의 맹렬한 폭격을 피해 몇몇 대원들은 무사히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서 생명의 위협은 일단 모면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중공군의 추격에서 안정권을 벗어나자 전열을 가다듬는다. 불과 몇 명 남지 않았지만, 아직 전우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가운데 폭격으로 인해 혹 부상 중에 놓여있을 수도 있고, 생사를 확인한 것이 아니어서 다시 폭격 장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제럴드 중위는 그 와중에 중공군이나 북한군들이 오지 않을 방향을 나름 설정하여 걷기 시작한다. 수통에 물은 다 떨어지고 벌써 몇 시간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목이 탄다. 메마름에 침을 삼키듯 꿀 꺽 거릴 때 수분이 없어 말라붙은 긴 식도가 속에서 달라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또한 고통스러웠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 그만 발을 헛디뎌 언덕 아래로 굴렀다. 나무아래 그늘에서 한동안 누운 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오직 물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비틀대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산모퉁이를 돌았을 때 집 한 채가 보였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자 닭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얼마 남지 않은 기운으로 샘터 가까이 와서는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제럴드가 눈을 떴을 때는 방안에 누워 이불이 덮여있었고, 상의는 언제 벗었는지 기억도 없는데 벗은 채 오른쪽 가슴과 어깨 아래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누워서 방안을 한번 빙 둘러 본다. 둥근 추가 째깍째깍 좌우로 움직여 30분을 알리는 종소리는 한 번 울리고, 그리고 시간마다 땡땡 울리는 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괘종시계가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제럴드는 순간 어렸을 때 할아버지 방에도 비슷한 벽시계가 걸려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태엽만 감으면 긴 추가 자동으로 움직이고 또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기까지 하니 어린 마음에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마다 의문의 물음들을 던져 주위 사람들을 웃기게도 하고 난처하게 하기도 했었다. 잠시 후 시계가 세 번 울린다. 벽시계 반대편에는 빛바랜 액자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데 흑백사진들이 여러 장 들어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고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중공군의 폭격에도 살아남은 제럴드중대의 네명의 대원들은 쑥대밭이 되어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시체들을 일일이 확인해 보지만 중대장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철모 안쪽에 J.W.J. 이름이 적혀있는 철모를 발견했다.

“이상하다 헬맷은 있는데 사람이 안 보인다.” 버지니아주에서 참전한 스탁턴 병장이 철모를 들어 보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중대장님은 어쩌면 살아있는지도 몰라”

“나도 꼭 살아있을 것만 같아 몇몇 시신을 봤는데 개목걸이가 하나는 박혀있고 하나는 없는 것으로 봐서 틀림없이 중대장님이 그렇게 하셨을 거야” 오하이오주 출신의 해리슨 병장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한결같이 시신들의 지갑과 총 대검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북한군이나 중공군들이 이미 지나갔다면, 그렇다면 제럴드 중위가 적군들의 포로가 된 것은 아닐까? 대원들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한결같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소대장 넬슨 소위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우 침착한 사람이었다. 어떤 난관에 직면해도 그는 마음의 평정심을 잃어 실수하거나 당황하는 일은 거의 없는 사람이다.

“자 불길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적군을 피해 어디 몸을 숨긴 것으로 생각하자” 이렇게 그는 대원들을 격려했다.

“해리슨 자네 같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겠는가?” 소대장 넬슨이 전사자 확인을 마친 해리슨 병장에게 물었다.

“글쎄요 아무래도 도움을 구하려면 미군 부대나 가까운 아군부대가 있을 방향으로 피하지 않았을까요?” 넬슨 소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네”

“그러면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해리슨과 같은 생각인가?” 버지니아 출신 스탁턴 병장에게도 같은 물음을 한다.

“해리슨의 생각에 공감하지만, 과연 중대장님이 파편을 맞고 쓰러졌으면, 분명 중상을 입었을 텐데 그 와중에 어느 방향으로 가면, 아군부대를 만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을까요?”

“그럼 자네 생각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네 저의 생각에는 어디론가 몸을 숨겼겠지만, 아군부대가 있는 방향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스탁턴 병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파편이 몸에 박히기라도 하면 무슨 온전한 생각이 들어 판단을 정상적으로 내릴 수 있겠는가?

“해리슨 병장”

“네 소대장님” 군사지도를 건네며

“가장 가까운 미군부대 할 것 없이 아군주둔지의 방향을 알아보게”

“네 알겠습니다”

테네시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코리안 어머니 사이의 혼혈인 캐시어스 상병이 한마디 거든다.

“소대장님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틀림없이 중대장님은 폭격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겁니다. 지금쯤 포로가 되어있던지, 아니면 가까운 민가로 피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중대장님은 파편으로 인해 출혈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곧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선 민가로 피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넬슨은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후 조용히 결론을 내린다.

“다들 좋은 의견들이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방향이나 선택해서 찾아 나설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해리슨 가까운 민가의 방향도 알아보게”

“네 알겠습니다”

“소대장님 미군 아군 할 것 없이 가장 가까운 부대가 50km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미군인가?” “아닙니다. 연합군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부대도 지금쯤 후퇴했을 가능성이 다분 이 높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가까운 민가는 어느 방향으로 몇 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가?”

“지도에는 남동쪽으로 약 2.3km 외곽에 조그맣게 나와 있습니다.”

“자 그럼 이동, 전방은 내가 맡을 테니 좌우 잘 살피고, 캐시어스는 후방을 맡아라.”

“예 알겠습니다.”

넬슨 소대장과 일행은 아주 빠른 걸음으로 행군한다. 제럴드중대장의 생사를 알 수도 없었고, 만약 살아있다면 폭격으로 인해 상처가 깊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대원들은 몸을 낮춘다. 대략 삼십호 정도의 평범한 시골 마을로 사람의 그림자나 짐승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너 군데 연기가 피어올라 혹시나 해서 가보았지만, 포탄이 떨어져 전소되고 마지막 불씨가 겨우 피어올랐다. 적군들이 이미 점령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손으로만 신호를 보냈다.

두어 시간에 걸쳐 지붕 위까지 샅샅이 수색해 봤지만, 중대장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캐시어스 상병이 마을 주변을 살펴보는 사이 나머지 대원들은 잠깐 휴식을 취한다. 소대장 넬슨이 담배를 꺼내어 두사람에게 권하고 자신도 지치고 힘겨운 듯 깊이 빨아들이고는 후하고 내뱉는다. 다들 아무 말이 없다. 어떠한 심정들인지 굳이 말을 안 해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리라. 주변을 살피러 간 캐시어스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음을 황급한 그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다.

“소대장님 적군이 마을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오른손 검지를 길게 하고, 방향을 가리키는데, 북쪽이었다.

“북한군인가 중공군인가?”

“중공군 같아 보였습니다”

“숫자는 몇 명이나 되던가?”

“많았습니다. 대략 200명 정도는 족히 될 것 같습니다” 캐시어스 상병의 말을 듣는 순간 두려움이 모두에게 임했다. 즉시 피우던 담배를 걸터앉은 돌 위에 짓눌러 끄고는 꽁초를 중지의 힘으로 휙 튕겨버린다. “어떡할까요? 소대장님”

“정확하게 어디쯤 오고 있었나?”

“냇가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쯤 마을 입구에 다다랐겠구나?”

“아마 그럴 겁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일단 몸을 피하자”

“아까 수색하면서 한 곳을 봤는데 네 사람 정도 몸을 숨기기에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해리슨 병장이 의견을 낸다.

“좋아 그럼 빨리 그곳으로 피하자” 달려간 곳은 비교적 넓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도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는 그런 집이었다. 큰방과 작은 방 부엌이 함께 있었다. 약간 옆에 외양간과 사랑방과 소죽을 끓이는 아주 큰 가마솥의 사랑채가 있었다. 뒷간과 돼지우리와 물건들을 저장하는 광과 곡식들을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 이렇게 세 군데로 나뉘어있었다. 대원들이 숨은 곳은 바로 돼지우리 위 장작들을 쪼개어 건조하며 보관하던 선반 너머로 해서 몸을 숨겼다. 선반 바닥은 곡식 창고의 지붕이 되는데 밖에서 봤을 때는 이런 공간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해리슨 병장이 한국문화를 잘 알지도 못할 텐데, 그래도 위기의 순간이 닥치자 이 장소가 몸을 숨기기에는 안전하다고, 생각이 들었나 보다. 네 사람은 반듯하게 누웠다. 잠시 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불과 몇 시간 전 넬슨 대원들이 집집마다 수색을 한 것처럼 저들도 무리 지어 수색을 시작한다.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대원들이 누워 있는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본채와 사랑채의 문들을 꽝꽝 거칠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 두 사람은 저쪽도 좀 살펴봐라” 선임으로 보이는 이가 아직 군복이 신병티를 벗어나지 못해 어딘가 어색한 사병 둘에게 손으로 미군들이 숨어있는 곳을 가리킨다.

“예 알겠습니다.”

선반 너머로 숨을 죽이며 웅크리고 누워 있는 네 사람은 적군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직감적으로 이곳을 수색하라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두어 사람의 발소리가 장작 더미를 넘어 얇은 판자의 경계까지 다다랐다.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것처럼 몸은 굳어있었고, 서로 눈동자조차 돌아가지 않았다. 총구로 판자를 툭툭 쳤다. 혹시 속에 뭐라도 들어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만약 뭔가 닫은 것같이 둔탁한 소리가 나면 기어이 안을 확인해 봤을 것이다. 다행히 소리는 무겁지 않고 가벼웠다. 대원들의 군화 바닥이 판자와 떨어져서 총구 끝으로 전달되는 느낌이 합판 너머의 공간은 어둡고 비어있다고 판단했다.

“이상 없습니다.” 수색하던 병사가 큰소리로 외친다. 상병 캐시어스가 더는 참기 어려웠던지, 폭발하듯 한숨이 푸우~하고 요란하게 품어져 나오는데 아래 광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급히 넬슨이 캐시어스의 입을 손으로 막는다. 지금 미군 병사들은 광 위 천정에 누워 있다. 창고는 모두 나무합판으로 되어있어서 수색하는 적군의 발걸음 소리뿐만 아니라 디딜 때마다 진동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물론 대원들이내는 움직임이나 작은 소리조차도 아래서는 그대로 들린다. 북한군은 한쪽발을 들어 군화 뒤꿈치로 바닥을 꿍꿍 이곳저곳을 눌러보기도 하고 개 머리 판으로 천정의 이곳저곳을 툭툭 올려치며 나름 특이점을 찾으려고 한다. 조금 전 그 선임병이

“왜 뭐가 이상해?” 텅 빈 그래서 이상 할 것도 전혀 없어 보이는 창고에서 나오지 않고 뭔가 이상한 것처럼 제스처를 취하니까 핀잔 섞인 어투로 물어본 것이다.

“아 아닙니다. 이상 없습니다” 멋쩍은 듯 황급히 뛰어나간다. 미군들은 죽음과도 같은 긴장으로 인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숨조차도 자유롭게 쉬지 못하는 것이 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육신의 생리적 현상들은 많은 수의 적군들로 인해 이미 그 기능들을 상실한 것처럼 아무 느낌도 없다. 그렇게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가 했더니 이게 웬일인가. 적군들은 대원들이 숨어있는 이 집이 크고 비교적 보전이 잘되어있기도 하고 또 가마솥도 있어서 그나마 여기가 다른 집보다 낫다고 의견을 모았다. 수색을 마친 일 백여명의 병사들이 하나둘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가까이서 들리는 웅성대는 소리로 봐서 적군의 수는 가늠하지 못할 만큼 많게 느껴졌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중공 군인들의 생소한 언어는 사방이 막혀있는 어둠 속에서 더욱 두려웠다. 말의 톤이 대체로 높아서 무척 시끄럽게 들리고 어수선한 분위기 덕에 미군들은 각자 경직돼있던, 몸을 조금씩 돌려 자세를 바꾸기도 하고 귓속말보다 더 낮게 말하지만, 충분히 들리고도 남았다.

“소대장님 야간에 모두가 잠든 틈을 이용하여 탈출을 하면 어떨까요? 더 이상 버티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해리슨 병장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스탁턴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적군이 몇 명인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데 탈출이라니 소대장님 불가능합니다”

“내가 판단을 내릴 때까지 잠잠이 기다려. 지금은 탈출도 그렇다고 여기서 이렇게 있는 것도 몹시 힘들다. 어둠이 내린 다음 중공군의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결정하겠다” 소대장의 말에 모두 공감하는 눈치다. 바로 그때 중공군 두 병사가 대화하며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서로 입으로 손가락을 갖다 대며, 또 한 번 숨을 죽인다. “힘들고 귀찮은 것은 우리만 시키냐 아 참 오늘 야간이동하는 거야?” 아까 이곳을 수색했던 두 신병이었다.

“그러게 오늘 밤에 행군할지 내일 출발할지 아직 몰라?” 낮에 봐둔 장작을 한 아름 안고는 사랑채 가마솥이 걸려있는 아궁이로 나른다. 두 사람이 네번에 거쳐서 남김없이 모두 날랐다.

장작이 쌓여 있을 때는 선반 안쪽 합판 너머가 보호를 받았지만, 장작이 없으면 딛고 올라서서 지금 넬슨 대원들이 숨어있는 안쪽을 쉽게 드려다 볼 수 있어서 발각되기가 쉬웠다. 다행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고, 이미 수색을 마쳐서 누구 하나 창고동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넬슨 소위가 제럴드중대장이 생각이 났는지 조용히 입을 연다.

“혹시 중공군들이 중대장님을 포로로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포로들은 남하하는데, 걸림이 되기 때문에 붙잡혔으면, 이미 북송당했을 겁니다”

순간 넬슨 소위의 표정이 무겁다. 벌써 시간이 상당하게 흘렀고 몸은 부상까지 입었으니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중공군들은 여전히 말소리가 줄어들지 않고 톤도 낮아질 줄을 모른다. 저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혹 중대장의 행방을 알 수도 있을 텐데

“중공군의 말소리가 줄어든 것을 기화로 이곳을 빠져나간다” 소대장은 저들이 잠들었을 때 비로소 말을 멈출 것이고 그때 탈출하자는 것이다.

중공군은 하나둘 분대별로 나누더니 비교적 적당한 곳들을 선택하여 무리 지어 이동한다. 자정이 가까 왔을 때 거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간간히 보초병들의 담소정도만 들리는 정도다. 소대장이 먼저 몸을 일으켜 세운다.

“해리슨 병장 자네가 앞장서게”

“예 알겠습니다” 죽음과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병들은 또 생명과 맞바꾸는 모험을 감내해야 했다. 만약 창고 천장에서 날이 밝아 올 때까지 계속 숨어있으면, 발각될 가능성이 다 분했다. 우선 대원들이 피말리는 초긴장 상태를 몇 시간씩 무슨 스포츠도 아니고 견뎌내기란 아마 힘들 것이다. 소대장 자신도 이런 상황이 조금만 더 지속 된다면 미칠 것만 같았고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불안하기까지 했다. 해리슨 병장이 먼저 조심스럽게 마당 반대편 달빛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캐시어스가 그 뒤를 따르고 스탁턴 병장이 창고에서 막 나오는데 중공군 당번병이 순찰을 돌다가 마침 창고 옆으로 와서 벽에다 소피를 본다. 잠시 후 담배를 피우기 위해 성냥에 불을 붙이는 순간 담벼락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스탁턴과 눈이 마주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한곳에서 미군을 보고 몸이 굳은 듯 어찌할 줄을 모른다. 이때 전광석화같이 스탁턴의 왼손은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대검을 쥔 오른손은 적군의 옆구리에서 번쩍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소대장과 재빨리 시체를 자기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옮긴다. 마음이 초조하고 다급했다. 적군이 시체를 발견하는 날에는 모두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담을 넘어 세 군데나 설치된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어두움 속을 바람처럼 이동한다. 20분쯤 지났을까? 마을 외곾을 거의 빠져나올 무렵 고요한 어둠을 뚫고 중공군의 비상을 알리는 싸이렌이 길게 울린다. 근무자가 교대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적군의 야습으로 판단하여 비상을 울린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호각소리로 인해 중공군 진지는 마치 벌집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총성 한번 울리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니... 넬슨과 대원들은 황급히 깊은 산속으로 몸을 숨긴다.

중공군은 새벽녘이 되어서 01시에서 02시 근무자 한 사람만 없어진 줄을 확인했다. 탈영은 아닐 것이란 확신 가운데 다시 수색에 나섰고 얼마 못되어 시신을 발견했다. 담벼락 밑에 젖은 피와 옮기면서 흘러내린 핏자국들을 보고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2.

 

한 번 잠에서 깬 제럴드 중위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떠보니 방안은 바뀐 것은 없었고 머리맡에 물 주전자와 컵이 쟁반에 놓여있었다. 겨우 몸을 가누어 앉고는 물을 두컵 정도 마셨을 때 괘종시계가 땡땡 일곱 번을 울린다. 제럴드는 지금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왔는지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주인은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똑똑 당황 되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들어왔다.

“잘 주무셨어요?” 제럴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나름 고마움을 표한다.

여성은 몇 마디 말을 건네지만, 상대가 아무 반응이 없자 큰소리로 누군가를 부른다.

“네 알았어요”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이십대 초반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영어로 인사를 건넨다. 이런 시골에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뜻밖이었다. 의아한 듯 제럴드는 한참 동안 아가씨를 바라본다.

“이렇게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이름은 존 윈스턴 제럴드 미 육군 중위입니다”

“저는 김영원입니다” 영원은 이곳 양주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이곳 고향에서 함께 자랐고, 엄마는 바로 위 오빠 친구인 영원의 아빠를 어릴 때부터 잘도 따랐다. 영원의 아빠는 군대를 제대한 다음 시골에서 농사짓기를 원하시는 부모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상경하셨다. 이유는 농사일이 본인하고는 체질상 잘 맞지 않아서였다. 서울에서 가장 큰 미곡처리장의 장부 정리 일로 취직이 되면서 그때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하셨다. 일본의 탄압이 극심할 때 혼인하지 않은 조선 여자들은 언제 위안부로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시기에 영원의 외조부님은 딸의 혼사를 서두르셨다. 이웃 동네에서 한두 번 청혼이 들어왔으나 엄마는 만나보기도 전에 완강하게 거절하셨고, 이유를 모르는 부모님은 딸을 심하게 혼내셨다. 부모님께는 차마 말은 못 하고 오빠에게 조용히 속을 내 비취셨다. 오빠는 다음날 바로 서울로 올라와 영원의 아빠를 만났고, 일주일이 지난 다음 원영의 외삼촌은 엄마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딸의 마음이 확고함을 알고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셨다. 집안의 큰 반대 없이 혼인하였고 첫 자녀로 영원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여 여자로서는 드물게 영어를 전공하였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여 마침내 부모님의 고향인 이곳으로 첫 발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 년 남짓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만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난리 통에 학교는 학업을 중단하고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애국심이 강한 일부 남학생들은 스스로 학도의용병으로 참여해 무기를 받고 적과 대치 중 안타깝게 최후를 맞이한 학생들도 많았다.

“제가 여기온지 얼마나 됐나요?”

“오늘이 3일 됐습니다. 우리 집 앞에 쓰러져있는 것을 저희 엄마가 처음 발견하셨어요. 물론 의식도 없었고요.”

“아 그랬었군요”

“3일 동안 거의 주무시기만 했습니다”

‘아 3일씩이나’ 불현듯 부대원들이 생각이 났다.

“생각보다 중위님의 상처가 깊습니다. 꿰매어야, 될 정도로 깊고 범위가 넓은 것 같습니다. 적당한 치료제가 없어 붕대만 감아 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실과 바늘 있나요?”

“의료용 바늘은 있지 않습니다”

“그냥 바늘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하려고요?”

“상처를 꿰매려고 합니다”

“집에 약과 꿰맬 수 있는 의료도구는 전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실과 바늘만 주세요”

제럴드는 영원의 도움을 받아 붕대를 풀어 상처를 꿰맬 준비를 한다.

상처는 워낙 깊고 길게 찢기어 있어서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군인으로 상처 입은 환자이지만 남자의 탈의 된 상체를 보는 것이 쑥스러운 듯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한다. 평소 비위가 약한 어머니는 고깃덩어리같이 빨간 살 속을 보자 구역질부터 나와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는 수없이 원영이 제럴드의 왼편에서 치료를 도운다.

“엄마! 물을 따뜻하게 데워 주세요” 피묻은 상처를 닦아내고 또 세균으로 인한 감염을 막기 위해서였다.

제럴드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주고는 차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돌린다.

제럴드는 마취제 없이 갈라진 틈을 꿰매고 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균에 쉽게 오염되고 또 잘못되면 염증으로 인해 진물과 고름이 생기고 살이 썩어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도 시절에 귀에 따갑도록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출혈이 심했다. 영원은 지금까지 이런 광경은 처음 이었다. 마취나 간단한 의료 조치도 없이 자신의 살을 꿰매는 제럴드는 아픈 표정이나 신음도 거의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흐트러짐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제럴드에게 진정한 군인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영원은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봤다. 뜨거운 물에 수건을 짜고는 흘러내리는 피와 진물을 닦아낸다.

제럴드의 이마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굵은 바늘로 생살을 꿰매놨으니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이 몰려온다.

영원은 상처에 소독제를 바르고 다시 붕대를 어깨와 가슴둘레로 길게 감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중위님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엄마 들어오세요. 다 끝났어요”

어머니는 방에 들어오자 그저 놀랍고 신기한 듯 안지도 않고 제럴드를 내려다본다.

“서양 사람들은 바늘에 찔려도 안 아픈가 봐”

“많이 아프지요. 다 같은 사람인데”

“그런데 어떻게 아야, 소리도 안 낼 수가 있나 참 별일이네”

영원의 어머니는 빨간 핏물이 대야 가득 담긴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저의 군복하고, 군화는 어디 있습니까?”

“군화는 밖에 있고 군복은 빨아 걸어뒀습니다”

“최근에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다녀갔나요?”

“아니요”

“근래 다녀간 적은 없습니까?”

“최근 들어서는 없습니다”

순간 제럴드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몹시 어두워진다.

“왜 그러세요?”

“만약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다녀가지 않았다면 수일 내에 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네에?”

“우선 저의 군복과 군화를 빨리 숨기시고 여차하면 피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유엔군들이 북으로 진격하지 않으셨나요?” 영원이 제럴드를 똑바로바라보며 묻는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했으나,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밀려 남하 중입니다”

“그럼 어떡하죠?”

“우리도 피난을 가야 하나요?”

“서둘러 떠나야 됩니다”

마침 이웃집 총각 광택이가 영원의 집앞을 지나며 고개를 힐긋 돌려 안을 들여다보고는 영원이 낯선 미군과 함께 있는 것이 못마땅한 듯 휙 돌아서 간다.

영원이 급히 뛰어나가 광택이를 부르는데 “광택씨~ ” 광택이 못 들은 척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데, 영원이 다시 큰소리로 “광택씨~ 광택씨 ~” 하고 부른다. 광택이 그 재서야 겨우 뒤를 돌아보며

“왜 그러세요?” 하고 입술을 삐죽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무슨 화나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몇 번씩 불러도 그냥 가고”

“아무 일 없어요” 광택이 여전히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혹시 시내 다녀오는 길이세요?”

“그런데요?”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나요?”

“글쎄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예 알겠습니다”

“왜 중공군이 온대요?”

“아 아닙니다”

광택은 영원과 한마을에 사는 청년으로 영원이 처음 학교 선생으로 부임해 오면서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언제부턴가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런 영원이 제럴드와 함께 있는 것이 몹시 거슬릴 수밖에 집에 도착해서는 다짜고짜 막걸리를 찾는데 대낮부터 왠 술이냐며 이유를 묻는 어머니에게 분이 풀리지 않자 행패를 부린다.

 

제럴드와 영원은 뒷동산 느티나무 아래 둥근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제럴드는 이렇게 한국 사람과 대화를 해보기는 거의 처음이었다. 통역병을 통해 주고받은 말은 작전과 전쟁용어들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등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나무가 무척 크네요” 제럴드가 먼저 말문을 연다.

“느티나무라고 해요 더운 여름 사람들에게 그늘을 선물하죠”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나무가 있어요”

“어떤 나무인데요?”

“오크나무! 들어봤어요?”

“오크나무? 글쎄요”

“크고 잎들이 무성하죠.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쉬기를 좋아해요”

“아 그렇군요. 중위님 고향은 어디세요?”

“캘리포니아입니다”

“금문교로 유명한 그곳 말인가요?”

“네 맞아요.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죠. 바로 저의 고향입니다”

“정말 좋은 곳에서 태어나셨네요. 미국은 짧은 역사에 비해 이루어놓은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조국이 자랑스럽습니다”

“고향에는 부모님과 또 누가 있어요?”

“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많이 보고 싶겠어요?”

“네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많이 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영원은 순간 제럴드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촉촉이 젖어 나옴을 보았다. 민주주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서 그것도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전한 제럴드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애틋한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 새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가까이에서 들리는 새 울음소리가 신기하듯 제럴드가 묻는다.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운다. 이상하게 다른 새소리는 잘도 들리는데 정작 듣고자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새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이 한동안 울지 않고 잠잠했다. 약간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을 무렵 때마침 ‘호’자를 휘파람으로 불듯 ‘호 호 호 호’하고 4음절로 나름 리듬을 탄다. 몇 번 연속해서 들으니 마지막 음절은 앞의 음보다 조금 낮고 약간 길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랫소리는 두 사람의 기분까지 좋게 해주었다.

“맞아요. 이 소리였어요.” 제럴드는 오른손 검지를 허공에 대고 소리나는 방향을 가리킨다.

“검은등뻐꾸기입니다.” 영원은 의외로 쉽게 대답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 울음소리가 특이해서 어떤 새일까 궁금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수업시간에 우리 마을에 서식하는 새를 비롯한 동물, 식물들의 이름을 영어로 숙제를 냈던 적이 있었어요. 한 학생이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를 구분해서 제출했는데 특색을 물어보니 울음소리를 들려주어서 쉽게 구분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름도 울음소리도 처음 들어보는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는 예쁜 꽃들도 많고 새들의 지저귐도 아름답습니다.” 제럴드는 마치 색다른 경험을 한 듯이 고개를 쳐들고 빙그르르 둘러본다.

“미국에서는 들어보기 힘들 거예요. 계절에 따라 우리나라를 거쳐 러시아 동남부와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등으로 이동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우리 미국에도 아름다운 새들이 많이 찾아 왔으면 좋겠네요.”

“아마 전쟁이 끝나면 중위님 바람대로 미국에도 아름다운 새소리가 울려 퍼질 거예요.”

“아! 그럴까요? 하하하”

“호호호”

조금 부끄러운 듯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곳에 두다가 또 어느 순간에 서로를 뚫어지게 살피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지금이 전시상황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화로워 보였다.

“중위님은 왜 군인의 길을 선택하셨어요?”

“저의 집은 대대로 군인 집안입니다. 5대조 할아버지는 남북전쟁에서 남군 대령으로 군대를 지휘하셨고 할아버지 또한 1898년 미국과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전하셨어요.” 먼 이국땅에서 뜻하지 않게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하게 되어 감개 한지 잠시 말을 멈춘다.

“와 대단하시네요. 그럼 아버님도?”

“네 아버님도 1차대전에 보병으로 참전하셨습니다.” 제럴드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간다.

“어릴 때 우리 형제들은 할아버지로부터 군인시절 무용담을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남자들은 군대를 반드시 다녀와야 했고, 또 복무기간 중 미국이 개입된 전쟁은 꼭 참전하기를 종용하셨어요. 그래서 할머니하고도 많이 다투셨죠.” 영원이 놀란 듯

“왜요? 왜 할머니하고 다퉈요?” 제럴드가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듯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는 아들도 또 이제 손자들도 다 군대를 가게하고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으니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가 미울 수밖에요.” 영원도 이해가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럴드도 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 못하는 것은 또 아니에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위기의 순간이 올 때는 젊은 사람이든 누구든 간에 예외가 없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그래도 전쟁터로 기꺼이 나아가는 것은 ,,,, 저는 어디까지나 할머니 편입니다.” 영원이 손을 들고 외치자 둘 사이에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어쩌면 군인의 길이 가장 자연스러운 길인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중위님에게는 말입니다.” 약간 경직된듯한 표정의 제럴드는

“네 맞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는 여러, 자녀들, 중에 웨스트포인트를 누군가는 나와 주기를 기대하셨지요. 자녀들이 뜻대로 잘 따라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기대를 거두지 않으셨죠.”

“웨스트포인트는 뭐예요? 혹시 군사 학교 같은 곳인가요?”

“육군사관학교를 말합니다.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시에 있어서 흔히 웨스트포인트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장군들이 거의 이곳 출신들이죠. 이번 인천상륙작전을 펼친 맥아더 원수도 이곳 출신이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 아이젠하워, 패튼장군등 수많은, 별들을 탄생시켰죠”

“그럼 중위님도 웨스트포인트 출신인가요?” 제럴드는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영원을 바라보며

“네 그렇습니다.” 나지막하고 짧게 대답했다.

영원도 제럴드가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고 느꼈지만, 육군사관학교 출신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왠지 그의 군인다움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마치 선조들의 용맹한 디엔에이를 고스란히 받은 것 같다.

영원이 갑자기 무엇이 궁금한지 “제럴드! 중위님!” 하고 부른다.

“네” 영원이 아무 말이 없자.

“말씀하세요.” 영원이 대뜸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럴드를 보며 말한다.

“교회당 가운데로 손잡고 걸어갈 사람은 있어요?”

순간 제럴드는 영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교회당 가운데로 손잡고 걸어갈 사람? 이게 무슨 뜻이지?’ 한두 번 되뇌더니 금방 알아차렸다. 영원의 재치에 놀랍다는 듯 제럴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웨스트포인트의 빡빡한 일정은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4년간의 학업을 마침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지요. 연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제럴드는 왼쪽 어깨의 통증으로 자세가 불편한 듯 몸을 굽혔다 폈다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영원이 제럴드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묻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한 자세로 오래 있다 보니 꿰맨 자리가 눌린 것 같은 통증이 느껴져서요.”

“상처는 괜찮을까요?”

“당분간 물을 조심하면 괜찮을 겁니다.”

“아까는 많이 놀랐습니다.”

“왜요?” 제럴드는 커다랗고 둥근 눈으로 영원을 바라며

“바늘로 직접 치료한 것 때문에요? 사실은 그 이후가 더 아팠어요.”

“네! 꿰매는 것도 무서웠고, 아프다는 표정이나 소리도 내지 않아서 더 놀랐습니다.” 영원이 제럴드와 눈을 맞추고는

“중위님 많이 아프셨죠? 하지만 제가 옆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 아닙니다. 우선 부상당 한 저를 거두어 주시고 또 간호해 주셨습니다. 아마 미국에 돌아가서도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영원씨와 어머니께 이미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럴드의 꾸밈없는 마음은 영원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 중위님은 고향을 떠나 먼 이국땅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당과 전쟁을 치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찌 보면 저희가 중위님께 큰 은혜를 입었지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럴드의 말은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래도 힘이 있었다.

“중위님! 언제쯤 이 전쟁은 끝이 날까요? 하루빨리 이 땅에도 평화가 찾아 왔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적어도 학생들이 전쟁터로 내몰리는 일은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럴드가 영원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금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전쟁은 중공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복잡하게 꼬여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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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씨는 여성으로서 드물게 대학을 졸업하시고 영어를 전공하셨는데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지요?” 제럴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 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고 모든 부분에서 특히 여성이 교육을 받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부터 이 부분이 몹시 궁금했었다.

지난 시절 기억들을 떠올리는 영원의 얼굴은 어느새 행복 가득한 미소로 젖어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교시는 대부분 담임선생님과 학생들이 서로 교감하는 시간을 갖는데 공교롭게도 영어 선생님이셨어요. 중학교 진학하고 난 다음 비로소 영어를 배우니까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기에 무척 늦었지요. 그래도 영어의 매력에 푹 빠져 영어를 전공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뜻을 정하기까지는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담임선생님의 영향이라뇨?”

“선생님은 그 시절 드물게 외국 유학을 다녀오신 엘리트이셨지요. 일본을 거쳐, 미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는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조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열정을 쏟으셨어요. 선생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요. 한국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서 교육으로 뜻을 정하셨대요.” 흥미로운 듯 잠자코 듣고 있던 제럴드가

“그럼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공부는 처음부터 영어가 아니었어요?”

“선생님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려야겠어요.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예술에 조예가 깊었어요. 특히 화가를 꿈꿨지요. 그것도 서양화가를요. 그런데 한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어요. 한계에 부치자 유학을 결심하셨어요. 먼저 일본에서 공부한 다음 프랑스로 건너갈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일본에서 1년 동안 대학을 다니셨고, 애초 계획한 대로 프랑스 S대학에 입학절차를 끝내고 프랑스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는 동안에도 고국으로 나오지 않고 계속 일본에 남아 공부를 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부족한 科目(과목)과 이론을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대여섯 명의 불량배로 보이는 사람들이 몽둥이로 한 사람을 심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어요. 구타당하고 있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한국인이었대요. 순간 모른 체하고 지나갈까? 아니면 그만하도록 말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사람 살려” 하고 끔찍한 비명 소리를 내지르자 차마 같은 동포로서 외면, 할 수가 없었대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을 말리는데 잠시 후 그들은 선생님이 한국 사람임을 알고 “너도 조센징이구나 잘 됐다. 오늘 같이 죽어봐라” 하고 선생님도 덩달아 몽둥이, 찜질을 당하셨어요. 머리를 감싼 손위로 계속해서 몽둥이가 날아들고 그만 오른손 손목뼈가 부러지고 말았어요. 직접 병원을 찾아가 문을 두드려 보아도 받아주지를 않더래요. 시간이 늦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한국 사람인 줄 알고 거절당하셨대요. 그렇게 다섯 번째 병원에서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두 달간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한번 손상된 기능과 감각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섬세했던 손은 떨리기 시작했고,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경찰서에서 폭행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지만 피해 사실이 분명한데도 사건의 발단은 오히려 조센징에게 있다고 혐의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또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이나 치료비조차도 받지 못하자 심한 회의가 찾아 왔어요.

‘조국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지 이미 오래고 주권을 상실한 국민은 마치 난민처럼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보호받지 못함을 개탄하셨지요. 이런 마당에 내게 무엇이 더 중요 할까? 그래도 예술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그것은 선생님의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고민이었고, 자신에 대한 냉정한 물음이기도 하셨어요.

‘내가, 추구하던 공부를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로 성공했다고 하자. 그런데 내게 祖國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날이 후 선생님은 자신을 위한 공부보다는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로 가고자 했던 계획을 미국으로 바꾸고 일본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발전된 미국을 보며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예술 특히 화가로서의 뜻을 접었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전혀 새로운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것은 고국의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우리말과 우리글을 빼앗기고 희망없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한국의 교육을 위해서 자신을 바칠 것을 다짐하셨답니다.

“아~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시네요.” 제럴드는 감탄을 자아낸다.

“일본에 의해 오래도록 한국 사람들이 고초를 당한 정도밖에는 잘 몰랐어요. 물론 그 부분도 온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겠죠.”

“1910년 일본은 본격적인 국권침탈이 있기 전부터 우리나라를 많이 괴롭혔어요.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국외에서 활동을 많이 했어요.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불살랐지요.”

“워낙 유명한 사건들이어서 그분들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것 같아요.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선생님도 국민들이 배움이 없이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학생들 교육에 헌신하신 것도 당시로써는 하나의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지요.”

“네 중위님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은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먼 이국에서 온 청년 장교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쁘고, 제럴드 또한 한국의 근현대사가 궁금했는데 마침 영원에게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의 역사는 언제 들어도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 난 것도 잠시 지금은 같은 민족끼리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으니...”

제럴드의 말에 영원도 현실이 안타까운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다.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 하고 두 사람 모두 같은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드러나게 말은 못 해도 결국 전쟁으로 인해 이렇게 만나게 되지 않았는가. 운명적 만남을 위해 전쟁을 핑계 삼으면, 안 되겠지 만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서로를 향해 ...

특히 제럴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운명적이었음을 직감했다. 제럴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영원씨는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영원은 뜻밖의 물음에 약간은 흥분한 듯 뜻 모를 미소만 내뿜는다. ‘운명’ 지금 이 순간은 생각만 해도 설레었다.

“글쎄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중위님은 운명이 있다고 믿어요?” 하고 반문하는 영원의 표정은 오히려 지독하게 믿는 눈치였다.

“저도 아직 인생이 그리 길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우연히 저절로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영원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그의 눈은 빛났다.

“그러면 중위님은 이 모든 일을 운명이라고 믿는가요?” 진지한 눈빛으로 제럴드를 바라본다. 제럴드 또한 시선을 영원에게 집중했다.

“글쎄요? 그렇다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 ” 제럴드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잠시 생각한 다음 말을 이어간다.

“처음부터 한국으로 배치를 받은 것은 아니었어요.”

“네? 한국으로 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뜻인가요?” 영원이 말했다.

“네 한국으로 지원했지만, 미 국무성은 필리핀과 독일 두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그러다 최종적으로 독일로 확정됐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영원은 초롱한 눈으로 제럴드를 바라보며 묻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송기 계단에 막 발을 디딜 무렵 다급한 전갈이 도착했는데 한국으로 바뀌었다는 통보였습니다.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모두가 놀랐어요. 이번에는 할아버지도 강경하시지 않으셨죠. 목숨을 확신할 수 없는 치열한 전쟁터에 손자를 보내기란 자신이 참전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어요.”

“아무렴 왜 그렇지않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손자는 당신의 목숨만큼이나 더 귀한 존재인데요. 그런데 독일에서 한국으로 그것도 급하게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한국전쟁이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어요. 그런데 전쟁발발 일주일이 체 못되어 남한의 대부분이 적군의 손아귀에 넘어간 사실을 알았어요. 미국과 유엔은 그제야 겨우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다른 나라에 급파할 병역들을 한국으로 급히 돌리게 되었지요.” 제럴드는 말없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영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못되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다음 질풍노도같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사실은 영원씨도 잘 알고 있지요.” 영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저의 중대도 대부분 이 앞 전 전투에서 거의 다 전사했어요. 그래도 몇몇 대원은 생존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제럴드는 괴로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혼자 남은 것이 이렇게 고통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먼저 간 대원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제럴드를 향해 영원이 그의 어깨에 살며시 몸을 기댄다. 그리고 부러운 손으로 그의 팔을 감싼다.

“중위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병사들이 어디선가 중위님을 찾고있는 지도 모르잖아요.” 영원의 말은 내면의 통증같이 괴로운 제럴드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말없이 영원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예민한 감각의 부드러움이나 이성의 불장난같이 소름 돋는 전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오래도록 아니 영원히 영원히 그대에게 고마움을 간직합니다.”

제럴드는 마치 고백하듯 말하고 사랑스럽게 영원을 바라보았다. 제럴드를 바라보는 영원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빗물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왜? 눈물이 사춘기 소녀처럼 왈칵 쏟아졌을까?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제럴드도 영원을 향해 무엇인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솟아올랐다.

그것이 사랑일까? 처음 느껴보는 마음들이 가슴속에서 마구마구 솟아오르다 못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사랑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을에서 탕 탕 탕~ 하고 총성이 울려 퍼진다. 순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은 안 해도 동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하고도 남았다.

“중위님 무슨 일일까요?” 영원이 불안한 듯 제럴드에게 묻는다.

“총소리로 봐서 소련제 소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북한군이 마을로 들어왔다는 것인가요?”

“글쎄요 자세한 것은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아요.”

한 번의 총성은 공기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두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혹시 모를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의식해 영원이 아는 잘 다니지 않는 샛길로 제럴드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큰 연기가 동네 중앙쯤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영원과 제럴드는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을 확신했다.

“중위님 혹시 모르니까 제가 살펴보고 올 께요.”

“괜찮겠어요?” 제럴드는 영원을 혼자 보내기가 몹시 불안했던지

“영원씨 아무래도 내가 다녀오는 것이 좋겠어요.”

“혹시 북한군이라도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니까 내가 가서 살펴봐야지요.” 제럴드는 민첩하게 숲속으로 사라진다. 영원은 제럴드에게 무슨 일이라도 미칠까 봐 불안했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제럴드가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중위님 어떻게 됐어요? 예상했던 대로인가요?”

“네 예상했던 대로 북한군입니다.” 제럴드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영원씨 일단 집으로 들어가서 어머니와 함께 계세요.”

“중위님은요?”

“만약 같이 있는 것이 발각되면 어머니도 영원씨도 잘 못 될 수 있어요. 나는 주변에 숨어서 동태를 살피다가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 들어가겠습니다.” 영원은 걱정이 앞선다. 혹 자신의 집에 미군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도리가 없다. 언제까지나 숨어있을 수도 없고 갑자기 사람이 없어진 줄 알면 괜히 의심만 가중될 뿐이 아닌가. 용기를 내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집에는 마침 어머니가 계셨다.

“엄마! 괜찮으세요?” 엄마는 영원을 보자 화들짝 놀란다.

“애야 어디 있었느냐?” 엄마는 영원이 북한군에게 붙잡혀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중위님과 함께 있었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래 그 미군은 지금 어디 있느냐?”

“북한군들이 마을에 들이닥친 줄 알고 잠시 몸을 숨기고 있어요.”

“그러잖아도 북한군들이 집집마다 뭘 찾는 것처럼 구석구석 살펴보더라.”

“혹시 우리 집도 다녀갔어요?”

“다행히 우리 집은 휘~익 둘러보더니 그냥 지나갔다.”

“정말 다행이네요. 빨리 중위님의 옷과 물품들을 어디다 숨겨야겠어요.”

“아침에 그 양반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라고 해서 일단 숨겨놨다.”

“네 잘 하셨어요.”

“그런데 북한군들이 몇몇 사람들을 학교에 붙들어 놓고 있다는데 무슨 일일까?”

“네?” 영원이 화들짝 놀라서 어머니께 다시 묻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무슨 일로 잡혀갔다는 거예요?”

“아 글쎄 북한군들이 윗마을을 먼저들이 닥쳐 몇몇 사람을 포박하여 가고 그리고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는 광택이하고 정호, 상근, 동호 하고 영수도 포박은 안 했지만 데리고 갔단다.”

“아니 동호하고 영수는 국민 학생인데 그럼 초등학생들도 잡아갔어요?” 영원이 비통한 얼굴을 하고

“아무래도 학교로 가봐야겠어요. 어머니!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될 것 같아요” 딸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영원의 팔을 강하게 붙들고 만류한다.

“이것아 그곳이 어디라고 시방 그곳을 간다는 거여” 영원의 어머니는 거의 울음과 애원이 섞인 목소리로 영원을 잡아끌고 앉힌다.

“그럼 애들이 잡혀갔다는데 어떡해요.”

“이것아 빨갱이 놈들이 어른아이 가려서 잡아간 다냐. 그리고 너를 온전히 놔둘성 싶어 어림도 없는 소리 집밖으로 나갈 생각 말고 조용히 집안에 가만히 있다가 북한군이 물러 가고난 다음 밖으로 나올 생각해” 영원의 어머니는 강제로 딸의 팔을 끌고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답답하다. 아까 총성은 무엇이고 도대체 북한군은 마을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잡아갔을까?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순간 영원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혹시 ‘제럴드’ 때문이 아닐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3

 

한편 넬슨 소대장 일행은 중공군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중대장 제럴드의 행방을 쫓고 있다.

“소대장님 조금 쉬었다 가지요.” 캐시어스 상병이 말했다. 그의 소총은 기관총으로 다른 병사들보다 무거웠다.

“그럼 잠시 쉬었다 가지” 다들 지치고 피곤하여 각자 큰 나무를 등받이로 기대고 철모와 소총을 내려놓고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동안 아무 말들이 없다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소대장 넬슨 주위로 몰려든다. 넬슨은 지도를 꺼내어 현 위치와 주변의 정세를 살핀다.

반경 20킬로 내외를 설정하여 중대장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선택하여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넬슨 소대장은 지나온 마을들을 체크 해가면서 다음 동리를 물색한다. 남은 네 명의 병사들로 분산해서 살펴보기에는 아무래도 위험이 따르고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현재로서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같이 살펴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소대장님!” 해리슨 병장이 입을 열었다.

“말해보게” 해리슨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듯 시선은 특정한 한곳을 고정하고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 뭔가 확신 없는 표정과 목적 없는 사람처럼 꽤 심신이 지쳐 보인다.

“맥아더 원수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갈때는 전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 가족들의 품으로 날아 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의 개입과 소련의 현대식 군수물자를 지원받은 북한에 의해 서울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다 또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에 의해 겨우 서울을 재탈환했는데 소대장님은 과연 이 전쟁이 끝이 날까요?” 해리슨의 말은 질문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아마 전 연합군 모두의 공통된 물음일지도 모른다. 넬슨 소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 상급자가 있으면 해리슨과 동일 한 질문을 마치 푸념처럼 널려 놓았을 것이다.

넬슨이 조용히 입을 연다.

“나도 이 부분이 제일 궁금하네. 과연 이 전쟁은 언제쯤 끝이 날까? 만약 맥아더 원수를 만나기만 한다면,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다네 그래서 마음에 질문의 요지를 이미 오래전에 준비해 뒀지.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떠나서 전쟁의 종식 하다못해 전쟁의 휴전, 조차도 어찌 맥아더 원수 한 사람에게 달려있겠는가? 양측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밀어붙였다가 또 밀려 내려왔다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더 치러야만 끝이 날 텐가?” 소대장도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린다. 함께 했던 전우들이 먼저 죽고 적의 총탄이 언제 나의 가슴을 꿰뚫을지 알 수 없는 현실은 병사들로, 하여금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오는데 어찌나 예민한지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이다. 넬슨 소대장은 전쟁이 길어짐으로 행여나 대원들이 전투 의욕마저 상실할까 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해리슨이 다시 말을 잇는다.

“지난 폭격으로 중대원들을 거의 다 잃고 우리 네 사람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중대장님은 시신을 보지 못했으니 어딘가 살아있겠지만, 생존은 알 수 없고 부대도 부대원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솔직히 회의가 많이 듭니다. 두렵기도, 하구요.” 넬슨이 해리슨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눈빛은 다정한 눈빛이었고 소나기 같은 폭격에서 살아남아 이렇게 함께 있는 것에 대한 고맙고, 감사함도 녹아있는 눈빛이었다. 어깨를 다독여주며

“우리 모두 힘을 내자, 먼저 간 전우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나 대신 죽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거야 그러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지지 실제로 우리는 고국에 돌아가서도 먼저 간 전우들의 삶까지 몇 몫은 더 살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는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네 그렇습니다. 전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잘 살아야지요.” 해리슨의 말은 뜻밖이었다. 아니 감동적이기 까지했다. 지금까지 암울했던 마음은 살아야 할 이유로 분명해졌고, 전쟁도 향방 없는 싸움이 아님을 각자 마음속으로 확립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장병들의 얼굴은 생기가 돌았고, 소대장 넬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대원들의 밝아진 표정들을 보고는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가벼워졌다. 왠지 중대장 제럴드도 어딘가에서 부대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들 이리와 봐” 넬슨은 지도를 펼쳐놓고 수색한 마을과 하지 않은 마을들을 구분 지어 놓았다.

“가위 표시는 이미 우리가 지나온 곳들이고 점을 찍어놓은 곳은 그래도 지도에 나올 정도의 마을들이네.”

“한국의 특징은 지도에도 없는 조그마한 마을들이 오히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스탁턴 병장이 다음 장소를 어디를 선택하면 좋을지 신중하자는 뜻으로 한마디 거든다.

“앞의 마을을 그냥 지나치고 이 끝 마을을 먼저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중대장님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도 없고, 자 다음 마을로 이동하자.” 넬슨이 먼저 몸을 일으킨다. 한 시간 정도 행군하여 도착한 마을은 가구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젊은 사람은 피난을 갔는지 보이지 않고 늙은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미군들을 봐도 한두 번 쳐다보고는 반기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두려워하거나 피하여 숨는 것도 없었다. 아마 적군을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할아버지 왜 피난 안 가셨어요?” 넬슨이 새끼를 꼬고 있는 어떤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넨다. 물론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약간의 경계어린 눈으로 지그시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새끼꼬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병사들은 할아버지의 손놀림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할아버지의 손놀림으로 만들어지는 새끼의 용도가 궁금하여 물어 보지만 할아버지는 마치 ‘양놈들이 시방 뭐라는 겨’ 하는 표정으로 못 들은 척 아무 반응이 없다. 넬슨은 할아버지 곁에 앉은 다음 할아버지와 눈을 맞추고 손짓 발짓을 시도한다.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키고 반대편 손으로 땅바닥을 가리킨다.’ 즉 푸른 눈의 미군 병사가 이곳에 오지 않았느냐? 라는 말을 대신해서 손짓으로 전해 보지만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푸른 눈은 이곳에 온적이 없다는 것인지..... 느낌상 알아듣지 못하시는듯하다.

“캐시어스, 정찰을 다녀오게.”

“예? 이동하실 겁니까?”

넬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원들은 이번 마을에서도 특이점을 찾지 못하고 다음으로 이동한다.

정찰을 다녀온 캐시어스는 이상 없음을 보고했다.

 

“캐시어스 자네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라 했든가?”

“네, 맞습니다.”

넬슨 소대장은 캐시어스 상병과 나란히 걸으면서 먼저 말을 건넨다. 넬슨은 캐시어스의 어머니가 한국 사람인 것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보니 새삼 생각이 났나 보다.

“이번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는 사실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네. 막상 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가난한 데다 남북으로 나뉘기까지 했으니.... 그래 어머니는 어디 분이신가?”

“안타깝게도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캐시어스는 어머니의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지원했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럼 이곳이 어머니의 모국이 아니란 말인가?” 넬슨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놀란다.

“아닙니다. 소대장님 맞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 맞지만 태어나기는 하와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와이?” 걸음을 멈추고 캐시어스를 쳐다보며 묻는다.

“네, 하와이”

하와이라는 말에 이해가 잘되지 않는 듯 넬슨은 점점 궁금증이 더해간다.

“그 재미있구먼 이 조그만 나라에서 또 하와이라니 캐시어스 괜찮다면 어머니 얘기를 계속 좀 들려주게” 넬슨은 캐시어스 상병을 보며 말했다.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고 했을 때 우리 부대에서 상병 자네가 제일 먼저 지원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네.” 캐시어스는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가끔 고개를 떨구기도 하고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의 눈빛은 빛났다.

“늘 어머니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남과 북이 한쪽은 민주주의 또 다른 쪽은 공산주의로 갈라서서 전쟁을 벌인다고 하니 참전에 대해서는 길게 생각할 것이 못 되었습니다.” 캐시어스는 수통에서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옷소매로 입술을 쓱 문지른 다음 말을 계속 이어나간다.

“오래전부터 한국은 일본의 간섭으로 인해 살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00년대 초 무렵 이민정책을 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 당시 하와이는 사탕수수농장이 번성해서 자체 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19세기 중반 무렵 일본인과 중국인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점차 두 나라는 노동법을 앞세워 막노동인 농장일로 부려먹기는 불편하여 한국 사람을 쓰기로 했습니다. 어찌 보면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한국의 상황과 인력난을 겪고 있는 하와이 농장경영자의 상황이 잘 맞았다고 할 수 있죠. 일본을 거쳐 오랜 시간 배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한국인은 102명으로 최초의 이민자들입니다. 그 후 1905년까지 몇 차례 더 시도되었다가 일본에 의해 중단됐습니다. 어머니의 부모님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 들은 생전 처음 이억만리 먼 이국땅에서 천신만고 끝에 일자리를 얻어 생활했지만 모든 것이 열악했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혀가 빠지는 고된 일을 한마디 불평 없이 잘 견뎠는데도 농장주의 처우는 형편없었나 봅니다. 노동자들은 농장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좀 심하게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견디다 못해 폭등이 일어나자 그 다음 부터 조금은 나아졌는데 고향이 많이 그리웠나 봅니다. 그 이후 소대장님 무슨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캐시어스의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잘 듣던 넬슨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듯.

“글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럼 소대장님 사진 신부라는 말은 들어봤어요?”

“사진 신부?” 처음 들어보는 말로 어느새 넬슨의 표정은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캐시어스 사진도 뭔지 알고 물론 신부도 뭔지 아는 데 그런데 사진 신부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소대장의 물음이 당연한 듯 캐시어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당시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총각들로 혼기를 이미 넘긴 나이인데 고국과의 먼 거리와 통신 매체가 아직 발달 되기 이전이어서 사진과 함께 간단한 이력을 적어 보내면 중매하는 사람들의 주선으로 결혼이 이루어진대요. 참 신기하죠?” 넬슨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웃는다.

“그럼 서로 만나보지도 못하고 사진만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거야?”

“네 실제로 그땐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맺어진 부모님 사이에서 첫 번째로 태어나셨고 다행히 이민 1세대는 2세들에게 가난과 노동의 고역, 차별, 학대, 멸시받는 것들은 물려주지 말자는 강한 신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타파하는 것은 교육밖에 없다고 믿고 일찍이 자녀 교육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어머니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부터는 미국본토로 나와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캐시어스의 말이 끝나자 넬슨 소대장이 다시 묻는다.

“캐시어스의 어머니의 얘기가 아니라 마치 한국의 역사 한편을 공부하는 느낌이군. 낯선 하와이로 이민을 결정하신 외조부님의 심정을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 데.... 고향은 내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고 부모 형제와 일가, 친척들을 뒤로하고 듣도 보도 못한 먼 이국땅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겠지. 그런데 외조부님 고향은 한국 어디인가?”

“인천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천이면 상륙작전을 펼친 그곳 아닌가?” 잠시 기다림도 없이 넬슨이 묻는다.

“네, 바로 그곳입니다.”

“캐시어스! 자네 누구보다 감회가 새로웠겠구먼”

“네 말로만 듣던 어머니의 나라와 또 외조부님의 고향에서 작전을 펼친다고 하니 가슴이 많이 벅차올랐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용감하게 전투에 임했던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되네. 캐시어스 자넨 지금까지 한 번도 뒤로 물러가지 않았었지. 대단했네.” 넬슨의 눈빛은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 한다는 듯 반짝인다.

“아 아닙니다. 소대장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머니의 그 이후 이야기도 좀 들려주게 지금까지 들어봤던 사연들,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다네.”

“네 소대장님” 캐시어스의 마음은 미국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에 가슴 가득 눈물이 젖어있었다.

대원들은 혹시 모를 적과의 교전을 생각해서 쉽게 노출되는 큰 도로보다는 비교적 오솔길같이 조그만 길을 이용했다. 갑자기 앞서가던 해리슨과 스탁턴이 뒤를 돌아보며 몸을 낮추라는 신호를 보낸다. 뒤따르던 두 사람도 급히 몸을 낮춘다.

“무슨 일인가?” 넬슨이 묻는다.

“적의 정찰병 같습니다.” 스탁턴이 손가락으로 11시 방향을 가리키며 망원경을 소대장에게 건넨다.

“북한군으로 정찰을 나온 게 틀림없네.” 넬슨은 지도를 꺼내어 북한군 병력들이 어디쯤 있을 것을 가늠한다.

“해리슨 정찰병들이 어디쯤 와있는가?”

“대략 700미터 정도 앞까지 와있습니다.”

“각자 몸을 숨기고 내 신호 없이는 절대로 총을 쏴서는 안된다.”

“네 알겠습니다.”

각자 바위 틈새와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잠시 후 북한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섯명이 한 조를 이룬 것 같았다.

“동무들 저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요.” 고참으로 보이는 병사가 말했다.

“네, 동무 그럽시다.” 총은 한곳에 기대어 놓고 모두 바위위로 올라서자 바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런데 북한군들이 올라앉은 바위가 공교롭게도 캐시어스 상병이 바위 밑 틈새에 몸을 숨기고 있어서 나머지 대원들은 손에 땀을 쥐며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잘못되어 발각되는 날에는 포로가 되던지, 아니면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김동무 앞으로 우리 부대는 어떻게 되는 기야요?”상황실에서 상황을 기록하는 김동무에게 무슨 새로운 정보라도 하달되었는지 옆에 있는 병사가 묻는다.

“뭘 말이요?”

“지금 3일째 학교 옆 마을에서 이동을 안하고 있으니 계속 여기있을 것인지, 아니면 남으로 밀고 내려갈 것인지 궁금하오.”

“동무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소.”

“아니 뭐 들은 것이라도 없소?”

“아직 수령님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인가 보오.” 김일성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말에 다들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담배만 양 볼이 쪽 들어가도록 깊게 빨아들이고는 후욱~ 하고 꺼지듯이 연기를 내 품는다. 그러다 폐 깊숙이 얻혀있는 갓난이 주먹만 한 가래를 컄아~앜 하고 입으로 끌어 올리고 속에서 오물오물, 하다가 엣퇴~ 하고 힘껏 내 뺕는다. 날아간 가래는 바위 밖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캐시어스 상병 옆으로 떨어졌다. 까맣고 누런 가래에 침까지 묻어있어서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행히 소리는 나가지 않았지만, 누런 가래가 몸에 닫는 상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럼 김동무 생각엔 어떻게 될 것 같으오?” 김동무는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계속 질문을 던지는 병사는 김동무가 아무 말이 없자 계속 말을 이어간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들이 계속 몰려들고 물론 우리도 중공과 소련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1차 침공때 같이 낙동강까지 내려갈 수 있을지 아니면 서울만 탈환하고 더 이상 남하하지는 않을지? 만약 내려간다면 언제쯤 밀고 내려갈지 수령님의 생각이 몹시 궁금하단 말이오?”

잠자코 듣고 있던 김동무가 천천히 입을 연다.

“아마 1차 때처럼 단시간에 조선의 남쪽까지 내려가기란 무리일 꺼요. 더군다나 사령관은 2차 대전을 종식시킨 맥아더가 아니요. 그가 이번 전쟁에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하기 전 우리 북한 조선인민들이 낙동강을 넘어 적화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펼칠 줄 누가 알았겠소? 우리 중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소.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단시간에 함경북도 저 압록강까지 진격하리라는 것도 예상 못 했고 그때 모택동 동지가 인해전술로 우리를 돕지 않았다면, 전쟁은 맥아더에 의해 벌써 끝났을 것이오. 그러니 조만간 상부로부터 무슨 지령이 내려오지 않겠소.” 정찰병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서둘러 되돌아간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넬슨은 지도를 꺼내 펴고 수색하고자 한 마을은 북한군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다른 마을로 선회하기로 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4.

 

영원의 마을에서 제럴드를 본 사람은 영원의 모녀 외에 광택이가 유일했다. 북한군들은 첫날 광택을 비롯해 청년 몇 사람과 국민학생 동호와 영수를 잡아다가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하루 동안 감금했다. 밥도 먹이지않고 굶긴 다음 한 사람씩 불러다가 교실이 아닌 조그만 독방으로 눈을 가린채 데리고 갔다. 안대를 풀었을 때는 여기가 학교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낯이 설었다. 나무로 된 탁자가 중앙에 놓여있고 천정에서 전선이 길게 내려와 갓머리가 씌어져 있는 전구가 탁자위를 비치고 있었다. 노란빛은 어찌나 어두운지 얼굴만 겨우 알아볼 정도로 아주 희미했다.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는 이만한 방법도 없을 것만 같다. 그 기에 더하여 바깥 병사들의 가벼운 대화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날카로운 기합조차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는 아무리 살려달라고 고함을 질러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좌우 벽에는 체구가 좋은 두 명의 병사가 나무의자에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들은 숨을 쉬는지조차 의심될 정도로 움직임이라곤 없었다. 시선은 고정되어있고 모자챙의 그림자가 얼굴을 가려 턱과 아랫입술 외에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국민학생부터 나이순으로 차례로 불려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광택이 불려간다.

“동무 이름이 뭔가?” 광택이와 마주 보고 앉은 사람은 좌우에 앉은 군인들에 비해 신장은 약간 작은 편이지만 땅땅한 것이 자비라곤 털끝만큼도 없어 보였다. 머리칼은 뒤통수 주변으로 조금 있는데 그나마 짧고 이마부터 정수리 가름마까지는 가뭄에 콩 나듯이 머리칼이 드문드문 있었다. 계급장은 붙어있지 않았지만, 당 간부쯤 되어 보였다. 광택이를 노려 보는 검은 동자는 눈꺼풀에 반쯤 걸려있는데 어두워서 흰자위만 보여 눈을 맞추며 말하기가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광택 입니다.”

“누구와 사는가?”

“어머니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안 계십니다.”

“피난 갔나?”

“돌아가셨습니다.”

“언제?”

“일곱 살 때요.”

“지금 몇 살인가?”

“스물여섯입니다.”

“장가는?”

“아직 안 갔습니다.”

고문관은 한동안 말을 쏟아내다가 아무 표정도 없이 광택이를 유심히 쳐다본다. 광택이도 한두 번 눈을 마주치다가 더이상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두려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문관은 처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동무 왜 잡혀 왔는지 아는가?”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더욱 또렷했고 상대방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음~ 잘 모르겠다?” 고문관은 턱을 앞으로 당기며 심호흡을 크게 한다. 의자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세 바퀴를 돌고는 다시 앉는다. 고개 숙인 광택이를 보고 “이보라우 정말 잘 모르겠나?” 억센 평안도 발음이었다.

“예~” 광택이 두려움이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갔어. 여기 누군가 미군을 숨겨 주고 있지? 누군지 빨리 말하라우”

순간 광택이의 눈이 빛난다. ‘아 이 사람들이 영원씨 집에 있는 미군 때문에 이 난리를 치는구나 이제 사 이놈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하게 되면 영원씨와 그 어머니는 틀림없이 고문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다가 결국 죽겠지’ 광택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몸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표정은 불안함이 금방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도 도끼눈을 하고 먹이의 미세한 떨림조차 놓치지 않는 노련한 고문관은 쉽게 눈치를 챘다. 광택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자 고문관의 눈빛이 다시 한번 섬뜩하게 빛난다.

“이보라우 동무들 이놈의 종간나가 뭘 알고 있는 것이 틀림 없구만 준비하라우” 좌우 벽에서 그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앉아 있던 병사들을 향해 소리친다.

“옛 알겠습니다. 동무” 그들의 행동은 큰 체구에 비해 매우 민첩했다. 잠시 후 처음 보는 기계들을 여럿이 힘겹게 들고 들어오는데 아무래도 고문기기 같았다. 다시 한번 두려움이 몰려왔다. 광택이 앉은 의자 뒤편에서 설치준비를 하고 있다. 고문관이 광택이에게 조용히 묻는다.

“이보라우 동무 미군들이 어디로 갔으며 누구집에 머물렀나? 날래, 말 하라우” 그는 어느새 소련산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모릅니다.”

“몰라? 모른다.” 앞의 병사들을 향해 “이보라우 아직 멀었나?”

“거의 다 되갑메다. 동무”

“빨리 하라우. 이곳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지~이익~ 직직 피복이 벗겨진 두 전선을 붙였다 띠었다 할 때 파랗고 강한 전류의 불꽃 같은 것이 일어난다. 그것은 번개의 번쩍임 같아서 고문관의 충혈된 눈빛만큼이나 섬뜩했다.

“고문관 동무 준비 끝났습니다.” 고문관은 떨고 있는 광택이를 한번 쳐다보고는 대기하고 있는 병사에게 머릿짓으로 시행할 것을 가리킨다.

“엣 알겠습니다.” 네 명의 건장한 북한군 병사는 광택이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의자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상의를 찢어 벗기고 전선을 맨살 이곳저곳에 고정, 시켰다. 오른손 검지에는 악어 이빨같이 생긴 큰 클립이 아프도록 물고 있었다.

“끝났습니다, 동무” 다 됐다는 말에 고문관은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연거푸 두 모금을 최대한 깊이 빨아들이고는 지그시 눌러 끈다.

재떨이에서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자 큰소리로 허파를 감싸고 있는 끈적하고 누런 액체 덩어리를 쾌에 앸 하고 밖으로 겨워 올려서 자신이 피우던 꽁초 위를 덮는다. 연기는 더이상 나지 않고 꽁초도 덩어리 속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시작하지” 그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광택의 비명이 먼저 터져 나왔다. 옆에 있는 사람들의 귀청이 터지는 것 같았다. 마치 쇳소리같이 날카로웠다. 고문은 15초 간격으로 계속되었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모른다고 고문 중간에 몇 번 소리도 쳐봤지만, 그들은 이미 물소의 피맛을 본 사자같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아주 끝장을 볼 기세였다.

“이놈이 생각보다 좀 버티는데 아무래도 전류를 좀 더 올려야겠소”

광택의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전기가 온몸을 타고 흐를 때 몸속 근육들이 터지는 것 같았다. 장기들도 떨어져나와 몸속 어디선가 굴러다니는 것 같다. 얼마 못되어 두 콧구멍에서 코피가 쏟아진다. 지금까지 이런 코피는 처음이었다. 고문의 강도를 더 올린다는 말에 광택의 몸은 꽁꽁 얼어붙은 것 같다. ‘아 결국 여기서 죽겠구나.’

“아 알았소~”

북한군 병사들은 광택의 말을 신음 소리로 알고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계속되는 고문에 광택은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누군가 찬물을 머리에 들어부어서 정신이 돌아왔다.

“고문관님을 불러주시오”

“뭐 때문에 고문관 동무를 찾느냐?”

“할 말이 있소”

 

 

5

영원은 숲속에서 제럴드를 만났다. 먹을 것과 함께 군복, 소총등 제럴드의 소지품들을 다 챙겨서 넘겨주었다. 북한군들이 청년들과 어린이 두 명을 학교로 잡아간 것도 제럴드에게 알려주었다.

“잡아간 이유가 뭐예요?” 제럴드가 묻는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혹시 나를 본 사람이 이 마을에서 영원씨 외에 누가 또 있나요?”

“아니요, 아무도 없어요.” 영원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생각하다가

“아 광택씨가 그때 같이 있는 것을 봤어요.”

“그럼 광택씨도 잡혀갔나요?”

“네 함께 잡혀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아마 저 때문일 겁니다.”

“네? 중위님 때문에요?”

“네, 틀림없습니다.”

“아니 왜요?”

“북한은 미군을 포로로 잡으면 굉장히 유리한 부분이 많습니다. 미국은 한 사람의 자국민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출하든지 아니면 막대한 돈을 지불 해서라도 데리고 가지요. 미군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상호 간 포로 교환 카드로도 굉장히 유리합니다.”

영원이 걱정 어린 얼굴로 제럴드를 올려다본다.

“중위님 우려하신 대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어떡하죠.?”

“광택이가 말을 했으면 곧 북한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제 생각에는 집으로 가지 말고 당분간 어머니와 어디로 피해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쟁 중에 어디 마땅한 곳도 없고,,,,,”

“그래도 어디든 피해야 합니다.”

“광택씨가 얘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럴드는 영원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절망하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고문을 견디기란 죽음처럼 힘들 겁니다.”

순간 영원의 얼굴에 깊은 근심의 빛이 감돈다.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어디로 피해있는 것이 좋겠다는 제럴드의 말에 온갖 두려움이 몰려와 마음을 짓누른다.

제럴드 또한 이 모든 위기가 자신으로 말미암음 인줄 알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만약 영원에게 화가 미친다면 자신의 목숨을 다해서 보호할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 아아 이 순간 넬슨과 우리 대원들이 함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원을 안전하게 보호 할수 있을 텐데...’

“중위님!” 무거운 눈빛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제럴드를 영원은 나즈막히 부른다. 제럴드가 듣지 못하였는지 아무 반응이 없자 영원은 재차 부른다.

“제럴드 중위님!” 제럴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원을 바라본다.

영원은 순간 제럴드의 슬픔 가득한 얼굴을 보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은 두 사람 사이에 곧 일어날 일들을 마치 아는 것만 같았다.

 

제럴드가 말없이 영원을 힘껏 끌어안았다. 잠시 뒤 영원도 두 손으로 제럴드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은 전쟁만 아니었으면 사랑의 아름다운 포옹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어쩌면 이별의 포옹이 될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눈물이 왈칵 흘러내린다. 제럴드도 영원도 차라리 이 순간이 꿈이었으면 .....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

 

영원이 제럴드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잠시 어디론가 피해있다가 북한군이 물러가면 그때 다시 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이 소란했다. 문을 열자 이미 북한군 십여명이 어깨 총을 하고 피투성이가 된 광택이를 질질 끌고 와서는 영원의 집 마당에 팽개치듯 밀친다. “광택씨” 영원이 달려가 광택이를 흔들어 보지만 광택이는 고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인솔해온 북한 군인이 영원을 보며 “애미 나이가 영원이네?”

영원이 상대방을 노려보며 “그렇소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인지는 가보면 알아”

“어딜 간단 말이오?” 북한 군인은 영원의 물음에 아무 대꾸도 하지않고

“동무들 빨리 이 애미나이를 끌고 가라우” 이때 영원의 어머니가 북한 군인들 앞을 가로막는다. “내 딸은 못 데려간다. 이놈들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잡아간단 말이냐 이 못된 놈들아” 영원의 팔을 잡은 군인들을 세차게 내리치며 완강하게 붙들고 저항했다. 이때 북한군 인솔자가 사정없이 개머리판으로 영원의 어머니를 내리친다. 그래도 군복 자락을 붙들고 저지하자 이번에는 얼굴을 그대로 강타했다. 살이 터지고 피가 튀겼다. 순식간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했다.

“엄마” 영원이 병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들어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의 얼굴을 끌어안는다.

“너희 여섯은 집을 수색하고, 그리고 너희는 빨리 끌고 가라.”

 

아무리 몸부림쳐,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원도 광택이가 심문을 받았던 그곳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대머리 간부가 들어왔다. 그를 본 순간 모든 희망은 내려놓는 게 좋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의 고문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던가. 혹 운 좋게 살았다 하더라도 중한 장애를 인해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북한 비밀 조직에서도 꽤 알아주는 고문 기술자였다. 그가 영원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연다.

“이름이 영원이라고 했나?” 영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도 예상 한 듯이 앞의 사람들에게 한 것처럼 다그쳐 묻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른다. 실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전혀 고문실 같지 않게 조용하지만, 공기는 비명보다 더 무거웠다. 이따금 고문관의 폐에 걸쳐있는 가래로 인해 쉑~쉑 하는 거친 숨소리가 마치 스피커의 잡음같이 들린다.

이때 “톡톡톡” 문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깬다. 좌측 벽에 앉은 병사를 향해 머릿짓을 한다. 문을 열자 영원의 어머니를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가격한 그 사람이었다.

“무슨 일인가? 동무”

“수색을 마치고 돌아왔습 메다.”

“그래 단서라도 찾았는가?”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는지 그의 말은 중간에 끊어지고, 끝을 맺지 못했다.

“그럼 못 찾았다는 말인가?”

“..........”

“이봐 동무 제대로 찾긴 찾은 거야?” 그가 버럭 화를 낸다.

“옛 동무 샅샅이 뒤져 봤습메다.”

“그런대 왜 못찾나?” 상대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한다.

“그런데 왜 못 찾아자?” 상대는 연거푸 같은 말을 들었지만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고문관은 노려보기를 멈추고 대신 문을 열어주었던 군인을 보며 “김 동무가 한번 다녀와야갔서 가서 샅샅이 찾아보란 말이야”

“옛 알겠습니다.”

내심 어떤 물증이라도 찾아오기를, 바랬는데 막상 빈손으로 돌아오자 확신에 찬 기대는 증오로 바뀌어 불같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증오는 고스란히 영원에게로 향한다. 뱀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노려보듯 언제든지 집어삼킬 기세였다. 영원은 자신의 머리 위로 살기(殺氣)에 가까운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로지 탁자 위로 고정돼있었다. 마치 두려움이나 공포로부터 흔들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처럼 느껴졌다.

고문관은 처음부터 영원에게는 강압적 이기 보다는 증거 위주로 하고자 했었다.

 

제럴드는 영원이가 집에 있으면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어서 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어머니로 인해 한사코 간다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광택이 발설을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린다.

예상했던 대로 영원의 집에는 어느새 북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행여나 미군이 찾아오지는 않을까? 싶어서일 것이다.

제럴드는 어둠을 틈타 학교로 향한다.

 

미군의 단서를 찾기 위해 영원의 집으로 보냄을 받은 김동무 역시 샅샅이 수색하고 또 뒤졌지만, 고문관이 바라던 물증들은 나오지 않았다. 고문관은 이렇다 할 소득이 없자 자신이 고안해낸 기구들을 가방에서 꺼내어 살핀다. 이른바 고문 기기들로 옆에서 보기에도 섬찟했다.

“하는 수 없지” 짧게 한마디를 던지고, 기구들을 다시 원래대로 가방에 챙겨 넣고는 고문실로 향한다.

희미한 백열전등이 켜있는 고문실에 영원이 홀로 앉아있다.

 

‘북한군이 제럴드의 물증을 찾지 못하면 나를 순순히 돌려 보내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고문을 해서라도 토설하게 할 테지. 아 아 제럴드! 북한 군인들이 내게 견디기 힘든 고문을 가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혹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 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당신이 무사히 전쟁을 끝내고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제럴드!

당신을 다시 못 본다 해도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뜨거운

눈빛을 가슴에 안고 가겠습니다.’

 

영원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일까? 이곳을 온전히 나가기란 힘들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칠 무렵 굳게 닫혀있던 문이 철컹하고 열렸다.

언제나 네 명의 군인이 먼저 들어온 다음 고문관이 들어온다.

 

“이봐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인내심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못되 그러니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고문관은 영원에게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男女老少) 할 것 없이 무례하게 굴었다.

“언제 누가 다녀갔나?” 그가 드디어 취조를 시작했다. 영원은 고문관의 말을 들었으나 제럴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가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어. 더구나 영어를 전공했다지? 그 미국놈하고 같이 있으면서 많은 얘기를 했겠구먼?”

영원이 첫 물음부터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하며 질문들을 쏟아낸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고문관 앞에서 영원은 신기할 정도로 침착했다. 영원의 이러한 모습에 고문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정치범도 포로들이나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이 다 그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떨어야 했다. 밀려오는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그가 물어보는 대로 얘기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런 고문관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함에 영원 자신도 놀랐다.

도리어 고문관이 초조해지는지 갑자기 그의 동작은 빨라지고 그의 저음의 목소리는 상대방을 두려움으로 몰고 갔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트레이드마크 같은 그의 목소리도 격앙되고 뭔가 불안한 구석이 느껴졌다.

“이보라 동무 끝까지 주둥이를 열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만들어 주갔어. 그때는 소용없어라” 그가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테이블 다리에 기대어 있는 가방을 들어 영원의 눈앞에서 도구들을 펼쳐놓는다. 잠시 후 머릿짓으로 좌우에 앉은 병사들에게 뭔가를 지시한다.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움직인다. 영원을 그 자리에서 광택이를 묶었던 것처럼 단단하게 의자에 고정한다. 영원은 저항하거나 몸부림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고문실에 오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각오했다.

고문관은 마지막으로 영원에게 미군의 행방과 그들의 정보를 아는 대로 말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소용이 없자 격노한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보기만 해도 섬찟한 도구들이 그의 손에서 번쩍이자 그 어떤 살인 병기보다 무서웠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이란 죽음처럼 두려웠다. 오로지 제럴드를 생각하며 고통을 이겨보려 했으나 그대로 기절하고 만다. ‘아 제럴드~’ 신음과도 같은 짧은 외마디였다.

“고문관 동지 여자가 이렇게 견디는 것은 처음 봅메다.” 좌측에 서서 영원을 단단하게 묶고 함께 고문했던 병사였다.

“아 이렇게 지독한 년은 처음일세”

그의 옷에도 얼굴에도 영원의 피가 이곳저곳에 띄어 묻어있었다. 옷에 묻은 피를 보며 마치 구더기가 자신의 옷에 기어오르는 것을 쳐다보듯 오만상을 찡그린다.

“이 년이 그토록 입을 열지 않는 것은 필시 미국놈에게 무슨 중요한 정보를 들었거나, 아니면 적군의 기밀을 미군 부대에 전달하도록 이년에게 맡겼는지도 모르지. 그렇지않으면 이렇게까지 버틸 수가 없잖아. 그것도 일반인이 말이야.”

“그렇습메다.”

고문관은 영원에게 뭔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않으면 자신의 고문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름 강단,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처음 얼마간 버티다가 점차 강도를 높이면 끝내 실토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도 그 기에 강도를 조금만 더 높이면 토설치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확신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담배를 중간쯤 피우고 갑자기 김 동무를 급히 찾는다.

“찾으셨습니까? 고문관 동무” 부동자세로 서 있는 김 동무를 향해

“김동무 이 애미나이 집을 수색할 때 이상한 서류 같은 것 보지 못했나?” 김동무가 수색하던 장면을 떠올리는 동안 고문관이 먼저 말한다.

“틀림없이 영문으로 된 문서 같은 서류가 있을 테니 가서 다시 찾아봐”

“옛 알겠습메다.”

 

제럴드는 어둠을 틈타 학교 옆 플라타나스가 우거진 숲에 몸을 숨겼다. 교실마다 북한 군인들이 모여있었고. 두 명씩 보초를 서 있는 곳은 대략 세 네 군데 정도 되었다. 교무실은 창문마다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는 것으로 봐서 상황실로 이용하는 것 같았다. 창문이 가려져 있는 곳은 두 군데로 상황실과 무기를 보관하는 탄약고일 가능성이 다 분했다.

‘영원씨는 학교 어디에 있을까? 북한 군인들이 위해를 가하진 않았을까? 생명의 은인인 영원씨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 속으로 다짐하지만, 근심과 초조가 제럴드를 엄습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자신은 혼자이지만 영원을 구출할 방법을 세워본다. 학교 외곽을 북한군 둘이서 계속 돌고 있었다. 우선 저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밤이 되자 복도에도 불이 켜있고 보초병이 가운데와 양 끝에 서서 교대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취조하는 곳은 어디일까? 틀림없이 학교 본건물과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본건물과 30미터 정도 뚝 떨어진 창고 같은 조그마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불빛은 다른 곳에 비해 희미하나 보초병 둘이서 왔다 갔다 하며 출입문을 경계하고 있었다.

제럴드는 저곳에 영원이 있음을 확신했다. 창고 문이 열리더니 네 명의 군인이 나왔다. 그리고 이들은 학교 밖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저놈들이 영원을 고문했을 텐데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제럴드는 고문실에서 나온 북한 군인들의 뒤를 밟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영원의 집이 아닌가. ‘저놈들이 뭐 때문에 이 어두울 때 영원의 집에 왔을까?’

제럴드는 어두운 마당의 담벼락 옆 화단에 몸을 숨겼다. 성인 키 정도 무리 지어 자라있는 들국화 다발은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잘 알아듣지는 못해도 저들은 필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동무들 샅샅이 찾아 보라우 빈손으로 고문관 동무에게 갔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질 거요.”

영원의 어머니는 다행히 집에 없었다.

무엇을 찾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집을 이 잡듯이 찾았다. 저들의 손에 살림살이나 가재도구들은 이미 폐지처럼 뭉개져 있었다.

‘혼자서 여러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놈들이 분산되어 따로 떨어져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제럴드는 조용히 기다린다. 이윽고 하나둘 찾는 것을 멈추고는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동무! 찾아봐도 없소?” 원망 섞인 말투였다. 그리고 곧장 담배에 불을 붙인다. 찾는 것을 멈추고 모두 같이 앉았다. 랜턴도 켜지 않아 목소리뿐 모습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동무 더 이상 찾아볼 곳도 없는 것 같소.”

“그래 동무는 어디까지 찾아봤소?”

“항아리까지 다 열어 봤소, 고문관이 말한 그런 것은 없었소.”

김동무는 걱정이 앞선다. 고문관은 틀림없이 영문으로 된 기밀 문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데, 그런데 막상 와서 찾아보니 영어로 된 책과 공책 정도뿐 문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동무들 먼저 가라요.” 김동무가 세 사람에게 말한다.

“아니 왜요?”

“나는 좀 더 찾아보고 가겠소. 그리고 동무들은 오늘 밤에 체번도 있지않소. 그러니 먼저들 가시오” 김동무는 이대로 고문관을 만나기가 몹시 두려웠다. 더 이상 찾아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시간 지체되면 찾아봐도 없다는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김동무를 남겨두고 먼저 학교로 돌아간다.

제럴드는 북한군이 혼자 남은 것을 보고 드디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대검이 그대로 김동무를 향해 번쩍였다.

곧바로 세 사람의 뒤를 따른다. 불과 얼마 못되어 랜턴의 불빛을 발견했다. 그들의 뒤를 소리없이 바짝 붙좇았다. 북한 군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어두운 길을 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걷고 있었다. 오른편 사람을 개머리판으로 먼저 가격하여 쓰러트리고 동시에 대검으로 가운데 사람에게 충격을 가하였으나 나머지 한 사람과는 맞닥트리게 되었다. 북한 군인도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여야만 했다. 죽느냐 사느냐 결코, 만만치 않은 치열한 몸싸움이다. 고함이 어두움을 뚫고 울려 퍼진다. 랜턴은 이미 손을 벗어나 밤하늘로 비취고 있었다. 제럴드가 다소 밀리는 듯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인해 몸싸움이 거듭될수록 힘이 점점 빠졌다. 상대가 묵직하게 휘두른 한방이 제럴드의 상처를 그대로 강타했다. 상대는 약점을 알고 몇 차례 더 가격이 이어졌다. 그대로 사로잡혔다. 잡고 보니 그토록 찾고 있는 미군이 아닌가. 자신의 혁대를 풀러 제럴드를 포박하고는 주둔지인 학교로 향했다.

 

‘아 이렇게 끝나는가.’ 제럴드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은 포박돼 있고 북한군은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북한군 주둔지가 가까 올수록 그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웠다. 모퉁이를 막 돌아 학교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뒤에서 ‘으읔’하는 무거운 신음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제럴드 중대장님!” 하고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넬슨 소위가 북한군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폭격으로 생사도 모른 채 흩어진 대원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더러 냈다.

“아니 자네들!” 서로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재회가 될 줄 누가 알았던가 아무도 예상 못 했다. 다시 한번 깊은 전우애를 느꼈다.

“지금까지 중대장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감격하여 잠시 서로 말을 잇지 못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는데 때맞게 와줘서 고맙네”

“그런데 중대장님 조금 전 그 상황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말을 하기엔 시간이 없네. 가면서 얘기하세”

제럴드는 매우 급한 상황을 대원들에게 알리고 영원을 구출할 작전을 세운다.

 

 

6

대원들도 생사를 모른 채 막연히 찾고 있던 중대장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되어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비록 적군의 수가 상대도 못 할 정도로 많으나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흥분했다.

아군의 수가 현저히 적어서 전투를 하기에는 밤이 더 유리했다. 먼저 학교 외곽을 24시간 경계하는 순찰병을 제거하고 제럴드 자신은 영원을 구출하여 최대한 멀리 벗어난 다음 대원들과 만나기로 한다. 이번 전투는 이기기 위함보다 인질을 구출하는데 전력하고 총격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으로 하여 아군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의견을 모았다. 제럴드는 넬슨과 함께 고문실로 쓰고 있는 창고로 향한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 둘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제럴드와 넬슨은 수신호로 주고받으며 왼편의 병사는 넬슨이 바른편은 제럴드가 맡기로 하고 창고 뒤로 돌아서 접근한다. 하나둘셋 순식간에 병(兵) 둘을 조용히 처리했다. 창고 문을 열어보았으나 굳게 잠겨있었다.

 

한편 고문관은 김 동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지체되자 빨리 자백을 받고 싶었을까? 영원에게 처음보다 높은 강도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해. 죽고 싶어 환장했나 설마 죽고 싶지는 않겠지 미국놈은 어디 있어? 어딘냐고?” 고문관은 자신의 고문기술이 전혀 먹혀들지 못하자 흥분했다. 이렇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는 처음이었다.

벽 좌우에 각각 두 명씩 앉은 군인들도 지금은 한 명씩 앉아있었다.

고문관은 예리한 기구를 써서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급소를 골라가며 영원에게 충격을 가했다. 그러나 영원은 고통도 아픔도 더는 느끼지 못했다. 고개는 죽은 사람처럼 힘없이 축 처져 있었고 신음은 거의 내지 않았다.

제럴드와 넬슨이 대검을 손에 쥐고 문을 강하게 꽝꽝 두드린다.

오른쪽 벽에 앉은 군인이 김 동무가 돌아 온줄 알고 묻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문손잡이가 돌아가기도 전에 전광석화같이 미군 둘이 박차고 들어와서 양옆의 군인 둘을 처리한다. 그러나 서로 마닥트리는 짧은 순간 고문관은 벽에 붙은 빨간 색의 비상벨을 누르자 화재경보음같이 따르르르 하고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고요 속의 건물은 순식간에 전쟁터같이 변했다. 귀청을 울리는 벨소리가 어둠을 뚫고 퍼져나간다. 북한군들은 신속했다. 넬슨은 고문관을 뒤쫓아가 처리하고 대기 중이던 병사들과 합류했다. 제럴드는 영원을 안고 뛰었다. 총격전이 일어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비상 작동이 창고에서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 창고로 몰려간다. 고문실에서 심문을 받던 자는 감쪽같이 없어지고 북한군인 둘은 시체가 되어 피를 흘린 채 처참하게 나뒹굴어 있었다. 침입자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북한군은 또 한 번 비상을 걸었다. 잠시 후 고문관의 시체와 보초병들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급히 전열을 가다듬는다.

약 이십명씩 하여 삼 개 분대로 인원을 편성하고는 도주로를 가늠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 두 개 분대가 마침 제럴드가 도주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소대장님 저 방향은 중대장님이 도주한 방향이 아닙니까?” 캐시어스 상병이 넬슨을 보며 걱정 어린 투로 묻는다.

“나도 알고 있네” 잠시 고심 끝에 넬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와 저들 사이에 총격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저들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신호는 나의 총성이 울리면 일제히 사격하는 것으로 한다.” 넬슨은 일일이 대원들과 눈을 맞추고 작전을 지시한다.

“스탁턴과 해리슨은 저들을 중대장님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유인하게 그리고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이 되면 우회하여 약속한 장소로 돌아오게.”

“옛 알겠습니다.” 해리슨과 스탁턴이 어둠 속으로 민첩하게 움직인다. 넬슨은 용감한 캐시어스를 데리고 최대한 적들 가까이 이동한다. 자리를 잡고는 적을 향해 곧바로 총격을 가했다. 탕 탕 탕 드디어 넬슨의 총구가 불을 품었다. 북한군은 자신들이 예측한 반대 방향에서 적군이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사격을 개시한다. 양측 치열한 화력공방이 이어지다가 해리슨과 스탁턴이 조금씩 후퇴하여 계획한 방향으로 북한군들을 유인하기 시작한다. 미군들이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음을 알고는 세 갈래로 분산했던 병력은 다시 하나로 합쳐서 쫓기 시작한다.

넬슨과 캐시어스는 오로지 대검으로 소리 없이 적의 측면을 파고든다.

벌써 많은 수의 적을 쓰러트렸다.

 

영원을 안고 얼마를 달려왔을까. 제럴드는 힘든 줄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어둠은 점차 물러갈 조짐을 보였다. 실로 긴 밤이었다. 인생에서 이렇게 긴 밤이 또 있을까? 대원들과 약속한 장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무사히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영원을 풀숲에 눕히고 두 팔로 안았다. 몸은 온통 고문의 흔적들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맥박과 숨결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약했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제럴드의 눈물이 영원의 얼굴에 떨어진다. 제럴드의 온기 때문일까? 영원이 힘들게 눈을 떴다. 제럴드가 큰소리로 영원을 부른다.

“영원씨, 제발 정신 차리세요. 영원씨~” 영원이 제럴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제럴드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가늘게 움직인다. 제럴드는 가까이하여 자신의 귀를 대어본다.

“제럴드! 꼭 살아서 어머니께 돌아가세요. ”

영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말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는 떨어지고 팔과 다리의 맥은 풀어져 축 늘어진다. 그것은 곧 이생에서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처음 설레임을 안겨준 사람을 위해!

그녀가 그토록 북한 군인들의 손에서 지키고 싶었던 단 한 사람!

그 사람을 죽는 순간까지 그리워하다가 결국 그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불러도 보고 흔들어도 보지만 영원의 눈은 다시 뜨여지지 않았다.

맥박과 호흡도 멈췄다.

얼굴을 옆으로 하여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보아도 심장의 울림이나 떨림은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영원을 끌어안고 오열하듯 울었다. 그리고 비통하게 소리 질렀다.

 

잠시 후 해리슨과 스탁턴 병장이 도착한다. 1시간가량 이 지난 다음 넬슨 소대장이 겨우 도착했는데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배여 나왔다. 군복은 피에 얼룩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군과의 치열한 결전이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몹시 애통해 보였다.

“중대장님 캐시어스 상병이 그만....”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1953년7월27일 마침내 휴전 협정이 서방 강대국들에 의해 체결되었다. 뼈아픈 분단의 역사만 간직한 채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한국정부는 6.25 60주년 기념으로 미국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 참전 용사들을 초청했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당시 용사들은 대부분 작고하여 생존하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통령은 연설문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당시 젊음 이들이 누구의 강요에 못이 겨서 지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원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그 핏값으로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자유롭게 잘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결코 그분들의 값진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를 보다 일찍 마련하였더라면 더 많은 참전 용사님들이 이 자리를 빛내 주셨을 텐데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함께 싸워 지킨 이 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대통령으로서 여러분들에게 송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계시는 동안 편안하게 여행하시고 즐거운 시간, 추억의 시간이 되어 감회에 젖어보시기 바랍니다. 본국에 돌아가서도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다음 초청행사 때도 꼭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연설을 마친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그 친구가 많이 생각이 나요. 어머니의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부대에서 제일 먼저 지원했죠. 그는 정말 용감했어요.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용맹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어요. 우리는 적군에 비해 수적으로 말도 안 되게 적었지요. 폭격으로 다 죽고 저까지 겨우 다섯 명만 남았어요. 그날도 나를 구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총격전을 펼치다가 실탄이 떨어지자 이 친구는 대검만 가지고 수십 명도 더 되는 적진으로 뛰어들어갔어요. 그리고 혼자서 그의 모든 적을 무찔렀지요. 그 덕분에 나머지 우리 네 명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제럴드가 그 옛날 캐시어스 상병을 떠올리며 인터뷰 도중 손수건을 꺼낸다.

“그럼 그 부하는 그 전투에서 전사하셨어요?”

제럴드는 말없이 눈물을 훔친다.

“네 그 전투에서 안타깝게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그 외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연이나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면요?” 기자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제럴드는 “음~ ” 하고 짧게 신음하듯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오래전 기억들이었을까? 먼지가 겹겹이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도서를 찾는 것처럼 진지했다. 그것은 앵커가 보기에 왠지 고통처럼 느껴졌다. 수차례 자세를 바로잡고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번에도 조용히 그리고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말을 거두었다. 슬픈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이 사연을 대신하는듯했다.

“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어요. 그것은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아픕니다.”

 

상흔의 흔적들이 가득한 느티나무에 바람이 분다. 노파의 구부러진 발걸음처럼 힘겨워 보였다. 떼가 반쯤 떨어져 나간 어느 초라한 무덤 앞에 파란 눈의 노신사가 묵념하듯 서 있다. 나이는 많이 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어딘가 고매한 기품이 풍겨 나왔다. 신사는 누구와 얘기하듯 제법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의 마음속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이름! 그가 잠든 무덤 앞에서도 끝내 소리 내어 불러 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신사가 다녀간 이름 없는 무덤 앞에 지금까지 한 번도 놓인 적이 없는 붉은 장미꽃이 놓여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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