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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장씨(張氏) 이야기 / 김광한
2022년 12월 20일 13시 44분  조회:769  추천:0  작성자: 설야
[단편소설]
장씨(張氏) 이야기
 
김광한
 
     경기도 부천시가 아직 시로 승격되기 전 부천군으로 남아 있을 때, 윤영숙이란 서른다섯 살 된 여자가 살고 있었다.
     한 번 결혼에 실패하고 그 나이에 자식도 없이 홀몸으로 살면서 자신을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를 얻어간 남편에게 복수라도 하듯 돈 생기는 일에는 몸 파는 것 빼놓고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돈 욕심이 대단한 여자였다.
     그래서인지 이혼 당한지 5년 후에는 상당히 많은 돈을 저축해 부천이 시로 승격됐을 때 시내 중심가에 조그만 빌딩 한 채와 넓은 주택, 그리고 헐값에 사들인 땅이 꽤 많이 올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비 재벌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접촉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를 윤 여사 대신 통뼈마담이라고 호칭했다.
     얼굴이 남자처럼 말상인 데다가 태어날 때부터 뼈가 남달리 굵어 어쩌다 악수라도 할라치면 손아귀의 악력이 대단해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었고 키도 구척 장신인 데다가 목소리마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괄괄해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 가닥 할 인물이었다.
     아무튼 이런 통뼈마담인지라 세상 살아나가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돈 긁어모으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시장의 노점상인들에게 일수놀이를 한다거나 그 자신이 직접 다방의 가오 마담, 술집 주인, 화장품 외판사원, 보험 외판사원, 고리대금, 경찰 정보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안면이 넓어진 것을 무기로 틈틈이 중매쟁이 노릇도 해 짭짤하게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소지한 수첩엔 꽤 많은 신랑 신부 후보감들이 빽빽이 기재돼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한번 결혼에 실패한 손때 탄 남녀들이었다.
     워낙 많은 중매를 했고 또 성사도 많이 시켰기 때문에 부천시의 통뼈 마담은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이런 통뼈마담에게 어느 날, 우리들이 추천한 홀아비 장기수 씨가 등장했다.
     장기수는 일찍 장가를 들어 그 나이에 벌써 시집갈 연만한 딸을 두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조강지처와 이혼을 해 낭인생활을 하던 참이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 부친이 모 교회의 장로이고 모친이 권사였는데 어쩌다 그만은 돌연변이로 태어났는지 부모의 좋은 혈통을 따르지 않고 주색잡기는 물론 못된 짓이라면 골라서 하는 문제아로 성장했다.
     학교 다닐 때는 책가방을 내팽개친 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산으로 끌고 가서 다리를 부러뜨려 무기정학을 받거나 시험지를 보여 달라고 공갈 협박을 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하고, 그 시절 악명 높았던 종삼 뒷골목을 버젓이 고등학교 모자를 쓴 채 어슬렁거리다가 훈육주임한테 들켜 풍기문란으로 무기정학을 받은 적도 있었다.
     또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집안에서는 한 가족처럼 지내던 식모를 꼬여 임신을 시켜 꽤 많은 돈을 주고 내보내게 한 적도 있는 전과가 대단한 작자였다.
     이런 장기수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어서였는지 하느님은 그에게 놀라운 손재주를 부여해 주었다.
     장씨는 원래 엔지니어 출신으로 전자계통에서 내노라하는 기술자였다. 라디오 조립은 물론 흑백 TV 시절 청계천이나 세운상가에서 부속품을 사다가 집에서 TV를 조립 판매할 정도로 그 실력이 대단했다. 그의 손이 한번 가면 용케도 고장 난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고 망가져 고물 장수에게나 줄 TV에서 화면이 재생되는 것이었다.
     이 손재주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엔 제법 큰 규모의 전자회사에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일하는 솜씨가 공대 출신 뺨칠 정도로 대단해 경영자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생활 형편도 펴지고 가장으로서 과거의 나쁜 습관을 버려 사는 맛을 알게 될 즈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우 좋고 급료도 괜찮은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어떤 발명(?)에 열을 올렸는데 일반인들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글쎄, 천재가 하는 일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싶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일이라서 옆 사람이 보기에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전천후 만능안경'
     즉, 이 안경은 남자가 끼고 있으면 지나가는 여자의 알몸 뿐 아니라 조금 더 조작하면 마치 투시경처럼 사람의 내장 상태가 화면에 나타나 의학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어 이것이 발명되면 노벨상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거부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장씨는 퇴직금을 받아서 청계천에 나가 각종 고물기계를 사다가 후미진 골방에다 연구실을 차렸다. 무슨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처럼 방 앞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붙이고 변소 갈 때 한 번 얼굴을 비치는 것 외에는 24시간 그 방에서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내도 밤 시간 이외에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비밀이 새어 나간다는 이유에서였다. 가끔 그의 얼굴을 보면 운동 부족 때문인지 영양실조 때문인지 얼굴에 황달기가 역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부인과 그의 부모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처음엔 몸 걱정을 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쩐지 그 발명품이란 것이 잘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보, 몸 상하는데 쉬었다 하시구려." 하고 부인이 얘기할라치면
     "완성단계에 있어. 말시키지 말아." 하며 부인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완성 단계에 있다는 발명품이 몇 달이 지나도 그 상태인 것 같아
     "정말 발명이 될 것 같아요?" 하고 그의 선량한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그는 욕설부터 내 뱉았다.
     "아니, 이 x년이 다된 밥에 재를 뿌리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 죽치고 아가리나 닥쳐!" 하며 주눅을 들여 놓기도 했다.
     하루는 그의 부친이 걱정이 되어
     "얘야, 모든 일은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거란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내가 보기엔 공연히 애만 쓰는 것 같은데 하느님께 열심히 간구해라. 고마우신 하느님께서 이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말을 들으니 그 발명품의 용도가 해괴망칙한 것이던데 하느님이 그런 추잡한 용도에 쓰이는 물건을 발명하는데 협조를 해주실 것 같지 않다.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돌릴 생각은 없냐?" 하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할 것을 종용했다. 그 발명품의 용도가 자신의 신앙과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꼭 사탄의 꾀임에 빠져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기도요? 그건 아버지 같은 예수쟁이들이나 하는 일이에요. 과학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요. 괜히 천당이라는 걸 만들어 놓고 무식한 사람들 겁이나 주는 그런 것 절대 믿지 않아요. 인공위성이 달나라는 물론 화성까지 갔다 오는 세상에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수작이에요?"
     "수작이라니? 너 예수 믿지 않는 건 네 자유지만 그렇게 하느님 모독하면 죄받는다."
     "아니, 아버지 그만 웃기세요. 죄받다니요."
     "이거 큰일 날 아이로군. 병 걸려도 중병에 걸렸군. 저걸 어떻게 회개시키나?"
     그래서 부모는 아들을 위해 철야 기도를 하거나 능력 있는 목사를 모셔다가 '사탄'의 세력에 빠진 아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주여!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지금 저 아이는 눈가에 비늘이 덮여 있습니다. 비늘을 떼어 사물을 올바르게 보게 해 주십시오.“ 하고 목사와 그의 아버지는 함께 기도를 드렸으나 장씨의 눈가에 덮인 비늘은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두터워질 뿐이었다.
     오히려 장씨는 그에 반발하여 더욱 거칠게 나왔다. 또한 그는 자신의 연구(?)가 끝나면 이웃 포장 마차집 과부에게 달려가 갖은 수작을 다 부리며 부모를 욕되게 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씨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회사에 다닐 때는 그래도 월급이란 게 있어서 풍족하진 못하지만 그런대로 가계는 꾸려 나갔는데 퇴직한 지 6개월쯤 후에는 쌀마저 떨어져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자 밀가루를 사다가 수제비 국을 끓여 먹었다.
     "발명왕 에디슨도 처음엔 다 이랬어.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것인 줄 알아? 집념이 강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가 필요해." 하며 수제비를 떠먹으면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
     그의 어린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말끔히 쳐다보다가는 또 혼날까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느 날,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얼굴로
     "여보, 이 무식한 것이 뭐 알겠어요. 그러나 이젠 지쳤어요. 허구헌날 남의 집에가 돈이나 꾸고 이젠 꿀 데도 없어요. 그 연구란 것 포기하고 남들처럼 삽시다." 하면 그는 방바닥에 놓여진 요강을 집어 던져 방바닥을 오줌바다로 만들어 놓을 뿐이다.
     "이 무식한 것아! 세계적인 발명품이 한두 해에 이루어지면 누군들 발명 못 하냐, 이 여편네가 미쳤나?" 하며 아무 소리 못하게 했다.
     마침내 1년 6개월째 접어들자 장씨도 자신이 하는 일에 점차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발명품이 발명되지 않을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그는 포기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새 출발을 제의했다. 그리고 친정 오빠에게 찾아가 돈을 빌려 부천시에다 조그만 전파상을 차려주었다.
     전파상은 그런대로 잘 운영이 되었다. 신흥주택가라서 일이 많았고 공장이 들어서자 그의 일손은 무척 딸렸다.
     또 하청을 맡아 꽤 많은 돈을 만지게 되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누런 얼굴이 제 색깔이 날 때 쯤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이 이런 장씨 일가를 시기한 '사탄'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끔씩 장씨의 전파상에 찾아와 심한 농짓거리를 하던 이웃 복덕방 박씨가 장씨가 출장간 사이에 그의 촌스럽고 순진한 부인을 집적거렸던 것이다.
     "아줌마, 몇 살이오?"
     "그건 왜 물어요?"
     "아줌만 내가 보기에도 딱해요. 한창 나이에 뭐 즐기는 것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처음엔 벼락 맞을 소리라고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멋대가리 하나 없는 남자와 평생을 살 생각을 하면 자신의 신세가 결코 유복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자주 찾아와 바람을 집어넣다 보니 카바레까지 진출하게끔 되었다.
     장씨가 장기 출장에서 돌아오자 눈치를 채고 있던 종업원 아이가 그 사실을 장씨에게 귀뜸했다.
     "아저씨, 요즘 아줌마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아저씨 없는 사이에 가끔 외박했어요."
     "그야 임마, 친정에 갔다 왔겠지, 저런 늙은 할망구를 누가 건드리냐?"
     "늙었다니요. 아저씨 없는 사이에 월부 화장품을 얼마나 사들였는지 아세요?"
     "월부 화장품?"
     "그래요."
     "돼지주둥이에 루즈 바른다고 여우가 된다더냐?"
     "사람 일은 몰라요. 조심하세요."
     "원 녀석도 별것 다 신경을 다 쓰는구나." 장씨는 일소에 붙였다.
     그런데 가끔씩 찾아오는 박씨를 대하는 아내의 눈초리 속에 색이 담겨져 있는 것 같이 느낀 건 보름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박씨가 그래도 사람은 좋단 말이야. 옛날에 한 가닥 했다던데." 하고 슬쩍 운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박씨에 대해 언제 그렇게 알았는지
     "뭐 옛날에 시의원도 나갔대나 봐요. 사람이 서글서글한게 이런 촌 동네에서 복덕방 하긴 아까운 사람 같아요."
     "그래서 당신 맘에 들었어?" 장씨의 말에 뼈가 들었다.
     "그런게 아니고‥‥‥‥“
     "그럼 뭐야!" 하며 이번에는 큰소리로 화를 냈다.
     "그 복덕방 새끼 자주 찾아오는 것 내가 모를 줄 알고, 너 이 X년, 이실직고 하지 않으면 이걸로 아가리를 요절낼 줄 알아!" 하며 식칼을 들고 설치자 그의 부인은 억울한 듯
     "하늘이 알아요! 천벌을 받을 소리 함부로 하는 게 아녜요." 하고 훌쩍훌쩍 울고 법석을 떨었지만 아무래도 그의 부인은 순진한데다 초범(?)이었다.
     "우리 일하는 아이가 증인이야! 대질시켜줄까?"
     그녀는 마침내 자백을 했다.
     "꼭 한번이에요. 박씨가 어딜 가자고 해서 술을 잔뜩 먹여 놓고‥‥‥“
     장씨는 아무 말 없이 부천경찰서 형사계로 찾아가 부인과 박씨를 간통죄로 고소했다.
     그렇잖아도 융통성 없는 구식 마누라가 보기 싫었는데 속으로 잘됐다 싶은 장씨는 유치장에서 잘못했다고 두 손 모아 비는 부인을
     "이런 망종들은 실컷 콩밥을 먹여야 해." 하며 합의를 거절했다.
     장씨는 부인이 결국 알몸으로 쫓겨나 6개월 형을 살게 됐을 때 마지못해 합의를 해주었다.
     그 후 장씨는 전파상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합의금을 갖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계집질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장씨의 두 딸은 이런 아버지가 보기 싫어 어머니에게 가버렸고 남은 것은 장씨뿐이었다.
     장씨는 틈틈이 술집 접대부를 불러들여 살림도 차려보았고 다방 아가씨를 꾀어 들여 집안에 앉혀 보았으나 그 동안 벌어 놓은 돈만 축낼 뿐이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식으로 뒤늦게 바람이 난 장씨에겐 하루하루 가는 게 꿈결 같았다. 그러다가 6개월쯤 후에는 더 이상 쓸 돈이 없었다. 알거지가 된 것이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빈털털이가 되자 그 동안 살 섞으며 죽자 사자했던 계집들도 이번엔 외상장부를 들고 찾아와 악다구니를 쳤다.
     "장씨, 그 동안 마신 술값 어떻게 할거요?"
     장사장님에서 장씨로 호칭이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좀 봐줘."
     "술값은 외상으로 치자. 아니, 아이들 화대 값도 외상으로 할거야?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생각다 못한 장씨는 갈아입을 옷 몇 가지만 가방에 챙겨 갖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런 장씨가 가끔씩 우리 친구들 앞에 나타났는데 나타날 때마다 큰 소릴 쳤지만 그의 초췌하고 꾀죄죄한 모습에서 그의 현재 형편을 측량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동안 부산에서 부두 노동자를 비롯하여 외항선원, 회사 경비원, 노가다 인부 등 전자계통과는 전혀 무관한 육체노동을 하며 만고풍상을 겪어서인지 이미 그의 머리는 반백이었다.
     이런 장씨가 딱해서 친구들은 그를 마땅한 과부와 재혼시킬 것을 신중히 논의, 마침 부천에 용한 중매쟁이가 있다는 걸 수소문했는데 그녀가 윤 마담, 즉 통뼈마담이었다.
 
     윤 마담은 디방으로 데리고 나온 장씨를 마치 민완수사관처럼 아래 위를 훑어보며 예의 주시하더니 몇 마디 물었다.
     장씨는 그녀가 묻는 말에 더듬더듬 대꾸했다.
     윤 마담이 쓰고 있는 안경알 속의 눈초리가 차갑고 매섭게 느껴졌기 때문에 잘못 거짓말이라도 하다가 발각되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괜찮아.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차근차근 대답해. 자네의 일생이 걸린 일이야. 나중 일은 생각지 말아.“
     "혼자되신 지는 얼마나 되는지요?"
     장씨는 그 말에 주눅이 들어 올려다 보지도 못하고
     "예, 예, 꽤 오래 됐습니다." 하며 겨우 모기 소리만 하게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한 5년 됐습니다."
     "5년이라? 그럼, 그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다른 여자와 동거생활을 했는지 아니면 틈틈이 난잡한 짓을 했는지 그런 의미였다.
     "그냥 혼자 책도 읽고, 산에도 가고 그랬습니다."
     "기간이 너무 긴데요." 하며 윤 마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음 질문을 했다.
     "이혼을 당했습니까, 이혼을 했습니까? 아니면 상처를 했습니까? 이혼을 당했으면 선생에게 하자가 있는 것이고, 이혼을 제의했으면 부인에게 하자가 있는 법인데 좀더 구체적이고 육하원칙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래야 성사가 됩니다."
     그 말의 뜻을 이해 못하는지 장씨는 머뭇머뭇 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답변해 주었다.
     "예. 상처를 했지요.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떴거든요.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의 일생에 파도가 몰려 온 것입니다.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요."
     윤 마담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건 그렇고, 현재 직업은 뭡니까? 그것도 구체적으로, 또 재산상태는요?"
     "예, 전자제품의 하청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재산은 공장부지하고 이것저것 합해서 약 3억 정도 될까요?"
     이것도 우리가 대답해 주었다.
     "아, 그래요? 그 정도면 재산 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그럼 어떤 상대를 원하십니까?"
     "예, 그냥 빨래나 해주고 어린애 딸리지 않은 40줄의 과부라면,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알아봐야지요. 40줄의 과부라? 퍽 순수한 편이시군요."
     "예, 워낙 이 친구가 마음씨가 착해 놔서‥‥‥‥“
     "호적은 깨끗하겠지요?"
     "예 물론입니다."
     "가족관계는?"
     "현재 홀몸입니다."
     "홀몸이라고 해놓고 부인 얻고 나서 하나 둘 객꾼처럼 모여들면 손해 배상 물어야 해요. 그런 사람들 그 동안 많이 봤어요."
     "염려 놓으십시오."
     그녀는 장씨가 답변하는 말을 신문기자처럼 노트에다 정성껏 적었다. 그러면서도 장씨의 몰골이 초라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 열심히 곁눈질을 하며 흘겨보았다.
     세탁소에서 빌린 양복이 너무 낡아 세탁을 했지만 소매가 헐어져 실밥이 튀어나온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친구 너무 소탈해서 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공치사를 늘여다 놓아도 윤 마담의 노련한 눈길을 피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재산상태는 정확하겠죠? 나중에 심부름 센타 직원들 시켜 확인해 볼 테니까 정확히 말씀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 장씨의 재혼문제는 정식으로 윤 마담의 수첩에 올라 추진되었다.
     장씨와 윤 마담은 그 후 자주 만났다. 윤 마담과 만날 때마다 세탁소 하는 친구는 장씨에게 손님 옷을 빌려 주었고 우린 그의 거사비용을 염출해 주었다.
     윤 마담은 장씨와 만날 때마다 한 사람씩 신부 후보라고 데리고 나왔다.
     어느 때는 스물이 조금 넘은, 비록 과거의 경력(?)이 좀 있지만 살결이 고운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장씨는 저 여자라면‥‥‥‥ 하고 생각했으나 오직 그림의 떡이었다.
     소개를 시키고 윤 마담은 그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피했는데 번번이 장씨 쪽에서 딱지를 맞았다.
     주로 서른 살 내외의 여자는 유흥가 쪽에서 잔뼈가 굵어 세상물정을 너무 잘 알아 장씨와는 상대가 되질 않았다.
     윤 마담은 젊은 여자와는 쉽게 성사되지 않을 것 같자 이번에는
     "장사장님, 아무래도 젊은 애들보다 산전수전 겪은 과수댁이 어떨까요? 한 사람 마땅한 사람이 있긴 있는데 한 가지 아이가 한명 딸려서, 아이라야 친정에서 양육하면 될거고."
     그래서 그것도 괜찮다 싶어 맞선을 보았다. 그랬더니 장씨도 늙었지만 늙어도 아주 늙은 시장바닥에서 고등어나 팔 뚱뚱한 50대쯤의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모르긴 하지만 슬하에 손자까지 있을 성 싶은 늙은 여자였다.
     장씨는 윤 마담에게 싫은 표정으로 눈짓을 했다. 아무리 내가 늙었기로서니 저런 저승길 앞장 설 여자를 데려오다니 사람을 뭘로 아는가 싶어 화까지 났다.
     "장 선생님, 웬만하면 그냥 하세요. 장 선생 인생도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헌신 문수만 맞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그렇지요. 윤 마담, 사람 너무 무시하시네요."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배필이 나타났다. 30 중반의 여자인데 장씨도 호감이 가고 그 여자도 장씨에게 호감을 피력했다. 이런 걸 천생연분이라고 하든가?
     "예, 마음에 듭니다. 추진하겠습니다."
     장씨는 윤 마담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상대방도 윤 마담에게
     "사람이 성실한 것 같아요. 나이가 좀 들었으나 가꾸면 되는 것 아녜요. 오히려 젊은 사람보다 나은 것 같아요." 하며 교제하다가 봐서 살림 차릴 것을 생각하는 듯 했다.
     윤 마담도 장씨에게
     "이번 일은 잘 성사가 될 것 같은데 장 선생, 나 시시한 여자 아닙니다. 크게 놀아요.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하며 금전문제를 넌즈시 물어보았다.
     "예, 제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한 장?"
     "그렇게 해야겠지요."
     윤 마담의 한 장은 1백만 원을 생각하는 것에 반해 장씨는 견해가 달랐다. 십만 원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도 지금의 형편으로는 여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네, 좋아요. 그러면 내일 저녁에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저녁, 장씨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30대 중반의 과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윤 마담이 나타났다.
     "그 아이가 몸이 아파 못 나오겠다고 해서 대신 나왔어요. 아무래도 집에서 반대를 하는 것 같아요. 헤어질 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간 것을 보니, 할 수 없어요. 사람이 하는 일, 본인이 싫다고 하면‥‥‥‥“ 하며 장씨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장 선생,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요?"
     장씨는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윤 마담도 장씨에게 여러 명의 여자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문득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중매만 했지 자신의 일은 한번도 스스로 처리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돈 몇 푼 때문에 남의 인생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을 때 스스로의 인생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윤 마담은 이제부터 중매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쳐 당사자(?)끼리 해결한다는, 이제까지 없었던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 상대를 장씨로 내심 생각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장씨가 비록 머리가 반백이고 체격도 별 볼일 없지만 그 동안 만나본 결과 성격이 온순하고 홀몸이며, 재산상태도 3억 정도 되니 자신의 재산을 축내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체격으로 보아 자기 휘하에 잡고 놀 수 있지 않느냐는 나름대로의 철저한 계산을 해보았다. 그래서 장씨가 마음에 든다는 여자를 다른 핑계 삼아 따돌렸던 것이다.
     윤 마담은 장씨가 술을 마다 않는다는 것을 알고 술집으로 데려가 가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만취한 장씨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수작을 붙였다.
     "장 선생님, 내가 중매쟁이 노릇을 한다지만 나도 외로운 사람이랍니다. 사람이란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나 중매 좀 서 주세요. 구전은 톡톡히 드릴께요." 하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촌닭처럼 앉아있는 장씨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의 악력이 대단해 꼭 역도선수의 손 같았다.
     "윤 마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장씨는 술 취한 와중에도 체면을 지키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떼려 했으나 떼면 뗄수록 수갑처럼 꼭 죄어왔다.
     "장 선생님도 외로운 사람, 나도 외로운 사람,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는 것도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장 선생님." 하며 짐짓 취한 것처럼 슬그머니 장씨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다가 장씨를 쓰러뜨렸다.
     "윤 마담, 이러시면‥‥‥‥"
     그러나 그것도 말 뿐이었다.
     장씨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괜히 돈도 없는 주제에 젊은 계집 탐해봐야 평생 고생문 닫히지 않을 것 같고, 또 몇 달 살다가 젊은 놈팽이 얻어 고무신 바꿔 신을 것 같아 윤 마담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윤 마담의 얼굴이 말상이고 섬찟하게 생겨 마음에 걸렸지만 얼굴이 먹여 살리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뼈다귀가 굵어 가끔 부딪치는데(?) 좀 신경을 써야겠지만 이 여자와 함께 지내면 의식주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씨는
     "이렇게 여러 모로 부족한 나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같이 못난‥‥‥“ 하고 슬쩍 빼보았다.
     "아니에요. 제가 그 동안 너무 잘난 체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 외로운 여자예요. 겉으론 화통하고 뭐든지 혼자 해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장 선생님, 날 어떻게 해주세요." 하며 윤 마담은 장씨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그 이튿날 새벽, 장씨가 깨어보니 곁에 반라의 윤 마담이 번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부터 윤 마담과 한 식구가 되었고 호칭 역시 '여보 당신'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
     윤 마담은 그것도 하느님이 뒤늦게 주신 귀한 남편이라고 장씨를 극진히 대접했다.
     "여보, 괜찮다면 며칠 푹 쉬세요. 당신이 사장이니까 맘대로 해도 될 것 아녜요. 시장하시면 냉장고 열고 입에 맞는 것 꺼내 잡수세요. 나는 수금할게 있어서 나갔다가 좀 늦을테니까요."
     그래서 며칠 간 마음 놓고 푹 쉬었다.
     장씨는 자신의 처지가 발각될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에라, 나중에 삼수갑산 가더라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냉장고에서 기름진 음식과 양주를 꺼내 대낮부터 취했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보내길 4일, 윤 마담이 어느 날,
     "여보, 당신 직장일 보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하고 직장에 나갈 생각을 않고 방구석에서 번둥빈둥 대는 장씨에게 물었다.
     "총무한테 이야기해 놨어요. 일주일 간 몸이 아파 쉰다고‥‥‥“
     "회사를 남의 손에 맡기면 안 되는데‥‥‥“ 하며 윤 마담은 반신반의했다.
     무슨 놈의 회사가 일주일씩 비워도 괜찮단 말인가.
     그날, 일수 돈을 걷어 정오쯤 들어온 윤 마담은 대낮인데도 술이 취해 팬티만 걸치고 대(大)자로 누워 있는 장씨가 문득 의심스러웠다. 장씨의 신원조회 한번 해보지 않고 받아들인 자신이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장씨 친구들 말에 넘어가지 않았나? 3억 정도의 재산이라면 꼴이 왜 그 모양인가?)
     그래서 다시 한 번 장씨의 누워 있는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 동안 목욕탕에 가질 않아선지 손톱 끝에 까만 때가 박혀 있었고 양말 뒤꿈치가 드러나 보여 3억 정도의 재산가 같지 않았다. 누워 있는 장씨의 입에선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품위 없이 침까지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잠꼬대까지 나왔는데 듣기에 아주 민망한 상소리였다.
     "야, 이 x년들 ! 내가 누군 줄 알아! 이래 뵈도 왕년에 용산 짱구라면 계집들이 사족을 못 썼어! 이것들이! 외상술 먹는다고 괄시야! 빨리 술 가져와!"
     윤 마담은 그의 잠꼬대에 기겁을 했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상소리는 아무리 잠꼬대라지만 그의 전력을 의심케 했다.
     (외상술? 이래 뵈도 왕년에 용산 짱구? 아무래도 내가 잘못 봤지, 양말에 구멍 뚫린 것은 또 뭔가? 요즘 세상에 구멍 뚫린 양말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하고 보니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윤 마담은 혹시나 이치가 혹시나 싶어서 장롱 깊숙이 숨겨둔 현금 뭉치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있었다. 윤 마담은 누구도 믿지 못해 수금한 돈을 모조리 봉투에 넣어 모르는 곳에 감춰두었던 것이다.
     안심이 된 윤 마담이 이번에는 장씨의 주머니를 살그머니 뒤져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를 살펴보았다.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을 보아하니 친척 같아 보여 다이얼을 돌렸다. 장씨의 부친 장 장로였다.
     "거기 장기수 씨 댁이지요?"
     윤 마담은 장씨가 깰까봐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조용 말했다.
     "그렇긴 하오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장기수 씨 잘 아는 사이입니까?"
     "그래요. 물어보시오."
     "이혼은 했습니까?"
     "건 왜 묻소? 남이야 이혼을 했건 말았건, 그런데 거기가 어디요? 교도소요?"
     "아닙니다."
     "난 교도소인줄 알았지. 교도소 말고 그 놈이 갈 데가 없는데‥‥‥‥"
     윤 마담은 얼른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완전히 그의 정체가 들어 난 셈이었다.
     "알고 보니 순 양아치 아냐?"
     윤 마담은 자신의 판단이 틀려도 너무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분한 생각까지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한 줄도 모르는 장씨의 잠꼬대는 계속됐다.
     "야, 이x년아! 빨리 쏘주하고 오징어 한 마리 가져와. 윤 마담은 또 어디 갔어!"
     윤 마담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젠 콧물까지 흘리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분한 생각이 앞서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장씨, 일어나요. 여기가 어딘 줄 알아요?"
     "어디긴 어디야, 내 집 안방이지."
     윤 마담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그러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악을 써댔다.
     "아니, 이거 어디서 굴러 온 말뼈다구야! 야, 이 새끼야! 빨리 일어나지 못해!" 하면서 한 발로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그것도 모자라 한손으로 그의 귀싸대기를 훔쳐 갈겼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장씨는 며칠 후에 올 사태가 일찍 다가온 것을 직감했다.
     "내가 취했나? 남의 집에 들어온 것 같군." 하며 부시시 일어나더니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없이 쏜살같이 윤 마담의 집을 빠져 나갔다.
     윤 마담은 세숫대야에 물을 퍼 담아 그를 향해 힘껏 뿌렸다.
     윤 마담은 장씨를 집 밖으로 쫓아 보내고 나서 장농 깊숙이 숨겨 두었던 현금과 자기앞 수표를 꺼내 세어보았다. 2천만 원은 넘어 보였다.
     요 몇 달 동안 이자에 이자가 새끼를 쳐 벌어준 돈이었다. 일수 돈, 고리 대금으로 벌어들인 돈, 다방 임대료, 아직도 걷어 들일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윤 마담은 그 돈을 만져볼 때 산다는 것에 대한 강렬한 의미를 느끼곤 했다. 남들이 느낄 수 없는 쾌감,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종이조각에 불과한 것들을 꺼내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 종이조각들이 축 날까봐 그 동안 남의 결혼식에도, 잔치 집에도, 값비싼 옷도, 친척들의 모임에도 될 수 있으면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 마담은 그 돈을 세어보면서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가슴 한 구석이 텅비고 웬일인지 허무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장씨의 후줄그레한 뒷모습에서 석연치 못한 쓸쓸함을 느꼈다. 얼마 안 있으면 나이 마흔, 그 동안 이 돈을 벌기 위해 인색하고 지독하단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을 버린 전 남편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악착같이 살아왔던 것이다.
     도둑 맞을까봐 자동 경보장치를 설치하고 이자 돈을 늦게 갚으면 인정사정없이 차압딱지를 발송케 하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것은 돈이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잃은 것은 그녀의 인생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주위에 없었다.
     "이것이 뭐길래."
     그녀는 침을 발라 돈을 세다가 그만 그 돈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이것 말고 더 귀한 것이 있을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 같았다.
     길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기타를 두들겨가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동전을 구걸하는 맹인 부부의 얼굴에도 기쁨이 넘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작 동냥 받는 몇 천 원의 돈에서 기쁨을 찾는 것일까? 그리고 아침마다 들리는 청소원 아저씨의 밝은 얼굴, 좌판 아줌마의 피곤에 젖은 얼굴에서 초조와 불안의 그림자보다 오히려 행복감이 엿보이는 건 웬 일일까? 그런데 나는 왜 장농 속에 수천만 원을 숨겨 두고 행복은커녕 매일 초조와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고 살아갈까?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 물벼락을 씌워 내쫓은 장씨에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마담은 마음이 심란해서 그날은 하루 쉬기로 했다. 모처럼만에 극장 구경이나 갈까 하고 생각했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 몰래 들어가 보았던 남녀의 사랑에 얽힌 애정영화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 동안 살아가는데 너무 시간을 뺏겨 감정이 메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매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기쁨을 생각하기에 앞서 중매 수수료에 신경을 써왔던 자신의 마음이 너무 인색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옷을 주워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의 집 앞 골목이 끝나는 길에 요즘 새로 생긴 성당이 있었다. 매일 하루에 두 차례씩 보는 성당 건물이었지만 그날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극장을 가려다 말고 성당 뜨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미사 시간이었다. 여신도들의 머리에 뒤집어 쓴 보자기가 산뜻해 보였다. 영성체 하는 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전능하신 천주와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과연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졌으며 또한 나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이 미처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저 사람들 가운데 나처럼 돈을 숨겨 놓고 혼자 몰래 세어보며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겠지.)
     그녀는 만약 내가 수중에 돈 한 푼이라도 없다면 나는 죽은 송장이나 다를 바 없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죽자 살자 하고 돈을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가슴에 허무가 밀려온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사람대접 받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그러자 그녀는 그 동안 자신은 남들에게 베푼 것이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자기 뒤집어 쓴 여자들 틈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성당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치 패잔병 같은 심정이 들었다.
     사무장 옆에서 말을 주고받는 수녀에게 다가가
     "수녀님, 저도 이 성당에 나올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젊은 수녀의 얼굴은 깨끗했다. 자기처럼 돈 욕심이 없는 아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는 딴 세상에서 온 천사와 같이 느껴졌다. 수녀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비교해 보니 자신의 얼굴은 너무도 때가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해와 세속적 욕심의 때가 묻지 않은 젊은 수녀의 얼굴을 대할 때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수녀는 윤 마담에게
     "초 신자이신 모양인데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늘 선생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선생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마땅하지요. 참 반갑습니다." 하면서 그녀를 성당 뒤쪽의 수녀관으로 데려 갔다.
     그녀는 마치 주인의 손에 끌려가는 한 마리의 소처럼 억지로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죄짓고 쫓겨 다니다 자수한 범인의 심정처럼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앉으십시오."
     그녀가 의자에 앉자 수녀는 그녀를 위해 성호경을 긋고 그녀를 위해 간단한 기도를 했다.
     "전에 교회나 성당을 다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릴 적 교회성가대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흥미삼아 다녀본 것이죠."
     "가족관계는?"
     "홀몸입니다."
     "그 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괄시 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돈이 제가 갖는 신앙이었습니다. 괄시 받지 않고 사람 대접받으며 이 세상을 꾸려 가자면 돈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았습니다만......"
     "잘하셨어요. 돈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이제부터 돈보다도 마음 속에 사랑을 쌓아가는 생활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돈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을 살아가면서 찾아야 해요. 남들과 원수진 것을 풀고, 용서를 해주고 그럼으로써 선생님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으로 베풀어야 합니다."
     윤 마담은 수녀의 '베풀라'는 말에
     "그럼, 제가 갖고 있는 돈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란 말입니까?" 하며 정색을 했다.
     (그게 어떤 돈인데, 마음이 심란해서 성당을 찾아왔는데 겨우 애써 번돈을 게으름뱅이들에게 나눠 주란 말인가? 그래야만 보자기 쓴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는 웃으면서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재물은 때로는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들에게 베풀어 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려는 자는 얻을 것이요, 목숨을 아끼려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란 성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갖고 계시면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재물만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수녀관을 둘러보니 값나가는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값나가는 그림도, 도자기도, 전자 제품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엔 이상하게도 마음을 아늑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용도 모르고 값나가는 그림을 구입해서 벽에다 붙여 놓고 그걸 들여다보면 느끼던 즐거움, 그것은 어쩌면 가짜일 것 같았다. 그림을 감상하며 진정한 즐거움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림의 값을 견주어보며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윤 마담은 이렇게 혼자 살아가면서도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수녀가 부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수녀님은 월급이 얼마나 되십니까?"
     "월급은 없습니다."
     "그럼, 생활하는데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합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물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겠습니까? 선생님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찾아오신 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말에 윤 마담은 그 동안 가졌던 강퍅했던 마음이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도 처음엔 다 선생님 같았습니다. 자주 찾아오십시오."
     수녀의 말을 듣고 수녀관을 나온 윤 마담의 발걸음은 처음의 패잔병 같은 발걸음이 아니었다. 한결 발걸음에 가벼웠다. 평소에 경멸하던 장님 악사부부도, 절름발이 불구자도,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6개월 후, 그녀는 마침내 교리 공부를 마치고 '기름부음'을 받았다.
     통뼈 마담이 아니라 '루시아'란 본명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녀가 이상스럽게 느꼈던 미사보를 쓰고 미사예식에 참례했고, 진정 삶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느꼈다.
     "인생이란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돈 말고 또 다른 무엇, 그것은 사랑입니다. 자매님도 늦지 않았습니다.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세요."
     그녀는 자신 있게 남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놀라운 변화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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