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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우크라이나의 봄 / 노인기
2022년 10월 31일 13시 15분  조회:514  추천:1  작성자: 설야
 

[단편소설]

우크라이나의 봄

노인기

 

     좁은 포신을 뚫고 나온 탄알은 휘익~ 어둠을 가른다. 금속과 화염(火焰)이 결합하여 내는 소리는 살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과도 같았다. 마치 고요한 밤하늘의 고통처럼 뇌 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어둠은 일순간에 분주한 대기를 고요하게 하지만 전운의 기운은 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고도 남았다.

     대다수 외신은 이번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거라 전망했다. 우려와는 달리 전쟁의 양상은 다행히 러시아에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전쟁의 중심은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다. 지금쯤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무모한 결단을 후회하고 있을까? 이렇게 장기화 될 줄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키예프까지는 약 2주 정도면 충분할 거라 여겼다. 늦어도 4월 안에 모든 것이 끝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재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 전쟁 또한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

     러시아 해군의 자랑 모스크바 군함은 이렇다 할 전과도 없이 흑해에서 미사일 두 방에 격침되어 자국에 적지 않은 실망과 당황을 안겼다. 정확히 중앙을 가격당한 함선은 검은 연기를 하늘 높이 뿜어 올리며 위태롭게 운행하다 그만 좌측으로 기우뚱하더니 결국 흔적도 없이 바다에 삼키운바 되었다.

     이외에도 우크라군은 용감하게 러시아의 중요 시설들을 불태웠으며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나갔다.

     그렇다고 모든 곳에서 선방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곳은 러시아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우크라 시민들을 학살에 가깝게 살육했다는 보도도 전해진다. 독재자의 야욕으로 무고한 시민들만 이유와 원인도 모른 채 처참하게 죽어간다.

     푸틴은 우크라가 예상외로 선전하고 그와 더불어 세계의 여론이 러시아에 불리하게 흐르고 있는 것에 초조함을 느껴서일까? 핵 카드를 만지작 만지작하는 것 같다.

     2022년 2월 겨울이 끝나갈 무렵 시작된 전쟁은 꽃피는 봄을 지나 한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초여름이 다되도록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는 앞다투어 우크라의 소식을 톱 뉴스로 다루었다.

     우크라 대통령은 비장한 어조로 결사 항전의 뜻을 밝히고 시민들을 독려했다. 그의 표정과 말에는 과거 그가 코미디언으로 티비에서 사람들을 웃기며 즐겁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은 듯 도리어 결연함이 넘쳐나는 것에 놀라는 눈치다.

     한때 사람들은 코미디언 출신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그래 하며 속으로 비아냥댔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자 그에 대한 편견은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격전지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짧은 머리와 수염을 그대로 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티비 앞에 섰다.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놓인 시민들을 독려하고 세계를 향해 도움의 손길도 잊지 않았다. 강력하고 신속한 무기들을 지원해줄 것과 난리 통에 어디서 식량과 의료 물품을 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원과 물질의 도움을 강력하게 촉구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뻐꾹뻐꾹 뻐꾸기 울음소리 대신 총성이, 아카시아 향긋한 꽃 냄새 대신 자욱한 화약 연기만이 온산을 진동했다.

     우크라이나는 봄을 잊은 지 오래다.

     오늘도 돈바스 지역과 세베로도네츠크가 러시아에 포위돼 힘겹게 항전을 이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살랑살랑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머니의 품 속처럼 포근했다. 생명의 바람이었다. 대지는 변함없이 움을 돋우고 나뭇가지는 새싹을 틔운다. 고통이다. 아니, 고통스럽다. 여러 사람에게 기쁨과 화사함을 안겨줄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이번 계절은 모든 것을 비워야 했다.

     물결 위에 부서지는 찬란한 햇빛도 바퀴 자국 선명한 아스팔트 옆 돌틈의 노란 민들레, 연약함은 오히려 연민을 자극했다. 그러나 연민은 더이상 아름다움으로 자리하지 못했다. 다만 거센 바람은 북으로 러시아로 모든 것을 되돌려 세우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리아는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이십대 초반의 여성으로 키예프에서 약 400킬로 떨어진 조그마한 농촌을 고향으로 두었다. 오늘의 주인공이다.

     눈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듯 크고 색깔은 푸른 빛을 띠기도 하고 그렇다고 완전 푸른빛은 또 아닌 바라보고 있으면 신기하게 빨려드는 것 같다. 왠지 그런 마리아의 눈을 빠져나오기란 힘들 것 같았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 풍성한 머리칼은 짙은 갈색이지만 햇빛을 만나면 금발에 가까웠다. 특히 우크라 사람들에게 드문 갈매기 눈썹은 거짓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입술 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위로 오빠 다섯을 두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거칠었다.

     큰 오빠 알렉세이만 마리아를 위할 뿐 다른 오빠들은 그녀를 남동생 대하듯 했다. 태생 자체는 연약하였으나 고향의 거친 산세와 더 거친 오빠들 틈에서 성장하다 보니 늘씬한 키와 순박한 생김새와는 많이 다른 마리아를 사람들은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키예프 출신으로 성장하면서 비교적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뭇 남성들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심성이 고운 사람으로 지금까지 남편이나 부모님의 속을 단 한 번도 썩힌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키이우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름 없는 시골 청년을 만나 결혼까지 이르렀는지 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연은 이러했다. 마리아의 아빠는 전형적인 우크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그래도 공부는 곧잘 했다. 어느 나라든 시골은 할 일이 많다. 아니, 끝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어린 나인데도 시골에서 농부로 평생을 농사나 지으며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손에 쥐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를 면담했다. 아버지 또한 아들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뭔가 비장함을 느꼈는지 어른을 대하듯 마주 앉았다.

     부자는 이렇게 냉냉한 공기를 흩뿌리며 앉아있는데 대화의 절반은 침묵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잠시 후 “음~” 하며 신음하듯 내뱉었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면 하는 수 없지.” 아버지는 아들의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러웠고 아들 또한 아버지의 당혹한 표정이 부담스러워 애써 얼굴을 돌렸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비록 시골에서 성장했지만 보다 큰 도시 생활을 꿈꿔왔었다.

     성적표를 받아들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은 이유는 중세건축에 관심이 높아 중세건축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학을 키이우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버지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아들의 견고한 내면을 발견했다. 그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고 비록 늦은 감이 들긴 하지만 아버지 자신에게도 의미를 부여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결심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곧바로 키예프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말로만 듣던 키이우를 찾은 것은 가로수 잎이 스산하게 떨어질 무렵의 늦가을이었다. 쌓인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만 봤을 때 계절은 마치 초겨울 같았다.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베리아의 찬 공기를 그대로 키예프 상공에 뿌려 놓은 것 같이 손등은 시렵고 발걸음은 종종거렸다. 푸르렀던 가로수는 앙상해지고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다. 마른 가지는 햇살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아들은 그런 햇살을 보며 얼굴을 찡그린다. 막연히 꿈꾸던 도시의 태양을 그렇게 한없이 올려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아버지가 흔들어 깨우듯 자신을 흔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부자는 모든 것이 낮선 거리를 약속이나 한 듯이 바삐 움직였다.

     내년 봄이면 아들이 진학할 대학을 우선하여 들렀다. 정문에 들어서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진으로만 보던 곳이 아닌가. 벅차기는 아버지도 매한가지다. 한마디로 감개무량,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슴을 부풀리고 또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여기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네.”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지 대답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의 동행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옆에 떡 버티고 있으니 자신감이 충만했다. 캠퍼스를 만끽하듯 천천히 걸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눈 적이 없는 대화들을 나누었다.

     바로크 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라 지어진 위풍당당한 건물들이 한두 채도 아닌 여러 채가 눈에 띄었다. 화려하면서 복잡한 무늬는 마치 고도의 정밀 기계로 깎아 만든 것처럼 정교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오래전 17세기 무렵 한창 유행했던 건축기법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 역시 현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넓은 벽면은 명화 한점 걸려있지 않았어도 건축 당시 새겨진 문양으로도 훌륭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이토록 조화로울 수 있단 말인가?

     언제 누가 설계하고 건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무슨 건물인지 알 턱이 없는 아버지는 연신 아들에게 건물의 용도를 묻는다. 그러다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왠지 학교와 연관이 깊을 것만 같은 화강석 받침의 한 흉상이 보였다.

     “저 흉상은?”

     “학교 설립자입니다.”

     돌비 가운데 기록된 설립자의 약력을 소리 없이 읽어내려갔다.

     “참 훌륭한 분이구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또 말은 하지 않았어도 아들이 키이우에 다녀간 일도 없는 데 언제 대학의 정보들은 세세하게 알았을까? 간절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대화만큼이나 뜨거웠던 가슴은 온도 차가 크지 않았다.

     캠퍼스를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도 아들도 모두 대학생이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두 사람은 그 여세를 몰아 아메리카에서 막 건너온 맥도날드 가게로 향했다.

     아들은 마지막으로 햄버거를 언제 먹었는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

     발길이 닫는 대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가게를 들어서긴 했는데 곧 후회했다.

     알 수 없는 메뉴들로 인해 주문부터 난관이었다.

     빨간 모자를 살포시 눌러쓴 앳된 아르바이트생은 주문을 위해 몇 마디 건넸으나 두 사람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친절한 그녀의 도움으로 주위 사람들의 낮 뜨거운 시선은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부자의 모습은 잘 갖춰 입었어도 왠지 어색한 차림은 어쩌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그만한 것이 또 있을까?

     그렇게 마리아의 아버지는 꿈에 그리던 대학으로 진학하고 1년을 정신없이 보낸 다음 2학년으로 진학했다.

     봄기운이 완연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두 손은 번갈아 가며 호주머니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큼지막한 가방은 어깨에 메고 왼쪽 옆구리에 책 두 권은 들고 도서관 모퉁이를 막 돌아서는데 맞은 편에 긴 머리칼의 여학생 둘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지나가는데 왠지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볼까? 망설이다 결국 돌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에게 도서관은 수업 다음으로 중요하여 입출시간이 비교적 일정했다. 들쭉날쭉 불규칙한 패턴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2주일하고 5일이 지났다.

     손끝에 전해지는 솔솔 부는 바람은 어제와는 확실히 달랐다. 따스함이 묻어났다. 
     ‘오! 드디어 봄이 온 것인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고 그것은 일 년 중 특별히 봄에만 부여된 시간 같았다. 꽃은 보이지 않는데 향긋한 꽃내음이 느껴졌고 움이 싹을 틔우지 않았어도 파릇한 풀 내음을 내 품는 것 같았다. 뇌 속은 이미 다른 수 천개의 미립자를 끌어다가 오버랩하여 마치 현실로 인식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짧은 21년의 삶 가운데 처음 경험해보는 것으로 지금 자신의 상태가 꿈인지 생시인지 본인도 잘 분간하지 못했다.

     수려한 산골에서 나고 자랐어도 한 번도 나무와 숲과 자연을 생각해보지 않았고 또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도 고향의 친구들도 멀리 있다.

     어제까지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졌다면 오늘은 모든 것이 날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다.

     어머니의 품 속을 떠나 처음 느껴보는 행복, 풀밭 같은 포근한 바람은 그리움에 지친 몸과 마음을 그대로 받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상황은 또 달랐다. 몸의 지체 중 발끝 말초신경은 다른 곳에 비해 지극히 현실적이다. 저릿저릿했다. 비로소 본연으로 돌아섰다. 순간, 이곳저곳 통증이 몰려왔다. 누가 말했던가. ‘아프니까 청춘!’ 무심코 피식 웃으며 지나친다. 물론 육신의 아픔을 두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이때, “저기요?” 어디선가 누구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화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여보세요?”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다.

     오른쪽으로 휙 고개를 돌려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그의 가방을 잡아끌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얼굴로 짓은 갈색의 긴 머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순간, 어리둥절하여 정신을 못 차리는 남학생을 향해

     “전에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맥도날드에서 처음 봤어요.”

     그랬다. 그때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해할 때 친절을 베푼 여학생이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마리아의 어머니는 아픈 친구를 대신해서 잠깐 3시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교대 근무자가 뚜렷한 이유 없이 10분 정도 늦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아버지와 아들이 맥도날드 매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리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만났고 지금 마리아의 나이보다도 적은 나이였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머니도 여러 대학을 놓고 전전긍긍하다가 우연히 아버지가 다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일찌감치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마침 가방을 멘 어깨가 무척 힘들어 보이는 어떤 남학생과 마주치게 되었다.

     2년간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고 또 기억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그런데 그날!

     어쨌든 이런 기막힌 만남은 졸업과 동시에 결혼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첫아들 알렉세이가 태어났다. 아빠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은 행복은 생각처럼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잦은 기침은 그칠 줄 모르고 오히려 점점 심해져 토혈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진단 결과 폐결핵이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폐렴으로 발전하여 생사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힘들겠습니다.”

     주치의는 똑바로 아빠를 쳐다보지 못하고 환자의 상태를 담담하게 전해주었다.

     아직 많이 어린 아들을 안고 병원들을 전전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심 끝에 두 분은 아빠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아무래도 아빠 혼자 어린 알렉세이와 병약한 엄마를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부모님의 도움이 절실함을 알고 아이가 조금 성장할 때까지만 함께 거하기를 부탁드렸다.

     그렇게 어머니는 태어나 처음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했다.

     모든 것이 어색하다 못해 낯설기만 했다.

     처음 며칠은 스트레스를 받아 오히려 건강이 더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하고 석 달이 흘러 넉 달째 접어들었다.

     시골 생활에 무슨 기대는 고사하고 더 이상 악화하지만 않기를 바랬다. 복잡한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선 공기가 맑았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에 들로 산으로 일을 거들었다.

     처음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았던 몸은 점차 기운이 돋았고 신기하게 기침과 호흡기 관련 장기들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알렉세이가 세 살쯤 될 무렵, 어머니는 기적같이 예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아버지는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겨우 회복됐는데 선뜻 도시로 나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쉽사리 좁혀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조부님은 가족회의를 개최했다. 결론은 아빠의 꿈도 중요하지만 어머니의 건강은 더 중요하다는데 달리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지혜롭고 흔들림 없는 할아버지의 판단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후, 마리아의 어머니는 아들 넷과 오늘의 주인공 마리아까지 해서 여섯의 자녀를 출산했다.

     서두가 많이 길었다. 이 땅에 맥도날드가 처음 들어올 무렵이니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마리아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함은 물론 아니다. 오직 마리아는 참혹한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는데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다가 결국 죽음보다 더한 고통 중에 놓이게 된 것을 말하고자 한다.

     마리아의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오빠들은 여동생을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잔소리를 하는데 그것은 마리아에게 고문과도 같은 지긋지긋한 간섭이었다. 그런 오빠들로부터 해방은 마치 새장을 벗어난 새가 자유롭게 창공을 나는 것과 같았다.

     처음부터 유아교육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래 가족들은 사범대를 원했다. 마리아 자신도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가족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도록 지켜본 선생님은 마리아에게 유아교육을 권했다. 전혀 뜻밖이었다. ‘유아교육이라니’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선생님의 의도를 들어보기 전에는 혼잡만 가중될 뿐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의 어떤 부분을 들어 유아교육을 권하셨을까? 전에도 한번 사범대를 말씀드렸는데 유아교육이나 사범대는 장래를 위한 비젼보다는 왠지 사명감에 가깝게 느껴진다. 확실히 세상 출세를 위함은 아닌 듯하다.’

     선생님을 만난 이후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뜻을 정하는데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유아교육과 겸해서 사학을 부전공으로 함께 공부했다.

     가족들 곁을 떠나기는 처음이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청소년기를 지나면 부모, 형제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랄 때가 있는데 막상 떨어져 생활해보면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평온한 삶을 살았는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어머니의 희생, 가족들을 위한 아버지의 책임감, 비록 자신을 남자아이 대하듯 부드러움은 몸 속 어딘가 꽁꽁 묶어놓고 좀처럼 풀릴 줄 모르는 오빠들, 집 떠나 생각해보니 그래도 본심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큰오빠 알렉세이가 유일하게 가족들을 대표해서 편지를 보내왔다. 어린 여동생이 많이 생각나고 아무 연고 없는 곳에 혼자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걱정이 앞섰다.

     마리아는 바쁜 일정으로 제때 소식을 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낯선 곳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향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함께 있을 때는 가족의 소중함을 왜 잘 알지 못했을까? 눈감으면 조용히 떠오르는 변함없이 성실하신 아버지, 평생 가족들을 챙기느라 어느새 까칠까칠한 어머니의 손, 그렇게 어머니는 자신의 삶이라곤 온데간데 없었다.

     누구라도 외로이 혼자 떨어져 생활하다 보면 주눅이 들거나 의기소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가족들의 기대와 응원에 힘입어 매사에 자신이 넘친다. 수업을 듣는 그의 눈동자는 항상 빛났다.

     우크라는 동유럽국가로 러시아 다음으로 국토가 넓다. 남동쪽과 남쪽 흑해와 아조프해를 제외하고 사방으로 국경이 접해있다.

     흑해는 우크라의 해상물류 거점으로 너무도 중요한 곳이다.

     셋째 오빠 세르게이가 태어나던 해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였다. 동부 유럽 대부분이 70여년의 긴 기간 동안 소련 정부의 통치 아래 있다가 한꺼번에 분리 독립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먼 이야기가 아닌 불과 30년 전의 일로 비교적 가까운 이야기다.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다가 독립하여 자력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많은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가보다.

     마리아는 이렇듯 처음부터 전쟁의 중심부로 나아갔던 것은 아니었다.

     3학년을 마무리할 즈음 계절은 찬 기운을 뿌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매서운 시베리아의 눈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하다. 덩달아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해(年)의 시작은 그나마 여유로우나 그런 여유도 금세 바닥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의 다 지나가고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당황한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마음은 전기에 감전되었다 풀려난 사람처럼 경황이 없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하고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러시아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했다.

     러시아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의 동쪽 돈바스 지역 주변으로 집결하다가 세계 언론들의 비난이 이어질 때는 물러나고 그러다 잠잠해지면 더 많은 병력이 결집하고를 반복하더니 해가 바뀌고 얼마 못되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결국, 설마설마하는데 그만 러시아의 포문이 우크라를 향해 불을 뿜고야 말았다.

     사학과 수업을 2년간 같이 수강한 이반 겐나디 안톤은 마리아보다 2년 위의 체육과 학생으로 건장한 청년이었다. 키이우에서 나고 자란 그는 한 번도 키이우를 벗어난 적이 없는 전형적인 도시 사람이었다.

     마리아를 처음 본 순간,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쾌활함은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맑고 청순한 모습에 이반의 심장은 너무 빠르게 뛰어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이토록 타인을 향해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이 자신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은 대학 3년이 될 때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리아를 향한 요동치는 가슴을 조용히 속으로 간직할 뿐 아무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해 일 년은 한 달보다 짧았다. 적어도 마리아에게는 그러했다. 조용히 2학년을 준비하는 가운데 가급적 부모님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는 중 오빠 알렉세이에게 편지가 왔다.

     가족들이 몹시 기다리고 있으니 다른 생각 말고 방학과 동시에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확히 1년 만의 방문이었다. 버스에 올라타면서부터 마음은 이미 고향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탐스럽게 익은 곡식은 산들바람에 너울너울 춤추고 알알이 맺힌 이삭은 튼실해 보였다. 한눈에 풍년임을 알 수 있었다. 들판의 푸른 잎사귀들은 바람을 일으키듯 마리아를 격하게 맞이했다.

     해질 녘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에 가슴이 떨려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향취인가. 마리아의 후각 시신경은 인간의 눈에 절대 보이지 않는 고향의 미립자를 정확하게 기억해 내고는 가슴이 고무풍선이 되도록 부풀린 다음 뱃속 깊이까지 들이마셨다. 이렇듯 고향의 그리움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오직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아무것도 기억 못 할 어린 치어가 강물을 따라 대양에 다다른 다음 장성하여 기한이 차면 정확히 자신이 태어난 골짜기 냇가에서 자신의 어미가 그러했듯 그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화를 끝으로 생을 마감한다. 연어 이야기로 교훈이 많은 물고기이다.

     고향이란 연어처럼 참 묘한 존재라는 것을 처음 느껴보았다.

     열흘간 가족들과 꿈같은 날을 보내고 다시 키이우로 돌아왔다.

     떠나오기 전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는 딸의 손을 붙잡고 연신 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마 다른 할 말도 많이 있었을 텐데 행여 건강이 나빠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어머니의 얼굴은 몹시 수척해 보였다. 밤새워 뒤척이며 괴로워하신 것이 분명했다. 얼굴과 손등에 잔주름이 부쩍 널은 어머니! 아버지 또한 얼굴 이곳저곳에 무거운 주름이 내려앉은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떠나오는 발걸음은 연(鉛)을 주렁주렁 매단 것 같이 무거웠다.

     때마침 해외 소식통들은 러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듯 우려하는 목소리들을 냈다. 앞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염려하던 무거운 공기는 몇 달이 못 되어 현실이 되었다.

     마리아는 졸업 논문도 미리미리 준비하고 동시에 취직 시험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만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 학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국가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아메리카는 볼 것도 없는(승산이 없다 뜻)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대통령을 아메리카로 망명을 제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크라 대통령은 망명보다 국민과 함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울 것을 분명히 했고 그런 그의 결단은 어떤 화력보다 강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국민을 견고히 하고 다시 흔들리지 않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우연히 러시아 군인들이 우크라 마을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한곳으로 몰은 다음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어린아이들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마치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것은 빛바랜 옛날 화면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장면이었다.

     전쟁은 자연재난이나 인재에 의한 재앙 또는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한순간 화염에 휩싸여 죽거나 다치거나 어떤 사람은 생사도 모른 체 이산가족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전쟁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인생사 전쟁만 아니면 그 모든 재난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며 다 헤쳐나갈 수 있다고 한다.

     국제 협약에 따르면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힘없는 여자와 노약자, 어린이들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되며 만약 이를 어길 때는 군사 재판에 회부될 수 있으며 만약 그러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된다.

     처참한 아이들의 시신을 보자 마리아는 마음 속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적의가 마그마같이 부글부글 끓어 오름을 느꼈다.

     학교로 갔다. 폭격에 의해 건물이 손상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나 둘 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생기발랄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학생들은 무너져 내린 교실을 보며 흐느껴 울었다. 마리아의 두 눈에도 쓴 눈물이 매달렸다. 검은 눈썹을 흥건히 적신 다음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볼 양옆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 눈물은 넘어진 검은 콘크리트 잔해 위에 떨어진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와 교실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저마다 울분이 솟아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어떤 남학생은 벽면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군데군데 철근 더미가 삐죽삐죽 솟아 있는 그을린 벽을 향해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쾅쾅 주먹을 휘두른다. 러시아를 향한 분노의 주먹이었다. 많은 젊은 학생들이 우리도 싸우겠다고 앞다투어 지원했다. 그렇다고 누군가 선동하거나 강요에 못 이겨 지원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마리아도 어린 생명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장면이 잔상처럼 떠나지 않았다. 치유되기 쉽지 않은 고약한 트라우마를 자신도 모르게 이미 격고 있었다.

     연약한 여자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피난이나 피신조차 할 수 없는 병약한 노인을 폭행해 죽이기도 하고 어린 유아를 돌아보지 않는 러시아군을 향해 분노했다.

     모퉁이를 환하게 비추던 가로등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깜박이는데 곧 쓰러질 듯이 힘이 없다. 타닥타닥 소리는 잠시 후 들리지 않았다.

     매서운 밤하늘은 금방이라도 폭탄을 쏟아부을 것만 같았다.

     참으로 매서운 밤하늘이었다. 올려다보기가 여간 두렵지가 않다.

     어쩌다 북쪽 끝에서 번개의 번쩍임과 흡사한 파란 광선이 번쩍이고 동시에 성난 사자의 부르짖음 같은 오싹한 울음에 절로 머리가 곤두선다.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마리아가 말했다.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습니다.”

     별빛이 맑은 우크라의 밤 풍경은 일순간 공포의 흑암으로 둔갑했다.

     어디서 누가 무슨 목적으로 발사했는지는 고사하고 적군이 발사했는지 아니면 아군이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수십 발의 포탄무더기는 눈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간다. 어떤 날은 이것들이 별들을 대신하듯 반짝였다.

     그래도 사상자는 줄여야 했기에 기본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로 전장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기초 훈련을 다지는 초라한 훈련소에 지원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군사 기본교육은 거의 생략하고 실전을 바탕으로 한 훈련이 어쩌면 더 효율적인지도 모르겠다. 유격과 각개 전투는 실전을 방불케 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는 우크라이나군이 거의 모든 곳에서 러시아보다 열세였다.

     시간이 없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아무래도 사상자를 많이 줄일 수는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소총을 전달받고 영점 잡고 과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보는 것으로 몇 일간의 훈련은 끝이 났다. 그리고 전선으로 내몰린다.

     어느새 연병장은 신병들을 이송할 수송용 군용트럭들이 배기구로 굉음과 검은 연기를 뿜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모인 가운데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나이가 척척 소리를 내며 단상 위로 올라간다. 육중한 덩치 중에 유독 목덜미가 굵은 것이 마치 황소의 목처럼 강인해 보였다. 앞에 정열하여 서 있는 햇병아리들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그의 표정은 어둡고 칙칙했다.

     “고생 많았다.” 목소리는 덩치에 비해 잔잔했다. 가슴이 메이는 듯 한숨을 연거푸 두 번이나 내쉰다.

     “이 시간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곳으로 저 군용트럭들이 여러분을 안내할 것이다. 그곳은 아무도 나의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직 포탄과 총성과 비명만이 귓전을 울릴 것이다. 조국의 운명은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
     눈물이 고였다. 제군들은 그의 무게보다도 무거운 침묵의 의미를 헤아리기라도 한 것일까? 
     “와 ~” 울분에 찬 함성이 온천지를 뒤흔든다.

     그는 단상 위에서 짧은 두 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무겁고 긴 침묵을 던졌다.

     한편, 이반 겐나딘 안톤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얼마 동안 세무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왔다. 잠시도 그냥 있지 못하는 본인의 성격과 세무하고는 많이 다름을 발견했다.

     겐나딘의 아버지는 아들도 본인과 같은 세무 공부를 내심 바랬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세무의 기초적인 일을 맡겨보았으나 알려준 대로 하지 않고 엉뚱하게 하여 바로 잡느라 상당 시간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겐나딘의 아버지는 참고 인내하면서 ‘조금 지나면 잘 하겠지.’ 하고 도리어 자신을 위로하듯 답답함을 억눌렀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같은 실수가 계속 반복됨을 알고 그 동안 꾹꾹 눌러왔던 인내는 분노가 되어 폭발하고 말았다. 아들을 향한 높은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흥분했는지 얼굴 전체에 열꽃이 피어올라 정수리까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아들 또한 그런 아버지가 몹시 부담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한마디 의논도 없이 하사관 모집 공고를 보고 단숨에 지원 입대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이었다.

     12주가 넘는 긴 훈련 끝에 신병 훈련소로 발령받았다.

     본래 큰 키와 단단한 체구를 소유한 그는 석 달이 지나자 제법 군인다운 면모가 풍겨 나왔다.

     훈련병들에게 유격대 시범을 보이며 유격 훈련과 총검술을 지도했다. 방심은 곧 죽음임을 항상 강조했다.

     훈련 첫째 날 여러 코스를 돌고 돌아 유격 훈련장에 도착했다. 군복은 이미 땀과 흙탕물에 젖어 말이 아니었다. 팔각의 챙이 긴 빨간 모자의 교관은 군인의 자세와 군기가 많이 약한 훈련병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는 바위같이 단단하고 메시지는 녹음기를 털어놓은 듯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 얼굴과 목둘레 손등 피부가 드러난 곳은 그을음이 내려앉은 듯 검게 탄 것이 장시간 햇볕에 노출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기둥같이 굵은 허벅지 커다란 손에 쥐어진 소총은 마치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절도있는 그의 시범 동작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런 그의 기백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감을 한층 충만하게 심어주었다.

     마리아가 도하 훈련 중 관등성명을 제창하자 겐나딘이 비로소 마리아를 알아보고 놀란다. 물론 마리아는 겐나딘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리아는 러시아와 한창 불꽃을 주고받고 있는 전방으로 배정되었다.

     그곳은 푸틴의 자존심이 걸린 곳이기도 했다. 치열했다. 그의 모든 신병들이 이곳으로 내몰린다. 러시아는 최정예부대를 투입하여 우크라이나를 압박했다. 우크라이나 사상자가 러시아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겐나딘은 마리아가 치열한 전방으로 그것도 사상자가 제일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배정됨을 알고 자신도 교관의 직무보다 전선에 나가 싸우기를 희망했고 그것은 곧 받아들여졌다.

     겐나딘은 마리아와 같은 군용트럭에 올랐다. 양옆으로 길게 장의자가 고정되어 있는데 한 줄 10명씩 해서 대략 20명 정도 앉을 수 있었다. 물론 덮개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전장으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군용트럭의 묵직하고 둔탁한 디젤 엔진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겐나딘과 마리아는 대각선으로 앉았다.

     마리아는 초조한 듯 차에 오르면서부터 고정된 시선은 움직일 줄 몰랐다.

     게나딘은 그런 마리아가 몹시 걱정되어 자주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얼마를 왔을까? 불도저 같은 육중한 장갑차의 웅장하고 무거운 기계음이 가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목적지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덮개를 살짝 젖힌 다음 밖을 살펴보았다. 총성과 포성은 들리지 않지만 싸늘한 공기와 곧 죽음이 임할 것만 같은 무표정한 얼굴에서 우크라이나의 가장 뜨거운 곳에 도착했음을 확신했다. 
     다음날 겐나딘과 마리아는 곧바로 전선으로 향했다.

     적진 깊숙한 곳!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부상병들이 새로운 병사들을 구경이라도 하듯 불편한 몸을 일으키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많은 것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는 티브에서 보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많이 열악했다. 병력은 턱없이 모자랐고 화기는 말할 것도 없이 열악했고 화력은 방어조차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에 반해 러시아는 마치 사생 결단이라도 내릴 것처럼 화력과 병력을 집중했다.

     우크라 대통령은 서방에 물자를 지원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나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나라를 향해 경고성 메시지를 날렸다.

     겐나딘은 생각하기를 ‘이곳에서 살아서 돌아가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영원한 이별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문득문득 그를 괴롭혔다.

     젊은 남자도 중도에 포기할 정도로 힘든 훈련을 꿋꿋하게 이겨낸 마리아!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험악한 전장 속에서도 “물드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마리아의 목소리는 겐나딘의 가슴을 짓눌렀다.

     오래전부터 아무도 모르게 간직해온 사람을 전쟁터에서 잃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탄알이 피웅~ 하고 겐나딘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나무에 박힌다. 어떤 때는 나무를 피해 바위에 부딪치면 파편들이 나뭇잎들을 요동치게 한다.

     벌써 동기 두 사람이 지난번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다. 한 사람은 총알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는 큰 부상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역시 총알이 오른쪽 허벅지 중앙을 그대로 관통했다. 겐나딘이 허리띠를 풀어 지열을 한 다음 부축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다. 물론 두 사람 다 온전히 회복하기란 부상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양쪽 진영은 잠시 소강 모드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도 마리아와 겐나딘은 위기를 잘 넘겼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깊이 의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번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우크라군은 누가 더하고 덜 할 것도 없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추스르기에 시간이 꽤 걸릴 것만 같았다.

     마리아와 겐나딘은 우연히 파괴가 심한 의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마리아는 부상병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지원했고 겐나딘은 복구하기 위해 차출되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겐나딘이 손으로 머리를 쓱쓱 빗어넘기고 마리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부상병들의 상태는?”

     “부상의 정도가 매우 심합니다.” 마리아 역시 송글송글 맺혀있는 이마의 땀방울을 소매로 쓰윽 훔치며 대답했다.

     “안드레이는?” 허벅지를 관통당한 동료의 안부를 묻는다.

     “밤마다 울부짖다가......”마리아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멈췄다.

     “밤마다 울부짖다가?” 겐나딘이 놀란 눈으로 마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마리아의 눈망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깊게 고여있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리며 흠칫하는 마리아를 보는 순간, 겐나딘은 안드레이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총알이 관통한 안드레이의 다리는 부상 정도가 심했다. 정형외과를 전문으로 하는 잘 갖춰진 대형 병원에서도 결코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인데 하물며 이런 열악한 야전 병원에서 온전한 치료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되어 괴사가 진행되었다. 군의관은 이미 괴사가 진행되었음을 알고 바로 봉합 수술을 시행하려 했으나 대대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차례 수술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못했다. 한 차례만 더 해보기로 하고 그다음은 군의관 뜻에 따르기로 했다.

     상처는 대대장과 군의관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항생제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혈액이 공급되지 못한 살점은 몸에 붙어있어도 마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까맣게 죽어 들어갔다. 괴사가 더 진행되기 전에 의사는 봉합을 서두른다.

     전열을 가다듬은 양 진영은 또다시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예상대로 러시아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아마도 우크라이나의 피해 정도가 더 심함을 알고 회복되기 전 선제공격을 가해 확실히 우위를 점할 심산이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런 와중에 G7이 참석하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회의에 참석해 러시아의 침공은 불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에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자행되지 않기를 강력히 호소하고 더불어 물리적 지원을 촉구했다.

     마리아와 겐나딘이 속해있는 부대는 지난번 폭격에서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고 또다시 적군의 공세를 맞이해야 했다.

     겐나딘은 부지런히 모래주머니를 쌓고 무너진 진지를 구축했다. 비록 힘들게 쌓는 돌무더기 하나하나가 자신과 동료의 생명을 지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와 함께여서 지금까지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고, 총알이 빗발치는 위험 가운데서도 오히려 자신의 안전보다 마리아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겐나딘은 절망 가운데 놓였어도 마리아를 생각함으로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하나같이 죽음에서 막 돌아온 표정을 짓고 말이 없었다. 말을 건네는 사람도 상대방에게 말을 붙이는 사람도 없는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다음 전투에서 자신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때리고 머릿속을 맴돌고 몸 구석구석 혈관이 산소를 운반하듯 두렵고 불길한 생각들을 온몸으로 실어나르는 것 같았다.

     답답한 심경을 달리 표출할 방법이 없기에 어떤 병사들은 계속해서 담배만 피워댄다. 곧 적군의 공습이 시작될 거란 전문이 내려왔다.

     이어서 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흘러나온다.

     “각자 위치로!” 높은 지휘소에서 내려다보듯 말했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각자 위치를 고수하고 이탈하지 말 것을 위엄있고 당당한 투로 재차 반복했다.

     지난번 전투에서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 이번에는 가급적 사상자를 줄일 목적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진지 구축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신을 주고받았다간 공연히 아군의 피해만 늘어날 뿐! 아마도 상대방의 전술에 그대로 말려 들어갈 것이 뻔했다. 지난번에도 적군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함으로 화를 키웠다. 해서 이번에는 전술을 바꾸어 적군이 아무리 총과 대포를 쏘며 나아와도 각자의 참호에서 대장의 명령이 내리기 전까지 총알 한 발도 쏘지 말 것을 지시해 놓았다.

     예상했던 대로 러시아는 지난번 전술을 들고 나왔다. 화염은 맹렬했다. 비교적 안전한 참호에 몸을 숨겼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러시아군의 성난 사자 같은 공세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러시아가 간격을 좁히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게나딘의 참호에까지 미칠 것 같았다. 점점 가까워진 러시아군은 얼굴 식별이 가능한 거리까지 좁혀왔다. 우크라군 대장은 박자를 맞추듯 마음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헤아리며 러시아군이 조금 더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우크라군은 마치 출발 선상의 100미터 선수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았고 대신 무서운 슬픔과 흥분이 대장의 신호를 재촉하듯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우레같은 대장의 소총이 탕탕하고 불을 뿜었다. 이것은 곧 우크라군의 공격 신호로 대원들은 대장의 총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크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맨 앞쪽 참호의 겐나딘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뛰어나갔다. 단숨에 러시아군 다섯을 해치웠다. 순식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우크라군의 반격에 러시아군은 흔들렸다.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곱게 물러갈 러시아군은 또 아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높지 않음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러시아가 유일하게 미국과 견줄 수 있는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쪽은 오히려 러시아였다.

     이곳만 보더라도 벌써 몇 달째 치열한 공방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다 결국 사상자만 잔뜩하고 별 소득 없이 물러난다면 러시아의 체면은 그야말로 말이 아닐 것이다. 러시아도 이 부분은 잘 알고 있었다.

     우크라군이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러시아는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고는 곧바로 반격에 나선다. 이번에는 60톤이 넘는 순수 러시아산 철 덩어리 장갑차를 앞세웠다.

     러시아는 자국의 전차가 지상에서 성능이 가장 우수하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자랑하던 티거 전차에 소련의 전차들이 맥없이 무너지자 소련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곧 있을 독일의 모스크바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전차개발이 시급했다.

     종전보다 뛰어난 T-34를 개발했지만 그렇다고 독일의 전차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래도 모스크바를 독일로부터 지켜내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의 가을은 깊어가고, 그리고 잠시 후 악명높은 모스크바의 겨울이 찾아 왔다. 살인적인 추위는 전쟁의 흐름마저 바꿔 놓았다. 독일은 소련의 화력보다 배고픔과 추위에 의해 거의 점멸하다시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독일군은 소련의 전차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소련에 패배함으로 6년 동안의 세계대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일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독일을 물리쳤던 소련 시절의 우수한 전차 디엔에이를 러시아는 그대로 물려받았다.

     지구상 현존하는 최고의 전차가 성난 사자같이 울부짖으며 우리의 주인공 마리아와 겐나딘의 부대를 향해 꽝꽝 불과 연기를 쏘아대고 있었다.

     전차의 위력은 대단했다. 순식간에 팽팽하던 전세를 러시아 쪽으로 기울여 놓았다. 반경 수 킬로 내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과 사람이 주요 대상이었다. 한번 목표로 삼은 표적은 이동 중이라도 피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이렇듯 우크라군의 사상자와 피해는 대부분 러시아 전차와 미사일에 의해 발생했다. 대전차를 앞세워 진격하는 러시아군의 공세의 수위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최고로 강렬했다. 마치 러시아의 모든 화력을 오직 이곳에 쏟아붓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많이 열세인 우크라군은 밀리고 또 밀려 결국 마지노선에 다다랐다.

     잠시 숨을 고른다. 좌우를 둘러보니 얼굴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전투가 치열한 만큼 희생자도 많이 발생했다. 대장은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변변한 화기로 최정예 러시아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동안 대장의 훌륭한 지휘 덕분에 그래도 잘 견뎌냈지만 아니 견뎠다기보다 버티었다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통신병으로부터 무전기를 건네받고 어디론가 다급한 목소리로 무전을 날렸다. 아마 상부에 지원 요청을 하는 것 같았다.

     겐나딘의 대장은 남은 병력을 확인하고는 어쩌면 최후의 결전이 될지도 모르는 작전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잘 버텨야 할 텐데.’

     대장은 시름이 깊었다. 러시아 또한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나름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매달렸다.

     소총과 수류탄만으로 저 강철 덩어리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가시권 밖의 러시아 군인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장은 무전기를 통신병으로부터 빼앗듯이 잡아채고는 목청을 높인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들이 움직인다.”
     상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남은 병력과 화기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어느새 대장의 목소리는 다급함보다 상부에 대한 원망과 울분이 서려 있었다. 순간, 무수히 죽어간 부하들의 모습들이 마치 환영을 보듯 자신의 눈앞에서 춤추듯 사라진다. 대장이 떠올린 그들의 희미한 미소는 죽은 자의 미소가 아닌 것 같았다. 괴로움에 떨쳐버리려고 발버둥치듯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잠시 후, 상부로부터 짧은 전문이 날라왔다.
     “적들로 아를로드 다리는 건너지 못하게 하라.”

     “알겠습니다.”
     ‘결국 싸우다 죽으란 얘기군.’ 대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겐나딘의 대장은 상부의 지원 없이는 방어할 수도 없고 모두 전멸당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소총은 무의미하여 단 몇 초도 견딜 수 없다. 그렇다고 부대원들을 뻔한 죽음으로 내몰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때, 고민에 빠져있는 대장을 향해 겐나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장님,” 대장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고심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들로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려면.....”

     “어디 좋은 묘책이라도 있는가?”

     “폭발?”

     “폭발?”

     “더이상 방어는 무의미합니다.”

     “음, 알고 있네.” 대장도 러시아군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결국 아를르를 건너지 못하게 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폭발이라니? 결국 아를르를 지켜낼 방법은 진정 폭발이란 말인가? 
     “대장님 저쪽을.....” 한 병사가 손가락으로 러시아군을 가르쳤다.

     맹렬한 기세보다는 1차 목적지인 아를르가 시야에 놓여서인지 러시아군은 한층 여유를 부리는 듯 보였다. 어떤 병사는 잇몸이 훤히 보이도록 웃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군이 더 이상 자신들을 향해 총을 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총을 들 여력조차 상실한 것으로 판단이 미쳤는지 장난치며 무슨 놀이 하듯 걷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 전투에서는 전차 뒤에 숨어 총을 쏘아댔지만 지금은 너무도 당당하게 전차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날씨는 더운 여름이지만 마리아는 오싹할 정도로 한기를 느꼈다.

     우크라군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운데 짙은 당혹감마저 내려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나쁜 일을 예감이라도 하듯 두려움이 담긴 표정들이다.

     러시아군을 향해 마땅한 전술이 떠오르지 않았다. 긴 침묵 속의 우크라군 대장은 조용히 입을 뗐다.

     “변변찮은 무기로 잘 갖춰진 최정예 러시아군을 방어하느라 아군의 희생이 많았다. 최후까지 남아줘서 고맙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대장의 목소리는 무거웠지만 의외로 표정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겐나딘은 빅토르와 다른 두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적의 우측에서 최대한 방어하여 우리와의 간격을 더 이상 좁혀들지 않게 하라.” 대장은 평평한 땅 위에 대검의 날카로운 끝으로 찌르듯이 그리며 지시한다.

     “마리아는 이들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라.”

     대장은 남은 병사들에게 각각 적의 중앙과 좌측을 방어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은 부대원 중 제일 나이가 적은 어린 병사 하나를 데리고 아를르의 다리로 향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어깨 위에는 까만 뭉치의 긴 전선이 놓여있었다.

     “시간이 없다.” 대장은 대원들을 재촉했다. 그리고 비장한 어조로

     “최대한 방어하되 설치가 완료되면 즉시 아를르를 건넌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나를 비롯해 우리들은 모두 여기서 조국을 위해 죽을 것이다.”
     대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부대원들은 두려움과 초조함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의 희생으로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불사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육중한 장갑차도 두렵지 않았다.

     부대원들은 대장이 일러준 각자 장소에서 몸을 숨긴다.

     러시아군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겐나딘의 총부리에서 불을 뿜는 것을 기화로 일제히 반격에 나선다.

     의외였다. 처음 몇 달은 서로 팽팽하게 맞섰으나 전투가 거듭될수록 화력이 약한 우크라군의 고전이 눈에 띄었다. 조금씩 조금씩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아를르 다리까지 밀려났다. 우크라의 잠정적 마지노선인 아를르가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아를르를 건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러시아의 장갑차는 마치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성난 맹수같이 아를르로 치닫고 있었다.

     드디어 대장이 일러준 사정거리 안으로 러시아군이 들어서자 겐나딘의 총구에서 탕! 하고 화약이 강하게 피어올랐다. 우크라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군은 당황했다. 그대로 아를르를 건널 줄 알고 행군하듯 무방비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다. 전차와 나란히 걷던 러시아 병사들은 전차 뒤로 몸을 숨기고 방어태세를 취한다.

     우크라군은 이것이 최후의 결전임을 알고 마지막을 준비했다. 대장의 말처럼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접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정예 병사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우크라군에 의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희생자가 늘어나자 전쟁에 익숙한 정예부대는 신속하게 대오를 가다듬었다.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도 정확하게 집었다. 처음엔 어디서 날아오는지 몰라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양측은 서로 몸을 숨긴 채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한동안 양 진영은 교신하듯 탄알을 주고받다가 별 차도가 없자 이번에는 장갑차 위에서 망원경으로 우크라군을 발견하고 서서히 포대를 겐나딘이 몸을 숙인 곳으로 향했다. 여지없이 포탄이 날아왔다. 다행히 머리 위를 지나 제법 크게 빗나갔다.

     전차는 고개를 숙이듯 포신을 살짝 내린 다음 꽝! 하고 강철 덩어리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이번에는 살짝 앞에 떨어졌다. 많이 위험했다. 겐나딘은 세 번째 포탄은 틀림없이 자기를 빗나가지 않을 줄 알고 옆으로 이동했다.

     우크라군은 탄알 재고가 거의 바닥이었다. 그것은 겐나딘 뿐만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였다. 눈치를 챈 것일까? 러시아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빗발치듯 쏘아대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전차를 앞세워 또다시 간격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마리아 탄약이 다 떨어졌어.” 겐나딘이 다급히 마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마리아는 대답 대신 알았다는 표정을 날리고 급히 움직였다.

     탄알이 부족한 우크라군은 한발 한발 조준하여 쏘아댔다. 그것은 많은 실효를 거두었다. 사상자가 발생함으로 러시아군은 멈춰섰다.

     러시아는 겐나딘의 참호 속에서 발사되는 실탄에 의해 유독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전차의 화력을 집중시켰다.

     마리아는 포탄이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않고 용감하게 탄알을 날랐다.

     우크라군의 맹렬하던 총성은 어느 순간 겐나딘의 참호 외에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겐나딘의 탕! 하는 총성과 함께 러시아군이 쓰러지고 동시에 대전차의 포신이 꽝! 하고 크게 흔들렸다. 발사된 포탄은 그만 겐나딘에게 쉴새 없이 탄알을 전달하던 마리아 가까이에 떨어졌다.

     “겐나딘~”

     가슴을 찢는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그 후 15일이 지났다.

     마리아가 겨우 눈을 떴다. 꼭 보름만이었다. 꿈꾸는 듯 앞이 희미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데라곤 한 곳도 없었다.

     점차 눈이 밝아오고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왜 침대에 누워 있지?’

     보름 전의 일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아 눈은 이마 위를 보듯 올려다보는 데 겐나딘이 머리맡에 서 있었다. 놀란 듯 말을 하고자 했으나 이상하게 말은 입 속에서 머물 뿐 소리 되어 나오지 못했다.

     겐나딘은 오래도록 수염을 깎지 않았는지 턱밑이 검게 수북했다. 그는 마리아를 향해 두 뺨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흘러내리는데 표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의 알 수 없는 모습에 당황했다.

     “겐나딘! 어떻게?” 모기보다 작은 소리였다.

     알아들었는지 겐나딘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잠시 후, 묵직한 통증이 허리 아래서부터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었다.
     ‘다리가 왜 이렇게 아플까?’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한바탕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고통으로 인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처절한 싸움이었다.

     보름 전 적의 전차포에 의해 쓰러진 기억이 마치 꿈 속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날 겐나딘의 동료들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절체절명 위기에 놓였었다. 러시아군도 죽음을 각오한 우크라군을 단지 수적으로 열세인 것을 알고 얕잡아 본 탓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우크라군은 잘 싸웠지만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결국 점멸하다시피 했다. 힘겨운 겐나딘의 싸움은 오히려 적의 화력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그만 마리아는 두 다리를 잃었다. 날카로운 비명에 돌아보니 마리아가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데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두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겐나딘은 싸움을 중단하고 마리아를 안고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아를르를 향해 뛰었다. 러시아군의 총탄과 포탄이 휙휙 빗발치듯 스쳐 지나가는데도 전혀 당황하거나 주눅들지 않았다. 오직 마리아를 살려야겠다는 일념뿐!

     폭약 설치를 끝낸 대장과 합류했다. 겐나딘이 사력을 다해 다리를 건너자 대장은 코앞까지 다가온 러시아군과 탱크 여러 대가 다리 절반쯤 건널 무렵 기폭장치의 기폭스위치를 힘껏 눌렀다. 다리는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러시아군은 결국 아를르를 건너지 못했다.

     마리아는 과다 출혈로 맥박은 뛰는 듯 안 뛰는 듯 희미했고 혈압도 턱없이 낮았다. 서둘러 봉합 수술을 받았다. 쇼크로 인해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겼다. 출혈이 심한 탓에 많은 양의 수혈을 받아야만 했다. 보름 만에 겨우 눈을 떴다. 통증보다 더한 고통스러운 현실은 마리아와 겐나딘 모두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리아는 현실을 향해 아니, 자신의 운명을 향해 몸부림쳤다. 차라리 다른 동료들처럼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잠시 총성이 멈춘 건물 밖은 수채화를 뿌려 놓은 듯 아름다웠고 너울너울 나비의 날갯짓은 평화로웠다. 마치 전쟁이 끝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꽃잎은 화려하고 향기는 어린 시절 꺾었던 꽃에 얼굴을 가까이하여 맡을 때보다 더했다. 그렇게 꽃과 나비는 산하(山河)의 신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화하듯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겐나딘은 휠체어에 마리아를 번쩍 들어 앉힌 다음 답답한 실내를 벗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마리아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따스한 햇볕은 마치 우크라이나의 청명한 봄 햇살 같았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녹음이 우거진 수풀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리아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두 사람은 새소리 가득한 숲속 벤치에 앉았다.

     “오래전 대학생 때였어요.” 겐나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긴 머리칼이 무척 아름다웠지요. 그런 그녀를 나는 먼발치에서 쳐다보기를 좋아했어요. 내가 아는 그녀는 어린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항상 허리를 구푸려서 눈높이를 어린아이와 같게 하고 어린이와 대화하기를 좋아했어요.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랐지요.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으로 내 속에서 어찌나 강렬하던지 나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 깨달았죠. 그것은 그녀를 향한 나의 첫사랑이었음을 말입니다.”

     겐나딘은 조용히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숲에선 데이지꽃 향기 풍겨오고 새들은 나무 위에서 노래 부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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