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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전기] 모택동의 이야기
2022년 11월 01일 10시 06분  조회:504  추천:0  작성자: 설야
[伟人传奇]
모택동의 이야기
  
모택동은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에 많은 이야기를 남긴 위인이다. 허다한 이야기는 이미 책으로 영화로 우리가 많이 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백성과 가까웠던 이야기를 다시 감상해 본다.
 
1. 어린시절
 
1893년 12월 26일(음력 계사년 11월 19일) 바로 해가 솟는때 모택동은 호남성 상담현 소산충 상옥장의 한 토벽돌로 지은 집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생존인 할아버지의 명함은 모은보, 아버지는 모이창(자ㅡ순생, 호ㅡ량필), 어머니는 문칠매 였다. 아이가 태여나서 3일이 되는날 모씨네는 당지의 풍습대로 풍성한 술상을 차리고 “하3조”(賀3朝)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날만은 부처님, 보살님을 믿지않는 모순생도 향을 피우고 폭죽을 터치고 분주히 돌아치며 기분을 돋구었다. 연회에 참석한 매우 학식이 있는 한 사람이 아이에게 십분 쟁쟁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모택동이다. 그선생은 호도 지어주었는데 윤지라고 하였다. 그먼저 두아들을 강보에서 잃은 모씨네는 셋째로 또 아들을 보자 무척 기뻐했든 것이다. 모순생부부는 모두 5남2녀를 보았는데 2남 2녀는 모두 강보에서 잃고 모택동, 모택민, 모택담 3형제를 성인으로 키웠다. 하지만, 모택민, 모택담은 해방전 혁명투쟁중에서 희생되였다.
 
모택동의 아버지 모순생은 세심하면서도 깍쟁이였는데 그는 이악스레 집살림을 경영하였다. 모순생은 각박스레 돈을 모아 차츰 괜찮게 살게되였고 자식들에게 엄혹하였다. 대신, 어머니 문칠매는 인자하고도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았다. 용모거나 성품에서 모택동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어느해 가을이다. 갑자기 먹장구름이 뭉켜오더니 광풍이 불어치며 폭우가 당금 쏟아질 기세였다. 집집마다 말리느라 널어놓은 벼를 급급히 거둬 들였다. 어린 모택동도 아버지와 함께 급급히 탈곡마당에 널어놓은 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일하다 문득 바라보니 이웃집 할머니가 혼자서 힘겹게 벼를 거두고 있었다. 모택동은 다짜고짜로 즉시 달려가서 이웃집을 도왔다. 그사이 폭우가 쏟아지며 모택동네 벼는 적지않게 비물에 흘러가고 푹 젖어버렸다. 이에 대노한 아버지는 멍청이 같은 놈이라며 때리려고 하였다. 모택동은 선자리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이웃집은 소작농이여서 벼가 많지도 않거니와 소작료를 또 내야하지만 우리는 많기도 하고 자기것이니까 좀 손실을 봐도 괜찮은게 아닌가고. 더욱 분통이 터진 모순생은 기가 막혀 네놈은 그래 밥을 먹지않는가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줄욕을 퍼 부었다. 모택동은 그럼, 때마다 내가 적게 먹으면 될게 아닌가고 대 들었다. 결국은 어머니가 나와서 말렸다.
 
모택동이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사숙에 다니며 공부할 때다. 그는 점심밥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밥을 가지지 않았다. 어느날, 모택동은 집이 먼 동학이 점심밥을 사지않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동학의 집은 너무 가난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점심시간에도 공부를 더 하겠다는 리유로 어머니하고 점심밥을 사 달라고 하였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는 흡족해 하며 그럼 점심밥을 사 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짠지쪼각에 밥을 조금 싸 주라고 엄명을 하였다. 어머니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될수록 좋은 반찬에 밥을 많이 싸 주었다. 모택동은 가난한 동학과 함께 점심밥을 먹었다. 저녁때면 모택동은 굶은사람처럼 밥을 먹었는데 어머니는 점심밥이 적어서 아이가 이러는게 아닌가고 의심이 들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모택동과 자세히 물어 내막을 알게 되였다. 어머니는 네가 잘했다고 하면서 점심밥을 두몫으로 싸 주었다.
 
어느해의 일이다. 모택동의 아버지는 린근의 한 농민집에서 큰돼지 한마리를 사기로 하고 예약금까지 물었다. 며칠이 지나서 돼지값이 올라가자 모순생은 아들에게 돼지값을 주면서 가서 돼지를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택동이 돼지 가지려 가니 임자는 매우 랑패해 하며 돼지를 잘못 팔았다고 아쉬워 하였다. 돈있는 집에서는 별일아니지만 자기네 같은 사람은 큰 손실이라며 돼지를 내여 주었다. 모택동은 예약금을 돌려받고 돼지를 물려주었다. 그러고 돌아오는중 동무를 만났는데, 동무는 땀벌창이 되여 반달음으로 현성에 가는길이였다. 어머니가 급히 앓는데 현성에 있는 친척집으로 돈꾸려 간다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두말없이 주머니의 돈을 동무에게 주었다. 이로하여 모택동은 아버지에게서 줄욕을 먹으며 대판싸움을 하였다, 결국은 또 어머니가 나서서 말려냈다.
 
모택동이 11살 때다. 모순생의 사촌동생 모국생은 병으로 7무의 밭을 팔려고 하였다. 이밭은 모국생네 명줄이였다. 모순생은 때를 만났다고 좋아라 밭을 사들였다. 이로하여 모택동과 어머니는 극구 반대하며 국생네 난관을 함께 이겨내야 한다고 입이 닳게 말했으나 아무 쓸모도 없었다. 이일은 모택동의 가슴에 잊을수 없는 상처로 되였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모국생의 아들 모택련이 북경으로 왔을 때 모택동은 이옛말을 여러번 하면서 “구사회의 그사유제는 형제간의 정도 무시하였다,”고 말하였다.
 
모택동이 16살 되던 해다. 모순생은 모택동에게 이젠 공부를 그만큼 했으면 되였으니 현성(상담)에 가서 돈벌이를 하라고, 현성에 있는 친구 미곡상과 약속이 되였는데 그집에 가서 쌀장사를 배우며 일하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할수없이 현성으로 갔다. 가서 보니 미곡상은 근량을 속이고 지어는 쌀에 모래를 섞기까지 하였다. 모택동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나는 농사일을  하면 하였지 그런 량심없는 장사술은 배우지도 하지도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어머니는 옳다고 하면서 외가집에 가서 더 공부를 하면서 두외삼촌들과 의논하여 출로를 찿으라고 하였다.
 
이렇게 바른길로 바르게 성장한 모택동은 청년시절부터 평생을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2. 전사들과 함께
 
기나긴 장정의 길에서 모택동은 전사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다. 장정초기 큰병을 앓고난 모택동의 신체는 매우 허약했다. 하여 담가를 안배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늘 담가를 쓰지않고 상병원전사들에게 돌리였다.
 
한번은 황혼무렵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널때였다. 그때 경위원 황택구는 심한 복통으로 걷기가 몹시 힘들었다. 하여 반장 호창보에게 대오의 뒤에서 걷겠다고 청시하였다. 호창보는 비준하였다. 대오가 모태하강변에서 배를 기다릴때 모택동은 신변의 공작인원들을 점검해보고 황택구가 없는것을 발견하였다. 황택구가 복통으로 뒤에 떨어진것을 알게된 모택동은 담가를 강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호창보는 모택동에게 담가는 당신께서 계속 쓰고 황택구는 말을 타게 하자고 하였다. 모택동은 머리를 흔들면서 배가 아픈 사람이 어떻게 말을 타느냐고, 꼭 담가에 앉게하라고 하였다.
 
1935년 6월, 부대가 대설산을 넘을때다. 가파롭고 미끈눈길은 한발작을 나가면 두발작을 미끄러지는 형편이였다. 경위원들이 부축하려고 하면 그는 견결히 사양하면서 힘들게 걸어나갔다. 경워원들이 그럼, 말꼬리를 붙잡고 걸으라고 해도 그는 사양하면서 체약자와 녀성동무들에게 돌리였다. 전사들이 헐떡이며 지쳐하거나 눈구덩이에 빠지면 그는 꼭 손잡아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한명이라도 설산을 넘으면 그만큼 힘이 더 커진다면서 전사들을 고무하고 격려하고 손잡아 이끌어 주었다. 설산의 기후는 너무도 악렬하고 변화무쌍했다 모택동은 산꼭대기를 보지말며 산아래도 보지말고 머리를 수그리고 발앞만 보며 걸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절대로 잡은손을 놓지말라고 수시로 웨치였다. 설산은 오를수록 공기가 희박하였다. 경위원 대천복이 호흡곤난으로 주저앉자 모택동은 즉시 업으려고 하였다. 이때 오길청이 먼저 업게되여 모택동은 곁에서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이렇게 모택동은 전사들과 함께 설산을 끝끝내 정복하고 넘었다.
 
부대가 장족지구에 들어선후 부대는 소금과 량식이 다 떨어졌으나 어데서 구할길이 없었다. 장족동포들은 반동파들의 악선전으로 피해버렸던 것이다. 몇백리 험난한 길을 홍군은 말그대로 풀을 뜯어 먹으며 전진하였다. 부대가 초지를 건널때다. 어느날 세찬폭우가 쏟아졌는데 비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모택동은 담가의 유포를 뜯어서 전사들과 함께 쓰고 비를 피했다. 이때 진창봉은 자기가 리질에 걸렸기에 모택동과 함께 유포를 쓰면 않된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진창봉을 자기곁에 끌어다가 함께 유포를 썼다. 초지에서 량식이 떨어진지 여러날이다보니 상병원들이 더욱 늘어나고 전사들이 기진맥진하였다. 모택동은 말 몇필을 잡게하고 고기를 상병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이때 전사들은 손바닥만한 말고기를 모택동 몰래 풀과 함께 끓인후 모택동이 먹게 하려고 꾀를 썼다. 이를 알게된 모택동은 말고기를 기어이 담가에 누워가는 대천복에게 가져다 주게 하였다. 며칠후 담가원들이 빈 담가를 들고 모주석께로 왔다. 대천복은 끝내 회생되였던 것이다. 경위원은 종이에 싼 말고기를 모택동에게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대천복은 림종시에 이 말고기를 꼭 모주석께 드리라고 하면서 혁명이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주석께서 꼭 보중하시며 경위반 전우들이 모주석을 잘 보위하라고 당부 하였습니다,” 모택동은 비통을 억제하며 아무말도 못하였다. 그는 말고기를 다시 잘 싸면서 다음과 같이 목멘소리로 말하였다. “수천만의 렬사들이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희생되였다. 이정신은 중국인민을 감동케 할것이며 세계인민들을 감동케 할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의의 사업을 지지할 것이다. 우리의 정의의 사업은 반드시 승리할것이다.”
 
무정한 설산과 초지와 기아, 추위와 폭우, 부상, 질병은 많은 생명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홍군은 완강한 의지로 설산, 초지를 전승하였고 자아를 전승하였다. 홍군은 국민당의 포위, 추격, 저지, 차단을 물리치며 380여차의 전투를 하며 11개 성을 경유하였다. 8만명이 떠난 장정대오는 1만1천명으로 1935년10월 섬감혁명근거지 오기진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중앙홍군의2만5천리 장정은 모택동의 인솔하에 승리적으로 끝났다. 모택동은 시작부터 끝까지 전사들과 함께 행군하였다.
 
3. 벼락사건
 
1941년 6월3일 오후다. 섬감녕변구정부에서는 작은례당에서 변구현장들의 회의를 하였다. 하늘에서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서 련속 우뢰가 진동하였다. 이때 한줄기 벼락이 회의장을 들이쳤는데, 연천현대리현장 리채영이 불행히도 벼락에 맞아 즉사를 하였다.
 
그날은 장날이였다. 남관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들끓었다. 안색에서 온 한 50대의 사람도(老鄕) 나귀를 끌고 장보러 왔는데 말뚝에 매여놓은 그의 나귀도 그날 벼락에 맞아 죽었다. 로향은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서 발을 구르며 잉!잉!울면서 소리쳤다. “하늘놈이 눈깔이 멀었는가. 왜서 모택동은 벼락치지않고 리현장과 내나귀만 벼락을 치는가…”그의 발괄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부사람들은 급급히 울고불고하는 로향을 말렸다.
 
이날 이사건과 로향의 망발은 특대희소식이 되여 전 연안성에 쫘악 소문이 났다. 반박하며 욕하는 사람, 로향을 동정하는 사람, 말을 더 보태여 만들어 내는 사람, “하느님이 인간을 징벌하는것이다… 보응이다… 더 큰 재난이 덮칠 징조다… 간대루야 공산당과 모주석이 백성을 모르는체 하겠는가…” 연안성은 각종여론으로 시글벅적하였다. 소식과 여론은 변구보안처에 보고되고 모택동에게도 보고되였다. 모택동은 즉시 보안처의 오동무를(小吳) 불렀다.
 
쑈우가 오자 모택동은 매우 친절히 물었다.
“듣건대 쑈우가 로향을 구류하자고 한다는데 어째서 그러는가?”
“그는 숱한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모욕했습니다.”
“그런가? 그가 어떻게 나를 모욕했는지 들어보자.”
“리현장이 벼락으로 사망한것이 주석과 무슨관계가 있는가. 그의 나귀가 죽은게 주석의 탓인가. 그가 연안에서, 그것도 제일 번화한 장마당에서 당신의 명함을 찍어부르면서 욕하고 모욕한것은 엄중한 사건입니다. 즉시 구류하고 심사해야 합니다.”
모택동은 경쾌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이모택동을 욕한것이 법을 위반한건 아니잖은가?”
“아닙니다. 당신은 인민의 령수이십니다. 당신을 욕했다는건 그가 한간특무가 아니면 토호렬신이라는걸 말해 주는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구류심사하는것은 응당한 것입니다.”
“생각해 봐라. 그가 정말로 한간특무라고 한다면 백주대낮에 나를 내놓고 욕하겠는가?”
쑈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모택동은 그의곁에 다가가서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나직히 물었다.
“쑈우, 인민군중들이 왜서 우리를 옹호하며 열애하는지를 아는가?”
“우리가 로백성을 위하여 천하를 다투고 행복을 도모하기에…”
“옳다. 인민들이 우리를 옹호하고 열애하는것은 우리의 이대오는 혁명대오로서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만약 공작중에 결점과 착오가 있으면 누구든, 어떤방식으로든 비평과 의견을 제기할수 있다. 우리는 응당 접수해야 한다. 아닌가?”
“그는 의견을 제기한것이 아니라 사람을 욕했습니다.”
“욕도 일종의 의견제출방식이지.”
모택동은 쑈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쑈우, 내가 한가지 건의를 하자. 로향을 구류하느라 하지마라. 대신 나를 도와 구체정황을 잘 알아봐 달라. 그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의견이 있는지? 될수있겠지?”
쑈우는 경쾌히 대답했다.
 
원래, 문제의 근원은 변구정부의 내부에 있었던것이다. 당시, 근거지는 가장곤난한 시기였다. 왜놈들은 “3광”정책(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고 모조리 략탈)을 실시하면서 발악적으로 근거지를 소탕하고 국민당반동파들은 근거지를 첩첩 봉쇄하였다. 동시에 1939년부터 1941년간 근거지에는 수재, 한재, 충재 등 자연재해가 매우 엄중하였다. 그리고 몇년사이에 변구의 군정인원이 대량 증가되였다. 비생산인원이 10만여명으로 증가되였다. 군대와 정부기관의 수요를 보장하기 위하여 변구정부에서는 군중들의 부담을 해마다 증가하였다. 과중한 부담은 군중들의 생산적극성을 손상했을 뿐만아니라 당과 군중의 관계를 손상했고 불평불만과 원성이 나타나게 하였던 것이다.
 
며칠후 쑈우의 회보는 다음과 같았다. 항전초기의 변구의 공량은 1만석이였는데 1939년에는 5만석,  40년에는 9만석, 금년에는 20만석으로 급증했던것이다. 로향은 이에 의견이 컸던것이다. 모택동은 길게 탄식하며 “오, 그런 일이구나! 그로향은 확실히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의견을 제기했다. 비평을 아주 잘했다!”
 
모택동은 즉시 이문제를 세심히 대량 조사하고 처리하였다. 공량을 최후 4만석으로 결정하고 대규모의 정병간정을 실시하였다. 이거조는 모택동의 위신을 더 오르게 하였다. 로향은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자기머리를 쥐여박으며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천부당 만부당 모주석을 욕하는게 아닌데!” 하며 후회를 했다.
 
그러나 문제가 다 없어진건 아니였다. 일부지방에서는 공량임무가 여전히 과중하였고 어떤간부들은 공작방법이 간단하고 조폭하였다. 하여 농민들의 생산적극성과 당과 군중의 관계에 손상을 주었다.
 
변구 청간현의 한 농촌아낙네가 당과 모주석을 대대적으로 욕하여 연안으로 압송되여 왔는데 보안처에서는 심사후 엄하게 처리할 작정이였다. 이 농촌아낙네는 남편이 죽고 아이가 셋인데 큰애가 겨우 10살이고 작은애는 3살반이였다. 그리고 집에는 풍을 맞아 운신을 못하는 시어머니가 있었다. 요동(땅굴집)은 골물곁이여서 비만 좀 크게 내리면 물에 잠기였다. 하지만 로력이 없고 돈이 없다보니 어쩔수 없었다. 이집은 마을에서 몹시 가난한 집이였다.
 
최근년간 공량징수때문에 현과 향, 촌에서 간부들이 적지않게 내려 왔는데, 어떤간부들은 실제형편이야 어떻든 강박적으로 징수하며 욕사발을 퍼 붓기까지 하였다. 하여, 살길이 막막하였던 아낙네는 악이받쳐 공산당을 욕하고 모주석을 욕했던 것이다. 이러이러한 문제로 사람이 잡혀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택동은 즉시 그 사람을 직접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농촌아낙네는 모택동께서 만나자고 한다니 대뜸 자기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모택동 앞에 꿇어 엎디며 큰죄를 범했으니 죽여달라고 빌었다. 이에 모택동은 아낙네를 진정시키며 자초지종을 자세히 물었다. 전후지사를 자세히 료해한 모택동은 격분을 참을수 없었다. 아낙네가 “주석님! 집에 시어머니와 아이가 셋이 있는데 그들을 생각해서 나를 집에 가게 해 주십사.”하고 애원하니 모택동은 “된다!”고 대답한후 책임간부에게 즉시 직접 집까지 호송하며 청간현에서 각항사업을 전면 엄격히 검사하며 문제를 즉시 시정하며 착오있는간부는 엄숙히 처리하라는 공문까지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고 이 아낙네의 요동을 새로 잘 만들어 주라고 부탁하였다. 아낙네는 진실의 말을 하며 우리공산당과 혁명정부에 량호한 원망과 의견을 제출한 좋은 사람이라고 부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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