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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꿈 / 박명선
2022년 11월 16일 12시 22분  조회:525  추천:0  작성자: 설야
[단편소설]


박명선

1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전차가 사막에 멈춰서버린 꿈이었다. 일본은 사막이 없는 나라인데 왜서 전차가 사막에 왔을까? 전차를 탔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다. 저쪽 출입문 옆에서 웬 남자가 머리를 숙이고 걸레가 들어있는 물통 안의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고 있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어떻게 저런 더러운 물을 다 마신단 말인가? 전차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모노를 입고 이목구비가 수려한 여인이 물병을 들고 웃으며 앞에 서있었다. 그는 여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 나와 보니 차바곤에 7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물은 어디에 있을까? 가없이 펼쳐진 사막 가운데에 푸른 오아시스가 보였다.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가다가 꿈 속에서 깨어났다.....
     일본에 와서 어쩌다 낮잠을 잤더니 이게 웬 꿈일까?

     2000년대초 어느 해 2월 중순 토요일 오후였다.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지만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룸메이트였던 찬이가 이사를 간 집에 혼자 있기도 멋적게 생각되어 그는 운동복을 차려입고 집문을 나섰다.
     오전과는 달리 바람도 불지 않고 따스한 햇빛도 비쳐왔다. 집과 가까운 곳에 큰 공원이 있었지만 찬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유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주유소를 지나 집 동네를 벗어나는 길목에 작은 공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 공원을 지나 옅은 강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느면 신작로에 닿는다. 작년에 한달간 비닐제품제조공장에서 주말아르바이트를 할 때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보았던 공원이었다. 오늘은 웬 일인지 그 공원에 가보고 싶었다.
     주유소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걸린다. 주유소에 거의 왔을 때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주유소를 나와 앞으로 내달리는 게 보였다. 주유소를 지나려던 그는 맞은켠 길옆에 잠깐 멈춰섰다. 노란 유니폼에 노란 모자까지 쓴 종업원들을 보노라니 두주일 전까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찬이를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 화물차가 무섭게 옆을 스쳐가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아까 하얀색 승용차가 공원 앞에 멈춰있었다. 동네를 둘러보면서 공원에 도착하니 승용차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공원 구석진 곳에 놓여있는 벤취에 선글라스를 건 남자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가 햇볕쪼임을 하는지 큰길 쪽을 등지고 앉아있었다. 말하고 있는 남자는 30대 후반으로 보였고 웃고 있는 여자는 꽤 젊어보였다. 그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처 앞으로 걸었다. 나왔던 김에 강변까지 가보고 싶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나니 산책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강변을 거닐다가 돌계단에 앉아 잘금잘금 물결이 일렁이는 강물을 굽어보면서 집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엇저녁에도 이제 몇 밤 자면 오는가고 딸애가 묻기에 백 밤만 자면 간다고 말했다. 이젠 백 밤이라는 말을 어린 딸애한테 몇 번이나 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에 온 지 1년이 넘었다. 애엄마와 딸애의 얼굴은 사진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돈지갑에 넣은 사진을 꺼내보았다. 이제도 몇 년 더 있어야 귀국할 수 있는데 그 때면 애엄마도 딸애도 나를 보고 낯선 사람 만난 듯 서먹서먹해하지 않을까고 생각해보니 마음이 서글퍼졌다.
     한참 앉아있다가 공원에 다시 이르렀을 때는 승용차가 보이지 않았다. 벤취는 하나 뿐이었다. 그는 아까 그들이 앉았던 벤취에 가서 앉았다.두 팔을 벤취에 올려놓고 따스한 햇살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부인과 딸애를 일본에 요청하여 한주일 전에 이사를 간 찬이가 부러웠다. 찬이는 하얼빈 모 대학 일본어학부 동창생이고, 일본어교원을 같이 하다가 일본에도 같이 유학을 온 친구였다. 일본에 금방 왔을 때 이제 서로 가족요청을 하면 동갑인 애들이 같은 유치원에 다닐 수도 있겠다던 찬이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찬이처럼 가족요청을 하고 싶었지만 학업을 마치면 귀국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정부 공무원인 애엄마를 일본에 꼭 오라고 강요할 수도, 일본에 데려다가 아르바이트를 시킬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멀지 않은 쓰레기통 옆에서 까마귀 두 마리가 하얀 비닐주머니 안의 알포트 쵸콜렛봉투를 헤집어대고 있었다. 그들이 먹다가 버린 음식쓰레기 같았다. 그는 까마귀들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눈앞에서 까마귀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충격적인 정경에 그의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까마귀들은 찾아낸 먹이를 제각기 먹는 게 아니였다. 주둥이를 맞대고 서로 먹이를 먹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눈치챘는지,먹을 만큼 먹었는지 얼마 안되어 까마귀들은 검은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까악까악 소리를 내지르며 시가지 쪽으로 날아갔다.
     까마귀들이 헤집어놓은 비닐주머니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려던 그는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본 듯 되돌아서버렸다. 비닐주머니 안에 빈캔이며, 쵸코렛 부스러기며, 빨간 립스틱이 묻은 티슈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앉았던 벤취에 멍청하니 앉아있었다는 게 께름직하게 느껴졌다. 옷에 뭐가 묻지 않았나 옷잔등과 바지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를 떴다. 오늘 괜히 여기를 찾아오지 않았나 싶었다. 아까 차를 눈여겨보았다. 도요다차였고 도꾜 차번호였다.
     주유소를 다시 지나 번화한 네거리에 왔을 때 그 도요다차가 마주오다가 전철역 방향으로 굽어들어 길옆 주차장 안에 멈춰서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가지 않고 차를 향해 걸어갔다. 선글라스와 노란 머리가 같이 내리더니 멀지 않은 세븐일레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부부간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뒤따라 세븐일레븐에 들어선 그는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 선그라스도 노란 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화장실에 또 같이 들어갔을까? 지금까지 다녀본 패밀리마트나 세븐일레븐에 화장실은 없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나오던 샴푸를 찾아가지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서려는데 그 남자가 카운터 안에 서있었다. 유리창문으로 비쳐들어오는 햇빛에 야마시다(山下)라는 명찰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윽하여 노란 머리도 카운터로 통한 휴게실이라고 써붙인 문으로 나왔다. 둘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던 것이다.
     오오쯔끼(大槻)라는 명찰을 단 노란 머리가 40대 여점원에게 인사를 하고 계산대에 바꿔섰다. 교대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세시였다.
     야마시다가 오오쯔끼에게 바코드를 찍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오오쯔끼가 아르바이트하는 첫날인 것 같았다.
     점장일 수도 있는 야마시다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오오쯔끼, 공원에서 세븐일레븐으로 날아들어온 두 까마귀.......
     그는 샴푸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2

     이튿날 아침, 호랑이도 간담이 서늘해 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대문이 바람에 닫기는 소리였다. 대문의 진동에 한 겹 창문들이 덜컹거리고 주방의 그릇들이 딸락거렸다. 일본에 온 지 얼마 안되던 어느 날 밤중에는 갑자기 집 전체가 마구 흔들거려 지진에 집이 무너져 깔려죽지 않겠나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방안으로 찬바람이 불어들어오고 있었고 잔뜩 들린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커튼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부터 닫았다. 어제 오후 통풍시키려고 조금 열어놓았던 창문을 자기 전에 닫는 걸 깜빡 잊었던 것이다. 대문이 닫기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집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는 문을 도로 닫았다. 한달 전, 증권회사에 근무한다는 오오무라(大村)가 독신으로 1층에 이사를 왔다. 그보다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쾌활하고, 웃을 때면 덧니가 유표하게 드러나는 그녀와 가끔씩 농담도 주고받았었지만 찬이가 이사를 간 후부터는 예의적인 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군 했다. 외국인을 상대하기 싫어하는 듯한 중년 부부가 한동안 1층에 살고 있었는데 작년 연말에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 1층이 비어있을 때는 아랫층에 내려가서 대문을 닫을 때도 있었지만 이젠 오오무라가 있기에 아랫층에 내려갈 필요가 없었고 혹시 비좁은 대문 안에서 오오무라를 만나면 어설픈 인사를 하기도 싫어서였다.  
     오늘도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다. 어쩌다 이틀 쉬게 되어 오늘은 찬이네 가족을 집에 요청하여 저녁식사나 같이 할까고 어제부터 속궁리하고 있었다. 찬이가 이사한 날, 전자레인지를 이사선물로 사주고 찬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언제 한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그들 부부에게 말했던 것이다. 어제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는 날씨라 오늘은 찬이네 가족을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하얀 냉장실이 굶주린 짐승의 뱃속처럼 느껴졌다. 오늘 점심에 전철역 앞 마트에 가서 불고기용 쇠고기랑 찬이의 딸애가 좋아한다는 치킨이랑 카레를 한꺼번에 사려고 어제는 달걀도 사놓지 않았다. 김치와 쏘세지 한 개와 달걀 한 알 밖에 없었다. 달걀을 볶아서 아침이라도 먹고 싶었다.
     그는 달걀을 사려고 다시 집문을 나섰다. 집 부근에 패밀리마트가 있었지만 세븐일레븐으로 자전거를 내달렸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고 바람도 부는 날씨라 가게에는 손님이 서너 명 밖에 없었다. 달걀과 사과쥬스를 사가지고 나가려던 그는 가게에 손님이 없는 걸 보고 계산대에 되돌아섰다. 세븐일레븐 로고가 새겨진 황토색 에프런을 앞가슴에 걸친 30대 중반으로 보이고 어느 드라마에서 나오던 탤런트처럼 이쁘게 생긴 아까 여점원에게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생을 수요하는가고 물었다. 여점원이 웃으면서 그의 신상에 대해 먼저 묻더니 밤 열두시부터 새벽 다섯시까지 하는 시간대가 비어있다고 말할 때 휴게실 문으로 야마시다가 나왔다. 여점원이 야마시다의 옷소매를 내려주는 걸 보고 그들이 부부간임을 알아차렸다.
     야마시다가 입국심사관처럼 그의 전신을 위아래로 쓱 내리훑어보고 나서 이것저것 묻더니 오늘 밤부터 나올 수 없는가고 묻기에 지금 좋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야간아르바이트인데 시급이 낮다고 능청스레 대꾸했다. 야간아르바이트 시급이 1,000엔이면 높은 레벨이었다. 야마시다가 와이프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면서 100엔을 인상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방학기간이고 점심 열두시부터 저녁 아홉시까지 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집에 가서 좀 누워있다가 시간을 맞춰 다시 와도 되었다. 그는 선선히 동의했다. 부인의 분부 대로 종업원명보에 인적사항을 적어넣었다. 7,8명 되는 아르바이트생 대부분이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오오쯔끼만은 두 정거장을 가야 하는 곳에 살고 있었다. 찬이네 집 부근인 것 같았다. 야마시다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돌아서려는데 부인이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건네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해달라고 하기에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집에 들어온 그는 방금 전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내가 오늘 왜서 세븐일레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했을까? 야마시다와 오오쯔끼 때문일까? 그들이 무슨 사이든 상관할 일이 아니잖은가? 까짓 달걀을 사려고 세븐일레븐을 찾아갔단 말인가?
     어제 그 공원을 찾아갔던 것처럼 오늘도 괜히 세븐일레븐을 찾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제 꿈에 보았던 7숫자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어쩌면 세븐일레븐과 야마시다부인일지도 몰랐다. 부인의 황토색 에프런과 에프런에 달린 파란 호주머니가 사막과 오아시스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전국 각지에 점포가 널려있고 슈퍼들 중에서 매출량이 상위라는 세븐일레븐, 일이 이렇게 된 바엔 집에서 멀지 않은 세븐일레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좋을 상 싶었다.

3

     세븐일레븐 아르바이트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도시락을 산 손님에게는 덥혀드릴까요, 컵라면을 산 손님에게는 더운 물을 부어드릴까요, 하고 물어봐야 했다. 계산대에서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돌려주는 일은 그나마 수월했지만 혹시 물건을 훔치지 않는가고 모니터로 손님들의 거동을 주시해봐야 했다. 물건을 가만히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손님들도 있다고 한다. 창고에서 상품들을 날라다가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넣어야 했고, 가져간 상품들을 기록부에 기록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빵, 샌드위치, 스시, 도시락, 오니기리(주먹밥)와 같은 유통기한이 짧은 식료품들은 밤 열두시가 지나면 소비기한을 재확인해야 했고, 마사진 달걀이나 과일은 처분하고 새 것으로 다시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식료품배달트럭이 들어오면 식료품들을 날라다가 냉장코너에 진열해놓아야 했다.
     야마시다가 한시간 정도 가게에 있다가 파트너인 혼다(本田)와 잘 협력하라고 부탁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부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 부부는 매일 여기에 주숙하지 않는 걸로 짐작되었다.
     둬시간은 허리를 펼 사이도 없었다. 휴게실 안에 창고도 있었고, 창고 옆에 탈의실과 화장실도 있었다. 카운터로 나가는 문 왼쪽에 작은 미닫이방이 있었다.
     새벽 세시가 되니 손님이 적었다. 대학 2학년생인 혼다가 걸상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자꾸 올려다보았다. 오늘부터 몇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하루에 두 곳 아르바이트를 어떻게 할까, 버텨낼만 할까 근심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계산대 옆에 붙여놓은 일정표를 보았더니 오오쯔끼는 오후 세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한주일간 오까다라는 여성과 파트너로 되고 있었다.
     매장 안을 한바퀴 둘러보다가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밖으로 나갔다. 가게 옆에 설치한 공중전화기가 전화줄에 매달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전화를 하고 전화기를 제대로 올려놓지 않은 것이었다. 새벽바람에 으스스 몸이 떨려 전화기를 도로 올려놓고 가게로 달려들어가면서 큰길을 얼핏 건너다보았더니 멀지 않은 가로등 아래에 파란색 승용차 한 대가 멈춰있었다. 그가 가게에 들어와서 얼마 안되어 마스크를 착용하고 코트 깃을 올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섰다. 그는 감기에 걸린 손님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유와 샌드위치를 들고 카운터에 와서 값을 치른 여자가 야마시다부인이 오지 않았는가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야마시다부인한테 전해달라면서 호주머니에서 웬 편지봉투를 꺼내 카운터에 내밀며 야마시다부인한테 전화를 할 것이니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까봐서인지 머리를 숙이고 총망히 가게를 나갔다. 그와 혼다는 인사말도 건네지 못하고 의아한 눈길로 여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편지봉투 수신인과 발신인 난에는 이름도, 주소도 씌어있지 않았다. 혼다가 웃으며 돈이 들어있지 않을까고 묻기에 돈은 절대 아닐 거라고 대답했다. 편지봉투를 만져보았더니 사진이 몇 장 들어있는 것 같았다. 혼다도 편지봉투를 만져보고 여자손님이 수상하다며 부인한테 어떻게 전해드리면 좋을까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파란색 승용차가 움직이더니 전철역 방향으로 씽하니 가버렸다. 여자는 아까부터 차안에서 동정을 살펴보고 있다가 가게에 들어온 것이었다.
     혼다는 한주일 전부터 여기서 일하고 있어 야마시다부부한테 소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애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편지봉투를 창턱 꽃병 옆에 놓아두었다.
     새로 들어온 식료품들을 진열해놓고 어제 남은 오니기리 네 개를 광주리에 담아들고 카운터에 돌아가려는데 부인이 가게에 들어섰다. 부인이 아침인사를 하면서 이젠 퇴근하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가 다 되었다. 그와 혼다가 옷을 갈아입고 카운터에 다시 나오니 부인이 롱코트를 입은 채로 계산대에서 돈을 점검하고 있었다. 뒤돌아보던 부인이 집에 가서 아침이라도 먹으라면서 그와 혼다에게 오니기리 두 개씩 나눠주었다. 그가 얼마인가고 묻자 웃으면서 2천만엔이라며 점장이 몇시에 퇴근했는가고 묻기에 새벽 한시 쯤에 퇴근했다고 대답했다. 왜서 남편이 몇시에 집에 들어간 것도 모르고 있을까? 혼다도 멍하니 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혼다에게 창턱을 눈짓하자 혼다는 눈을 껌벅거리고는 돌아서버렸다.
     그는 새벽 세시 쯤에 마스크를 착용한 여자가 부인한테 전해달라며 부탁한 것이라고 창턱의 편지봉투를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웬 여자가 새벽에 편지봉투를 가져왔을까고 의문스러운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던 부인이 알았다면서 수고했어요, 내일 다시 뵈요, 하고 카운터에서 그들을 바래주었다.
     어머니와 누나와 같이 살고 있다는 혼다는 저녁에 다시 만나자며 집 방향이 다르기에 먼저 가겠다면서 자전거를 냅다 몰고 벌써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그보다 나이도 어리고, 일본인인 혼다와 똑같게 오니기리를 나눠준 부인이 고마웠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이제 부인한테 무슨 큰 불행이라도 닥쳐오지 않을까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집에 들어오니 소르르 졸음이 몰려왔다. 오니기리를 먹으려다가 가방에 넣어두었다. 배가 고팠지만 눈이 내려와 먹을 것 같지 못했다. 평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는 전차로 반시간 가야 하기에 열한시 전에 일어나야 했다.
     얼마나 잤을까, 자지러지게 울려대는 휴대폰 벨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일곱시였다. 그는 누운 채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모시모시, 저예요. 주무시는데 전화를 드려 미안해요. 통화 불편하지 않아요?”
     야마시다부인이었다.
     “괜찮습니다.”
     “녹화를 보았는데 그 여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혼다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 여자 몇 살 쯤 돼보였어요? 그 여자를 뒤따라 나가보지 않았어요?”
     혼다는 새벽부터 몹시 당황해했고, 부인한테서 전화가 걸려오니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을 수도 있었다. 혼다에게 먼저 전화를 한 부인에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파란색 승용차를 몰고 가더라고만 대답했다.
     “차번호는 기억했어요?”
     “불빛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습니다.”
     “김상한테 한가지 일을 부탁하고 싶은데 직접 만나서 얘기할 수 없을까요? 지금 집인가요?”
     “네, 집입니다만...”
     “그럼 지금 집에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이 여자가 집앞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4

     어제와는 달리 따스한 햇살이 방안으로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여자가 집을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바삐 옷을 주어입었다. 이불을 개어놓고 집문을 열었다. 그녀는 아까 옷차림 그대로였다.
     “편히 앉으세요.”
     방에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에게 그는 웃으면서 방석을 건네주었다.
     “이 자세가 더 편해요.”
     그녀가 방석을 무릎 밑에 깔고 그를 보며 정색해서 말했다.
     “집까지 찾아와서 미안해요. 오늘 밤 그 여자가 다시 가게에 올 수 있으니 잘 살펴봐주세요.”
     “알겠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 여자가 익명신과 함께 사진도 석 장 보냈더군요. 사진 보여드릴까요? 아니,더러운 사진은 보여드리지 않겠어요.”
     익명신의 내용은 몰라도 무슨 사진인지는 알만 했다. 그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화제를 돌려버렸다.
     “지금 점장님이 가게를 보고 있겠지요?”
     “아직 오지 않았어요. 어제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몇시에 집을 나가는가고 물었다.
     “열한시 전에 집을 나가야 합니다. 그 여자가 부인한테 전화를 하겠다고 하던데 전화가 왔던가요?”
     “전화가 올 리 없죠.”
     “커피라도 드릴까요?”
     주인의 예의를 갖춰 물어봤을 뿐인데 뜻밖으로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가스불을 켜서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하품이 쉴새없이 나왔다. 선자리에서라도 잠깐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녀가 점장이 오면 내가 어디에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해달라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커피 두 잔을 타서 방으로 들어왔다.
     “커피 드십시요.”
     “고마워요.”
     그녀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어요. 오늘 출근하면 점장이 있을 거예요. 점장이 퇴근할 때 가만히 뒤를 밟아주시겠어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나한테 부탁하다니?
     “미안하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부탁했다가 가게에 소문이 날까봐 그래요. 제가 김상을 믿고 하는 말인데 저를 한 번 도와주시면 안되겠어요? 저는 지금 분을 참지 못하겠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격분했으면 나를 다 찾아와서 이런 부탁까지 할까 싶었지만 지금 자신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들고 있다는 불쾌한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먼저 5만엔 드릴게요.”
     그녀가 핸드빽 안의 돈지갑에서 만엔짜리 지페 다섯 장을 꺼내 그의 커피잔 앞에 내놓았다.
     내가 치사한 일을 하면서 돈을 받는 남자인 줄 알았는가.
     “이러시면 저는 가게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는 돈을 그녀의 손에 도로 쥐어주었다.
     “그럼, 오늘은 드리지 않을게요. 점장이 어디로 갔는가만 확인해주시면 그 때 더 드릴게요. 저는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어요. 어떻게 저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는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여자가 가정을 파괴하려고 간계를 꾸민 게 아닐까요?”
     “익명신을 간계라고 쳐요. 그럼 왜서 두 사람의 알몸과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을 석 장이나 보냈겠어요? 사진 일시는 작년 11월말이던데 가위로 여자의 얼굴을 베어낸 걸 보아 사진 속의 여자가 그 여자 같아요. 작년부터 그 사람을 의심하긴 했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지금까지 참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법적으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증거를 남긴 야마시다가 못나도 너무 못난 바보라고 생각되었다. 아무리 못나도 어떻게 사진을 증거로 다 남긴단 말인가? 헌데, 사진은 그들이 스스로 찍은 것일까, 아니면 그 여자나 누군가가 몰래카메라로 찍은 것일까?
     “점장님이 혹시 그 여자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요?”
     “그럴 수 없어요. 서로 미친 듯이 좋아했겠죠.”
     그 여자는 아마 야마시다의 오랜 애인일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야마시다가 자기를 차던지고 어쩌면 오오쯔끼일 수도 있는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는 걸 눈치채고 야마시다가 자기와 같이 놀던 방탕한 사진을 동봉하여 부인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진을 보여달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편지내용도 알고 싶지 않았다.
     “부인을 도와드릴 수 없어 미안합니다.”
     “김상이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나가지 않겠어요.”
     “?...”
     일순 그녀를 어떻게 집에서 내보내야 하는지 궁리가 나지 않았다. 답복할 수는 없었다. 불쑥 머릿 속에 뭔가 떠올랐다. 그는 입을 막고 하품을 하는 척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조금 자야겠습니다. 자지 않고 이대로 밖에 나가면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럼 쉬세요.”
     그녀가 무릎을 세우더니 침대에 가서 이불을 펴놓았다. 이젠 그만 가겠는가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커피잔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그는 침대에 돌아누웠다. 노곤해진 몸을 뉘으니 절로 눈이 감겨졌다. 내가 자는 걸 보면 알아서 가겠지.
     비몽사몽 꿈결에 누가 이불을 덮어주는 느낌에 눈을 뜬 그는 와뜰 놀라고 말았다. 그녀였다. 그는 이불을 차고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깜빡 잠들었습니다.”
     “조금 더 쉬셔도 되는데요.”
     시계를 보니 열시반이었다. 내가 세시간이나 잤나?
     “아직 가지 않으셨.....”
     그는 말끝을 흐리웠다.
     “김상이 일어나는 걸 보고 가려고요. 저의 부탁 들어주시는 거죠?”
     “이미 말했습니다. 저는 이젠 집을 나가야 합니다. 같이 나갑시다.”
     “아니요. 전 여기에 그냥 있겠어요.”
     억울하고 기가 막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있겠으면 있으라지. 언제까지 있는가 두고볼 테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가방과 웃옷을 쥐고 혼자서 집문을 나갔다.

     저녁에 좀 늦게 퇴근했다. 집 골목에 들어서자 집 전등이 환히 켜져있었다. 전등을 켜놓고 나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여직껏 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다. 그녀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더니 그녀는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 그녀가 입고 왔던 롱코트는 옷걸이에 걸려있었고 창문 커튼들도 쳐져있었다. 그녀는 자는 척하고 있는 게 아니였다. 누가 안아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숨소리에 따라 반팔 회색 스웨터 위로 오르내리는 몰캉한 젖가슴, 허벅지에 꽉 낀 곤색 바지 위에 윤곽이 드러난 몽클한 엉덩이, 황토색 나일론 양말에 눈길이 멎자 사막과 오아시스가 다시 생각났다.
     사막에 멈춰서버린 전차에서 내려 물 마시러 오아시스로 달려가다가 꿈 속에서 깨어났는데 오늘 눈앞에 이렇듯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질 줄이야 어찌 상상인들 했으랴.
     낮꿈은 개꿈이라더니 내가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보려고 그런 꿈을 꾸었단 말인가? 내가 보려던 오아시스는 이것이 아니였잖은가?
     헌데, 오아시스에는 어떤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까? 어떤 마을이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5

     침대 앞에 서있던 그는 주방에 가보았다. 주전자가 싱크대 옆에 놓여있을 뿐 라면을 끓여먹은 흔적도 없었다. 쓰레기통도 그대로였다. 그녀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이다. 며칠 입은 적삼이나 씻자고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쓰레기통 안에 두루마리종이 여러 장이나 던져져있었다. 종이도 많이 쓰는구나 속으로 웃었다. 문득 왜서 생리기도 아닌 그녀를 집에 두고 야마시다가 어제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남자들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지금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녀는 깨끗한 여자일까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내가 왜서 저것들 때문에 에로틱한 상상까지 해야 하는가고 다시 생각해보니 화가 치밀어올랐다. 와락와락 적삼을 씻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씻은 적삼을 베란다에 널어놓고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돌아오셨군요. 언제 오셨어요?”
     그녀의 말소리가 마치 금방 잠을 깬 아내가 늦게 퇴근한 남편한테 하는 인사말처럼 들렸지만 그는 언성을 높였다.
     “지금 남의 집에서 뭘 하고 있어요? 부끄럽지도 않는가요? 이웃들에서 내가 어떤 여자와 동거하는 줄로 알겠어요.”
     그녀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입을 열었다.
     “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저는 김상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아요. 저의 동생과 동갑이더군요.”
     그녀가 인적사항에 적어놓은 내역을 본 것이다.
     “그럼 왜서 동생 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 왔어요? 동생한테 부탁하면 되잖아요?”
     “동생한테 알리고 싶지 않아서요.”
     “저한테 왜서 이렇게 집착해요?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요?”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김상한테 부탁하면 꼭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예요.”
     “저는 못합니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예요.”
     낯빤대기도 두꺼운 여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겨우 삼켰다. 그녀를 문밖에 콱 내쫓고 싶은 것도 참고 있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몇시에 들어올지 몰라 여덟시까지 기다리다가 패밀리마트에 가서 도시락 두 개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어요.”
     “저를 상관 말아요.애는 어쩌구요?”
     부지중 그녀의 딸애가 생각나서 그는 어망결에 물었다.
     “저녁에 외할머니 집에 가라고 했어요. 아참, 전자레인지가 없는 걸 모르고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었네요.”
     그녀가 몸을 일으키더니 냉장고로 뛰어갔다.
     그녀가 정말 며칠이고 그냥 집에 눌러있으면 어떻게 한담? 내일이면 아랫집 오오무라나 이웃들에서 알 수도 있었다. 그녀를 그냥 집에 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마시다가 오늘 밤 어디에 가는가고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도시락을 덥힐까요?”
     “아니요.”
     그는 퉁명스레 대답하고 방에 있기 싫어 화장실에 다시 들어갔다. 양말이라도 씻으면서 시간을 흘러보내고 싶었지만 도시락을 덥히지 말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방으로 되들어왔다.
     “차갑지만 같이 먹어요.”
     그녀가 도시락 두 개를 밥상 위에 가져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먹으라고 그녀를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드는 것도 예의가 아니였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젓가락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빨리 드십시요.”
     “그럼 먹겠어요. 언제 한 번 같이 식사해요.”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고 있는 그녀는 며칠 굶은 사람 같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그녀가 인차 젓가락을 내려놓을 것 같아 맛있다고 말하며 같이 먹었다. 진짜 맛있었다. 오늘 도시락이 이처럼 맛있을 수가 없었다. 고느적한 한밤중에 집에서 서너살 연상인 그녀와 도시락을 같이 먹는 이 야릇한 기분을 어떻게 형언했으면 좋을까!
     그는 한바탕 웃어제끼고 싶었다. 정신이상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웃으면 그녀가 덴겁하여 밥도 채 먹지 못하고 허둥지둥 집에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시계는 정각 열한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 세븐일레븐까지 5분이면 도착한다. 그녀가 잘 먹었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도 따라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과쥬스를 드릴까요? 저는 커피를 마시겠습니다.”
     “그럼 같이 커피 마셔요. 제가 커피 탈게요.”
     그녀가 다 먹은 도시락 두 개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창밖을 내다보니 이웃집 전등들은 모두 꺼져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번 주 목요일이 가게 오픈 3주년 기념일이라는 걸 알았다. 기념일을 어떻게 보내는가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식료품들을 보내오는 음식제조공장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가 피로해보였는지 그녀가 좀 쉬라면서 시간이 되면 깨워주겠다고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아까 전차에서 눈을 붙이긴 했지만 집에 와서 좀더 자려고 했다. 오늘은 세븐일레븐에 나가지 않고 아침 늦게까지 폭 잤으면 세상에 이처럼 행복한 일이 더 없을 것 같았다.
     주방에서 커피잔을 씻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방에 들어온 그녀는 그가 자는 걸 보고 방 전등을 끄더니 바람벽에 기대 앉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방안으로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실루엣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오전에 내가 잘 때도 그녀는 저렇게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내가 깨어날 때까지 그녀는 코트도 벗지 않고 있었다. 추워서가 아니였다. 내가 자기의 몸매를 훔쳐볼까봐서였다. 나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방금 전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소리가 들릴세라 동시에 물을 내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애엄마는 일본에 데려오지 않는가, 혼자서 적적하지 않는가는 따위의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옅은 화장만 했고, 귀걸이도 걸지 않았고,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았다. 이쁜 여자들이 인물값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런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편지봉투를 뜯어본 순간, 그녀는 얼마나 놀랐을까? 그녀한테는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일곱시에 나오는 종업원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익명신을 보낸 여자를 어떻게 찾아낼까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생한테 알리고 싶지 않다던 그녀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한테 부탁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찬바람에 커튼이 춤 추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전등을 켰다. 추운 데 있지 말고 침대에 가서 쉬라고 하자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겠다면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고 챈넬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가 이젠 같이 집을 나가지 않겠는가고 당장 물어볼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기색이 역역히 어려있었다.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오늘 밤 점장을 미행하려고 결심을 내렸다. 그녀를 집에서 내보내려면 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가게에 나가겠습니다. 점장이 퇴근하면 어디에 가는가 살펴볼게요.”
     그녀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발딱 일어서더니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말이 나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으면 나의 목까지 끌어안을까 싶어 그는 가만히 서있었다.
     “제가 혼자서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두려웠어요. 점장과 가게에 오는 여자손님들을 잘 살펴봐주세요. 저는 그 여자를 꼭 찾아내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침대 쪽으로 한발 다가가더니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심장이 팔딱거리고 아랫도리가 후끈거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요.”
     “아닙니다. 지금 가봐야겠습니다.”
     그는 살며시 그녀의 두 팔을 풀어놓았다.
     “근심 말고 쉬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는 스프링처럼 단숨에 밖으로 튕겨나왔다.

6

     가게에 들어서자 야마시다가 일찍 왔다며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처음 보는 아르바이트생과 어제 인사를 나눈 젓가락처럼 생긴 근시안경과 교대를 마친 그는 계산대에서 일하다가 야마시다를 따라 창고와 매장을 돌아보았다. 야마시다가 분부를 마치고 카운터에 다시 들어와서 시계를 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두는 것이었다. 저녁에 다시 만나자던 혼다가 열두시가 넘어도 오지 않고 있었다. 야마시다가 혼다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혼다가 겁을 집어먹고 그만둔 것 같았다.
     손님 몇 명이 카운터에 다가왔다. 맥주를 산 남자손님에 이어 타올을 산 여자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돌려주며 인사를 한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랫집 오오무라였다. 오오무라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생긋 웃고는 가게를 나갔다.
     오오무라가 왜서 이 시간에 여기에 왔을까? 왜서 나를 보고 당황해하지도, 주저하지도 않을까?
     가게에 온 오오무라가 심상찮아보였다.
     손님들이 나가자 옆에 서있던 야마시다가 오늘 혼자서 가게를 볼 수 있는가고 묻기에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점장님께서 집에 돌아가서 주무시라고 했더니 좀 있다가 가도 된다면서 야마시다가 휴게실로 들어갔다.
     야마시다는 그 여자가 가게에 왔다간 걸 알고 있을까? 마누라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걸 알고 있을까?
     그는 세븐일레븐 조끼 호주머니 안에 넣은 휴대폰을 진동모드로 설치해놓고 휴게실 문 가까이에 다가갔다. 안에서 야마시다가 누구한테 전화를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방안에서 전화를 하는지,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방안에도 카메라가 있음직해보여 계산대로 되돌아섰다.
     손님들이 다시 뜸해지자 바닥청소를 해놓고 카운터에 들어오니 야마시다가 자고 있는지 휴게실 안에는 아무 동정도 없었다. 상품을 가지러 들어간 척 들어가보려다가 야마시다를 그대로 자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혼다가 오지 않았기에 이제 야마시다가 밖에 나간다면 가게를 비워두고 미행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두 번 다시 가게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긴장의 끈은 놓을 수 없었다. 자동출입문과 창밖을 수시로 내다보면서 이제 박두해올 시각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두시부터 세시 사이에는 택시기사와 중년남자가 쥬스와 청주를 각자 사가고 세시부터 네시 사이에는 도로공사 유니폼을 입은 노동자 대여섯 명이 시간 간격을 두고 컵라면과 오니기리를 먹으러 여러 번 드나들었을 뿐 여자손님이라곤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네시반이 거의 되었을 때였다.
     웬 시꺼먼 그림자가 창밖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다시 찾아온 유령 같아보여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시 돌아서서 공중전화를 하는 그림자는 짧은 생머리 여자였고, 검은색 웃옷에 검은색 바지까지 입고 있었다. 어제 여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코트 깃을 올렸지만 긴 웨이브머리였기에 그 여자는 아닌 것 같아보였다. 그런데 창밖의 저 여자는 집전화나 휴대폰이 없어서 새벽에 공중전화를 할까? 혹시 그 여자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다시 찾아온 게 아닐까? 후다닥 밖으로 달려나가보고 싶었지만 누가 문 뒤에 숨어있다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후려칠 것 같아 나가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윽하여 여자가 전화기를 놓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여자는 존재감을 생색이라도 내 듯 또각또각 구두발소리를 울리며 고요한 새벽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이나 걸음걸이도 그 여자는 아니였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 야마시다가 깨어날까봐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커피 한 잔만 마셨다. 다시 카운터에 들어와 종업원들이 마셔라고 테블에 올려놓은 눅거리 인스턴트커피나 한 잔 더 마시려는데 야마시다가 휴게실에서 나왔다. 같이 커피를 마시자며 손수 탄 커피 한 잔을 그에게 건네주고 걸상에 앉은 야마시다의 두 눈에 피발이 서있었다. 야마시다가 웃으면서 개학은 언제이고, 개학하면 수업이 많은가고 묻더니 혼다가 그만두었다면서 야간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더 구하기 전까지 매일 나와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나서 벽시계를 보며 물었다.
     “어제는 부인께서 다섯시에 나오셨더군요. 오늘도 부인께서 일찍 나오세요?”
     “오늘은 다른 사람이 나와요.”
     야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다가 통화가 되지 않는지 자리에 되앉았다. 그녀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마주앉아 무슨 말을 하려다가 휴대폰을 뒤적이는 야마시다의 얼굴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를 집에 몰래 숨겨두고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뻔뻔스럽고 음흉스럽게 느껴졌다. 야마시다가 얼굴을 들자 그는 경찰을 본 범죄자처럼 몸둘 바를 몰라했다. 마침 음식배달트럭이 들어왔기에 자리를 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섯시가 되어도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있었다. 야마시다가 퇴근하는 그를 문밖까지 바래주었다.
     참으로 지겹고도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
     동트기 전인 춥고 어두운 이 새벽에 그녀는 혼곤히 잠들어있을 것이다. 오지도 않는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고 괜히 신경줄이 팽팽해지다 나니 가게를 들여다보던 여자를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알기나 할까? 그 시꺼먼 그림자를 생각하면 집으로 달리는 자전거가 집어삼킬 듯한 동굴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늘 이불 안에서 바지를 벗고 자기만 해보지. 오늘은 절대 가만놔두지 않을 테다!
     집앞에 당도하자 방 전등은 꺼져있었고 현관전등만 켜져있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살며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방 전등을 켰더니 펴놓은 이불 안에는 그녀가 없었다. 이불 안은 그녀의 온기로 따뜻했다. 그녀가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주방과 화장실 안의 쓰레기주머니들은 새 것으로 놓여져있었고 타일바닥들은 깨끗하게 닦아져있었다. 휴대폰은 꺼진 상태였다.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벽시계 초침소리가 어제 아침 계단을 올라오던 그녀의 발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녀의 체취가 풍겨오는 이불 안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창밖이 훤히 밝아서야 비로서 잠이 들었다.
     비가 내릴 듯 흐릿한 오전, 아르바이트 하러 가려고 전차에 앉은 그는 요즘 보던 소설책을 가방에서 꺼냈다가 황급히 책으로 얼굴을 막았다. 맞은켠에 앉은 사람들 속에 노란 머리가 있었던 것이다. 오오쯔끼가 어느 역에서 전차에 올랐을까? 일본에 와서 처음 느끼는 어색한 공기가 전차 안에서 감돌고 있었다. 좀 지나서 얼굴을 막았던 책을 슬며시 내리고 보니 그녀는 출입문 쪽에만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태연스레 앉아있었다.두 정거장만 가면 그녀가 내리는 것이다. 전차가 역에 도착하자 그녀가 먼저 내렸다. 그도 전차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가 찬이네 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문구방을 지나 찬이네 집으로 가기 전인 오른쪽 골목으로 굽어들더니 어느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그녀가 눈치 채고 고개를 돌릴까봐 되돌아가지 않고 대문을 지나 동네를 에돌아서 전철역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큰길에 다다르면 전철역이 보인다.
     그 때였다.
     하얀색 도요다차가 눈앞을 스쳐지났다. 야마시다 차 같아보였다. 큰길까지 뛰어가보았더니 차가 오른쪽으로 굽어들어갔다. 그는 다시 확인하려고 달려가서 골목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야마시다가 차를 담장 옆에 바싹 세워놓고 그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과연 까마귀들이 여기에 새 둥지를 틀고 있었구나!
     이러면 점장이 어디에 갔는가만 확인해달라던 그녀의 부탁은 들어준 것이고 미행도 여기서 끝난 것이다.

7

     내가 개인정탐이나 어느 영화에서 나오던 너절한 치들이 목표물의 뒤를 밟던 짓을 한 게 아닌가?
     전차에 다시 앉은 그는 그녀가 이제 전화가 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목격한 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후과가 두려웠다. 증인으로 경찰에 불리워갈 수도 있고 그러면 학교에 알려질 수도 있었다. 그들 부부 일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자칫하면 자기만 낭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점장은 혼다가 오지 않아서 아침까지 가게에 있었다고, 그 여자는 가게에 오지 않았다고 사실 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여자를 꼭 찾아내겠다고 그녀가 윽벼르고 있지만 그 여자가 가게를 다시 찾아오지 않는 한,야마시다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한 그 여자는 영원히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저녁 무렵까지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가게 전화로 두 번이나 전화를 해봤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
     나한테 언녕 전화를 해야 하잖은가? 그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혹시 못된 마음을 먹고 자살이라도.....?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전화를 해달라고 음성메세지를 남기려다가 경찰들이 그녀의 휴대폰으로 추적하면 어쩌랴 제꺽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아홉시가 되자 퇴근길에 올랐다. 집 대문 앞에서 쓰레기주머니를 들고 나온 오오무라를 면바로 만났다. 오오무라가 변명하듯 먼저 말을 건네왔다.
     “제가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세븐일레븐에서 멀지 않은 레스토랑에서 열두시까지 카운터를 봐요. 그리고 저의 친구도 세븐일레븐에서 일한다고 해서 친구가 있는가고 들려본 거예요. 김상이 거기에 일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요? 친구는 누군가요?”
     “오오쯔끼 구미꼬예요. 아시죠?”
     그는 흠칫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대가 달라서 같은 가게에서 일해도 얼굴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오늘도 세븐일레븐에 나가요?”
     “네, 그럼...”
     오오무라가 걸레 같은 오오쯔끼의 친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그는 내일 날씨를 보려고 텔레비전을 켰다. 지방챈넬에서 오락프로가 한창이었다. 한국에 여행을 갔다왔다는 한 젊은 여인이 한국에서 사온 파란 때밀이 타올을 들고 평소에는 몸에 때가 없는가 했는데 이 때밀이 타올을 써보니 때가 가득하더라고 웃으며 자랑 삼아 떠벌이고 있었다. 다른 챈넬을 보려고 리모컨을 찾던 그는 리모컨은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만 그냥 들려오자 발로 텔레비전 전원을 꺼버렸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한시간 넘게 잘 수 있었다. 알람을 맞춰놓고 잠자리에 누웠다.
     ... 그는 다시 꿈을 꾸고 있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거울을 마주하고 한 겹 한 겹 기모노를 벗고 있었다. 하얀 목덜미, 예쁜 허리.....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여인이 천천히 돌아서더니 웃으며 그의 옆에 고스란히 누워 정답게 속삭이면서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차츰차츰 아래로 내려가던 손이.....
     악!
     그의 입에서 무서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비명소리와 거의 동시에 휴대폰이 경망스레 울려터졌다.
     “저예요.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그녀였다. 늦게라도 전화가 오니 시름이 놓였다.
     “괜찮습니다. 지금 어딘가요?”
     “약방, 아, 아니예요. 지금 가게에 나가는 길이예요. 그럼 가게에서 다시 뵈요.”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약방이라고 말했다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녀가 혹시 새벽에 집을 나갔다가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그는 샤워를 하면서 여인의 손길이 닿은 부위를 깨끗하게 씻었다.
     열두시 전에 가게에 들어서니 그녀가 계산대에 서있었다. 어제 왔던 아르바이트생이 퇴근하려고 카운터에서 나왔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탈의실에서 조끼를 갈아입고 카운터에 나오니 마침 아까 왔던 손님들이 나가고 그녀와 단둘이 남았다. 회색 스웨터 위에 황토색 에프런을 걸친 그녀의 얼굴이 조금 초췌해보였다.
     그는 아까 약방이라고 하셨는데 감기에 걸렸는가고 물었다.
     “괜찮아요. 오전에 서류를 제출하고 점심시간에 어머니 집에 갔댔어요. 두통이 심해 열시반까지 누워있다가 가게에 전화를 해봤더니 점장이 여직껏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약방에 들렸다가 가게에 나온 거예요. 근심 말아요.”
     오전 열한시 쯤에 야마시다가 오오쯔끼 집에 갔었다. 오후 세시에 출근하는 오오쯔끼와 같이 나왔겠는데 야마시다가 지금까지 가게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얼굴색이 안 좋아보입니다. 집에 들어가 주무십시요.”
     “혼다를 아침 일곱시에 노임 가지러 오라고 했어요. 혼자면 힘들어요. 같이 있을게요.”
     “괜찮습니다. 점장님이 다섯시까지 나오지 않으면 제가 부인이 나올 때까지 남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좀 피곤하니 먼저 갈게요.”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수고하라는 말만 남기고는 가게를 나갔다.
     어떻게 이대로 그냥 나갈 수가 있단 말인가!
     온종일 휴대폰을 꺼놓고 있다가 야심한 밤중에야 전화를 걸어온 그녀, 아무리 몸이 불편하고 가게에서 사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은 그녀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원했던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을 어떻게 알고 제멋대로 부려먹는 수작인가 싶었다. 자신이 마치 밤중에 주문을 외우며 오아시스를 홀로 지키는 사막 어느 촌마을의 늙어빠진 촌장 같아보였다.
     카운터에 서있던 그는 걸상에 앉았다. 손님이 오면 일어나고 손님이 없으면 그냥 걸상에 앉아있었다. 비어있는 공간에도 상품들을 채워넣지 않고 있었다. 그 여자와 시꺼먼 그림자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야마시다나 그녀에게 어떻게 가게를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음식배달트럭이 실어온 식료품들을 냉장코너에 진열해놓고 시계를 보니 15분전 다섯시였다. 야마시다가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섯시가 되자 그녀가 가게에 들어섰다. 그는 아침인사를 하면서 카운터에 들어온 그녀에게 맞인사도 하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에는 지도교수님을 모시고 학급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저녁에도 약속이 있어 나오지 못하겠습니다.”
     단도직입으로 가게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자신이 기본도 지키지 않는 무뢰한으로 보일까봐서였다.
     “그래요? 내일은 가게 오픈 3주년 기념일인데요.”
     “미안합니다."
     “할 수 없군요.그럼 모레는 나오시는 거죠?”
     그는 그녀를 마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 알아차린 듯 인츰 되물어왔다.
     “혹시 그만두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남녀손님이 가게에 들어와서 서투른 일본어로 두부와 캐찹을 사고 싶다고 하기에 카운터에서 나와 손님들을 모시고 코너로 갔다. 여자손님의 생머리와 복장을 보고서야 어제 새벽 가게를 들여다보던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저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흘러나왔다. 손님들이 나가자 새벽공기도 쐬일 겸 밖에 서있다가 다시 들어오니 계산대에 서있던 그녀가 탈의실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들어오라고 부르기에 휴게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더니 에프런을 걸친 그녀가 문앞에 서있었다. 회색 스웨터를 그대로 입은 걸 보아 집에는 들어간 것 같지 않았다.
     “가게에서 더 말하지 않겠어요. 오전 열시반에 전철역 앞 마트 맞은켠에 있는 찻집에서 기다릴게요. 그럼 퇴근하세요.”
     그녀가 나가자 그는 옷을 갈아입고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가게를 나와버렸다.

8

     집에 들어온 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차라리 오늘부터 그만두겠다고 속시원히 말했더라면 찻집에 가지 않아도 될 걸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10시 10분에 알람이 울리자 대충 씻고 집 대문을 나섰는데 정장을 입은 오오무라가 부랴부랴 택시에서 내렸다. 오오무라가 인사를 건네오자 벌써 퇴근하는가고 물었다.
     “오오쯔끼가 교통사고를 당했대요. 집에 들렸다가 몇 명 친구와 같이 병원에 가보려구요.”
     “네? 오오쯔끼상이 많이 상했어요?”
     “어느 리조트에 갔다오다가 화물차와 충돌했대요.”
     “친구들과 같이 놀러갔나 보군요.”
     “가게 점장과 같이 갔대요.그럼...”
     오오무라가 대문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리조트라면 하룻밤 묵을 수도 있었다. 언제 갔는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야마시다가 오오쯔끼를 데리고 놀러간 것만은 분명했다.
     까마귀들이 겁도 없이 화물차를 들이박다니?
     전철역 자전거정류소에 자전거를 두고 그녀에게 전화를 해보니 휴대폰이 꺼져있었다. 그녀가 아직 교통사고를 모를 수도 있기에 급한 일이 있어 가지 못하겠다고 말하려 했던 그는 할 수 없이 찻집을 찾아들어갔다.
     그녀가 차를 시켜놓고 창문 옆 좌석에 앉아있었다. 저쪽 테블에 남자손님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혼자 앉아있을 뿐 고풍스러운 찻집은 조용했다.
     그가 휴대폰이 꺼져있더라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대로 말할게요. 그 날 아침, 편지봉투를 뜯어보고 어쩔 바를 모르겠더군요. 치밀어오르는 분은 눅잦힐 수 없고 가게 종업원이나 동생한테 부탁할 수도 없어서 막연하기만 하더군요. 먼저 혼다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는 잘 모르겠다면서 김상한테 물어보면 알 거라고 하더군요. 김상 집에 갈 때는 김상한테 부탁도 할 겸 그 사람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미쳐서 날뛰고 있는데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이예요.”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대담하게 나올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새벽에는 김상과 함께 있는 상상까지 해봤어요.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되어 김상이 오기 전에 집을 나간 거예요.”
     왜서 나를 기다리지 않았냐고, 기다렸다가 함께 환락 속에 기껏 빠져있었으면 좋지 않았냐고 물어보려던 그는 남자손님 쪽을 건너다보면서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제 새벽에 어디에 갔댔어요?”
     “어머니 집에 갔댔어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손님이 들어와서 남자손님과 마주앉았다. 회색 코트, 긴 웨이브머리, 갸름한 얼굴, 두쌍의 커다란 쌍겹눈, 그리고 금빛 귀걸이..... 그 여자 같아보였다.
     여자손님을 보던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행히 그녀는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여자손님한테 눈길을 더 주지 않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낮은 소리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그 여자의 오른손 중지에 기미가 있지 않았어요?”
     편지봉투를 내민 그 여자의 오른손 중지에 좁쌀알만한 까만 기미가 있었던 것이다.
     “손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사진을 이미 경찰서에 제출했어요. 왜요? 그 여자가 가게에 왔댔어요?”
     그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그녀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찻잔을 가볍게 테블에 내려놓는 그녀에게 하려던 말을 꺼냈다.
     “요며칠 저는 유학생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미안하지만 오늘부터 가게를 그만두겠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녀의 얇다란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하네요. 부탁한 일을 묻지 않아 기분이 나빠서 아침에 성낸 줄로 알았어요. 그 일은 오늘 조용히 물어보려고 했어요. 김상이 사례금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아까 전자제품가게에 들렸어요. 내일 오전에 전자레인지와 전기포트가 도착할 거예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만요. 그럼 모레부터 새로 시작하신다고 생각하겠어요. 시급을 인상해드릴 테니 오늘 먼저 사흘분 노임을 드릴게요.”
     그녀가 돈지갑에서 만엔짜리 지페 두 장을 꺼내 테블에 올려놓았다. 그도 돈지갑에서 천엔짜리 지페 석 장과 500엔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테블에 올려놓았다.
     “제가 일한 만큼 받겠습니다. 더 많지도 적지도 않게 받고 싶습니다. 모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오늘부터 그만두겠습니다.”
     그녀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했다.
     “제가 그 말을 해서 그러세요?”
     아르바이트 하러 갈 시간도, 그녀가 휴대폰을 켤 때도 된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쪽 테블에 앉은 여자손님의 매서운 눈빛이 찻집을 나가는 그의 등뒤에까지 꽂히고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9

     그녀와 그 여자를 한데 남겨두고 밖으로 나온 그는 가게를 한번 뒤돌아보고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세븐일레븐은 집에서 거리가 제일 가까웠지만 사흘 밖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은 가게였다.
     저녁에 퇴근해서 집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평소에는 꽁꽁 닫겨있던 오오무라네 집문이 빼꼼히 열려져있었다. 대문을 들어오는 발자국소리를 들었는지 오오무라가 나들이옷차림으로 집문을 열고 나왔다.
     “돌아오셨어요?”
     오오무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 오오쯔끼상이 괜찮은가요?”
     “많이 다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는 엄중하지 않대요.”
     “다행이군요. 점장도 괜찮은가요?”
     “옆칸에 입원해있다는 점장은 잘 몰라요. 헌데 점장과 오오쯔끼가 애인관계인가요? 왜서 같이 갔을까요? 친구들도 궁금해하더군요.”
     “점장이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오오쯔끼상의 얼굴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오늘도 세븐일레븐에 나가요?”
     “오늘 그만뒀습니다.”
     “그랬어요? 무리하게 일하지 말아요. 저의 어느 친구 남편은 너무 고되게 일해서 며칠 전에 입원까지 했어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이튿날 오전 열시 쯤에 택배가 도착했다. 그녀가 보낸 전자레인지와 전기포트였다. 그는 물건들을 들고 집문을 나섰다.
     택시로 세븐일레븐에 도착하니 출입문 어구에 꽃바구니 몇 개가 놓여있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바겐세일이라는 표어가 매장 곳곳에 걸려있고 손님들이 북적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처음 보는 여종업원에게 인사를 하고 야마시다부인한테 드려달라고 물건을 부탁했다. 여종업원이 부인께서 인츰 오신다고 하자 볼일이 있어 그만 가겠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다시 택시를 타려다가 시간이 충분하기에 멀지도 않은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을 굽어들었을 때 꽃묶음을 안고 꽃방에서 나오는, 어제 찻집에서 보았던 그 여자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속이 꿈틀했지만 모르는 척 스쳐지나갔다.
     “미안해요.저...”
     그 여자가 그를 부르자 그는 돌아서서 나를 불렀는가고 물었다.
     “네, 실례이지만 세븐일레븐 종업원이 아니세요?”
     그 여자는 그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그는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오늘 가게 오픈 기념일이지요? 야마시다점장님께서 나오셨죠?”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점장님을 알고 계세요?”
     “네, 저의 고중 선배예요. 부인은 나오셨나요?”
     그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부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인도 알고 계세요?”
     “부인과는 중학교 동창생인데 만난지 오래 됐어요. 이제 다시 보니 어제 찻집에서 예쁜 여성과 차를 마셨죠? 제가 그 찻집에 있었거든요.”
     중떠보려고 불러세웠는지, 그녀를 알아보고도 못본 척했는지 궁금해서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제 찻집에 갔댔습니다. 그 여성이 야마시다부인입니다.”
     “어머, 저는 야마시다부인인 줄 모르고 인사도 건네지 않았네요.”
     그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핼끔핼끔 그의 눈치를 살펴보는 그녀에게 한술 더 떴다.
     “저만 알아보시고 중학교 동창생인 부인은 알아보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 손님과 얘기하다 나니 알아보지 못했군요.”
     그는 아까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는가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교묘하게 꾸며대는 이 간사한 여자가 무슨 일로 부인과 같이 찻집에 갔는가고 되물어올 것 같아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런가요? 지금 쯤이면 부인이 가게에 오셨을 겁니다.그럼...”
     그가 돌아서려 하자 그 여자가 다시 말을 건네왔다.
     “점장님의 휴대폰이 그냥 꺼져있더군요. 미안하지만 이 꽃을 점장님께 전해주시겠어요? 지금 시간이 바빠서요. 노자끼라고 말하면 알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이젠 세븐일레븐 종업원이 아니라서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보았다.
     시간이 바쁘다면서 새끼 낳지 않은 암소처럼 늘짝늘짝 걸어가던 노자끼가 세븐일레븐 골목으로 굽어들지 않고 레스토랑이라고 큰 영어간판을 내건 빌딩 옆 골목 안에 세워둔 파란색 승용차로 다가가더니 꽃묶음을 뒷좌석에 던져넣고 운전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노자끼는 그들이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고 가게 오픈 기념일에 일부러 가게를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야마시다가 가게에 나오지 않았고 부인이 인츰 가게에 들어온다고 하니 꽃묶음을 부탁한 것이었다. 찻집에서 그녀를 보고도 못본 척했을 것이고 야마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줄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헌데, 노자끼는 나에게 괜히 인사를 건넸다고 후회하지 않을까?
     성씨까지 알려준 아둔한 여자가 어떻게 그런 엉뚱한 짓을 저질렀을까 하고 그는 코웃음을 쳤다.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가게의 경영자등록변경수속을 밟으러 갔다가 돌아오니 가게에 왔다가셨다더군요.”
     경영자등록변경수속?
     “그럼, 이제부터 부인께서 가게를 경영하게 되나요?”
     “맞아요. 3년 전에 제가 투자해서 점포 두 개를 세웠어요. 지금 아버지가 맡고 있는 세븐일레븐도 장사가 잘돼요.”
     점포 하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남편의 이름으로 등록했다가 지금 야마시다의 이름을 변경하는 수속을 밟는 중인 것이다. 이제부터 점장은 그녀인 것이다.
     “점장으로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혹시 이전에 장사라도 했어요?”
     “고마워요. 이전에 무역회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오늘도 열두시부터 가게를 봐주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서 저의 선물을 받지 않았어요?”
     야간아르바이트생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는 말로도 들렸지만 그녀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의는 고맙게 받았습니다. 아까 길에서 부인의 중학교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꽃묶음을 사가지고 가게로 가는 길이라고 하던데요.”
     “중학교 동창생들은 기념일을 몰라요. 성씨는 물어보지 않았어요?”
     “노자끼라고 하면 안다고 하더군요.”
     “노자끼? 잘 생각나지 않아요. 어제는 그 여자의 오른손 중지에 기미가 있다고 했죠? 그 여자와 노자끼라는 여자가 연관성이 있어보이던가요? 어제는 상상도 못한 일이 발생했지 뭐예요. 어떻게 가게의 여자와 또.....”
     그녀가 잠깐 말을 끊었다. 그녀가 교통사고를 알고 있는 것이다.
     “저의 선물도 받지 않은 대신 오늘 저녁에는 시간을 꼭 내요.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싶어요. 한 번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제가 말했잖아요.”
     “미안합니다. 오늘 시간이 안됩니다. 노자끼라는 여자는 긴 웨이브머리에 갸름한 얼굴입니다. 그리고 쌍겹눈이고 금빛 귀걸이를 걸었습니다.”
     찻집에서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노자끼를 알아볼 것 같이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노자끼라는 여자가 마음에 걸리는군요. 확인해봐야겠어요.”
     노자끼의 진상이 이제 곧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는 전차를 빨리 타야 하기에 그만 실례하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10

     며칠 후, 공교롭게도 1년 남짓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가 문을 닫게 되어 그는 집에서 그 동안 밀렸던 참고서적들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새 일자리를 구하려고 매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중국 유학생이라고 여러 가게들에서 거절당했고, 몇 명 점장들한테서는 동북 하얼빈에서 왔는가고 놀림까지 당했다. 중국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타먹으며 편안히 살 것이지 왜서 좋은 직업 버리고 일본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나, 이런 수모까지 당하나 싶었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활 날아가버렸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집 생각이 절로 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난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던 2월 마지막 날 오후였다.
     도꾜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전차에서 그는 오오쯔끼를 보았을 때보다 더 크게 놀랐다. 출입문 옆 의자에 수염이 텁수룩하고 얼굴이 창백해진 야마시다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혼자 앉아있었던 것이다.
     야마시다가 언제 퇴원했을까?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전차에서 내린 그는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던 전철역 서구로 향했다. 서구는 동구보다 컸고 가게들도 동구보다 많았다. 서구 광장 맞은켠 빌딩 아랫층에 중국요리점과 라면집이 있었다. 오늘은 그 가게들에 문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중국요리점을 찾아가는 길에서 뜻하지 않게 그녀를 다시 만날 줄이야.
     그는 놀라는 기색도,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그녀가 그의 근황을 묻자 그는 사실 대로 대답했다.
     “그럼, 저의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지 않겠어요?”
     눈앞에 보이는 세븐일레븐이 그녀의 아버지의 가게였다.
     “요즘은 책도 좀 봐야 하기에 잠시 아르바이트를 할 것 같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아닌 보살을 하며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개학은 4월이겠죠? 그럼 아무때든 연락해요. 저... 오오쯔끼의 친구가 무슨 말을 하지 않던가요?”
     그저께 오오무라한테서 오오쯔끼가 퇴원하는 길로 고향에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었다.
     “오오쯔끼가 고향에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요? 그 사람은 오늘 나온다더군요. 노자끼가 조사를 받았어요. 김상 덕분에 그 여자를 찾았어요.”
     야마시다가 오늘 퇴원한 것이었다. 노자끼가 조사를 받았다고 해도 왠지 그 일이 잘 끝나서 통쾌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저는 김상을 믿어요. 저의 아버지의 가게도 좋고 저의 가게에서 다시 일해도 좋아요.”
     “아닙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상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만 해요. 전화를 기다릴게요. 그럼 또 뵈요.”
     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하고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려면 그녀의 아버지의 가게나 그녀의 가게에서 다시 일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내심 고마웠지만 이왕이면 새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헌데 일자리도 아직 구하지 못한 마당에 점포 두 개나 갖고 있는 그녀와도 멀어졌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더욱 막막해졌다.
     오후 시간이어서인지 작은 라면집은 준비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중국요리점에 들어가려는데 오전에 면접을 보았던 도꾜 아끼하바라(秋葉原)전자가게에서 내일부터 나와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전문대상으로 도꾜에 세워진 전자가게였다.
     그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만약 전자가게에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더라면, 중국요리점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한테 전화를 했을까? 전자가게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은 전자레인지와 전기포트를 그녀에게 돌려줬기 때문이 아닐까?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전자가게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길 건너편 그녀의 아버지의 가게에 손님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다시 발을 들여놓을지도 몰랐던 세븐일레븐, 눈에 익은 세븐일레븐 로고, 꿈에 보았던 7숫자.....
     불현듯 사막과 오아시스가 클로즈업되어 눈앞에 다시 안겨왔다.
     그럼, 그 날 꿈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온 것은 오늘 그녀의 요구를 뿌리치려는 것이였을까? 그 더러운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던 남자는 오늘 전차에서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던 야마시다였을까? 아까 물통은 보이지 않았다. 더러운 것들이 사라졌으니 걸레가 들어있는 물통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잖은가? 그리고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가던 내가 갈증을 못이겨 물병을 들고 있던 여인한테로 되돌아왔을까?
     어렵사리 구한 새 일자리, 아득하게만 보이던 오아시스, 오늘 드디어 샘터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두주일 전의 꿈, 꿈 같은 오늘, 오늘은 그 날의 꿈해몽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날처럼 다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음에도 생각할 수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둥둥둥~
     난데없이 북소리가 울려왔다.
     중국요리점 문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그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둥둥둥~
     북소리가 또다시 울려왔다.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새봄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행사가 어딘가에서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북소리가 마치 꿈 속에서 어서 깨어나 새 출발을 하라고 울려오는 듯했다.
     이 좋은 날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불러내서 술도 같이 마시고 러브호텔에도 같이 가고 싶었다. 그 날 밤의 연장전은 오늘 밤에 불꽃 튀는 접전을 펼쳐야 하잖겠는가. 그 날 밤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뒤쫓아가서 아무데서나 눕혀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 뿐이지 남의 나라에 와서 못난 짓을 할 내가 아니지. 그래도 제일 어려운 시기에 자기의 가게에서 다시 일해도 좋다고 선뜻이 말해준 고마운 점장이 아닌가. 그녀가 집을 찾아온 일은 이젠 과거형으로 되었다.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전화를 하려는데 찬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고 보니 찬이와 통화를 한 지도 두주일이 넘었다.
     “오랜만이구나. 생일 축하한다.”
     “생일?”
     “생일도 모르고 있었나? 음력으로 오늘이 너의 생일이잖아. 저녁에 전번에 갔던 그 이자까야(居酒屋)에서 만나자.”
     통화를 마치고 그는 쿡쿡 웃었다.
     생일을 몰라서가 아니였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못해서도 아니였다. 전번에 갔던 이자까야가 생각나서였다. 20대 젊은 두 여자가 같이 마셔도 괜찮은가고 묻기에 다짜고짜 얼마인가고 물었다. 2만엔이라 하기에 너무 싸서 흥미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자까야를 나오면서 보니 그 두 여자가 길 가는 남자들에게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들을 만나게 되었다.어느 학부 학생들인지는 몰라도 일부 여대생들은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구나 속으로 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찬이에게 내일부터 아끼하바라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말만 하고 뒷말을 잇지 않아서였다. 면접을 마치고 아끼하바라역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아침에 샤워를 하고 팬티를 뒤집어 입었다는 걸 보아냈다. 전자가게 면접에는 통과되지 못했구나, 내일부터는 옷을 제대로 입고 집을 나와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생각에 얼마나 골몰했으면 팬티까지 뒤집어 입었으련만 어쩌다 팬티를 뒤집어 입으면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것인가.
     좋은 일만 생긴다면 매일 팬티를 뒤집어 입으리라.
     오늘은 참말로 재미있고 뜻깊은 날이었다. 오늘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동구 쪽에서는 보지 못했던, 꿈 속에서 사막에 멈춰서버렸던 그 전차가 손잡이에 조롱조롱 매달린 사람들을 가득 싣고 이 겨울 마지막 날 오후의 햇살 속으로 유유히 미끌어져가고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꿈이라는 것이 그런 꿈을 꾸지 말자고 해서 꾸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부터는 사막과 오아시스와 같은 꿈은 제발 다시 꾸지 말았으면 바랐다.

- 끝 -
(격월간 ‘송화강’ 2020년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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