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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퉁 썩궁리 시리즈22
진정한 사랑이란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
인간 개개인 혹은 사회에 있어서 제일 고상하고 성스러운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정을 베풀어가는 그러한 사랑심이 있기에 인간은 순수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심은 인간뿐이 아닌 동물을 비롯한 자연계의 모든 존재에 베풀어지며 모든 존재를 포용하고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본연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혼인을 목적으로 한 이성간의 사랑은 인간자체생산이란 남다른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베풀어가는 것이지만 혼인을 목적으로 하는 남녀간의 사랑은 소유라는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때문에 결혼 후 서로 상대를 자기의 소유물로 간주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당연시하는바 이와 같은 의식은 "내 남편" 혹은 "내 안해"라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내 남편" "내 안해"라는 낱말에서 상대가 "내 것", 즉 나에게 속한다는 소유의식과 소유자로서의 권위의식을 강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소유의식은 특히 성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상징성적인 기호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조라고 할 수 있다. "정조를 바친다"는 것은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것이야"하는 메시지와 같고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 당신에게 속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정조라는 기호의 배후에는 강한 소유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의식 때문에 인생길에서 남편(안해)아닌 또 다른 사모할 수 있는 이성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행복감 못지않게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고통 속에 모대기게 된다.
정조를 단순 육체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자기의 첫 순정을 사랑하는 애인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첫 순정을 받아들이는 남자(여자)는 그 당시 어떠한 심리현상이 일어날까요. 만약 결혼 전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모했었다면 사실상 마음의 정조를 이미 타인에게 준 것인데 육체보다 마음을 더 강조하는 우리는 오히려 마음의 정조의 상실에 대해 별로 개의치않게 생각한다. 그것은 마음의 정조를 우리가 감지할 수 없고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음의 정조는 치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혼인상대에게 대해 "과거를 묻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마음의 정조에 대한 것뿐이지 육체적인 정조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한 정조관념을 의식하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정조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처녀막회복이라는 기술까지 발명되어 정조를 지켜가는데 일조하고 있다. 처녀막수술을 통해 자기의 결백함을 보여 줄려는 사람이나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결백함을 보여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혼인문화풍토나 정조관념은 얼마나 허위적이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가.
그리고 한가지 실례를 든다면 가령 한 여자가 인공수정의 방식으로 자식 둘을 낳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두 자식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결국 배다른 형제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형제는 아니다. 왜서일까?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얼굴도 모르는 두 남성과의 간접적인 성관계를 통해 자식을 낳았을 따름이다. 이렇게 태어난 자식은 비록 어머니의 피줄은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부양자식관계일 뿐이다. 이럴 경우 어머니는 남편을 상대로 정조를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발 물러나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발생했다면 불륜이라고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모두 용납되지 않고 있지만 인공수정은 일종의 특수한 "불륜"이기에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사랑을 자체의 본연을 상실하게 하고 협애한 소유로 타락시켜버리고 있는 이른바 정조관념 때문에 우리는 결혼을 "사랑의 무덤"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저주하고 있다. 인간사랑이란 경지에서 놓고 볼 때, 사랑은 본질적으로 베푸는 것이라고 할 때, 결혼은 사랑의 종착이 아니며 무덤은 더욱 아니다. 인간사랑은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설사 남녀간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의 경지가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최고경지는 구경 무엇일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별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별할 줄 아는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사랑심의 소유자만이 진정 사랑을 논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희생이 엄청하고 비극적인 사랑인 것 같지만 사랑의 본연적인 차원에서 보면 제일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감이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기(知己)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이성지기(红颜知己)를 만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인생의 동반자와 사랑의 동반자가 합일체될 수 있는 이러한 이성의 지기(红颜知己)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운스럽고 복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본연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을 이성간에 키워갈려면 인생도 함께 하고 사랑도 함께 할 수 있는 红颜知己를 만날을 때 이루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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