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네임카드'에 해당하는 우리말의 '명함'이 한자어임은 누구나 다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족이나 한국인에게 명함의 '함'자를 어떻게 쓰느냐고 물으면 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郵便函'이라는 '函'자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명함에 보통 通信 주소가 적혀있으니 정답일 듯하다. 사실은 '職銜(직함)' '銜'자를 쓰는데 말이다.
'名銜' '姓銜'의 뜻을 정확히 풀이하면 '이름과 직함' '성과 직함'이라야 맞다. 명함을 일컫는 漢語의 '밍폔(名片)', 일본어의 '메이시(名刺)', 그리고 영어의 '네임카드'에는 '직함'의 개념이 전혀 없는데 어째서 우리말에만 유독 이렇게 됐을까?
이에 대해 우리민족이 아마 다른 민족보다 '직함'이나 '관직'을 각별히 중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겠거니 하고 넘겨짚기 쉽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 가령 漢族에 비해 벼슬에 대한 탐심이 적은 편이다. 우리말에서 네임카드를 '명함'이라고 하는 데는 그 원인이 다른데, 즉 유서 깊은 문화에 있다는 점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漢語의 '名片'이란 단어는 불과 淸末에 생겼다. 그러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名刺' '名紙' '名帖'이라 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조상은 '爵里刺(작리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 <三國志> 제9권 <夏侯淵傳(하후연전)>의 裵松之(배송지) 注釋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하후연의 다섯째 아들 榮은 어릴 때 뛰어나게 총명하고 기억력도 대단했다. 7살 때 벌써 문장을 지을 줄 알고 하루에 책 천자씩 읽었으며 한눈에 문장의 뜻을 다 터득할 수 있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魏文帝가 그를 한번 접견한 적이 있다.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名刺(명자)에 적혀있는 本貫, 성명 등을 문제에게 上奏한 뒤 하후영에게 한번씩 보였는데 1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名刺를 그는 한 사람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
배송지의 주해는 이 기록을 해석하면서 '名刺'는 바로 세간에서 말하는 '爵里刺(작리자)'라고 했다. '爵里刺'라는 말은 이미 한나라 때에 씌어진 <釋名>이라는 책에 나타나며 본인의 작위, 관직, 그리고 鄕里 즉 本貫이나 거주지를 적은 것을 말한다. 즉 중국에는 2,000여 년 전의 한나라 때에 벌써 명함이 있었으며 명함의 내용은 작위, 관직 또는 오늘날 말하는 직함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단 그때의 명함은 지금의 핸드폰 넓이에 세개 정도 길이의 엷은 널 쪼각으로 된 것이였다.
우리말의 '명함'은 고대 漢語 '爵里刺'라는 말의 뜻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으며 후세에 변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다만 '爵'자를 그와 뜻이 비슷한 '銜'자로 고쳤을 뿐이다. 사실 지금도 직함이 없는 명함은 거의 없다. 일반 농민이나 근로자가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따져 보면 일어의 '名刺'는 '名里爵'의 아들 벌에 해당되고 현대 漢語의 '名片'은 '名里爵'의 손자 벌에 해당되는 셈이다. 우리말의 '名銜'은 '名里爵'의 동생쯤은 되니까, '名刺'의 작은아버지, '名片'의 작은할아버지이고.
한국인들에게서 가끔 '국장 대우' '부장 대우'라고 씌어진 명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한국 기업의 직위가 세분화돼 있는 일면과 함께 한국인들의 명함에서 직함 '銜'자가 유명무실한 들러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이 있다는 얘기다.
필자는 한국인에게서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라는 물음을 받았을 때 "소인은 河東 鄭氏에 處長의 자리를 겨우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한번도 행동에 옮겨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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