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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복재정맥 등의 판막이 망가져 위로 올라갈 피가 거꾸로 내려와
엉덩이부터 발까지 심한 통증 유발… 혈관 돌출 없는 경우가 70% 달해
무릎·오금·종아리의 심한 통증, 다리 팽만감 등 지속 땐 의심 필요
58세 남성 A씨는 2001년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른쪽 엉덩이부터 허벅지와 종아리를 거쳐 발까지 뻗쳐내려오는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발을 땅에 딛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병원에 수술 부작용을 문의했으나 허리 수술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개인의원 할 것 없이 신경외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등 10개 병원과 5개 진료과를 돌아다녀봤지만 통증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한의원에도 갔지만 차도가 없었다.
한 의사가 “다리 혈관(정맥)에 문제가 생기는 ‘하지정맥류’일지 모르니 검사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권유해 모 대학병원의 전문 진료 교수를 찾아갔다. 하지만 해당 교수는 A씨의 다리를 보더니 “혈관이 튀어나오지 않았으니 하지정맥류가 아니다. 검사할 필요도 없다”며 되돌려 보냈다. 그렇게 A씨는 17년간 고통 속에 살아왔다.
그러던 중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하지정맥류로 자신과 똑같은 증상이 생길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반신반의하며 하지정맥류 전문 클리닉 문을 두드렸고 혈관초음파 검사에서 오른쪽 다리 ‘대복재정맥(바깥쪽 큰 정맥)’의 판막이 망가져 위로 올라갈 피가 거꾸로 내려오는 ‘역류 현상’이 발견됐다. 피 역류는 발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의사는 하지정맥류가 모든 통증의 원인일 수 있으니 문제가 생긴 혈관을 간단히 레이저로 지져 폐쇄하는 시술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시술 사흘째부터 통증이 확연히 줄고 닷새째 거의 사라졌다.
이후 발목 부위 대복재정맥의 가지혈관에도 역류가 발견돼 이번엔 문제의 혈관을 굳혀 막아버리는 주사를 맞은 후 엄지발가락 등 발 앞쪽에 남아 있던 통증도 거의 없어졌다. 17년 만에 그를 괴롭혀 온 대부분의 통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A씨는 “수많은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했는데 생각지 못했던 원인을 찾아내 병을 한순간에 고쳤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A씨를 진료한 흉부심장혈관외과 전문의 노환규(전 대한의사협회장) 하트웰의원 대표원장은 22일 “고통에서 해방된 환자의 오랜 고충을 듣는 순간 의사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면서 “하지정맥류는 결코 홀대해선 안 되는 병인데도 그 중요성이 저평가돼 있으며 많은 의사들의 이해 부족으로 근본 원인을 놓치고 오진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노 전문의는 하지정맥류의 의사 오진과 환자 오해가 많은 이유로 병명을 꼽았다. 하지정맥류(varicosevein)는 그리스어로 ‘포도송이 모양의 정맥’이라는 뜻이다. 다리에 혈관이 튀어나온 것이 마치 포도송이 같다 해서 붙여졌다. 한자 표기(下肢靜脈瘤)에서 ‘류(瘤)’는 ‘다리의 혹’이란 뜻이다.
그래서 하지정맥류는 ‘혈관이 튀어나와야 붙일 수 있는 병’으로 생각돼 왔다. 노 전문의는 “하지만 실제 하지정맥류 환자 가운데 혈관이 돌출된 경우는 약 30%에 불과하고 70%는 매끈한 다리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혈관 돌출이 없는 70% 환자들은 대부분 진단이 늦어 수년씩 고통을 겪는다”고 덧붙였다.
다리의 정맥(심부정맥, 대복재·소복재정맥 등)에는 위로 올라가는 정맥 피가 거꾸로 내려오는 걸 막아주는 ‘문짝’ 역할의 판막이 있는데, 노화나 직업 환경에 의해 헐거워지고 고장나면서 피가 역류해 이른바 ‘하수도의 역류’와 비슷한 현상으로 말초(사지)혈액순환 장애를 일으킨다.
혈관이 압력을 계속 받으면 튀어나오고 구불구불해져 흉한 모양을 띠기도 한다. 노 전문의는 “혈관 돌출은 정맥이 오랫동안 압력을 받아 혈관 벽이 늘어남으로 생기는 증상 중 하나일 뿐 진짜 병은 거꾸로 피가 내려오는 역류 현상 그 자체”라면서 “하지정맥류는 ‘하지정맥부전’으로 이름이 바뀌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다리가 무겁거나 터질 것 같은 팽만감, 발·다리가 붓는 등의 증상을 흔히 겪는다.
문제는 발·다리의 저림과 통증, 다리의 떨림 및 가려움증, 발·발바닥의 열감(한겨울에도 발을 내놓아야 잠을 잘 수 있음)이나 시림(발바닥이 늘 얼음장), 엉덩이·무릎·오금·종아리의 심한 통증 등 신경근골격계 질환과 매우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밖에 사타구니 통증(여성은 생리때 더 심함)이나 주기적으로 다리를 떠는 증상, 다리 쥐남(특히 기지개 켤 때), 무릎 아래 발목 위쪽에 짙은 갈색의 색소침착 등도 하지정맥류일 수 있다.
고정관념 증상인 ‘튀어나온 혈관’에 집착하면 하지정맥류와 연결짓기가 힘들다. 혈관이 돌출되기 전(前) 단계, 즉 다리 속에서 정맥의 역류가 발생해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데 바깥 피부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의사는 물론 환자들도 허리 디스크나 척추관협착증, 족저근막염(발바닥 염증질환), 말초신경염 등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다수가 신경외과나 정형외과를 맨 처음 찾고 그다음 재활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 신경과 등을 거쳐 마지막에 한의원까지 갔다가 결국 낫지 않아 하지정맥류 클리닉을 찾는 경우가 많다. 실제 엉뚱한 치료를 받는 이들도 적지 않다.
43세 여성 B씨는 6개월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 땅에 발을 디딜 때 심한 발바닥 통증을 느꼈다. 아침에만 통증이 있더니 한두 달 지나면서 하루 종일 지속됐고 발뒤꿈치쪽으로 옮아갔다.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더니 ‘족저근막염’으로 진단돼 체외충격파 치료를 받았으나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81세 여성 C씨는 4년 전 시작된 다리의 쥐가 갈수록 심해졌다. 한 번 쥐가 나면 다리 전체가 굳고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대학병원에선 마그네슘 결핍을 원인으로 보고 4년간 관련 처방을 받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B, C씨는 모두 뒤늦게 하지정맥류 클리닉에서 근본 원인을 확인하고서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정맥류의 경우 대학병원이 오히려 개원가 전문 클리닉보다 진단 수준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학병원에선 지나치게 분업화가 이뤄져 혈관초음파 검사를 의사가 직접 하지 않고 초음파 기사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외과의사들은 초음파를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노 전문의는 “하지정맥류는 의사가 직접 혈관초음파를 보면서 해야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가능하다”면서 “대학병원 진료실에는 혈관초음파가 없어 혈관경화요법(하지정맥류 있는 혈관에 주사를 놔 굳혀서 폐쇄)을 시술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최근에서야 다리 정맥의 역류 현상이 다양한 형태의 통증을 유발하고 척추 및 무릎질환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신경외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의사들 사이에 빠르게 알려지고 있다. 노 전문의는 최근 정맥통증연구회를 출범했다. 개원 의사뿐 아니라 일부 대학병원 의료진 등 23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노 전문의는 “그간 혈관을 치료하는 의사는 통증에 무관심(무지)했고 통증을 치료하는 의사는 혈관의 중요성을 간과해 온 게 사실이다. 정맥통증연구회는 전문 분야의 경계를 허물고 정맥과 통증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한 학술 모임”이라면서 “앞으로 연구를 통해 충분한 근거가 확립되면 하지정맥류의 잘못된 믿음과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한 대국민 캠페인을 전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정맥류는 혈관초음파 검사로 충분히 진단 가능하다. 다만 간호사 등 보조인이 환자 다리를 누른 상태에서 의사가 직접 보면서 검사해야 정확히 알 수 있다. 문재인케어에 따라 내년까지 혈관초음파 검사에도 건강보험이 적용될 예정이다.
하지정맥류를 예방하려면 오래 서 있는 걸 피하고 부득이 서 있어야 한다면 중간중간에 걸어줌으로써 다리 피가 위로 원활히 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걷기 힘든 상황이라면 발뒤꿈치와 앞꿈치를 번갈아 들어줘 다리 근육을 움직여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스쿼트, 데드리프트(바벨을 놓지 않고 계속 들고 있음)는 다리 정맥의 압력과 복압을 동시에 올려서 하지정맥류에 가장 나쁜 운동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하지정맥류 진료 환자는 2017년 24만여명으로 2013년(18만6000여명)보다 5년 새 30% 넘게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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