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남
20세기 70년대초, 내가 다니던 장항소학교 운동장 동남쪽에 건조실 하나가 있었다. 그 건조실 뒤는 상급학년의 부분적 남학생들이 늘 도적담배를 피우던 장소였다.
중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남학생들은 종종걸음으로 건조실 뒤에 가서 권연을 꼬나물고 갖가지‘연기’를 피워대군 했다. 그 가운데서 코로 담배연기를 내보내기와 입을 오물거리며 따발 모양의 담배연기를 공중에 대고 연신 뿜어내는 동작은 나의 호기심을 끌었다. 나도 그들처럼 하고 싶었다. 스스로 뿜어내는 시늉을 해보았더니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마른 시래기 부스러기를 신문종이에 말아 한대 피우면서‘실천’해보았다. 생각 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28전짜리 영춘표 권연에 눈독을 들였다. 그 걸 사서 피우기 위해 나는 닭똥망채 껍질과 치분깍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때는 닭똥망채 껍질 하나에 5전, 치분깍지 하나에 3전씩 했다.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닭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더니 집의 닭 네마리가 닭굴에서 피를 흘린채 쓰러져있었다. 족제비가 습격했던 것이다. 그날 집식구들은 족제비의‘덕분’으로 오랜만에 생활개선을 하게 되였다. 특히 닭똥망채 껍질 네개가 단번에 생긴 것은 나로 놓고 보면 뜻밖의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권연 한곽을 살만한 돈이 마련되였으니 나는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며칠 후 나는 마을의 종걸(가명)이와 춘석(가명)이를 데리고 공소합작사에 가서 마른 닭똥망채 껍질을 팔고 원래 수중에 있던 돈을 보태 영춘표 권연 한갑을 샀다.
방치같은 조이삭들이 휘늘어진 뒤산 운전골 조밭이다. 우리 셋은 영춘표 담배를 호주머니에 넣고 조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위가 꽉 막히고 푸른 하늘만 뚫려있는 조밭은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최적의 피신 장소였다. 우리는 시름놓고 밭고랑에 앉아서 줄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저마다 담배 연기를 입이 미여질 지경으로 빨아들인 후 입을 오무리며 공중에 대고 살랑살랑 내뿜어보았다. 과연 따발 모양의 담배연기가 하늘하늘 춤추며 조밭 속을 벗어나 하늘로 피여올랐다. 재미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이눔들아! 무슨 짓들이냐?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눔들!”
퉁포를 멘 마을의 포수 범룡아저씨가 불시에 눈앞에 나타나더니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불호령하는 것이였다. 조밭에서 몰몰 피여오르는 연기를 보고 불이 난줄로 알고 곧추 들어왔던 것이다. 혼비백산한 우리는 피우다 만 담배를 그 자리에 내동댕이치고 뿔뿔히 36계 줄행랑을 놓았다.
범룡아저씨는 우리 셋을 부모들에게 일러바쳤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간 나는 엄마한테 혼쭐 났다.
“못된 송아지 뿔부터 난다고, 감히 담배를 피워?”
엄마는 다짜고짜로 몽당비를 거꾸로 거머쥐고 손잡이로 나의 종아리를 연신 갈겼다. 서슬 푸른 엄마의 눈을 보면서 나는 온몸을 오슬오슬 떨었다. 종걸이와 춘석이도 몽둥이를 든 아버지들한테 쫓겨 온 마을을 일주했다. 춘석이는 울바자를 뛰여넘다가 발목이 걸려 엎어지면서 코방아까지 찧었다.
나는 종걸이와 춘석이네 집에 가서 그들의 부모들 앞에서 두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사과했다.‘주모자’는 나기에 다 나의 잘못이라고.
담배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나에 대한 엄마의 관리는 더욱 엄해졌다. 나의 일거일동은 엄마의 감시 속에 있었다.
한겨울에 엄마는 책벌로 나한테 생산대의 두엄 끄기와 두엄 싣기 로동을 시켰다. 꽁꽁 언 두엄무지를 육중한 곡괭이로 끈다는 것은 정말 힘에 부치는 강로동이였다. 나의 온몸은 땀벌창이 되였다. 하지만 나는 해야만 했다. 속죄의 마음으로 말이다. 나는 한아름씩이나 되는 두엄을 가슴에 안고 비틀비틀 팔자걸음을 하며 소수레에 실었다. 연후에 엄마는 몸을 솟구쳐 오른쪽 수레채에 비스듬히 걸터앉았고 나는 왼쪽 채에 올라앉았다. 소수레 운전은 엄마가 맡았다. 소수레는 “덜크덕 덜크덕”소리를 내며 울퉁불퉁한 흑길을 구을러 논밭으로 행했다.
“이랴—”
불현듯 엄마는 손에 쥔 싸리꼬챙이로 소엉뎅이를 호되게 후려치면서 웨쳤다.
“듣거라, 공부 안하면 이렇게 소궁디만 두드리게 된다는 걸!”
분명 나를 향해 던진 엄마의 자극적인 충고였다. 1962년초에 태여나자 마자 나라의 정책에 좇아 엄마를 따라 농업사에 가입한 나였기에 엄마는 나더러 숙명에서 제발 벗어나기를 바랐고 공부를 잘해 출세하기만을 바랐다. 공화국 창립전 집살림이 여의치 못해 소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자신의 설음을 평소에도 늘 토로하던 엄마였기에 나에 대한 엄마의 공부 요구는 각별히 높았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우리 집은 평강벌로 이사까지 했다.
이사를 간지 3년 후인 1977년 가을이였다. 벼파도가 넘실거리는 평강벌에 특대희소식이 전해졌다. 1977년 9월 25일에 전국고등학교학생모집사업회의에서는 1977년도부터 전국적으로 ‘통일시험을 쳐 우수한자를 모집하는’방법을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책은 수천수만의 중국청년들에게 자기의 전도와 운명을 개변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 해 년말에 또 하나의 희소식이 날아왔다. 1977년 전국고등학교입학통일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따낸 북고성대대(지금의 성북촌)의 청년 황인호가 남개대학 입학통지서를 받게 된 것이다. 1972년에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짓고 있던 황인호는 오매에도 그리고 그리던 대학꿈을 드디여 실현하게 되였다. 황인호가 남개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은 삽시에 60리 평강벌에 쫙 퍼졌다.
련며칠 나는 마치 자기의 소원이라도 이루어진듯 흥분 속에 잠겼다.
마당에서 닭 모이를 주고 있던 엄마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얘야, 앞길이 보이는구나, 힘내거라!”
엄마는 입을 옥물고 으스러지게 거머쥔 오른손 주먹을 내들어보이며 나를 응원했다.
후날 나도 전국고등학교입학통일시험에 합격되여 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얘야, 만약 그 때 네가 도적담배 그냥 피웠더라면 어떠했을가?”
대학교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면서 엄마는 슬쩍 담배사건을 입에 올렸다.
“글쎄요…흐흐”
나는 오른쪽 손으로 뒤머리를 긁적거리며 엄마 보고 피식 웃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때 만약 엄마가 그 담배사건을 즉시 바로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놀음만 탐내고 공부에 열중하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에 열중하지 않았더라면 대학 입학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 때의 엄마는 암흑을 헤가르며 나가는 나의 앞길에 광명을 비춰주는 등대와도 같은 존재였다.
기로에 들어설번 했던 나한테 안긴 엄마의 매는 기실 사랑의 매였다. 그래서나는 그 매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확실히 내가 잘못했기에. 나는 그 매를 그 후 나의 인생 행로에서의 채찍질로 간주하였다.
담배사건으로 나를 혼내주던 그날 저녁 나는 잠결에 나의 이불을 살며시 들고 뜨끈뜨끈한 물수건으로 나의 종아리를 찜질해주던 엄마의 뜨거운 사랑을 감지했었다. 그 때 나는‘귀한 자식 매로 키워라’는 우리말 속담의 참뜻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였다.
그 담배사건이 있은 후부터 나는 담배와의 인연을 아예 끊어버렸다. 60세가 지난 지금에도 담배엔 아무런 미련도 없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