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호
스무 살 꽃나이에 시집을 와서
한 가정 지켜온 미더운 당신
부모 공양 가정 살림 갖은 고생에
그 곱던 얼굴에 잔주름 생겼소
추울세라 더울세라 자식 걱정에
근심 많고 고생 많던 고달픈 당신
자식들 다 키우고 시름 놓으니
어느덧 머리에 흰서리 내렸소
여보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한평생 당신만을 당신만을 사랑하겠소
내가 작사하고 김덕윤 선생이 작곡한 <여보, 당신 미안해>는 많은 로인들이 즐겨 부른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7년 전 떠난 안해가 사무치게 그립다. 이 노래는 안해를 그리며 지은 노래이다.
결혼할 때 누구나 백년해로를 약속한다. 결혼 50주년은 금혼식, 60주년은 회혼례라 한다. 그러나 안해는 회갑 1년을 앞두고 뇌졸중으로 총망히 세상을 떠났다. 대학을 졸업한 자식들이 효도를 하려는데도 그렇게 일찍 떠날 줄이야...
나는 왕청현의 상모촌에서 자랐다. 초중 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로농들을 스승으로 일을 배워 생산대와 공사의 로력모범이 되였고 대대 민병련장 직무까지 맡았다. 그리고 한마을의 착하고 부지런한 처녀와 련애해 결혼했다.
신혼 첫해, 령하 3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안해와 함께 산에 목재를 하러 다녔다. 이듬해 50평방되는 초가집을 지었다. 신혼은 꿈처럼 달콤했고 아들까지 보았다.
그런데 둘째 아이를 낳은 후 2개월 만에 안해가 불치병에 걸렸다. 여러 의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안해는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만 보았다. 젖먹이 딸아이가 문제였다. 년로한 장모님은 체면을 무릅쓰고 이 동네, 저 동네로 젖동냥을 다녔다. 한밤중에 아이가 울면 미음을 쑤어 먹이며 달랬다. 몇 달 잠을 설치니 장모님 얼굴은 핼쑥해지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나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아이를 남의 집에 주자고 상의했으나 장모님은 동의 하지 않았고 결국은 딸애를 업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키웠다.
장인은 나를 부르더니 딸과 리혼하라고 충고했다. 나는 절대 못 한다며 하늘이 무너져도 안해의 병을 고치겠다고 고집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해를 데리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한 친구가 룡정에 있는 의사한테 치료를 받고 회복된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신혼집을 처리하고 이사짐을 싣고 룡정으로 향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룡정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련속이였다. 안해 병 치료를 위해 네 식구가 겨우 들어갈 18평방 단칸방을 세로 얻었다. 아들과 딸은 룡정중심소학교에 붙일 수 있어 다행이였다. 이튿날 중의병원 교수선생님을 찾아갔다. 의사는 둘째를 낳기 전부터 심한 영양실조에 아이까지 낳아 병이 생겼다며 식이료법과 중약, 민간침구료법을 겸하면 완쾌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안해의 손을 꼭 잡고 중의병원으로 다녔다. '정성이 지극하면 고목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안해의 병은 점점 호전되었다. 세집에도 웃음이 넘쳤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엄마가 좋아.”란 노래를 부르군 했다.
“엄마 없는 아이는 풀과 같대요. 엄마 품에 안기면 행복이 끝없어요.”
딸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자식들은 우리 부부의 희망이자 원동력이였다. 가난해도 불평 없이 부모 마음을 리해해주었다.
안해는 수척해진 나를 보며 늘 미안해했다. 자기 때문에 룡정에 와서 고생시킨다며 흐느끼기도 했다. 나는 “당신의 병이 호전되였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소. 이제부터 부지런히 일해 아이들을 잘 공부시킵시다!”라고 말했다.
안해의 병이 호전되니 어떤 곤란도 이겨낼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는 서로 돕고 리해하며 큰소리 없이 정을 나누며 살았다. 치료에 돈을 다 써서 쌀과 채소를 살 돈도 없었다. 량식이 떨어지자 주인집 아주머니가 연변농업과학연구소의 하루 일당 5원짜리 일을 소개해 주었다. 안해는 약을 먹으면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어느 날 안해가 벼탈곡장을 지나며 저 벼단을 털면 쌀알이 있을 것 같다며 낟알을 줏자고 제의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창피함도 무릅쓰고 벼단을 털고 낟알을 주웠다. 엄동설한에도 우리 부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너무 추우면 서로 마주보면서 뛰기도 하고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 가면서 한 알, 두 알 주었다. 10여 일이 지나자 안해의 손끝과 발가락이 얼어들었다. 가지대를 끓인 물에 발을 담그니 멀건 물이 나왔다. 내 가슴은 칼로 에이는 듯 아팠다. 이튿날 내가 혼자 가겠다고 큰소리쳤으나 안해는 발가락이 아프지 않다며 따라 나섰다. 30여 일 악전고투 끝에 천여 근의 벼알을 주웠다. 동네 사람들은 가난하면서도 싸움 한번 하지 않는 사이 좋은 부부라며 우리부부를 탄복해 마지 않았다.
후에 아들과 딸이 대학을 가니 어깨는 더 무거웠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뛰였다. 8년 동안 온돌 수리를 했다. 먼지가 날리는 일을 남성들도 싫어했지만 안해는 싫은 소리 없이 함께 다녔다. 구들돌을 들면 집안이 구들재로 가득해 눈앞도 보이지 않았다. . 안해는 무거운 돌과 찰흙을 날라 오른팔 인대가 늘어나기까지 했다. 진통제를 먹으며 참고 일했다. 뜨거운 여름에도 5전짜리 얼음과자 하나 사 먹지 않고 돈을 아껴 자식들 공부에 보탰다. 우리는 억척스럽게 일하고 아껴 쓰며 두 자식을 대학생으로 키웠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과 딸은 좋은 직장에 다니며 효도를 시작했다. 안해가 무릎 관절염으로 층집 계단을 오르지 못하니 엘리베이터 층집을 장만해 주었다. 고혈압도 생겨 미국에 있는 아들이 엄마를 초청해 6개월씩 치료받게 했다. 안해는 “여보, 나는 이젠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라며 웃었다. 나는 “이 좋은 세월에 팔십까지 살아야지.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면서...”라고 했다.
자식들은 1년 전부터 회갑을 준비했다. 금목걸이, 금반지, 한복까지 준비했다. 우리가 진갑을 쇠자고 했지만 자식들은 “엄마가 그렇게 고생하며 우릴 키웠는데 이젠 우리가 효도할 차례입니다.”라며 막무가내였다. “나무는 고요하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한 해 겨울만 지나면 회갑상을 받게 되는데 안해는 뇌졸중으로 총망히 저 세상으로 떠났다. 고생 끝에 락을 볼가 싶었는데 안해는 그 락을 볼사이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집에 들어서면 반갑게 웃어주던 안해, 내가 오기 전 숟가락도 들지 않고 기다리던 안해, 밥상에서도 잠자리에서도 속심을 나누던 안해, 산책할 때 손을 꼭 잡고 손자 손녀 얘기를 하던 안해, 건강하지 못해도 밤낮없이 내 곁에 있던 안해. 나는 피나는 고생만 하고 돌아간 안해가 안스럽고 불쌍했다. 고된 일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애들을 키운 안해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지금도 사무치게 그립다. 그래서 <여보, 당신 미안해>라는 이 노래를 지어 안해의 령전에 바친다.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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