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라비야 방송이 공개한 지난 5월 자말 카슈끄지의 사진. 이 언론은 "그가 착용한 3세대 애플 워치는 데이터 통신 지원 기능이 없다"고 주장했다. 알아라비야는 2005년 사우디아라비이와 쿠웨이트, 레바논이 5억 달러를 출자해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설립한 범아랍권 채널이다. [알아라비야 캡처]
사우디아라비아의 비판적인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60·영어권에선 ‘카쇼기’라는 발음으로 알려짐)가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간 뒤 행방이 묘연해진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터키 일부 언론은 카쇼기가 차고 있던 애플 워치에서 그가 고문받고 피살된 증거가 약혼녀의 워치로 동기 전송됐다는 주장을 전하며 ‘살해설’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사우디 당국은 이를 두고 기술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일축한다. 아직 정황은 있어도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사건이 권력기관의 공작이나 청부인지 밝혀질 것인가, 아니면 영구 미제로 남을 것인지에 관심이 쏠린다. 오리무중에 빠진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거 사우디 권력에 비판적인 인물이 행방불명되거나 숙청된 일련의 사건도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 해외 사우디인의 행방불명 사건을 살펴보면 경악할 만한 일이 줄을 잇는다.
모사드 뺨치는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 청부 납치? 시신 증발?
터키에서 사우디 비판 언론인 카슈끄지 행방불명되자 시선집중
왕자도 3명이 해외에서 행방묘연…전제정치·궁중암투 맨얼굴?
권력·정치·종교·사회 중세 방불케 하는 폐쇄 체제가 원인 지목
막강한 권력 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개입 여부 주목
ㅈ난해 영국 BBC방송이 방연한 다큐멘터리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라진 왕자들' 예고 화면.[BBC방송 홈페이지 캡처]
사실 사우디 왕실의 반대파를 대상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진 특수공작 의심 사건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BBC방송은 이미 지난해 8월 14일 유럽에 거주하던 비판적 성향의 사우디 왕자 3명이 이전 3년 새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그 내용을 뉴스로도 내보냈다. 여기서 왕자란 현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초대 사우디 국왕인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빈 파이살 빈 투르키 알사우드(1875~1953년, 사우디 국왕 재위 1932~53년, 서구에선 이븐 사우드로 부름)의 직계 남자 후손을 가리킨다. 압둘아지즈 이후 현재까지 사우디의 국왕은 그의 아들들이 줄을 이어 맡아왔다. 올해로 65년간 계속된 형제 사이의 상속이다. 현재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33)가 첫 3세 승계를 기다리고 있다. 왕이나 왕세제, 또는 왕세자가 되지 못한 압둘아지즈의 남자 후손들은 여전히 사우디의 특권층이지만 대부분 정치권력에의 접근이 제한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이 차기 왕위 계승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33). 명실공히 사우디 아라비아의 최고 실력자다. [중앙포토]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이던 술탄사우드 빈 투르키 왕자가 그중 하나다. 술탄사우드는 2003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납치됐고 지금은 행방조차 묘연하다.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던 2003년 6월 사우디 대사관에 찾아갔다가 갑자기 마취 당한 뒤 자가용 비행기에 실려 강제로 귀국을 당했다. 2002년 유럽으로 옮긴 뒤 본국의 인권·부패에 비판적 내용의 인터뷰를 하며 개혁을 촉구한 게 화근이었다.
그 뒤 사우디에서 감옥살이와 가택연금을 반복하다 2010년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제네바 납치와 관련해 사촌인 압둘아지즈 빈 파드 왕자를 고발했다.
그러다 2016년 1월 한 유럽 국가에서 이집트 카이로로 가는 여객기를 탔다가 비행기가 갑자기 다른 공항에 착륙하면서 영영 행방이 묘연해졌다. 항공기 납치인지 항공사나 조종사를 매수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같은 비행기에 탔던 승객들은 상당한 현금 보상을 받고 입을 다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비행기 항로 변경 사건은 별다른 조사도 없이 흐지부지됐다. 이를 누군가의 특수 공작으로 짐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투르키 빈 반다르 왕자도 사우디의 특수 공작 대상으로 의심받는다. 투르키 왕자는 2012년 프랑스로 이주한 뒤 유튜브에 본국 정부를 비난하는 영상을 올려 주목을 받았다. 그는 2015년 말 모로코로 갔다가 체포돼 사우디로 강제 송환됐다. 모로코는 서구 관광객이 많고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이긴 하지만 이슬람 군주국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우디의 입김이 통할 수밖에 없다.
사우드 빈 알나스르 왕자도 갑자기 사라졌다. 사우드 왕자는 유럽에 거주하며 2014년부터 트윗에 사우디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을 올려왔다.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향하는 파트너 업체의 전용기에 탑승했는데 비행기는 로마가 아닌 사우디 수도 리야드 공항에 착륙했다. BBC는 그 뒤 이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도했다.
사우디에 비판적인 왕자 중 현재 유럽에 남은 사람은 2013년 독일에 망명한 칼리드 빈 파르한뿐이라고 BBC는 전했다. 만일 사라진 왕자들의 특수 공작으로 화를 당했다면 이를 수행한 조직은 이스라엘의 모사드 뺨치는 솜씨를 보인 셈이다. 청부를 받은 어떤 조직이 했다면 대단한 프로페셔널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사우디 왕실에 이런 일이 생기는 직접적인 원인은 왕위 계승 경쟁과 권력 다툼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1953년 세상을 떠난 뒤 사우디 왕실은 형제상속을 시행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한다며 중세에나 있을 법한 제도를 택했다. 압둘아지즈는 22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45명(성인까지 생존은 36명)의 아들을 뒀다. 왕위 상속자는 형식적으로 가족회의에서 선거로 결정하도록 했다. 승계는 대부분 나이순으로 이뤄졌다. 다만 ‘국왕 직을 수행할 수 없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은 제외한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이 원칙이 화근이었다. 고무줄 잣대가 적용됐다. 2대 사우드(1953~64년 재위) 국왕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즉위 10년이 된 1963년 열린 가족회의에서 형제들이 단합해 사우드 국왕을 이듬해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3대 궁왕인 사우드. 형제들에 의해 자리에서 밀려났다. [중앙포토]
사우드의 뒤를 이어 파이살(1954~75년 재위)이 3대 국왕이 올랐으며 그를 도왔던 무함마드 왕자는 왕세제가 됐다. 무함마드는 이듬해 자리에서 물러나 킹메이커로 자리 잡았지만 1977년 왕가 내에서 위신을 잃었다. 19세의 손녀 미샬이 가족이 정해준 혼처 대신 원하는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가 간통죄로 처형을 당하면서다. 전통적인 공개 돌팔매질 대신 총살로 사형이 집행됐다. 집행 방식을 고통과 끔찍함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바꾼 것은 왕족에 대한 특혜이자 부친 무함마드를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이 사건은 여성인권 문제로 비화해 서구의 비난을 불렀다. 그 뒤 할리드(1975~82년 재위), 파드(1982~2005년 재위), 압둘라(2005~2015년 재위)가 차례로 사우디 국왕에 올랐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킹메이커였던 무함마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전 왕세제.(왼쪽) [중앙포토]
탈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자. 사우디에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자유왕자 운동을 이끌었지만 귀국 뒤 조용히 살아왔다. 그의 아들 알왈리드는 사업 성공으로 세계적인 부자가 됐다. [중앙포토]
이 과정에서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불만이 쌓였다. 기업인으로 유명한 알왈리드 빈 탈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64) 왕자의 부친인 탈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7) 왕자는 일찍이 왕위계승에서 탈락하자 1958~64년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자유왕자 운동’을 벌였다. 소외와 박탈감이 만든 저항이었다. 해외에 망명했다가 설득을 당했는지, 위협을 당했는지, 개과천선했는지 귀국해서 조용히 근신하고 있다.
사우디의 세계적인 기업인인 알왈리드 빈 탈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자.지난해 11월 '왕자들의 난 ' 당시 5성급 리치 칼튼 호텔에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게 거액의 돈을 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중앙포토]
사우디아라비아 3대 국왕인 파이살, 외가쪽 문제로 사우드 가문에 원한을 품은 조카에게 피살됐다. [중앙포토]
형을 몰아내고 3대 국왕에 올랐던 파이살 국왕은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1944~75년)에게 암살당했다. 범인은 파이살이 형제들과 힘을 합쳐 왕좌에서 몰아낸 사우드와는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왕실 내부의 오랜 원한과는 상관이 있다. 당국은 암살범 파이살이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사우디 왕국을 이룬 알사우드 가문의 경쟁자였던 알라시드 가문의 오랜 원한이 암살을 촉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알라시드 가문은 1836~1921년 아라비아 반도의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지배하며 알사우드 가문의 네지드 토후국과 경쟁했지만 끝내 정복당했다. 그 뒤 ‘멸문지화’ 수준의 화를 당해 구성원 대부분이 근거지에서 쫓겨나 이라크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가문의 딸인 와프타 빈트 무하마드 빈 탈랄은 사우디 왕실에 시집을 갔지만, 가문의 원한을 아들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에게 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암살범은 공개 참수됐다. 사우디는 중세 때처럼 사형수를 공개 참수형으로 처형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현 국왕인 살만. 무함마드 빈 살만 빈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왕세자의 부왕이다. '빈 살만'은 살만의 아들이란 듯이다. [중앙포토]
지난해 11월 4일 사우디에서 벌어진 '왕자들의 난'은 이 전제군주국의 정치가 '중세 궁정'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33)가 주도하는 반부패위원회가 왕자 11명, 현직 장관 4명, 전직 장관 수십 명을 기습해 체포했다. 이들은 수도 리야드의 5성급 리츠칼튼 호텔에 구금돼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풀려났다. ‘용의자’ 중에는 세계적 투자회사 킹덤홀딩스의 회장으로 포브스 추산 16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알왈리드 왕자도 들어있다. 반부패를 빌미로 반대파를 숙청해 저항의 싹을 자르고 손발을 묶어놓자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평가다. 여기에 이들로부터 통치자금을 받아내려는 의도도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전 왕세제. 형인 살만에 의해 왕세제에서 밀려났다. [중앙포토]
사우디판 ‘왕자들의 난’ 직후인 지난해 11월 5일 만수르 빈 무크린알사우드(당시 43세) 왕자가 의문의 헬기 추락으로 숨지면서 사우드 왕가의 해묵은 왕위 경쟁의 도마에 올랐다. 만수르 왕자는 2015년 3개월간의 짧은 왕세제 생활을 끝으로 경질된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73, 압둘아지즈의 마지막 아들)의 아들로 아시르주 부지사라는 공직을 맡고 있었다. 무크린은 형제 계승의 마지막 순위였던 자신을 밀어낸 이복형 살만 국왕에게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무크린의 아들의 갑작스러운 헬기 추락 사망은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 사우디 왕실 내부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수르 빈 무크린 반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자. 아시르주 부지사를 지내다 지난해 11월 의문의 핼기 추락 사고로 숨졌다. [중앙포토[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보유한 막강한 권력도 외부의 눈에는 문제로 지적된다. 그는 국방장관·국무장관·반부패위원장을 겸하며 부왕 살만 국왕과 함께 사우디의 정치·국방·외교·보안·사회 모두를 좌우하고 있다. 명실상부한 사우디의 실세다. 그는 사우디의 무력과 정보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부왕이 왕좌에 오른 2015년 1월 국방장관을 물려받은 데 이어 지난 6월에는 상당수 병력을 보유한 내무부도 접수했다. 그때까지 왕세질(국왕의 조카로 왕위계승권자)과 내무장관을 겸했던 사촌 무함마드 빈 나예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58)는 전격 경질돼 현재 가택 연금 상태다. 살만 국왕은 지난 4일 정변 직전에 무타이브 빈 압둘라 빈 압둘라(65) 국가경비대 장관을 전격 경질했는데 그 이후 무함마드 왕세자가 그 병력까지 장악한 것으로 관측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세 번의 인사로 국방부·내무부·국가경비대 등 사우디의 3대 무력을 한 손에 쥐게 됐다. 그는 아무도 견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부패 척결을 내세워 대대적인 ‘사회정화’ 작업을 이어왔다. 이는 1932년 사우디를 개국한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가 수립했던 전제군주제에 손질을 가하겠다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압둘아지즈와 그의 후계자인 사우드, 파이살, 할리드, 파드, 압둘라와 현 살만 국왕에 이르는 모든 사우디 국왕은 전제군주다. 사우디는 헌법도, 국민이 선출한 의회도 없으며 독립적인 사법기구도 없이 전제군주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압둘아지즈와 그의 아들들이 형제 상속제로 이어온 2~7대의 사우디 국왕들은 정당이나 의회 구성, 선거와 같은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철저히 배제했다. 불만에 찬 국민이나 일부 왕족이 민주주의 도입을 주장하면 금전 등으로 회유하거나 외국으로 추방했다.
사우디는 엄격한 ‘경찰감시국가’를 유지하면서 석유로 번 돈으로 국민에게 고용·의료·교육 등에서 시혜성 ‘석유 복지’를 베풀며 정치적·종교적·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려고 시도해왔다. 이른바 ‘침묵의 계약’으로 불리는 사우디의 정치·사회 체제다. 여기에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종교운동인 와하비즘의 보호자인 사우디 왕실의 독특한 위치도 문제다. 중세 수준이라는 평을 듣는 엄격한 종교적·사회적 통제를 완화해 사우디가 21세기 국가로 전환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다. 이는 왕세자나 국왕의 막강한 권력으로도 이루기 쉽지 않은 목표일 수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은 이런 고리를 끊고 석유 중독에서 벗어나고 산업을 진흥시켜 일하는 국민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키운 것으로 관측돼 왔다. 이는 절대군주제인 사우디의 한계를 극복해보겠다는 도전이다. 전제군주제의 가장 큰 문제는 부패로 지목된다. 부패가 만연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정치체제에 있다. 사우디에는 성문화된 헌법도, 왕실에서 독립적인 의회나 법원도 없을 뿐 아니라 국왕 명령 없이 알아서 왕족을 비롯한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조사하고 처벌하는 정부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펀드와 왕실 개인 호주머니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영국의 일간 가디언은 사우디가 법과 제도보다 권위와 관습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지적했다. 이것이 사우디에서 부패가 확산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설명이다.
부패는 사우디의 '사회적 관습' '만성 풍토병'으로 자리 잡아 왔다. 반대로 국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을 부패 사범으로 몰아 제거하기도 쉽다. 이런 상황이니 대중은 부패 사범으로 지목받은 인물이 진짜 나쁜 사람인지 정치적 숙청의 희생자인지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투명하지 않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진실을 알기는 힘들다. 법치국가나 민주국가가 아닌 사우디에서 누가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는 구분하기 힘들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힘을 쥐고 있느냐이다. 사우디인이 해외에서 자주 행방불명되는 비극이 쉽게 사라지기 쉽지 않은 이유다. 세계인들이 사우디에서 석유만 보지 않고 이러한 체제와 인간이 사는 모습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언론인 살해설, 왕자 비행기 납치설···'사우디 잔혹극' 배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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